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1)화 (1/129)

1.

삶은 덧없다.

시한부 삶은 더더욱 덧없다.

그래도 괜찮다. 캐서린은 삶에 미련이 없었으니까.

* * *

그날은 비가 내렸다. 빗물이 사납게 쏟아붓고 창문이 덜컹거렸다.

‘진짜 버림받았구나.’

가족들의 싸늘한 시선이 캐서린에게 향했다. 가족들이 캐서린을 버렸고, 캐서린은 버림받았다.

캐서린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계모가 부채를 펄럭이며 이야기했다.

“캐서린 너처럼 둔하고 멍청한 여인을 신부로 맞아 준다는 분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니?”

내일이면 캐서린은 결혼 매물로 던져져 팔려 나간다. 가족들은 캐서린을 비웃기 바빴다.

가족애를 기대한 적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랬으니까. 우리 가문은 바퀴가 빠진 마차와 똑같았고,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곳이 없는 집안이었다.

“캐빈 백작님 정도면 캐서린 너에게도 과분한 혼처다.”

계모의 비아냥거림이 이어지고, 의붓언니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며 이야기했다.

“그래도 아쉬워요. 결혼이라니 성스러운 일이지만, 캐서린은 아직 너무 어린 나이잖아요. 하지만 캐서린은 잘 지낼 거예요.”

의붓언니가 슬그머니 웃었다.

그래요. 웃을 거면 웃어요. 당신이 속으로 나를 얼마나 비웃을지 이미 뻔히 보이니까요.

마음속은 조금씩 메말랐다. 이제는 다 싫다. 모두 다……. 가족이라고 가족애를 기대하다니. 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다 부질없어.’

가족이란 표현도 사치다. 캐서린의 가족은 죽었다. 아버지께서 실종된 시점에서, 마지막 남은 가족이 떠난 거나 다름없다.

계모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캐서린은 가족들을 놓았다. 당신들은 용서받을 때를 놓쳤다. 당신들이 나를 버렸기에, 나도 당신들을 버렸다.

―쿵쿵

알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묵직한 발걸음이 울렸다.

“마님! 마님!”

모든 건 순식간이었다.

빗물이 점점 더 굵어지고, 자작가의 하인이 계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침통하게 고했다.

“캐빈 백작이 노환으로 사망했습니다.”

결혼식 전날, 캐빈 백작이 노환으로 사망했다. 칠순의 나이로 오늘내일하던 노인이었다. 사리사욕이 넘쳐나서 그 나이에도 첩실을 두고 지내더니 죽었구나.

“이 혼담은…… 여기까지네요, 어머니.”

스물을 갓 지난 젊은 여인을 첩실로 사들인다는 이야기에 노인네가 노망이 났는가 했더니, 죽을 때가 돼서 그랬던 모양이다.

캐서린은 허망한 눈길을 움직여 집 안을 살폈다. 슬슬 이 상황도 지겨워졌다.

그 사람이 올 때가 됐다.

찬찬히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느릿하게 숫자를 세며 때를 기다렸다.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지고, 쿵쿵쿵― 묵직한 굉음이 울렸다. 쿵쿵쿵― 그 굉음은 길게 이어졌다. 천둥소리가 아니다. 묵직한 굉음은 점점 더 가까워졌고, 자작저의 문을 두드렸다.

‘왔다.’

하지만 캐서린은 심드렁했다. 위기감도 없다. 무념무상 무사태평한 얼굴로 ‘그’를 기다렸다.

쿵쿵― 누군가 또다시 문을 두드렸다. 다 늦은 시간이었다. 밖에서는 빗물이 거칠게 쏟아붓는 중이었다.

계모가 하녀를 불러 문을 턱짓했다. 나무문이 힘없이 쾅쾅쾅 울렸다.

“얘, 나가 보렴.”

“……누구십니까?”

하녀가 문 쪽으로 다가섰다.

―쿵쿵쿵! 계시오!

노크에 문이 거칠게 흔들렸다.

