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마차가 멈춰 섰다. 하늘은 어느새 맑게 개어 있었다. 밤하늘은 고즈넉했고, 여기저기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났다.
캐서린은 창밖으로 마른하늘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내 마지막 삶에 얻어 낸 자유라니.’
덧없다. 인생이란 부질없고 의미 없고 삭막하기만 하다. 그 나른한 기분에 몸이 맥없이 가라앉았다.
‘헬렌이라.’
헬렌 영지는 여기서부터 산 하나를 통째로 넘어야지 닿을 거리에 있었다. 북부 땅 전체가 헬렌의 소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캐서린도 앞으로는 거기서 살아야 한다.
캐서린은 이미 생의 마지막을 먼저 엿봤다. 헬렌에서 맞이한 마지막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다. 그게 책 속인지 꿈속인지 잘 기억도 안 나지만, 그 마지막은 쓸쓸하고 적막했다.
‘이제 헬렌으로 가는구나.’
사위가 고요해지고, 풀벌레의 울음소리만 찌르르― 하며 울렸다. 시한부 사실을 깨달았을 때보다, 지금이 허망감이 더 컸다.
“왜일까.”
그때, 로렌디스가 맞은편에서 캐서린의 턱을 쥐었다. 마차에 앉은 그의 자세가 꼿꼿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맞닿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사람을 조각조각 분해하는 것 같았다.
“왜요?”
“너는 곧 죽을 사람 같거든.”
그의 작은 속삭임이 캐서린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캐서린은 손가락을 웅크리고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내가 마음에 안 드나요?”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지. 됐어. 그런다고 그 집으로 다시 돌려보낼 마음도 없으니.”
로렌디스는 아직 모른다. 캐서린은 1년 뒤면 죽는다. 몇 달간의 여유 기간이 더 있더라도 그래도 짧다.
로렌디스는 그런 미래를 모르니까, 후견인을 자처하며 캐서린을 자작저에서 꺼내 왔을 것이다.
‘당신은 내 미래를 몰라요. 그런 미래를 알았다면, 곧 죽을 아내를 집안에 들일 리 없잖아요.’
캐서린은 작은 머그컵을 쥐고 마른하늘을 올려다봤다. 달빛이 밝다. 빗방울이 쏟아붓더라니 하늘이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로렌디스 님께 묻고픈 게 있어요.”
“이야기해.”
“이제는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캐서린은 로렌디스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은근히 닿은 손등이 딱딱했다. 로렌디스는 그 미약한 손짓에 묶인 듯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저를 왜 공작성으로 데리고 가는 건가요?”
로렌디스가 다리를 꼬고서 캐서린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며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갔다.
“미리 말했듯 우리는 헬렌 공작령으로 가는 길이고, 나는 헬렌의 주인이야. 영애는 내가 후견인 명목으로 공작령으로 데려가는 길이고, 영애도 거기서 살게 될 예정이지. 여기까지는 이해했나?”
“네.”
“그리고 영애는 내 피후견 신분으로 헬렌성에서 머물다가 결혼식을 올리게 될 거야. 청혼은 헬렌성에 도착하면 할 거고. 아쉽게도 영애는 거부권이 없어.”
캐서린에게는 거부권이 없다.
“이해했나?”
“네. 그런데 왜 나였어요?”
“모든 일은 내 통제 아래 있어야 해. 친정의 입김이 약하며, 아내도 내 손에 닿으며, 권력과는 거리가 먼 가문이라면 더 좋지. 자작가는 내 손으로 충분히 통제가 가능해서 영애를 피후견인으로 택했고, 영애는 그만큼의 권력을 얻는 대신 자유를 박탈당할 거야.”
“어차피 자작가에서도 자유는 없었어요. 말씀 잘 이해했어요.”
전개대로 아주 잘 흘러간다는 뜻이다. 그래. 전개대로 흘러간다. 계모가 노귀족에게 캐서린을 팔아 치울 때, 캐서린은 이런 전개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의문은 안 든다. 이런 전개일 줄 알았고, 책 속에서 봐서 ‘아아. 우리 결혼하는구나.’라고 새삼스럽게 깨달을 뿐이었다.
그래도 막상 저 말을 들으면 더 서러워질 거 같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그저 잊고 있던 현실감에,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기분이랄까.
“저희 결혼하는군요.”
“더 궁금한 건?”
“없어요. 으음. 지금 막 다 해결됐거든요.”
캐서린이 아련함에 잠겨서 두 손을 기도하듯 잡는데, 로렌디스가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로렌디스가 은빛 갑옷 차림으로 몸을 수그렸다. 로렌디스가 손을 뻗더니 캐서린의 이마에 손등을 무심히 올렸다. 손등을 감싼 철제 갑옷이 이마에 닿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손을 올려서, 캐서린은 그때까지도 꼼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마차 멀미를 하나?”
“네? 아니요?”
“앞으로 이틀간은 더 이동해야 하는데 가능한가?”
“오늘은 조금 놀라서 그랬지. 내일부터는 이동하셔도 돼요.”
이번 생이 얼마나 더 허락될지는 캐서린도 잘 모른다. 책 속 캐서린은 젊은 나이에 요절해 버린다. 그 기간이 1년이다.
차라리 남은 시간이라도 편안하게 지내는 게 낫지. 편안히 지내다가 아름답게 끝맺으련다.
