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다나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멀둥 그를 바라보았다.
“레온, 어디가 아픈가요?”
그리고 오히려 그를 걱정했다.
레온은 기가 막힌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피식 웃음 지었다. 그는 다나가 누워 있는 침대 옆 작은 의자에 다리를 꼬은 채 앉아 내내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정말 몰랐나? 하긴 나도 몰랐으니.”
“뭘 말하는 거예요?”
“그야….”
똑똑똑.
경쾌한 노크 소리와 함께 릴리와 웬디가 함께 들어왔다. 그들은 깨어난 다나를 보더니 바로 달려와 인사했다.
“세상에! 비전하, 깨어나셨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 불편하신 곳은요?”
“식사 준비를 해왔어요. 오래 굶으시면 두 분께 안 좋아요. 바로 여기서 드시는 게 좋겠죠?”
“응? 릴리, 나 잠시만. 씻고 나서….”
릴리는 다나를 일으켜 앉히며 그녀의 등 뒤에 베개를 받쳐주었다.
“먼저 드시고 씻는 것도 도와드릴게요.”
“괜찮아, 오랜만에 혼자 느긋하게 씻을게.”
“절대, 절대 안 돼요!”
웬디의 칼같은 거절에 다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자신이 너무 단호했다 느꼈는지, 웬디는 얼굴을 붉히며 급히 사과했다.
“아, 혹시 위험하실까 봐…. 죄송합니다.”
“그래, 목욕은 이들의 도움을 받도록 해.”
레온이 웬일로 웬디의 편을 들어 상황을 무마시켰다. 릴리가 낮은 상을 들어 침대 위에 올렸다. 상 위에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수프와 과일 조각이 몇 개 올라가 있었다.
“…자, 수저 드세요. 먹여 드릴까요?”
릴리가 숟가락을 들고 아예 곁에 앉으려 하자, 다나가 그것을 휙 뺏어들었다.
“아, 아니! 괜찮아!”
다나는 냉큼 수프를 떠 먹으며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물론 릴리와 웬디는 원래 자신을 잘 챙겨 주긴 했다. 그게 그들의 일이였으니까.
하지만 뭔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레온도 좀 달랐고.
“상이 좀 부실한 것 같은데. 이 정도로 먹어도 괜찮겠나?”
다나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이 릴리에게 말을 건넸다. 레온이 다나의 하녀에게 말을 건다는 것부터가 일단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 빈속이라 일단 부드러운 음식으로 준비했어요. 비전하,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일러 주시겠어요?”
“먹고… 싶은 음식이요?”
다나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눈을 꿈뻑 거렸다. 깨끗하게 싹 비운 다음, 물로 입을 헹구며 말했다.
“깔끔한 화이트 와인 한 잔이요.”
“그건 안 돼.”
“아… 다른 건요?”
“샴페인?”
“왜 다 술이야? 평소에 술도 안 즐기면서.”
레온이 다 거부하자 다나의 입술이 툭 튀어나오며, 볼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릴리는 난처한 얼굴로 다나의 상을 치우며, 일단 자리를 피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 겪느라 머리가 아팠으니까요. 다 끝난 기념으로 깔끔하게 한잔하고 싶은 거죠, 나도.”
상을 치운 자리에 레온이 걸터앉으며, 다나의 입술 위에 묻은 수프를 엄지로 가볍게 닦아주었다.
“…마음은 알겠지만, 곤란해. 나도 참고 있으니까, 참으라고.”
“그러니까 뭘 참는다는 거예요? 아까부터?”
레온이 그 엄지를 그대로 자신의 입술에 갖다 넣었다. 혀로 핥은 후, 레온의 시선이 아쉽다는 듯 다나의 입술 위를 훑었다.
다나가 그 묘한 시선에 뺨을 붉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을 뿐, 레온은 그대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더니 다나의 배 위에 눈을 고정했다.
레온의 시선을 따라가다 다나는 스치며 드는 생각에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 나, 혹시….”
“음?”
다나가 우물쭈물 말하기를 망설이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푸른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는 게 뭔가를 계산해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며 뭔가를 헤아리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미간을 찌푸렸다.
“나… 혹시 아기를 가졌다고 하나요?”
“응.”
“…아.”
“축하해.”
레온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끌어당기며 정수리 위에 입을 맞췄다.
다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을 자신의 아랫배에 갖다 대고는 어설프게 쓰다듬으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배와 레온을 번갈아 보며 봤다.
“축하할 일인 거죠?”
“아기를 싫어하나?”
“…아뇨, 아기는 귀엽고 사랑스럽죠. 그냥 갑작스러워서….”
“의사 말로는 긴장이 풀려서 몸이 놀라긴 했지만, 아기도 무사하고 네 몸도 괜찮다고 했다. 어떤 것 같지? 불편한 점은?”
원래도 다나에게 친절했던 레온이지만 더없이 세심해진 그에게 다나는 슬쩍 미소 지었다.
“산책을 나가도 될까요?”
“조금 쌀쌀한데.”
