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자백을 받아낼 수 있을까요?”
“글쎄, 뭐 잘 쓰는 방법은 아닌데….”
마빈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리안을 보았다.
“이놈이 유통한다는 그 환각초를 종종 쓰기도 하지. 근데 그건 진짜 최후의 수단이고, 일단은 몇 대 패보면 대부분의 놈들은 술술 부니까.”
“아아, 그 환각초가 그런 용도로 쓰이는군요.”
둘은 리안을 빤히 보면서 대화했지만, 마치 앞에 사람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리안을 더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날 때린다고? 내가 누군 줄 알고. 분명 케밀턴 공작이 날 제대로 대우하라고 말했을 텐데!”
“그러게 말야, 우리도 그걸 걱정했는데.”
마빈은 한숨을 쉬더니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상하게 케밀턴 측에서 아무 말도 없단 말이지. 뭐 최소한 공평하게 해달라, 라든가 상투적인 당부도 없어. 아주 조용하다고.”
“뭐?”
“너 혹시 버림받은 거 아냐?”
마빈은 가볍게 던진 말이었지만, 리안에게는 아니었다. 흥분했던 리안이 움찔하더니 그 기세가 한결 가라앉았다.
“뭐, 그건 됐고. 그럼 진짜 본격적으로 가 볼까?”
“다나 더니즈, 그러니까 이제 다나 테라티우스 대공비에 대한 살인미수 혐의입니다.”
느긋하던 다니엘은 본격적으로 조사가 시작되자 진지한 어투로 변했고, 마빈도 점차 차분해졌다.
***
조사실 옆에는 작은 방이 있었다. 조사실과는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고 천장의 일부가 이어져 있었다.
그곳에 헤일즈가 앉아 있었다.
‘…리안과 서로 연인이었다니.’
리안이 방금 자신을 만나고 있는 동안에도 다나와 연인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비록 그녀를 죽였다는 건 부인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헤일즈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헤일즈는 조사실에서 오고 가는 대화를 내내 그곳에 앉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하녀가, 헤일즈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헤일즈는 눈물을 훔치며, 무도회에서 봤던 다나 더니즈를 떠올렸다.
첫 사교계 데뷔인 만큼 조금 어색해하긴 했지만, 레온 테라티우스 옆에서 그녀는 우아했고 아름다웠다.
이미 헤일즈는 리안이 슬슬 변하던 시점부터 그에게 종종 감시역을 붙이곤 했다. 그리고 그가 스필플라츠에 자주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연애결혼을 했던 헤일즈에게는 나름대로 충격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남자 귀족들의 흔한 일탈 정도로 여겼다. 헤일즈와 리안이 조금 특별했긴 했지만, 정략결혼으로 결혼한 부부의 경우 애인도 뒀고, 없더라도 유흥과 윤락을 즐기는 게 그리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의 행적은 점점 더 수상했다.
특히 수도에서는 리안이 다나를 내내 바라보았다는 보고를 듣고, 그녀가 아름다워 그렇다 여기며 살짝 질투하기도 했다.
“더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저쪽 조사실에서는 뭔가 더니즈 상단과 관련하여 이러쿵저러쿵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사전 조사일 뿐이고 정식 재판은 따로 열리겠지만, 들리는 이야기만으로 리안은 불리해 보였다.
헤일즈는 크게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니었는지, 혹은 그에 대한 마음이 굳어졌는지 메마른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방에서 벗어났다. 그녀의 하녀가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따라 나갔다.
치안대장은 헤일즈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혀를 차다, 그도 조사실로 향했다.
***
오웬의 이야기가 끝나고 레온은 두 손바닥을 얼굴에 비비며 마른세수를 했다.
굳은 표정으로 있던 다나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속이 후련한 얼굴이었고, 오히려 레온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다나가 조심스레 옆에 있는 그의 무릎 위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에 레온이 한숨을 쉬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이제껏 그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은 겁니까, 아버지.”
“너에게는 어쨌든 좋은 어머니였지 않느냐.”
오웬은 레온에게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하며, 다나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미안하구나. 원수의 자식과 이어준 날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난 로모크 가문의 핏줄에게 원래의 자리를 돌려주고 싶었다. 그들은 테라티우스의 오랜 반려자였어.”
“…원망하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가 왜 그렇게 저를 숨기며 키운 건지 이제 이해가 가네요.”
“증거가 있었다면, 그래도 벌했을 텐데…. 소피아는 엘리사에게 자식이 있다는 걸 알고는 집요하게 그를 찾았지.”
소피아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루셸은 장사를 가르친단 핑계로 어린 다나를 데리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소피아는 엘리사가 낳은 아이가 내 자식이라 생각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와 엘리사의 관계는 소피아와 결혼이 결정된 그날 이미 끝났고, 엘리사는 엄연히 루셸의 아내였어. 넌 그리고 그들의 사랑스런 딸이다.”
