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완)
옷을 갈아입던 다나는 뒤따라온 레온을 보고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릴리와 웬디가 서둘러 환복을 도운 후 밖으로 나갔다.
빗물이 검은 머리를 흠뻑 적시고 내려와 하얗고 날카로운 턱선 아래 고여 툭툭 카펫으로 떨어졌다.
다나가 서둘러 타월을 들어 그에게 다가갔다. 자신에게 고정된 시선을 마주하며, 다나는 조용히 그의 머리와 얼굴의 물기를 닦아주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레온은 천천히 말없이 지켜보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목을 살짝 붙잡았다.
푸른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더니, 다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한숨 같은 침묵이 잠시 흐르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괜찮아.”
“옷이 많이 젖었네요, 갈아입어야겠어요.”
다나가 아래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트렌치코트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렸다. 그녀를 보는 레온의 시선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기를 낳기 전에….”
단추를 모두 풀고나서 벗기려고 시도했지만 그가 영 요지부동이었다.
다나는 그런 그를 내버려두고는 안에 잠겨있는 조끼 단추를 마저 풀었다.
“결혼식을 먼저 올리자.”
그녀의 손이 단추 중간에서 멈춰버렸다.
다나는 물끄러미 레온을 올려다봤다. 레온은 곧은 시선으로 그녀를 봤다.
“물론 지금도 그대는 이미 내 아내고, 이 성의 안주인이며 대공비이지. 하지만 정식으로 알릴 필요가 있어. 배가 불러 거동이 힘들어지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 맞는 말인데.”
“음?”
다나가 허리를 펴며 자신의 뺨을 긁적거렸다. 그녀는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어딘가 곤란해 보였다.
“왜 그러지?”
“조금 갑작스러워서. 식을 올린다면 아기를 낳은 후라 생각했어요.”
“그럼 너무 늦으니까.”
“…글쎄요.”
***
장례식이 모두 끝나고, 집무실로 돌아온 레온은 아까 다나의 반응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생각보다 썩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왜지?’
물론 어머니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청혼이 그로서도 무조건 기쁜 일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어딘가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닐 텐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레온은 뭔가 떠올랐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예 성 밖으로 나가려는 듯 아힐이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
레온이 나간 후, 다나는 전신 거울 앞에서 서성거리며 연신 자신의 몸을 비춰보고 있었다.
릴리가 곁에서 그런 그녀를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지켜봤다.
“저어… 비전하, 아까부터 그러고 계시는데, 왜 그러시는 건지…?”
“나, 요새 좀 살찌지 않았어?”
“…네?”
릴리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눈을 크게 뜨며 다나를 아래위로 살펴보았다. 보기에는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하기만 했다. 그리고 애초에 아기도 가진 사람이 찌면 좀 어떻다고?
“아뇨, 전혀요. 왜 그러시는 건데요?”
“레온은 정말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하는 모양이야. 어떻게 바로 결혼식을 올리자고 할 수가 있지?”
다나는 이미 답은 정해졌다는 듯 릴리의 말은 듣지도 않고 툴툴대며 침대 속 이불로 쏙 들어가버렸다.
릴리는 알 듯 말 듯한 다나의 심경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용히 방 청소를 마저 할 뿐이었다.
***
“이걸로 하지.”
“예! 탁월한 안목이십니다.”
다니엘은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흘긋 그의 주인의 안색을 봤다.
눈 돌아가게 비싼 다이아의 가격에 살짝 경고했다가, 이미 한 소리 들은 뒤였다.
‘이럴 거면 나는 왜 끌고 온 거야.’
고르는 과정은 의외로 아주 빠르고 간단했다. 처음에는 그냥 알이 가장 큰 것만 찾더니, 나중에는 보석상이 ‘희귀하고 값지다’며 추천한 것 중 결국 가장 비싼 것을 골랐다.
물론 돈은 돈값을 했다.
듣도 보도 못한 레드 다이아몬드는 주위의 빛을 모두 흡수하여 그 자체로 영롱한 빛을 뿜어냈다.
“그날까지 제작할 수 있겠나?”
“물론이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기대하지.”
레온은 아무렇지 않게 반지 하나의 가격으로 성 하나 값을 치르고 나왔다.
물론 제국의 대공 결혼식이니 그 정도 사치는 허용될 수도 있겠지만, 아직 황후도 그런 걸 받았다는 걸 들어 본 적 없었으니 아마 소문이 나면 사교계가 시끌벅적할 게 눈에 선했다.
다니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음 가게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꽃 가게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다나가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땐 방 안이 온통 꽃밭이었다.
다나는 이게 무슨 일인이 영문을 몰라 하며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릴리.”
하지만 릴리 대신 나온 건 레온이었다. 그는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빨간 장미꽃다발을 들고 꽃밭이 된 방 사이사이를 헤쳐 나왔다.
“레온? 이게 다 뭐예요?”
“별로, 익숙하진 않지만. 어쩐지 내가….”
“내가?”
