3.
캐서린은 홀린 듯 시선을 빼앗겼다. 헬렌 공작령을 둘러싼 성곽은 커다란 요새와 같았고, 그 거대한 규모에 짙은 탄성이 터졌다.
“아아……!”
헬렌가의 기사단이 도착하자 성문이 덜컹대며 열렸다. 공작령은 전체적으로 단조롭고 단정했다.
로렌디스가 전쟁으로 영지를 자주 비운다지만, 빈 공백 없이 꼼꼼히 관리되어 있었다. 그만큼 영지민에게서도 여유가 느껴졌다. 캐서린은 그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아냈다.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커다란 대저택 앞에서 멈췄다. 검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로렌디스에게 예를 보였다.
“각하, 오셨습니까?”
“별일 없었나?”
“네. 각하 일단 안으로 드십시오.”
로렌디스가 마차 문을 열고서, 캐서린을 밖으로 이끌었다.
“영애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성의 집사, 오스틴입니다.”
“반가워요.”
캐서린은 가볍게 눈인사만 나눴다. 오랫동안 마차에 앉아 있어서였는지 다리가 휘청거렸다.
아아……. 마차 멀미 안 한다고 그랬는데, 이틀 내내 마차를 타는 건 체력적으로 힘든 일이구나.
캐서린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비틀대며 주저앉을 뻔했다. 그쯤,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팔뚝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괜찮나?”
캐서린은 부축을 받고서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거대한 규모에 짓눌릴 것 같았다. 캐서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구나. 내 무덤이 될 곳이.’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쪽으로 와서 서. 부축해 줄 거니까.”
캐서린이 더듬더듬 그의 팔뚝을 잡자,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가까이 당겨 안았다. 오스틴이 싱긋 웃더니 로렌디스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럼 안으로 드십시오, 각하. 영애도 이쪽으로.”
“환영합니다, 영애.”
하녀들이 머리를 숙였다. 캐서린이 이들을 피해서 로렌디스의 뒤로 숨는데,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어깨를 붙잡았다. 두꺼운 손아귀가 어깨를 붙잡고 있어서 어디 숨지도 못했다.
오스틴이 몸을 낮추고 엄중히 고했다.
“헬렌가의 안주인이 될 분이다.”
오스틴이 집사들에게 눈짓하고, 집사들이 일제히 몸을 낮췄다. 하녀들도 이미 전해 들었다는 듯 이들을 따라서 인사를 올렸다. 모두 엄숙히 몸을 숙였다.
질문은 없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데려온 시점에서, 이미 캐서린은 이들의 귀빈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몸을 감쌌다. 바람이 매서워서인지, 북부 땅의 나무는 밑동도 굵고 둘레도 커다랬다.
“북부는 춥네요.”
“북부의 북풍이 매섭긴 하지.”
커다란 대저택이 방문객을 반겼다. 벽을 따라서 촛불이 고요히 일렁이고 붉은 융단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웅장해요.”
캐서린이 북부의 전경을 눈에 담아내는데, 로렌디스가 조용히 하녀들에게 지시했다.
“됐으니 물러가거라.”
“그럼 식사 시간 때 찾아뵙겠습니다.”
하녀장이 하녀들을 이끌고 자리를 비켰다. 로렌디스는 여전히 갑옷 차림이었다.
“저택 안내는 내가 해 주지.”
앞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캐서린이 1년간 살게 될 곳이다. 북부 땅이라는 지형 탓인지, 내부에 열을 가둬 두는 온열 장치가 많았다.
안쪽은 헬렌가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만든 나무 계단이 이어져 있고, 그 위로는 샹들리에가 로비를 환히 밝혔다.
창문에는 각기 다른 조각을 새겨 두고, 신화 속에나 나올 법한 여신과 천사상으로 저택을 장식했다.
“황궁이 아닌데도 이런 장식을 해도 되나요?”
“모두 전리품이야. 보좌진과 집사의 제안으로 몇 가지만 추려서 꺼내 뒀는데, 이제는 어디서 가져왔는지도 모르겠군.”
캐서린은 사색이 돼서 입술을 더듬었다. 전장귀라더니, 전장을 얼마나 오랫동안 떠돌았으면 어디서 가져온 전리품인지도 모르고 저택에 장식해 두었을까.
모두 값나가는 물건들이었다. 크고 작은 보석들이 알알이 박힌 왕관부터, 도자기와 각종 세공품들이 유리 전시관 안에 가득했다.
로렌디스가 복도를 지나자 하인들이 알아서 머리를 숙였다. 이 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몸가짐이었다.
“영애의 방은 2층으로 마련했어.”
“고마워요.”
“낯선 사람이 불편할 테니 하녀 몇몇만 추려서 올려보낼게.”
책 속 로렌디스는 배려심이라고는 없는 냉혈한으로 묘사되었는데, 지금 로렌디스는 최소한의 배려를 해 주는 집주인 같았다.
“방은 이쪽.”
방문이 열렸다. 단아한 방이 펼쳐졌다. 따뜻한 색감의 캐노피가 침대를 감싸고, 보송보송한 융단으로 바닥을 덮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벽난로가 타닥타닥하며 불탔다. 다른 벽 한쪽에서는 진갈색 커튼이 바람에 나부꼈다.
“이 방에 있는 것도 다 전리품…….”
“대부분은 전리품이지만, 규모가 큰 건 폐하께 하사받은 하사품이야. 저 지도도 그렇고.”
