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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상속녀-82화 (82/92)

82화

레온은 자신의 목에 감긴 다나의 팔을 조용히 잡았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요, 어서 들어가요.”

나뭇잎 사이로 거센 빗물이 쏟아져 레온과 다나를 흠뻑 적셨다. 다나는 레온을 감싸던 팔을 풀고 벤치 앞으로 돌아갔다.

“레온?”

레온의 젖은 긴 앞머리가 내려와 그의 붉은 눈을 가렸다.

“…많이 충격이었나 봐요, 이해해요.”

다나가 그의 젖은 머리를 넘기자 레온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눈을 맞췄다.

“그건 그대가 할 말이 아냐.”

레온은 다나를 잡아끌어 벤치에 앉히더니, 동시에 자신은 벌떡 일어났다.

“레온?”

레온은 그녀를 앞에 앉혀두고는 서서히 몸을 낮추더니 젖은 땅 위에 무릎을 꿇었다.

“…레온!”

다나가 당황하여 일어나려 했지만, 레온이 두 손으로 다나의 손을 맞잡은 채 그녀의 허벅지를 누르며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왜 이러는 거예요, 갑자기.”

커다란 나무도 막지 못할 만큼 거센 비가 쏟아졌다. 다나는 속옷까지 완전히 젖어버렸다.

“미안하다. 내 어머니가 벌인 일은 평생을 걸쳐 사죄할 거야. ”

“…아니, 그건.”

“하지만 모든 걸 다 들었지만, 나는.”

레온의 속눈썹 위로 빗물이 맺혀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다나는 그 모습이 마치 그가 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그대를 놓아줄 마음이 없어.”

빗소리에서 나직하게 울리는 음성은 습기를 머금고 조용히 흘러들어왔다. 몸이 찼지만 그와 닿은 부분은 뜨거웠다.

이렇게 약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대답을 구하는 듯 붉은 눈을 들어 다나를 보았다. 다나의 손을 덮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건….”

다나의 속눈썹 위에 얹혀 있던 물방울이, 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톡톡 흩어져 내렸다. 그렇게 코끝에 맺혀 있던 이슬이 인중을 타고 내려와 입술 사이 자리 잡았다.

다나는 붉은 혀를 내밀어 그 이슬을 핥아 먹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대로 레온의 입술 위에 짧게 입맞춤했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곧이어 길고 긴 키스가 이어졌다.

***

“재판관님들이 들어오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치안대에 있던 법관을 포함하여 세 명이 나란히 단상 위에 자리 잡았다.

고위 귀족 간의 정식 재판치고는 생각보다 방청객이 적었다. 테라티우스 대공과 케밀턴 공작 모두 이 사건이 크게 알려지지 않길 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황제에게는 재판이 열린다는 사실 관계만 간략하게 보고되었다.

일단 첫 사건이 리안 측에서 신고된 것인 만큼 피고석에는 다나와 그녀를 대변해 줄 다니엘이 앉아 있었고, 원고석에는 리안과 치안대장이 앉아 있었다.

참관인석에는 레온이 팔짱을 끼고 앉아 무시무시한 눈으로 리안을 바라보았다.

케밀턴 공작 측에서도 사람을 보내긴 했지만, 공작이나 헤일즈가 직접 나오진 않았다.

리안은 불안한 눈으로 재판장 문을 쳐다봤다.

“그럼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재판장이 시작을 알리려는데, 리안이 다급하게 그를 막았다. 그를 의아하게 보자 리안이 쩔쩔매며 말했다.

“아직 올 사람이 있습니다. 잠시만, 잠시만….”

재판장은 재판을 지연시키는 그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려 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리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벌트!”

하벌트는 애매한 표정으로 리안을 향해 묵례하더니 레온과 다니엘에게도 흘끔 눈짓으로 인사했다.

하벌트 뒤에는 리안이 직접 고용한 변호인이 있었다.

리안도 완전히 바보가 아닌 이상 케밀턴 공작 측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스스로 나섰고, 자신의 편이라 생각한 사람을 불러들였다. 변호인도 큰돈을 주고 선임했다. 테라티우스 가를 상대한다는 사실에 조금 어렵긴 했지만, 또 시세보다 큰 금액을 제시하니 못 구할 것도 아니었다.

“흠흠,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변호인은 리안의 옆에 앉았고, 하벌트는 참관인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리안이 증인으로 불러둔 참이었다.

“첫 번째 사건부터 다루겠습니다. 먼저 얼마 전, 더니즈 상단에서 리안 펠리스 백작이 평민 여자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신고가 치안대에 접수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사건을 다룬 치안대장이 그 일에 대해 진술했다. 리안은 불안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케밀턴 공작의 집에 들이닥칠 때부터 치안대장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후 그를 매수하려 몇 번 더 시도해 보았지만, 난색을 표하며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고, 저희는 신고된 여자를 일단 조사차 치안대로 데리고 왔습니다.”

글자를 죽죽 읽어나가는 치안대장의 목소리는 기계적이고 감정이 깃들지 않았다. 그리고 듣는 수석 재판관의 얼굴에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오른쪽에 앉아 있는 법관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변했는데, 그는 치안대에서 다나를 마주했던 법관이었다.