‘놓자.’
그리고 오늘 밤, 마음 정리가 끝났다.
“있잖아요.”
캐서린이 말을 걸자, 로렌디스가 눈을 떴다. 나무에 기대앉았던 몸이 캐서린 쪽으로 돌아앉았다.
“북부 땅은 어떤 곳이에요?”
로렌디스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짧은 정적이 오가고, 로렌디스가 입을 열었다.
“거대한 요새 같은 곳이야. 겨울이 유난히 길고, 봄여름가을이 스치듯 지나가지.”
북부는 겨울이 유난히 긴 지역이었다. 눈이 한 번 내리면 한 달 내내 내리기도 하고, 겨울이 끝나면 찬란하게 꽃이 폈다가 때아닌 눈에 파묻히기도 한다.
“죽기 전에 눈은 한 번 보고 싶네요.”
“겨울 좋아하나?”
“겨울은 몰라도 눈은 좋아해요.”
짧은 생, 눈 한 번 보고 떠나는 것도 좋겠다.
‘1년이라…….’
긴 시간은 아니다. 그렇다고 짧은 시간도 아니다. 무언가를 하기에는 짧은 시간이고, 무언가를 하지 않고 흘려보내기에는 긴 시간이다. 이대로면 휘둘리듯 결혼하고 이번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할 거면 누가 말을 꺼내든 중요한 건 아니네요.”
피하지 못할 미래라면 스스로 택하는 게 맞다.
“나랑 결혼할래요?”
“뭐?”
“나랑 해요, 그 결혼.”
당신이 아니라 내가 먼저 말을 꺼냈어요. 그건 알아 두세요. 내가 선택한 거예요.
“그 청혼, 제가 할게요.”
“…….”
“당신이 나를 택했듯, 나도 당신을 택했거든요.”
잠깐이라도 일시적으로 캐서린을 보호해 줄 보호자가 필요하다.
“당신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같아서?”
“다행이에요.”
이건 캐서린의 선택이다.
이번 결혼으로 캐서린에게는 든든한 보호막이 생긴다. 그럼, 남은 1년간 적당히 그의 보호막 아래에서 지내다가, 적당한 때에 요양지를 찾아서 떠나면 될 일이었다. 로렌디스는 조금 무뚝뚝할지언정, 무뢰배는 아니었다. 그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캐서린이 배시시 웃는데, 로렌디스가 긴가민가하게 되물었다.
“원래 이런 성격인가?”
찌르르,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졌다.
“그냥, 마음가짐을 조금 다잡았을 뿐이에요.”
이 결혼을 거부할 만큼의 여유와 권력이 있다면, 캐서린은 아마 다른 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여유가 없어서, 책 속 캐서린은 마지막 순간까지 휘둘리며 살았다. 계모에게 휘둘리며 유년 시절을 보내고, 냉혈한 로렌디스에게 이끌려 헬렌가의 안주인이 되고, 1년 만에 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의지는 없다.
“냉혈한이라…….”
로렌디스는 캐서린이 죽기 몇 달 전에나 겨우 얼굴을 비출 것이다. 남편이 전쟁영웅이 돼서 1년간 전쟁터를 떠돌면, 캐서린은 남편의 무관심 아래서 요절할 예정이었다.
그게 어때서?
가족들도 캐서린을 버렸다.
가족을 택해 봐야 결혼매물로 던져져 다른 노귀족의 후처로 팔릴 뿐이다. 그런 가족들보다야, 캐서린에게는 냉혹한 남편이 낫다.
* * *
며칠이 흘렀다. 이 마차 여행도 슬슬 끝나 간다. 북부 땅을 의미하는 까마득한 절벽이 저편에서부터 근근이 보였다.
마차 여행이 길어지며, 헬렌의 기사들과도 안면을 텄다. 그들은 이따금 마차로 다가와서 캐서린을 살폈다.
말굽 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캐서린은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헬렌은 자연 속에 감춰진 영지 같았다. 드넓은 절벽 아래로 펼쳐진 영지가 아름다웠다.
“갑갑하진 않으십니까?”
“곧 도착한댔으니까요.”
오늘이면 공작령에 도착한다.
―쿵!
갑자기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마차가 북부 길에 들어섰다. 바람이 더 차가워진 것 같다. 캐서린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브레디가 대신 답해 주었다.
“여기서부터 북부 땅입니다.”
헬렌가의 기사가 대신 설명해 줬다.
“북부의 경계선에는 절벽이 많아서 초행길에는 주의해야 합니다.”
북부는 험난한 절벽이 많았다. 절벽을 따라서 마차가 움직였다. 저 아래로 까마득한 언덕이 펼쳐졌는데도, 헬렌가의 기사들은 유유히 절벽을 지났다.
“영애.”
로렌디스가 말을 타고서 마차 가까이 다가왔다.
“준비해. 곧 있으면 성벽을 지나니까.”
“그럼 여기가…….”
캐서린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헬렌의 성문은 거대했다. 거대한 성곽이 영지를 감싸 안았다. 검은색과 회색빛이 섞인 성벽은 울퉁불퉁하지만 규칙적이었다. 캐서린은 커튼 틈으로 바깥 전경을 찬찬히 살폈다. 월계수 잎사귀가 성벽에 크게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육중한 성문이 열렸다.
“이곳이 헬렌 공작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