소피아는 하셸 제국 일등 공신 집안의 딸이었다. 연회에서 오웬을 보고 한눈에 반한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그와 혼인하고 싶다 말했다. 소피아의 아버지는 반색하며 황제에게 이를 청했다.
하셸 제국은 이제 막 제국 아래 들어온 테라티우스 가문을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 그들의 공신 가문과 정략결혼 시키는 것이 좋다 판단했다.
그리하여 황제는 오웬에게 혼인을 명했고,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웬은 엘리사에게 눈물로 이별을 고했고 그렇게 끝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소피아는 오웬이 옛 연인과 아직 만나고 있다 생각하며 늘 의심했다.
그리고 그 의심의 싹을 자르기 위해, 엘리사를 죽이려 했다.
오웬이 그를 알고 루셸에게 테라티우스 왕실의 숨겨둔 재산을 맡기고, 엘리사를 데리고 도망치게 했다.
함께 도망치며 루셸과 엘리사는 사랑에 빠졌고, 부부가 되어 상단을 꾸리며 아이도 가졌다.
하지만 소피아는 그 후에도 종종 엘리사를 노리는 자객을 보냈다. 그것을 피하려 엘리사는 임신한 몸으로도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어쨌든 다나는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고, 어린 다나가 이제 막 걷고 뛰기 시작할 무렵이 되던 때였다.
엘리사는 누군가가 준 음료수를 먹고, 그대로 쓰러져 한동안 버티다 결국 죽고 말았다.
루셸은 오웬에게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제발 우연이길 바랐지만, 내가 조사해 보니 그때 소피아가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돈을 줬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그래, 그랬어.”
그 심부름꾼을 잡으려 해 봤지만, 그도 이미 소피아에 의해 입막음을 당해 죽고 없었다.
레온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
탁-
“레온.”
“미안, 미안해.”
오웬의 방에서 나오며, 다나가 레온의 팔을 살짝 잡아끌었다.
레온은 아주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떼어내며 다짜고짜 사과를 했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알 수 없었다.
“잠깐 혼자 있고 싶군.”
그렇게 양해를 구하며 레온은 혼자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다나는 차마 따라 나가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시간 차를 둔 후, 다나도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건물 밖을 나서니 꽤 시간이 지나 하늘이 어둑해져 있었다.
“비가 오려나.”
공기가 습기를 머금어 묵직하게 느껴졌다. 다나는 성안 길을 따라 걸으며, 곰곰이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봤다.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아.’
처음 소피아가 자신을 향해 소리 지르며, 엘리사를 향한 분노를 쏟아낼 때는 확실히 화가 났던 것 같다.
정신 나간 여인의 말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 몰랐어도,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밑도 끝도 없는 증오에 자신도 같이 반응했었다.
하지만 오웬에게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오히려 차분해졌다.
‘왜일까.’
자신의 어머니, 엘리사를 죽인 소피아에 대한 원망은 당연히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아들 레온에게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그는 몰랐으니까.
더군다나 다나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개념적으로야 알고 있었지만, 기억나지 않는 존재였다. 그 때문인지 크게 분노가 일지 않았다.
반면에 레온은 분명 원수의 아들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생명의 은인이었고 사랑하는 연인이며 남편이었다.
사연을 듣다 보니 오히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를 원하는 마음은 이제 다나도 잘 알았다. 그것을 알고 듣다 보니 오웬과 엘리사의 엇갈린 인연이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아버지 루셸과 어머니 엘리사 간의 사랑이 거짓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거의 기억은 없었지만, 루셸은 그녀가 죽고 난 이후에도 엘리사의 유품을 고스란히 정리하며 소중히 보관해 왔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할 때면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리워했다.
‘하지만… 레온은.’
길을 걷던 다나는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나올 때의 예상대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상처받은 얼굴이었어.’
엘리사의 얼굴도 모르는 자신은 아니었지만, 레온은 적어도 어머니와 정이 깊었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가 살인을 청부하고 끝내 죽였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더군다나 그게 다나의 어머니라면.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졌다. 바닥에 점을 찍던 물줄기가 점점 바닥을 적시며 고여갔다.
다나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오웬이 있는 건물과 다나와 레온이 머무르는 본성 사이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고, 그 아래 벤치가 있었다.
다나는 그 벤치에 앉아 있는 레온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비가 오는데도 피할 생각도 없이 그저 앉아 있었다. 단단하고 다부진 어깨 위로 물방울이 쏟아져 흘러내렸다.
다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레 그의 뒤로 다가갔다. 평소 레온의 감각이라면 그녀가 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다나가 오는데도 미동조차 없었다.
다나는 그대로 다가가 뒤에서 목을 꽉 끌어안았다.
“레온.”
차가운 빗줄기와 다르게 그의 목덜미는 따뜻했고, 다나는 그곳에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