쿵쿵― 굉음이 울리며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사이로 검은 로브를 쓴 인영이 걸어 들어왔다.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그들 사이로 웬 사내가 걸어 들어왔고, 심드렁하게 자작저 안을 살폈다. 그러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밀던 자작저가 맞는가?”

“…….”

“다시 한번 더 묻는다. 여기가 밀던 자작저가 맞는가?”

낯선 기사가 집 안에 들어서자, 계모는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계모와 의붓언니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캐서린만 ‘그’를 알아봤다. 저 얼굴을 하고 저 문양을 한 사람이라면 제국에 한 곳밖에 없다. 캐서린은 고개를 들고 남자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남자를 똑바로 보며 이야기했다.

“헬렌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헬, 헬렌 공작!”

그는 은빛 갑옷 위에 로브를 입고 있었다. 월계수 나뭇잎이 로브 위에서 펄럭였다. 저 월계수 나뭇잎이 헬렌가의 상징이라는 건 제국인이라면 모두 다 알 것이다.

로렌디스 헬렌.

헬렌 공작.

마침내, 남자의 시선이 캐서린에게 향했다. 그는 긴가민가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확인하듯 물었다.

“캐서린 밀던, 본인 맞나?”

로렌디스 헬렌. 그는 헬렌가의 주인이자 제국의 전쟁 영웅이었다.

“……캐서린 밀던이에요. 로렌디스 헬렌 각하를 뵈어요.”

“다행히도 알아봐 주어서 고맙군.”

남자를 만난 건 처음이지만, 캐서린은 이 남자를 아주 잘 안다.

“제국의 전쟁 영웅을 알아보지 못할 리 있나요.”

로렌디스는 제국 전역에서 유명한 전쟁 영웅이며, 밀던가는 헬렌가를 따르던 가신 가문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다 옛날 일이었다.

선대 헬렌 공작은 오래전에 전장에서 실종됐고, 밀던 자작까지 전장에서 실종되면서 이 관계도 단절됐다. 헬렌가는 젊은 후계자가 이어받았으며, 밀던 자작가는 공중에 붕 뜨며 계모와 의붓언니의 세계가 됐다.

두 주종관계는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된 관계지만, 둘의 인연도 흐지부지 끝났다.

“반가워.”

그리고 오늘, 끊긴 인연이 다시 이어졌다.

“나는 앞으로 그대의 후견인이 되어 줄, 로렌디스 헬렌이다.”

“……후견인이요?”

“선대 헬렌 공작, 내 아버지와 그대의 아버지가 막역한 친우 사이였지. 그분의 딸이니, 그대는 헬렌과도 인연이 깊지.”

이 맥락 없는 전개에 캐서린은 무념무상하게 수긍했다.

‘내 미래 남편이구나.’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럴 줄 알았다고요.

모든 일이 예정대로 흘러간다. 모든 건 이미 예정됐다.

“후, 후견인이라니요!”

계모가 넋 나간 듯 되물었다.

“내가 그 아이 엄마인데 나를 두고서 왜 후견인을……?”

당신은 부모인 적이 없다. 부모이길 포기했고 사람이길 포기했다. 그걸 가장 잘 아는 게 캐서린이었다. 캐서린은 넋 나간 계모를 놔두고 로렌디스에게 되물었다.

“후견인이라면?”

“후견인이 되어 남편이 되어 준다는 뜻이야.”

예상하던 이야기다. 이 역시 캐서린은 다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까. 어느 날 미래를 엿봤다는 부분에서 시작할까?

모든 이야기는 전쟁 영웅 로렌디스가 외딴 시골 자작저를 찾아오며 시작된다. 그리고 오늘이 그 시작이다.

로렌디스가 말문을 열었다. 단조로운 어조가 무뚝뚝하게 흘러나왔다.

“헬렌에서 정식으로 자작가로 청혼장을 넣을 거야. 결혼이라고 거창하게 여길 건 없어. 그저 보호자가 남편으로 바뀌는 거니까.”

로렌디스는 허락을 받으러 온 게 아니다. 통보하러 온 길이었다. 그는 계모와 의붓언니를 기절시키고 심드렁하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짧게 설명했다.

“방해될 것 같아서.”

“나를, 꺼내 주는 거예요?”