다나는 그 어색한 표정을 보며 어쩐지 웃음이 났다. 침대에서 내려와 슬쩍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손에 들려 있는 꽃다발과 주위에 널려 있는 꽃들을 보며, 그가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고 있었다.
“결혼식 이야기를 잘못 꺼낸 것 같아.”
“…네?”
“처음부터 그랬지. 그대가 싫다고 했는데도.”
레온은 다나의 품에 장미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다나는 갑자기 자신 앞에 무릎을 꿇는 레온을 보고 화들짝 놀라 소리를 높였다.
“…레온!”
“손을.”
다나는 한 팔로 꽃다발을 안고, 그가 이끄는 대로 내민 손 위에 살포시 손을 겹쳐 올렸다.
눈을 몇 번인가 깜박인 사이, 왼쪽 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빨갛고 영롱한 빛을 내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
“다나.”
레온의 목소리가 그답지 않게 조금 떨렸다.
“부디, 나와 결혼해줘.”
그 떨림이 다나에게 진심으로 다가왔다. 다나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레온이 이어서 말했다.
“나는 이미 그대에게 길들여져서, 벗어날 수가 없어. 이런 나를 그대의 남편으로 맞아줘.”
“…레온….”
당연한 말이었지만, 다나로서도 그와의 결혼이 진심으로 싫은 건 아니었다.
사소한 이유로 조금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레온과의 결혼은 그녀 역시 진심으로 바라는 바였다.
다나는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다이아몬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레드 다이아몬드네요.”
“마음에 드나?”
“네, 무척이요.”
그 붉은빛이 꼭 레온의 붉은 눈동자를 보는 것만 같아 다나는 기분이 오묘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며, 레온은 성 하나쯤의 값어치 정도는 정말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답은?”
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다나가 한 걸음 물러나더니 자신의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살포시 쥐어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그에게 예의를 표했다.
“고마워요, 대공 전하. 우리 결혼해요.”
***
그날은 테라티우스 영지뿐만 아니라 온 제국이 들썩거렸다.
대공의 결혼식에는 각 나라의 축하 사절단과 황제를 대신하여 어린 황자들까지 참석했다.
레온이 성주가 된 이래로 처음 성문이 활짝 열렸다. 대공 부부가 거주하는 내성을 제외하고, 외성까지는 외부인들도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성 곳곳이 화려한 장식들로 치장되고, 악사들은 흥겨운 음악을 연주했다.
대공의 결혼식은 당사자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이곳이 옛 왕국이었던 만큼, 왕족의 결혼 풍습 그대로 몇 날 며칠 동안 영지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다.
성은 창고에 쌓인 재물을 풀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영지민들은 그것들로 배불리 먹고 마시며 며칠 일손을 놓을 수 있었다. 이 시대에는 휴일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이런 날 유일하게 쉴 수 있었다.
“헤일즈 케밀턴 공작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리안을 잃고 난 후, 케밀턴 공작은 헤일즈에게 직접 공작 위를 물려받게 했다. 여자의 작위 계승이 법적으로는 허용되었지만, 흔한 일은 아니어서 잠시 논란이긴 했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그것은 헤일즈의 학술원 성적이 매우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사정을 알고도 재혼을 권할 만큼 간 큰 인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었는지, 공작이 된 후 처음 공식적인 자리에 등장한 헤일즈에게 쉽사리 다가서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중, 껄렁한 걸음걸이 하나가 다가와 그녀에게 샴페인을 건넸다.
“케밀턴 공작 전하, 공작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아, 감사합니다, 마빈 백작. 어쩐지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 일 때문이겠죠.”
“얼간이들이죠, 공작 전하 탓도 아닌데요. 괜찮다면 제가 에스코트해 드려도 될까요?”
“아… 물론이죠, 그럼 잘 부탁드려요.”
테라티우스 성의 메인 정원에는 하얀 캐노피가 높게 설치되었다. 그 아래 길을 따라 꽃들이 아름아름 줄지어 장식되었다.
꽃길 양옆에는 원형 테이블이 곳곳에 놓여 있었고, 그곳에 하객들이 앉아 신랑 신부의 입장을 기다렸다.
황제가 보내준 황실 전용 현악단이 식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을 연주했다.
아름다운 선율이 나비처럼 정원 속을 헤매고 날아다니다 신부 대기실까지 스며들었다.
그것을 들은 다나가 두 손을 모으며 폭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 떨린다.”
그녀의 금빛 머리 위에 더 빛나는 티아라가 씌워졌다. 그러자 다소곳이 감겨 있던 눈꺼풀이 올라가며 푸른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났다.
“이제 다 되었어요, 비전하.”
“정말, 정말 아름다우세요.”
식이 열리는 곳까지 가기 위해서 다나는 마차를 타야만 했다. 금빛 마차에서 내리자, 늠름하게 차려입은 레온이 그녀를 맞이하며 손을 내밀었다.
“가지.”
새하얀 웨딩드레스 자락 아래로 반짝이는 구두가 땅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꽃길 앞에 그들이 나란히 섰다.
햇빛이 쏟아지는 테라티우스 정원에서, 그들의 결혼식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