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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상속녀-79화 (79/92)

79화

“아, 잠시 갇혀있다 대공이 직접 데리러 와서 지금 풀려났습니다. 즉결심판을 하던 중에 데리고 가면서, 문제는 항소를 했다는 겁니다.”

케밀턴 공작은 엄지와 중지로 이마를 넓게 쥐어 꾹 눌렀다. 듣고 보면 이 사위 놈의 잘못은 아니지만, 약간 골치 아프게 꼬여버린 모양이었다.

“뭐로 항소를 한다는 거냐.”

“여자는 자신이 다나 더니즈임을 내세워 상단에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아마 이 일을 핑계 삼아 함께 걸고넘어질 것 같습니다.”

“가짜라며.”

“대외적으로는 그녀가 진짜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대공이 이미 알고 그에 협조해주는 것 같습니다.”

“허어, 참. 그러니까 가짜라는 걸 알면서… 아니지, 대공도 어쩌면 상단을 삼키고 싶어 일부러 그러는 걸 수도 있겠구나.”

케밀턴 공작은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탐욕이 묻어나오는 그의 얼굴을 보며, 리안도 그 순간 머리를 굴려대고 있었다.

이 노인네를 잘 구워삶아 놔야 훗날이 편할 것이다.

“우리가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대공이 가짜 대표를 내세워 상단을 차지하는 건 막아야지. 그렇게 안 봤는데, 젊은 놈이 보기보다 욕심이 많구먼.”

하지만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리안의 말만 듣고 움직이기엔 상대가 너무 거물이었다.

조금 더 캐물으려는데, 케밀턴 공작가의 하인 한 명이 급하게 달려왔다.

“공작 전하!”

“무슨 일이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치안대에서…!”

리안과 케밀턴 공작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하인의 뒤로 여러 사람이 따라 들어왔다.

맨 앞에는 치안대장이 있었고, 그 뒤에는 무장한 기사들이 줄지어 따라오고 있었다. 이곳이 케밀턴 공작의 저택이라는 것치고는 상당히 무례한 일이었다.

치안대장은 공작을 보자 먼저 간단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케밀턴 공작 전하, 공무를 수행 중이라 실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케밀턴 공작은 노기 띤 눈으로 대답 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자 치안대장은 슬쩍 그의 눈을 피하며 뒷말을 이어갔다.

“재판 관련하여 리안 펠리스 백작을 조사할 일이 있어 이렇게 방문하였습니다.”

리안 펠리스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있다 금세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그는 일부러 과하게 화를 냈다.

“지금 자네 여기가 어디라고 이렇게 무례한 거지? 조사를 위한 거라면 내게 따로 통보하면 찾아갈 것을, 나는 이 사건의 피해자야! 그런데 이 무장한 기사들은 뭔가?”

당당하게 나가려 했지만, 원체 찔리는 게 많은 리안이라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치안대장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어느 줄을 잡아야 할지 치밀한 계산 끝에 여기 왔기 때문에 애써 침착하게 그에게 대답했다.

“물론 그 일에서는 피해자이셨지만, 추가로 접수된 일들에서는 그렇지만도 않아서 말이죠. 여기서 드릴 말씀은 아닌 거 같으니 함께 치안대로 가 주셔야겠습니다.”

“추가로 접수된 일이라니, 그게 또 뭔가?”

케밀턴 공작의 질문에 치안대장은 흘끔 리안의 눈치를 봤다. 리안은 그의 눈빛에서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읽어냈다.

“아무래도 테라티우스 대공이 먼저 선수를 친 것 같습니다. 저를 옭아매려고요. 이미 더니즈 상단 임원진이 모두 제 편인 것을 알고….”

“살인 미수, 사기, 환각초 밀거래에 관한 혐의가 신고로 접수되었습니다, 공작 전하.”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케밀턴 공작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리안은 사색이 된 얼굴로 그의 말을 부인했다.

“무, 무슨 헛소리야! 살인 미수라니?”

“뭐, 신고 내용이 그렇다는 겁니다. 백작님의 말대로 아닐 수도 있으니 일단 치안대로 가시지요.”

그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여차하면 강제로라도 끌고 갈 태세였다. 물론 리안의 혐의가 입증된 것은 아니었지만, 치안대장의 마음은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이미 허락 없이 집에 들이닥친 것부터가 그랬다.

증거는 없었지만, 그는 기회주의자였고 늘 그렇듯 더 강한 자가 원하는 방향을 옳은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케밀턴 공작도 무시할 수 없는 고위 귀족이었기에 그는 뒤탈이 없게끔 최대한 정중을 가장했다.

“신고자가 누구기에, 테라티우스 대공인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네놈이 이렇게 오만하게 구는 거구나.”

“아닙니다, 공작 전하. 저는 황제 폐하의 신하로서 그저 절차에 따라 일을 처리할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평정을 유지했던 케밀턴 공작이 그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당장 폐하께 가서 이 일의 부당함을 알릴 것이다. 대공이라 해도 한낱 귀족인 것을, 폐하의 이름을 팔아 그의 권력에 기대려 하다니!”

“…가시지요, 펠리스 백작님.”

“감히 내 집에서 누굴 끌고 간다는 거냐!”

