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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상속녀-77화 (77/92)

77화

다나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완전히 잠들어 버렸다. 레온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종이 안의 내용을 봤다.

결코 긴 문구가 아니었지만, 레온은 어렴풋이 이해했을 뿐 단번에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짐작은 됐다.

이것은 일종의 계약서였다. 종이의 한쪽 면에는 인장이 세로로 잘려 반만 찍혀 있었다. 이것은 이것과 짝을 이루는 다른 계약서가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주된 경영자가 ‘더니즈 가’의 사람이 아닐 경우, ‘더니즈 상단’의 경영권과 초기 자본금을 ‘테라티우스 가’에 돌려준다.」

「추신, ‘더니즈’는 상단 내 경영자에게 붙이는 고유명사이며 실제 성이 아니다.」

이전 오웬의 설명을 떠올려 보면, 더니즈 상단을 처음 만들었던 루셸 더니즈가 오웬의 부하이며, 테라티우스 기사단이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돌려받는다는 건 이상했다. 더니즈 상단은 어디까지나 그가 일군 사적 재산이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상단을 키울 수 있는 씨앗이 된, 그 초기 자본금을 내어준 게 테라티우스 가문이라면 말이 됐다.

레온은 서류를 접어 협탁 위에 대충 올려놓고는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으응….”

다나가 얕은 신음을 내며 몸을 뒤척거렸다. 레온은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 위로 이불을 덮어주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왕실의 그 막대한 재산이 어디로 갔나 했지.’

부동산이나 해양권, 영주로서 걷는 조세권, 통행권 등은 당연히 그대로였다. 그것만 해도 테라티우스 가문의 재산은 하셸 제국 내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레온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 계산을 해도 많은 부분이 비어 있었다. 유동성 있는 자산들은 레온이 이 성의 성주가 되었을 때, 거의 없다고 할 만큼 금고 속이 텅 비어 있었다.

레온은 그것을 오웬이 하셸 제국에서 자리 잡기 위해, 황실에 헌납했을 거라 생각했다.

오웬에게 물어도 그동안 정확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알아봐야겠군. 어쨌든 이게 사실이라면 일이 아주 쉬워지겠어.’

다만 이런 형태의 계약서는 이 나머지 한쪽이 온전히 존재해야 하나로서 인정받았다.

다나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더니즈 상단에 접근했는지, 새삼 알 것 같아 한편으론 마음이 놓였다.

레온은 다나가 이 내용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를 따로 추궁하진 않았지만, 다나가 혹시 레온을 떠나 온전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닌가 라는 의구심이 조금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레온은 다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의 이마 위에 살짝 키스를 했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가운을 걸치고는 서류를 들고 밖으로 향했다.

철컥-

밖에는 웬디와 릴리가 꾸벅꾸벅 졸며 대기하다, 레온이 벌컥 문을 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엇…!”

“안주인께서 일어나실 때까지 깨우지 말고, 그 후에 목욕을 도와드려라.”

“네, 대공 전하.”

릴리와 웬디는 혹시 불호령이 떨어질까 무서워, 고개를 푹 숙이며 그의 말에 고분고분 대답했다. 다나가 성에 오고 난 후, 언젠가부터 사용인들의 근무 태만에 대해 매우 엄해진 대공이었다. 하지만 레온은 별말 없이 그녀들을 지나쳐 갔다.

이제 그녀들은 대공비의 전속 하녀였고, 그녀들을 다스리는 건 오로지 다나의 권한이었다. 레온은 그것을 구분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은 별로 화가 나지도 않았다.

***

하벌트는 씩씩거리는 리안의 앞에 앉아 난감한 표정을 숨기며 시선을 슬쩍 피했다.

“치안대 놈들은 그거 하나 빨리 처리 못 하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애초에 차기 대공비를 그런 식을 빼돌리려 한다는 것부터가 무모한 일….”

“시끄러워, 하벌트! 애초에 네 놈이 다나를 알아보기만 했어도 일이 이 지경까지 가진 않았을 거야.”

“…….”

리안의 말이 맞긴 했지만, ‘애초에’라는 전제부터가 틀려먹었다.

하벌트는 ‘네 놈이 다나 더니즈를 그렇게 죽여 버리지만 않았어도.’라는 말을 애써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하긴, 어차피 이제 죽을 놈.’

테라티우스 대공이 본격적으로 리안을 잡으려 벼르고 있다는 것을 하벌트는 알고 있었다.

되도록 리안과 이제 엮이지 않으려 했지만, 상단에서 일하는 이상 완전히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리안은 엄지손톱을 신경질적으로 잘근잘근 씹으며, 뭔가를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저쪽이 진짜 다나 더니즈라면 다시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제 거의 다 장악해 가는데 아깝게 어딜 넘겨.”

아마 리안이 장악한다는 건 환각초를 밀거래할 루트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하벌트는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좀 더 리안의 대답을 끌어냈다.

“허면 무슨 수로 버틸 생각이신지….”

“일단 임원 회의를 할 거야. 거기서 과반수의 찬성을 받으면 경영권을 완전히 인정받을 수 있어. 대리인이 아닌 진짜 경영자로.”

