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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상속녀-83화 (83/92)

83화

‘뭐지?’

다나는 조금 의아했지만, 곧 다니엘이 일어나고 레온이 다나를 일으켰다.

그들은 법정에서 나와 옆에 마련된 휴게실로 갔다.

통상적으로 피고인에게 이런 휴식 공간이 제공될 리 없겠지만, 이건 엄연히 대공에게 따라오는 특별대우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다음 재판 전력에 관해 의논할 수 있었다.

휴게실 문 앞에는 아힐과 리사가 나란히 서서 그들의 주인을 철저히 호위했다.

릴리가 잠시 음료를 들고 들어갔다 나온 거 외에는 엄중하게 사람의 출입을 통제했다.

“그냥 말을 할 걸 그랬나 봐요. 그랬으면 그 사람을 궁지에 몰 수 있었을 텐데.”

“네가 괜히 그런 희생을 할 필요는 없어, 다나.”

“그렇습니다, 비전하. 어차피 서류상 모두 제출되었어요. 그리고 앞으로의 재판이 어차피 남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밝혀지면, 그자는 사형을 면치 못할 겁니다.”

“사형… 이요.”

“그래, 사형.”

다나가 사형이란 단어를 따라 하며 말끝을 흐리자, 레온이 그녀를 바라보며 분명하게 그 뜻을 전달했다.

레온은 리안을 죽여 없애고 싶었다. 다나와의 일을 알게 된 순간부터.

법과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들이 그의 성격과 맞진 않았지만, 그래도 별수 없었다.

레온 하나뿐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그에게는 이제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지루한 절차를 밟고 있을 뿐이었다.

잘게 흔들리던 푸른 눈동자가 레온과 마주하자 곧게 서더니, 다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리안이 죽는 게 다나에게 가슴 아프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에 대한 복수의 형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시원스레 대답이 나오지 않을 뿐이었다.

그렇게 쉽게 목숨을 빼앗아도 되는 걸까? 조금 더 고통을 줘야 되지 않을까? 라는 조금 잔인한 생각도 스쳤지만, 곧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그의 죄는 상상을 초월했다.

단순히 자신을 죽이려 하고, 상단을 빼앗은 것뿐만이 아니었다.

형제를 죽이고 부모를 죽였을 뿐 아니라, 입을 막으려 그 가문에서 일했던 자들까지 죽이려 했다.

판결은 자신이 내리는 게 아니었지만,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리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죽음 외에는 다른 갚을 길이 없는 죄였다.

***

법정의 문이 열리고, 리안은 경악스러운 눈으로 들어오는 이를 쳐다봤다. 그녀가 올 거라고는 절대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다나도 조금 놀랐는지, 레온과 그녀를 번갈아 보며 예를 취하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리스틴 왕녀님, 그러니까, 이리로.”

법정 서기관이 직접 그녀를 에스코트하여 증인석으로 모셔갔다.

크리스틴은 조금 굳은 얼굴로 시선을 내린 채 서기관의 안내를 따라 걸어가며 자리에 섰다.

“흠흠, 저하는… 그러니까 증인은 자리에 서서 선서하십시오.”

재판장도 조금은 놀란 듯 그녀를 보다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양측의 증인 목록이 법관석에 제출되었지만 제대로 보지 않은 탓이었다.

“나 크리스틴 폰 체페스리아는 본 법정에서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위증할 시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한다.”

“다른 증인들도 선서하시오.”

크리스틴의 증인이 끝나자마자 재판장이 말했다. 증인석에는 크리스틴 왕녀 외에도 하벌트와 리사, 상단의 임원 한 명이 더 나와 있었다.

그들 또한 크리스틴의 뒤를 이어 하나하나 선서를 했다. 리안의 눈빛은 그들 각각을 볼 때마다 시시각각 변해갔다.

크리스틴을 볼 땐 불안함을, 하벌트를 볼 땐 안심을, 리사를 볼 땐 잘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참관인석 쪽으로는 아예 눈도 돌리지 못했다. 레온도 레온이었거니와, 아까와 달리 케밀턴 공작 측의 하수인들도 조금 더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작 본인은 아직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왜 도와주지 않는 거지. 정말 날 버리는 건가? 헤일즈. 내가 뭐 때문에 그 못생긴 상판을 참아줬건만.’

리안은 속으로 이를 으득 갈았다. 하지만 곧 허겁지겁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는 안색이 새파래졌다.

“으윽, 저자가?”

“아는 사람입니까?”

그는 자신을 조사했던 마빈이었다. 최고 감찰관이 이 재판에 직접 참여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아하하, 늦었습니다. 재판장님.”

“어서 오십시오, 검사 자격으로 오셨다고요.”

“네, 사건이 이래저래 복잡해서 제가 하는 게 낫겠더라고요.”

이 시대의 법률은 그리 복잡하게 나뉘어져 있진 않았지만, 재산권을 다투는 법률과 살인죄를 다루는 법률의 종류는 관할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감찰관은 때에 따라 두 사건을 직접 병합하여 조사하고 검사 자격으로 참가할 수 있는 만능 직종이었다.

마치 그 조커 같은 역할 때문에, 꼭 유능해야 했지만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별로 나서지 않아서 평소에는 할 일 없는 백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탕, 탕, 탕.

