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
일할 수 있는 자들에게는 일을 해야 물품을 제공하는 것으로 방식을 바꿨다.
그들은 일을 하면 거기서 얻는 수당과, 성에서 나눠주는 물품을 함께 받지만 아니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것을 발표하니 당연히 반발하는 자들이 나왔다. 덩치 크고 힘도 좋으면서 게을러서 남들 것만 탐내는 자들이 주로 그랬다.
“저 여자! 저 여자가 일의 원흉이야!”
그들은 그 일들이 다나가 오고부터 발생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몇 발자국 오기도 전에 리사에게 막혀 그대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들을 베는 손길에 인정 따위는 없었다.
“별 바퀴벌레 같은 것들이.”
검에 묻은 피를 툭툭 털어내면서 리사는 투덜거렸고 아힐은 다나의 안색을 살폈다.
“비 전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저 정도는 본보기가 되겠네요. 목을 베어 입구 쪽에 걸어두세요.”
생각보다 냉정한 그녀의 말에 아힐은 흠칫 놀라면서도 바로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지 안에 있지만 외진 산속에 이들의 거주지를 만들어 놓았다.
어차피 모두를 더니즈 상단에서 고용할 수는 없었다.
“산, 산이라면….”
“비 전하, 무엇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말씀 주십시오.”
“아니에요. 저녁때 다니엘을 불러주세요. 전에 내가 조사시킨 것을 갖고 오라고 하면 알아들을 거예요.”
관리인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곳에서 주무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래야겠네요.”
“하지만 너무 누추하여….”
“완전하게 처리하고 가야 두 번 방문하지 않을 테니까요. 번거롭겠지만 적당한 잠자리를 마련해주세요.”
관리인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물러나 다나의 명령을 전달하러 갔다.
그녀가 거주지를 살피고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관리인은 동분서주하여 어쨌거나 그럴싸한 잠자리를 만들어냈다.
아예 관리사무소용 건물을 통째로 비우고, 그곳을 침실로 활용해버렸다. 다나는 조금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다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그곳을 지키는 병사 중 한 명에게 말을 건넸다.
“참, 다니엘은 도착했는가?”
“아, 저, 그게….”
병사는 눈을 굴리며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옆의 병사가 그를 툭 치더니 대신 대답을 올렸다.
“예, 예. 도착하셨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깍듯이 고개 숙이는 병사 둘을 보며 다나는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그냥 들어갔다. 다니엘이 왔다면 그걸로 될 일이었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다나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레온.”
“맘마, 마…!”
레온이 침대 위에 덩그러니 앉아있었고, 그의 무릎 위에는 아드리안이 손을 뻗어가면서 다나를 반겼다.
다나는 그들을 보자 반가우면서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왔어요? 다니엘은요?”
“날 보자마자 다니엘부터 찾다니. 이거 상당히 질투 나는걸.”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레온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나는 아차 싶어서 얼른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
“아니, 그럴 리가요. 다니엘을 불렀는데 당신이 와 있길래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내가 대공이야.”
“그렇죠.”
“그 녀석이 아는 거라면 나도 다 알아, 다 할 수 있고.”
레온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다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누가 보면 레온 보고 무능하다 한 줄 알겠다.
다나는 레온의 무릎 위에 있는 아드리안을 품에 안아 토닥거리며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그럼 말씀 좀 해주세요.”
“뭘…?”
“제가 다니엘에게 조사시킨 일이 있는데, 그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요.”
“로사베리아를 재배할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면서.”
그 대답에 정말 의외라는 듯이 다나가 손뼉을 쳤다.
“오! 진짜 알고 계셨네요. 몰랐어요.”
“날 대체 뭐로 보고.”
레온이 기분 나쁘다는 듯 팔짱을 끼며 툴툴거렸다. 하지만 다나는 여전히 그를 귀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어떻데요? 가능하대요?”
“연구는 좀 더 필요하지만, 일단 자기 집 화분에서 로사베리아를 키우는 자를 발견했다는군.”
“정말요? 그게 정말이에요? 그 사람을 당장…!”
벌떡 일어나려던 다나는 자신의 옷을 꼭 쥐는 아드리안을 인지하고는 다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화분에서 키울 수 있다면 재배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거겠네요.”
“하지만 그자는 실내 화분에서 키웠어. 기후에 영향을 받지 않은 셈이지.”
“어쨌든 그 사람의 말을 들어봐야겠어요.”
“그래. 하지만 이미 밤이 늦었어.”
의욕을 보이는 다나를 다독거리며 레온이 아드리안을 받아 들었다.
“그 말을 대신 전하려고 당신이 온 거예요?”
“…그렇다기보단.”
다나의 천연덕스러운 질문에 갑자기 레온이 조금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다나가 얼굴을 좀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렇다기보단?”