한쪽 벽면에 제국의 지도가 걸려 있었다. 제국은 오랜 기간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혔는데, 그 넓은 영토를 지도에 다 담아냈다. 캐서린이 액자를 짚고 작게 감탄하는데, 곁에서 로렌디스가 이야기했다.
“여기가 앞으로 영애가 지내게 될 방이고, 시중들 하녀는 옆방에서 대기할 거니까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
아무리 초연해져도, 초연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현실감이란 이런 거구나.’
이런 미래를 예상하긴 했다. 그런데 머릿속으로만 예상하던 일이 현실로 닥쳐오니까 기분이 이상해졌다.
로렌디스의 건조한 시선이 캐서린에게 향했다. 검은 눈동자가 짙게 내려앉고, 캐서린은 쭈뼛대며 그 시선을 피했다.
오랫동안 전쟁터를 떠돌면서 감정이 점점 무뎌졌다더니……. 로렌디스의 시선은 유난히 차갑고 삭막했다.
“자리를 비워 줄 테니까 쉬어. 지금은 혼자 두는 게 영애도 나을 테지.”
“배려, 감사합니다.”
그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캐서린을 훑고 지나갔다. 로렌디스가 방에서 나가고, 그제야 캐서린도 혼자 남았다.
캐서린은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벽 한쪽에 전신거울이 있었다. 캐서린은 그 앞에 서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침실 커튼이 펄럭이며, 거울 위로 햇빛이 내려앉았다. 거울에 비친 낯빛이 유난히 희다.
“창백해.”
커튼이 다시 내려앉고, 그런 창백한 기색도 그림자 아래로 묻혔다. 캐서린은 말랑말랑한 뺨을 더듬거렸다.
“정말…… 말랐다.”
1년 만에 돌연사한다더니 병약하긴 하다. 그래도, 의사를 한 번은 만나야 하려나.
진통제나 이런저런 약을 받으려면 외부인이 낫지.
공작성 내의 주치의는 안 된다. 공작성의 주치의는 로렌디스의 사람이다. 그리고 캐서린은 치료받으면서 이번 생을 억지로 연명할 마음이 없다.
“평범하고 편안하게 지내다가 떠나자.”
* * *
일단, 헬렌성에 도착한 첫 소감은 그럭저럭 평범했다. 차갑거나 그런 인상을 떠올렸는데, 성벽을 지나오면서 본 헬렌 공작령은 전반적으로 여유롭고 온화했다.
“지내기에 나쁜 곳은 아니네.”
캐서린은 탁자에 앉아서 앞으로의 계획부터 차근차근 떠올렸다. 일단은 이 책의 전체적인 줄거리부터 되짚는 게 우선이었다.
캐서린은 요절하고 로렌디스는 그로부터 10년 뒤 재혼한다. 그게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때도 여자주인공을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었어. 정략결혼보다도 못한 결혼이었지.’
로렌디스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는데, 당시 그는 황제에게 결혼 압박을 받고 있었다.
10년이 지났는데도 헬렌가에 번듯한 안주인이 없자, 로렌디스는 결국 황제의 성화에 임의로 계약 아내를 집안에 들였다.
“그게 10년만이라니. 왜 재혼을 그렇게 늦게 했을까…….”
물론 그 이후는 캐서린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1년이면 죽는데, 그냥 편히 지내다가 떠나면 되지. 로렌디스가 재혼할 때면 캐서린은 없다. 내가 시한부인데 누구를 걱정할까.
“그 1년을 편히 지내려면, 끊을 건 끊고 놓을 건 놓아야 하려나?”
캐서린은 차근차근 계획부터 세웠다. 지금부터 할 일은 이 생을 마감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삶을 놓을 때야 느끼는 자유로움이라니. 다 내려 두고서야 느끼는 후련함은 상쾌하다 못해 홀가분했다.
때만 되면 다 버리고 떠난다. 1년 뒤면 마감될 인생, 이 짧은 생 잠깐이라도 편히 즐기고 조용히 떠날 거다.
“그래도, 대충 정돈은 해 놔야지.”
캐서린은 쪽지를 꺼내 펜으로 글자를 끄적였다. 뭘 끊고 뭘 놓을지 정리해 놔야지. 가족 간의 인연을 끊는 게 그 시작이다. 그리고 외부에서 의사를 한번 만나 보긴 해야 될 거고.
또 뭐가 있으려나.
“영애 계십니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임시로 영애의 시중을 맡게 된 하녀 넨시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캐서린은 쪽지를 서랍장에 숨겨 두고 문을 열어 주었다. 넨시는 문이 열리자 깜짝 놀라며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문은 제가 열어도 됩니다!”
“무슨 일이죠?”
“가볍게 먹을 다과를 챙겨 왔습니다.”
캐서린은 알겠다며 대충 얼버무리고, 탁자로 가서 앉았다. 스콘과 같이 먹을 홍차였다. 따뜻한 김이 솔솔 올라왔다. 넨시는 접시를 내려 두면서도 캐서린의 눈치를 흘끔대며 살폈다.
“그리고 영애, 말씀을 낮춰 주세요. 아랫사람에게 말씀을 높이다니요…….”
“그럼 그럴게.”
캐서린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넨시는 약간 멍한 표정으로 캐서린을 보다가 따라서 웃었다.
캐서린은 곧 떠날 사람이다. 1년이면 떠나는데 이들과 깊게 인연을 쌓을 필요는 없다. 적당한 거리감만 지켜 주고, 헤어질 때는 상쾌하게 헤어지면 된다.
“아가씨?”
캐서린은 별일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 넨시와 눈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