“자, 그럼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검사께서는 주요 쟁점들을 정리해서 진술하시기 바랍니다.”

마빈은 정리되지 않은 서류 더미 속에서 허둥지둥 몇 장을 찾아 헤매다 머리를 긁적이며 허리를 폈다.

그가 곁눈질로 레온을 보려다 그만뒀다. 보나 마나 못마땅한 눈빛으로 잡아먹을 듯 보고 있겠지. 대신, 이루지 못한 사랑, 아리따운 그녀, 다나에게 눈길을 줬다.

‘그래, 저 여인을 위해.’

아름다운 여인을 보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천천히 그가 입을 열었다.

***

“저놈과 만날 때마다 기억을 잃고 이상한 행동을 했어. 내가 일국의 왕녀인데, 창피함을 무릅쓰고 나왔단 말야. 그런데 거짓을 말할까?”

재판장에게의 예의 따위는 진작에 집어치운 크리스틴 왕녀는 특유의 고압적인 말투로 말하면서도, 분노를 참지 못한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물론 그녀에게도 역시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재판장은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레온이 잠자코 있자 그저 재판의 진행에만 집중했다. 그는 리안을 보며 말했다.

“저 말에 반박하겠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제가 약을 썼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왕녀께서는 무도회에서 분명히 술에 취해 있었는걸요.”

“뭐라고? 네 놈이 술에 분명히 뭘 탔잖아! 그럼 아침에는? 차를 마시고 나서도 갑자기 기억을 잃었어. 정신을 차리니까 갑자기….”

크리스틴 왕녀는 고개를 휙 돌려 참관인석에 있는 레온을 봤다. 레온은 가볍게 눈짓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크리스틴 왕녀가 조금 더 자신감 있게 말을 이어갔다.

“테라티우스 대공 앞에 서 있었지. 그가 날 구해주지 않았다면 난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방황하고 있었을 거야!”

“그거야 뭐 전날 술이 덜 깨셨거나….”

“뭐라고? 저런 괘씸한…!”

리안의 빈정거림에 왕녀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 질렀다. 지켜보던 참관인들이 각자 뭔가를 속닥거리자 실내가 웅성거렸다.

법관은 법봉을 두드리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자, 왕녀께서는 좀 진정하시고, 다들 조용히 하세요.”

주위가 조용해지고 마빈 코스트 백작이 나섰다. 그는 조금 껄렁한 자세로 서서는 턱을 문질거리며 리안에게 질문했다.

“리안 펠리스 백작, 나와 스필플라츠에서 봤잖아요. 그렇죠?”

“…네.”

“당신은 내가 처음이었겠지만, 나는 당신을 자주 봤어요. 꽤 유명인사더군요.”

“그래서요? 그게 환각초와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마빈은 손끝으로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책상 끝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그러다 펜이 바닥으로 툭 굴러떨어지자 ‘이크.’ 하고 소리 내면서도 줍지 않았다.

“거기서 쓴 돈들은 대체 어디서 난 겁니까? 펠리스 백작의 유산인가요, 아니면 케밀턴 공작이 사위의 즐거움을 위해서 기꺼이 용돈을 쥐여 주시는 겁니까?”

마빈은 질문을 다 끝낸 다음에야 펜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리안은 그 질문을 받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느라 입을 다물었고, 대신 그의 변호인을 툭툭 쳐댔다.

돈값을 하는 변호인은 상단 수익의 일부를 정산받았다고 둘러대었고, 이런저런 공방이 이어진 끝에 정확한 자료를 추후 제출하기로 한 후 일단 넘어갔다.

하벌트는 이 일에 증인으로 나서지 않았는데, 엄연히 말하면 유통망을 제공해준 그도 공범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병합된 마지막 쟁점을 앞두고, 그들은 휴식시간 없이 바로 진행했다.

바로 리안의 ‘살인 미수’와 더니즈 상단의 소유에 관한 쟁점이었다.

리사는 펠리스 백작 부부의 살인에 관한 정황을 진술했다. 물론 이 사건은 그에 관한 것을 다룬 게 아니었고, 또 너무 과거의 일이라 그 사실을 밝히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리안의 성격이나 행적에 관해 참고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리안의 편에서 나온 하벌트가 리안이 다나를 죽이려 했다고 증언했을 때에는 리안의 얼굴이 그야말로 사색으로 물들었다.

“너, 너, 하벌트…! 네 놈이 어떻게 감히 날 배신해!”

“그래도 사람을 정말 죽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거죠.”

하벌트는 혀를 차며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리안과 눈을 마주치는 것에도 거리낌 없었고, 오히려 조언까지 첨부했다.

“그러지 말고 죄를 인정하세요, 사람이라면. 그럼 죽은 아가씨도 조금은 편히 잠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리안이 어벙벙한 표정으로 말문을 닫았고, 다나도 퍼뜩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하벌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술 끝을 미세하게 올렸다가 내릴 뿐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여기 앉은 분이 가짜라는 말씀입니까?”

다니엘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하벌트가 오히려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연기를 해야 하는 겁니까? 대공 전하, 여기는 신성한 법정이 아닙니까. 위증을 하면 벌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알지 않습니까, 다나 아가씨께서 그렇게 되신 후, 거래를 위해 대역을 쓰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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