“으음, 회의 규칙에 보면 경영 권한을 위임할 순 있어도 회의에서 완전히 넘길 권한은 없다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어차피 예전 더니즈 대표가 만든 거잖아? 바꿔야지!”

리안이 광기 어린 집착에 하벌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리안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다나가 다나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거지? 자네조차도 알아보지 못한 걸, 더니즈 상단에서 누가 알아볼 거냐고?”

억지 같은 말이었지만, 일리가 없진 않았다. 다나가 스스로를 증명하는 건, 본인의 말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아는 상단의 사람들은 이제 이곳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기억이 없는 다나가 이곳에 왔을 때에는 자신의 대역을 하기 위해 보내지지 않았던가.

“우리가 아니라고 하면 돼. 여차하면 우리가 보냈던 대리라는 것도 밝혀야지.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리안은 욕심 가득한 얼굴로 번들거리는 입술의 한쪽 입꼬리를 씨익 잡아 올렸다.

“진짜든 가짜든 다나 더니즈를 다시 실종상태로 만들어야 해. 언젠가는 틈이 보일 거야. 언젠가는… 그때 내 곁에 묶어 두는 거야.”

리안이 말 한 ‘제일 중요한 일’은 다나 더니즈라는 여자를 사로잡는 일이었다. 하벌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리안은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상관 없는 눈치였다.

차라리 리안이 다나 더니즈를 사랑하기라도 했다면 모르겠는데, 그녀를 직접 죽였던 걸 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사로잡는다면 죽이는 게 깔끔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곁에 묶어둔다고 했다.

“뭐, 어쨌든 아직 회복을 더 하셔야 하니 더 쉬시지요.”

“아니야, 바로 회의를 소집해줘. 다친 모습으로도 상단을 위해 일한다는 걸 어필하면 임원진들이 더 나를 생각할 테니.”

“…그러지요.”

하벌트는 대충 대답하고는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밖에 서 있던 하인 한 명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하인은 고개를 몇 번 끄덕거리다 소리도 없이 어딘가로 뛰어갔다.

‘줄을 갈아타려면 확실히 해야겠지. 이 정도는 보여줘야 될 거야.’

그 하인이 가고 있는 곳은 테라티우스 성이었다.

***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한 후, 다나는 다시 포근한 침대 위에 누웠다.

아주 잠시 성에 나가 있었을 뿐이었는데도, 당시 이런 것들이 꽤 아쉽다고 느꼈다.

‘정말, 게을러진 거지.’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고, 나름대로 하녀나 하인들을 부리긴 했지만 이 정도로 극진하게 모셔지진 않았었다.

이런 호사에 한 번 사람이 길들여지면, 꽤 헤어나오기 어렵구나 새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금방 눈을 떴다.

“아, 맞아. 봉투 안을 못 봤는데.”

다나는 뻐근한 몸을 애써 일으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목욕을 하는 동안,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 곁에는 어떠한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당연히 다나가 가져온 봉투나 종이도 없었다.

“어디… 어디 간 거지? 어디 있지?”

이곳에 온 후의 일들을 차근차근 떠올려 보았다. 레온이 봉투를 발견하고, 그와 함께 들어와 있는 내내 자신도 레온도 그것에 관심 갖지 않았었다.

“아아, 대체 왜 그걸 잊어버린 거지.”

재회의 기쁨과 격렬한 정사에 확인을 뒤로 미루다 아예 존재까지 잊고 쿨쿨 잠들어 버렸다.

결국 다나는 다시 릴리를 불러, 혹 세탁물과 함께 있지 않은 지까지 확인하고는 가장 유력한 후보인 레온을 찾아가기로 했다.

타박타박 복도를 걷는 소리가 제법 빨랐다. 레온이 그걸 갖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무척 초조해졌다. 내용을 알 수 없으니 더욱 그랬다.

그녀가 정신없이 걸어가는 동안 복도에서 마주친 사용인들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레온은 어디에 있죠?”

예전에는 뜸을 들이며 구체적인 위치를 얼버무렸지만, 이제는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내궁 동쪽 집무실에 계십니다, 비전하.”

레온이 있다는 곳까지 다다른 다나가, 문을 열기 전 심호흡을 했다.

‘모르는 척 들어가서 가져와야 할까? 아니면 봤냐고 물어야 할까. 아버지가 남겨 둔 건데… 왜 먼저 봤냐고 따져야 하나?’

다나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동시에 세 남자의 눈이 다나에게 향했다.

“아, 그러니까….”

다나와 제일 처음 눈이 마주친 건 레온의 아버지인 오웬 테라티우스 공작이었다. 그는 다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쉬었느냐.”

“네, 저… 그러니까.”

오웬이 소파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었고, 양옆 소파에 다니엘과 레온이 앉아 무언가를 의논하는 모습이었다.

다나가 들어와 잠시 멈춘 듯했다. 그녀는 자신이 방해했다 여기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다시 올게요.”

“아니, 마침 잘 왔어.”

레온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이 걸치고 있던 실내용 가운을 다나의 어깨 위에 얹어주었다. 다나는 그제야 자신이 꽤 정신없는 상태로 이곳에 왔다는 걸 알았다.

다나는 레이스가 달린 잠옷 차림 그대로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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