치안대장의 진술이 끝나자마자, 그 법관이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바로 발언했다.

“하지만 자네가 말한 그 진술에는 큰 오류가 있네.”

“네, 그렇습니다.”

“그런가? 그게 뭐지?”

그 말에 무표정하던 수석 재판관이 조금 흥미를 보였다. 그는 일부러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것도 있었지만, 지금 다루는 이 사건에는 실제 흥미가 없기도 했다.

이 재판이 열리는 진짜 이유는 아직 시작도 안 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가해를 한 사람의 신분이 ‘평민’이 아닙니다. 그 시점에 그녀는 이미 테라티우스 대공비가 되어 있었지요.”

“흐음, 그렇군.”

이게 죄의 유무에 무슨 연관이 있냐 싶겠지만, 실제 판결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서로의 신분이었고, 그게 이 시대의 정의였다.

재판관은 더더욱 가치 없는 이 사건에 미간을 찌푸리며, 피고석을 바라보았다.

“피고인, 그대는 어찌하여 펠리스 백작에게 위해를 가했습니까? 혹시 그가 어떤 위해를 가했기 때문입니까? 편히 말씀해 보시지요.”

재판관은 확연하게 달라진 말투로, 한껏 예의를 차려 피고석에 앉아 있는 다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다니엘이 대신 말하려는데, 다나가 손으로 그를 막으며 눈을 마주쳤다.

“아.”

그리고 옅게 웃고는 재판관에게 고개를 돌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제 방에 어떤 물건을 가지러 들어갔어요. 그런데 갑자기 펠리스 백작이 들어왔죠. 저를 벽에 밀치고, 추행을 시도했죠. 그렇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그만….”

다나가 약간의 연기를 보태 말끝을 흐리며 살짝 몸을 떨었다. 마치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한 그녀의 가녀린 모습에 자동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리안에게 향했다.

물론 이 또한 ‘대공비’를 추행했다는 것에서 비롯된 비난의 시선이었다.

“잠시만요, 재판장님! 피고인께서는 그곳을 ‘제 방’이라 하십니다. 하지만 그곳은 리안 펠리스 백작이 쭉 쓰던 곳이고 무단 침입한 사람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몸이 닿았을 뿐 결코 추행하려 한 게 아닙니다.”

드디어 리안이 쓴 돈의 효과가 나타났다. 나름대로 리안의 변호인은 그가 말한 정황을 듣고 그를 변론해주었다. 창백했던 리안의 표정이 그나마 밝아지며, 그가 고개를 들었다.

“맞습니다, 상단의 대표가 사라진 후 내내 제가 대리인으로서 상단을 관리하면서 쓰던 방입니다.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와 있어 도둑인 줄 알고 잡으려 했을 뿐입니다.”

다나는 순간 당황하여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다니엘이 침착하게 끼어들었다.

“그곳이 누구의 소유인지는 앞으로의 재판에서 밝혀질 것이니 지금 논의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재판장님.”

“흠, 그렇군요. 그럼 실제 추행이 있었냐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펠리스 백작이 피고인을 어떻게 했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재판장은 당연하다는 듯 물었지만 대답해야 하는 다나로서는 곤혹스러웠다.

툭, 툭. 툭.

구두코가 나무 책상을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재판장을 울렸다. 정숙한 와중에 누구인가 봤더니 테라티우스 대공이었다.

명백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차마 누군가 나서서 그에게 경고하진 못했다. 레온의 표정이 마치 말이라도 걸었다간, 그 사람을 베어버릴 것처럼 살벌했기 때문이었다.

레온이 만일 여기서 칼을 뽑는다면, 당장은 구금될 테지만 곧 황제의 명으로 풀려날 것이다.

그의 표정을 다니엘도 보았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벌떡 일어나 재판장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귀부인에게 그것을 진술시키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다 생각합니다. 여기 구체적인 것을 적어두었으니….”

“흠흠, 알겠습니다.”

재판장도 분위기를 읽었는지 그쯤에서 넘어갔다.

재판의 결과에 상관없이, 재판관은 황제의 칙령 아래 보호를 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이었고 무엇보다 그들도 또한 사교계에 속한 귀족이었다.

때문에 귀족끼리의 재판에서 수석 재판관은 주로 공작, 후작급에서 맡아 했다. 그 정도는 돼야 어느 정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 정도 휴식 후에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양측의 변론이 오고 가고 첫 번째 사건은 명확한 결론 없이 넘어가야 했다.

사건 당시 침입자가 누구인지 밝히기 위해서는 그곳이 누구 것인지부터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미동 없이 앉아 있던 레온은 벌떡 일어나 다나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안색을 살폈지만, 다나는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힘들면 이런 자리에 굳이 없어도 돼. 다니엘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말 안 들을 거 알죠? 설마 또 집으로 보낼 건가요?”

다나는 레온의 귓가에 속닥거리며 흘긋 그의 너머에 있는 리안을 보았다.

리안은 자신의 변호인과 뭔가를 상의하며 다나를 흘끔흘끔 보고 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다나는 그대로 그가 눈을 피할 줄 알았지만, 리안은 원망스런 눈으로 다나를 쳐다보다 다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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