“잠시만요.”
그의 허락을 구한 건 그냥 형식이었는 듯, 벌써 다나는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리고 일어섰다.
그런 다나를 레온은 마치 갓 걸음마를 뗀 아기를 보듯 조심스런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거라도 걸치고 가자.”
한쪽 의자에 걸쳐진 두툼한 스웨터를 가져와 다나의 어깨 위로 둘러주었다.
“으음, 고마워요.”
이 계절에 입기에는 너무 두껍다 싶었지만, 그의 배려가 고마워 잠자코 입기로 했다.
둘은 손을 잡고 정원을 천천히 산책했다. 조금 한가로운 와중에 다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쓰러진 지 얼마나 된 거죠?”
“이틀.”
“그럼…. 그 사람은.”
“어제 처형되었다.”
다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발아래 밟히는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복수는 성공했지만, 사람이 죽은 일에 마냥 기쁨을 표할 만큼 분별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레온은 다나를 팔로 감싸 보호하며, 달려오는 이를 바라보았다.
치마를 들고 달려오는 이는 서쪽 별궁의 시녀 케이트였다. 그녀는 소피아의 전속 시녀였고, 어딘가 몹시 다급해 보였다.
“대공 전하…!”
그리고 레온을 부르는 그녀의 표정에서 어쩐지 하려는 말을 알 것 같았다.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겼나?”
***
소피아의 죽음은 어쩌면 예견된 일인지도 몰랐다.
케이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소피아는 잠가 뒀던 창문을 열고 그대로 밖으로 몸을 던졌다.
케이트가 방으로 왔을 때, 열린 창문과 빈방을 발견했지만 미쳐 소피아가 그곳으로 뛰어내렸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녀들과 시녀들을 풀어 샅샅이 별궁 안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한참을 뒤진 후에야, 별궁 밖 화단에서 소피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소피아를 발견한 후, 케이트는 사색이 되어 바로 레온에게 달려왔다.
레온이 아힐과 함께 먼저 빠르게 달려와 소피아를 보았다.
그 조금 뒤에 다나와 리사가 도착했다.
“아…!”
레온은 다나가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될까 먼저 다가가 다나의 눈을 가렸다.
“…가까이 가지 마.”
덕분에 다나는 소피아의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그의 거친 숨소리나 목소리에서 어렴풋이 상황은 파악할 수 있었다.
“무슨…. 어떻게 된 거예요? 레온? 당신, 당신은 괜찮아요?”
“…보지 마, 아무것도. 난 괜찮아.”
다나의 눈을 가려주던 레온이 뒤를 돌더니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다나를 감싸 안은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가 바들바들 떨렸다.
“레온.”
다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레온의 등 뒤에서는 아힐의 지시에 따라 시신의 처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오웬이 도착했다.
레온은 울지 않았지만, 오웬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오웬은 분명 소피아를 사랑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가 흘린 눈물이 슬픔인지, 죄를 묻지 못한 것에 대한 탄식인지 본인 외에는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테라티우스 성의 전 안주인은 그렇게 생을 마감했고, 모두가 쉬쉬하며 장례준비를 서둘렀다.
***
보슬보슬 가을비가 내렸다.
레온은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고, 우산을 들어 다나를 씌워주고 있었다.
다나도 역시 차분한 검정 드레스를 입고 숄을 걸쳤다.
오웬은 표정 없는 얼굴로 우산 없이 그들과 함께 서 있다, 눈을 감고 가볍게 묵념했다. 속으로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인사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소피아의 유골은 테라티우스 역대 왕족들이 묻힌 무덤에서 조금 비켜난 곳에 묻혔다.
비록 그녀가 살아 있을 때의 죄를 밝혀낼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지른 죄가 없어지진 않았다. 나중에라도 그 일이 밝혀지게 된다면 그것은 불명예였다.
비록 대공의 어머니이자 테라티우스 공작부인이었지만, 두 남자의 합의로 그 옆의 화단에 그녀의 유골함을 묻고 작은 비석을 세웠다.
장례식에는 최소한의 인원만 참여했다. 구슬픈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울한 빗소리만 자리했을 뿐, 소피아의 장례식은 그저 그렇게 아무 일도 아닌 듯 지나갔다.
다나는 간간이 레온의 옆모습을 보며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대는 먼저 들어가지.”
내내 조용하던 레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다나는 함께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려다, 그의 착 내려앉은 시선에 결국 알았다고 답했다.
레온이 다나에게 우산을 건네려 하자, 다나가 거부하고는 리사의 우산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당신이 써요. 내 남편이 비 맞은 생쥐 꼴로 있는 건 왠지 보고 싶지 않아요. 난 리사와 함께 쓰면 되니까.”
“그래, 먼저 들어가.”
결국 다나는 레온을 남겨두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들어가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레온은 오웬과 달리 혼잣말도 하지 않았고, 부동자세로 서서 그저 비석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쉽사리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음에, 다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저 안으로 들어갔다.
레온이 따라 들어온 건 반 시간 정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