“꺼내 줄게. 이곳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신경하면서도 무던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영애.”

로렌디스가 손을 뻗었다.

“잡아라.”

캐서린이 파르르 떨며 고개를 떨구는데, 그의 손이 캐서린의 목덜미에 닿았다. 캐서린은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고개를 돌려 혼절한 계모와 의붓언니를 살폈다. 볼품없이 쓰러진 그 모습이 덧없고 무의미하다.

“따라와.”

“…….”

“내가 그대를 꺼내 주지.”

캐서린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이건 제안도 아니고 강압적인 명령이었다. 나긋나긋한 그의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무시하기 어려운 압박감이 넘실거렸다. 로렌디스의 주변으로 거친 기운이 너울거렸다.

“……따라나선다면요?”

“그 길 잃은 눈동자가 그래도 갈 길은 찾게 되겠지.”

캐서린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따라가면 달라지나요?”

“적어도 허망하게 죽진 않지.”

“아니던데.”

“뭐?”

“아니던데…….”

아닌데 진짜 아닌데.

캐서린의 삶은 마지막까지도 허망했다.

* * *

여기는 《북부 공작의 겨울은 끝나지 않는다.》라는 소설 속이다.

전장을 떠돌던 전쟁 영웅이 오랜 전쟁으로 인격을 상실하지만 사랑으로 인격을 되찾는다는 클리셰적인 이야기.

캐서린은 이 전쟁영웅 헬렌 공작의 전 부인이다.

그러니까 결혼한 지 1년 만에 죽는 병약한 전처. 그게 캐서린이었다.

여기가 책 속이라고 깨달은 건 아버지께서 전장에 오른 시점이었다. 캐서린은 그때 아버지께서 실종되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함을 깨달았다. 아버지께서는 전장에 올라 실종됐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 뒤로 계모와 의붓언니 사이에서 힘겹게 지냈지만…… 캐서린은 안타깝게도 요절한다.

“캐서린 밀던. 1년 만에 요절하는 전 부인이라고……?”

남편인 로렌디스는 캐서린이 죽으면 10년 뒤에 재혼하고, 캐서린은 요절한다고 묘사된 게 다다.

세상에 제 편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캐서린 밀던.

계모는 어린 딸아이를 노귀족의 첩실로 팔아 버릴 계책을 짜내고, 의붓언니는 그런 동생을 비웃는다.

다행히도 그 시기에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결혼까지 하지만……. 1년 뒤면 요절이라니.

‘인생이란 진짜 덧없네.’

캐서린은 마차 안을 찬찬히 살폈다.

‘헬렌 공작성으로 가는 길인가.’

로렌디스가 자작저에 들이닥치고 자작저는 엉망이 되었다. 계모와 언니는 혼절해 버리고, 캐서린은 몸만 빠져나왔다. 모두 엉망진창 엉망이다. 그런 와중에도 캐서린은 턱을 괴고서 창밖만 내다보고, 로렌디스도 조용히 앉아 있었다.

“각하.”

수석 보좌관, 브레디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이분이 밀던 자작님의 딸입니까?”

“그래.”

“자작님과 별로 닮지 않았군요. 자작님께서는 좀 더 강직한 인상인데…….”

캐서린은 마차에 머리를 기대고 한쪽 눈만 떴다. 사뭇 따뜻하게 미소 짓던 브레디가 담요를 꺼내서 캐서린에게 내밀었다.

“받으십시오. 마차 안이 추운가, 몸을 잘게 떠시는군요.”

이건 모두 로렌디스의 기세가 너무 날카로워 그런 거다. 로렌디스는 전장에서 오래 다닌 탓인지, 가만히 있어도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브레디는 두 분끼리 편하게 오시라며 마차에서 내렸고, 로렌디스가 두꺼운 담요를 펼쳤다. 기사들이 쓰는 모포 같았다.

갈색의 꺼끌꺼끌한 모포지만 두꺼웠다. 보드라운 털 담요는 아니지만, 따뜻한 담요는 오랜만이었다.

“담요라도 덮어. 감기라도 걸리면 긴 여정에 방해가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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