케밀턴 공작은 리안이 끌려간다는 사실보다 테라티우스 대공의 권위에 밀린다는 사실에 더 분노하는 것 같았다. 열등감이 빚어낸 일종의 역린이었다.

케밀턴 공작이 분노하자 공작저를 지키는 그의 사병들이 몰려들어 왔다. 당연히 그에게도 저택을 지키고, 호위할 병력들이 있었다.

“공작 전하, 진정하십시오. 아무 죄도 없다는 게 밝혀지면 몸 성히 금방 돌려보내 드릴 것입니다.”

치안대장은 당황하며 공작을 진정시키려 했다. 케밀턴 공작가의 사병들은 그들을 포위했고,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이 펼쳐졌다.

리안은 당사자였지만 이 상황에서 어찌할지 몰라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그때 낮은 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응접실을 향해 걸어 들어왔다.

“아버지, 그 사람을 보내주세요.”

“헤일즈?”

“무슨 소리냐, 녀석은 네 남편이 아니더냐.”

헤일즈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와 리안을 한 번 쳐다봤다.

“…그 말대로 죄가 없으면 금방 풀려나겠죠. 여기서 순순히 보내주지 않으면 그 또한 폐하께서 노여워하실 거예요. 칼부림은 말할 것도 없고요.”

헤일즈는 특유의 차분한 말투로 조곤조곤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했다. 케밀턴 공작은 자신의 딸에게만큼은 한없이 약했다.

그는 곧 화를 누그러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후, 그렇지. 내가 너무 흥분한 것 같군.”

“헤일즈, 내가 가서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헤일즈의 말에 공작이 동조하자, 리안이 즉각 반발했다. 헤일즈는 그에 침묵했고, 흥분을 가라앉힌 공작이 다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내 사위이니 아무도 자네를 함부로 하진 못할 걸세. 차라리 떳떳하게 조사받고 나오게. 밖에서도 조사가 빨리 끝나도록 힘써 보겠네.”

“…장인어른!”

막 검을 뽑을 기세였던 치안대의 기사들은 그제야 안심하며 검집에서 손을 떼어 냈다.

“소란을 진정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모셔 가겠습니다.”

치안대장이 헤일즈에게 목례하며 말했다. 어쩐지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리안에게보다 훨씬 정중했다.

“저기, 잠시만. 헤일즈…!”

리안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내내 헤일즈를 애타게 바라봤지만, 헤일즈는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봐주지 않았다.

그녀의 그런 태도는 케밀턴 공작에게도 이상하게 보였는지, 공작이 흘끔 그녀의 안색을 살펴보며 입을 다물었다.

치안대장이 길을 트며 어서 오라는 듯 리안을 빤히 바라봤다.

결국 리안은 헤일즈의 옆모습만 바라보다, 무언의 강요에 못 이겨 느린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휙 돌아 소리쳤다.

“절 믿어주셔야 합니다! 모두 모함이에요!”

모두가 사라지고 나서야 헤일즈는 고개를 들고 리안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헤일즈, 저 녀석과 다투기라도 한 게냐. 빼내길 원하면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일단 황궁으로 가서….”

“아니에요, 아버지. 그만두세요.”

헤일즈는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케밀턴 공작은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저도, 저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어쩌면 사람을 잘못 봤을지도 몰라요.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조금만 지켜봐요.”

***

레온에게 팔짱을 낀 채 걸어가던 다나는 가다 말고 조금 머뭇거렸다.

“걱정되나.”

레온의 물음에 다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지금 레온의 어머니, 소피아가 있는 서쪽 별궁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레온과 다나는 혼인 관계에 있었고 소피아에게 소개를 해줘야 마땅했다.

소피아가 건강했다면, 결혼 전반에 거친 과정을 모두 직접 챙겼을 테지만 현재 상태에선 무리였다.

‘한편으론 다행이지.’

소피아가 관여했다면 모르긴 몰라도 지금보다 더 일이 복잡하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녀는 정치적 야망이 컸고, 상인의 딸, 거기다 그 전엔 근본도 모르는 여자를 들인다 하면 십중팔구 반대했을 테니까 말이다.

‘한편으론 다행이지.’

레온은 아픈 어머니를 상대로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게 찰나의 죄책감을 느끼긴 했지만,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저번 일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요.”

다나는 예전 일을 떠올렸다. 악에 받쳐 소리치던 그 모습이, 정말 단순한 착각 때문일까?

그 때문에 성에서 쫓겨나 이런저런 고충을 겪긴 했지만, 그에 대한 원망이 들기에 앞서 소피아의 발악하는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레온은 그때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나를 이해는 했지만, 그 일에 대해 크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레온의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소피아는 몸이 아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오웬이 조금 전 소피아에게 인사를 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 썩 권하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그도 딱히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았다.

“잠시 인사만 드리고 나올 것이다. 그 이후엔 굳이 일부러 뵈러 갈 필요는 없다. 그리고….”

다나가 고개를 들어 레온을 바라보았다. 레온은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을 한 손에 쥐고 슬쩍 입가에 갖다 댔다.

“이제 그대가 이 성의 안주인이니까. 좀 더 당당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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