“아드리안이 엄마가 보고 싶다며 보채는 바람에.”
“…아드리안이요?”
다나는 자신의 무릎 위에 앉아서, 다나의 머리를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아드리안을 내려다봤다.
“아드리안이, ‘엄마 보고 싶어.’라는 말을 하면서 보챘다는 말이죠? 이제 막 옹알이하는 아드리안이… 말이죠?”
“그래, 그렇다니까? 내 아들이라 그런지 역시 빨라.”
레온은 뻔뻔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아드리안을 덥석 안고 일어섰다. 그러자 갑자기 몸이 들리며 머리를 놓친 아드리안이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우아아아앙!”
그러자 레온이 더욱 당황했다. 다나는 레온의 팔뚝 위를 손으로 툭 치고는 다시 아드리안을 건네받았다.
“왜 애를 울리고 그래요.”
“…….”
그리고는 아드리안의 등을 토닥거리며 침대 위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레온이 그 옆에 앉으며 다나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잘 거야? 이대로?”
“쉬잇, 아기 자요.”
다나가 검지를 치켜세우며 레온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아드리안 쪽으로 돌아눕고는 아기의 몸 위에 손을 얹었다.
레온은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다 자신도 다나의 뒤쪽에 누워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다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앗, 레온…!”
꽉 끌어안는 손길에 놀란 다나가 소리치자, 레온이 다나와 똑같이 검지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쉿, 아기 잔다.”
“…….”
“잘 거야, 이대로.”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허리를 감은 손은 얌전했고, 다나의 목덜미에 숨결이 닿긴 했지만 비교적 평온하고 규칙적이었다.
다나는 그렇게 잠시 긴장한 채로 가만히 누워있었다. 앞에는 아들이, 뒤에는 남편이 누운 채로 왠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와중에 고롱고롱 소리가 났다.
아드리안을 살펴보니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고개만 조금 뒤로 돌려 레온을 보니, 레온 역시 어느샌가 잠들어 있었다.
‘하긴, 피곤했겠지.’
여기까지 온 걸 보면 한가한 대공인가 싶었지만, 사실 그의 스케줄은 다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바빴다.
그럼 그냥 성에서 하루 기다릴 것이지, 그 하루도 못 참고 아드리안 핑계로 쫓아오다니.
다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허리춤에 놓인 손등 위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눈을 감았다.
램프는 스스로 불꽃을 내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밤은 고요했고, 좁은 침대 속에서 꽤 깊은 잠을 잤다.
***
성에 돌아온 후에도 다나는 그쪽 일에 신경을 썼다. 사실 더니즈 상단의 인력이 필요하여 시작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이는 일들은 일종의 작은 실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쪽 산등성이가 완만한 곳이 있던데 농경지로 쓰면 좋을 것 같아요. 마을 사람들의 식량 자급자족을 위한 밭농사 위주로….”
“네. 알겠습니다.”
레온으로 인해 오지 못했던 다니엘은 다나가 성으로 돌아와서야 마주할 수 있었다.
“다니엘, 그 화분에서 재배에 성공했다는 사람, 접촉했나요?”
“네. 했습니다, 비전하.”
“그래요. 그럼 성으로 한번 모셔오세요. 식사라도 하면서 천천히 이야기 나눠봐야겠네요.”
“일러두겠습니다.”
다나는 그렇게 말하며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기대 반 두려움 반이 섞인 눈으로 다나를 보았다.
그들 중에는 아주 예전에 봤던 다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글을 알고 좀 똑똑한 사람들은 더니즈 상단 쪽으로 보내시고요, 아닌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마을 인프라를 건설하는 쪽으로 배치하도록 하세요.”
“네. 전하.”
“또… 어머.”
창가 근처를 서성거리며 이야기하던 다나가 문득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아드리안이 이제 제법 걸음마를 시작한 때였다. 유모와 함께 있던 아드리안이 레온을 발견하고는 아장아장 뒤따라 걸었다.
레온은 보지 못한 척 무표정한 얼굴로 앞서 걸었다. 그러다 아기가 바닥에 폴짝 넘어져 버렸고, 울음을 터뜨렸다.
유모가 안절부절못하며 아기를 일으켜주러 다가갔다. 그러자 레온이 다시 뒤를 돌아오더니 아드리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뭐라 뭐라 중얼거리더니 아드리안을 훌쩍 들어 올려, 목 뒤로 무동을 태워버렸다.
아드리안은 즐거워서 꺄르르 웃었고, 레온은 그대로 다시 뚜벅뚜벅 걸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창문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비 전하?”
“아,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다나는 미소를 띤 얼굴 그대로 다니엘을 보며 물었다.
바쁘지만 즐겁고 평화로웠다.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오후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