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치안대 건물 밖에는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레온은 보자마자 책망을 하거나 화를 낼 줄 알았지만, 의외로 거기까지 가는 동안 다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나는 레온의 에스코트대로 마차에 오르기 전, 퍼뜩 생각난 듯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레온, 함께 잡혀 온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도 구해줘야 돼요. 나 때문에… 리사가.”
다나는 마주보며 레온의 양팔을 붙잡았다. 레온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레온.”
레온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자, 다나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리사가….”
다나는 레온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리사를 내버려둘 순 없는 노릇이라, 그에게 다시 한번 졸랐다.
그의 눈동자가 느리게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뭔가 확인하는 듯 두어 번 오르내리다, 갑자기 확 하고 다나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아…!”
그대로 푹 파묻힌 품 안에서 그리운 냄새가 났다. 다나는 그의 가슴에서 울리는 쿵쿵대는 심장에 조금 놀라 고개를 들었다.
레온은 여전히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은 채, 작은 어깨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에게서 길고 긴 한숨이 쏟아졌다. 그의 그런 행동에 다나는 의아한 듯 가만히 있다, 문득 깨달았다.
‘아, 많이 걱정했구나.’
다나는 그제야 팔로 레온의 상체를 함께 마주 안고 잠시 눈을 감았다. 자신을 완전히 감싸 안은 단단한 체온이 내내 긴장됐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하지만 리사가 걱정된 마음은 여전하여, 다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품안에서 벗어나 그를 마주보았다.
“레온… 리사는.”
쭉 조용하던 그가 다나의 말에 흘끔 그녀의 뒤로 시선을 보냈다.
“저 여자 이름이 리사인가?”
“…어? 네?”
다나가 휙 몸을 돌렸다. 리사가 반가운 얼굴로 손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리사…! 무사했네요!”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다나는 레온에게서 완전히 벗어나 리사에게 달려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리사는 그 순간 레온의 표정이 미세하게 흐트러지는 걸 보았다.
리사는 왠지 웃음이 나오는 것을 애써 감추며 다나의 등을 토닥거렸다.
“어떻게 풀려난 거예요? 리사까지?”
“그건… 저 뒤에 계신 분이 대공님이지?”
“아… 네.”
다나는 다시 그의 존재를 깨달은 듯 괜히 얼굴을 붉히며, 레온과 리사 사이에 섰다.
리사가 시원스럽게 웃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
“빨리 오셨네요. 약간 힌트만 드린 건데.”
“힌트라니요?”
다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대신 레온이 대답했다.
“덕분에 실마리를 잡았지. 사례는 톡톡히 하도록 하겠다.”
“그 말,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대공 전하.”
다나는 영문을 모른 채 리사와 레온을 번갈아보았다. 마지막 다니엘까지 나오는 걸 보고는 레온이 마차를 가리켰다.
“일단 모두 타지.”
넷 모두가 타고도 남을 커다란 마차 안에서, 다니엘의 보고가 이어졌다.
“항소는 받아들여질 겁니다. 다나 님이 잡힐 당시 이미 대공비가 되셨으니 거절할 명분이 없습니다.”
“제가 대공비요?”
‘예비’가 아닌 그냥 대공비라는 말에 다나가 갸웃거렸다. 그러자 다니엘이 당황하며 우물쭈물했다.
“아, 네. 그러니까 그게….”
“이미 혼인신고를 마쳤다. 네가 사라진 바로 그 직후에.”
레온의 차분한 설명에 다나는 조금 놀란 듯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렇군요. 내가… 결혼을….”
다니엘은 입을 다물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며 다나의 눈치를 봤다. 물론 어차피 결혼할 예정이었고,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해도 본인이 없는 상황에서 밀어붙인 게 썩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눈치 없는 자신의 상관은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대신 리사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거 좀 거시기 하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부녀가 된 거 아냐. 꼭 그 방법밖에 없었나?”
딱히 특정 짓지 않고 혼잣말처럼 읊조렸지만 약간의 책망이 담겨 있었다. 정말 방법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제1 귀족이라는 테라티우스 대공인데, 그녀의 신분이 당장 무엇이든 간에 치안대에 잡힌 약혼녀 하나 빼내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굳이 법과 절차를 지킨 것이 레온의 투철한 준법정신 때문이 아님을 앉은 자리 모두가 짐작했지만, 굳이 꼬집지도 않았다.
“…고마워요, 레온. 저번에도, 이번에도 늘 나를 구해줘서요.”
정적을 깨고 말문을 연 건 다나였다. 찝찝함은 기분의 문제였고, 어쨌든 레온 덕분에 당장의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건 분명했다.
다나는 옆에 앉은 레온에게로 고개를 돌린 채, 그를 똑바로 보며 말을 했다. 레온은 별말 없이 창밖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조용한 와중, 다나는 레온의 귓바퀴가 눈에 띄게 붉어진 걸 보고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마차가 성 안에 도착한 후, 다나의 전속 하녀였던 릴리와 웬디가 부리나케 뛰어나왔다.
릴리는 수도까지 함께 다녀왔지만, 다나가 급하게 수도로 이동한 후 뒤늦게 출발하여 역시 그녀의 행방을 알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중이었다.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상한 곳은 없으신 거예요?”
“응, 괜찮아. 미안해, 걱정 끼쳐서.”
“그럼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집무실에서 찾아뵙겠습니다.”
다니엘은 다나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인 후 레온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가다 말고 다니엘이 뒤를 돌아보았다.
함께 올 거라 예상했던 레온이 다나 옆에 딱 붙어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었다. 다니엘은 그와 이것저것 상의할 일이 많아 잠시 고민했다.
“…지금 말 걸면 또 화내시겠지?”
레온은 아까 치안대 앞에서 잠시 기다리시라 하는 것도 참지 못하고 곧 쫓아왔더랬다. 다니엘은 빠르게 포기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홀로 떠났다.
다니엘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며, 레온은 다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검은 옷으로 뒤덮여 있는 몸 안이 보일 리 없었지만, 다나는 왠지 민망하여 몸을 움츠렸다.
그렇게 투시를 하는 것처럼, 다나를 살피던 레온이 뒤에 공손히 서 있던 하녀 웬디에게 나직이 명령했다.
“너는 일단 가서 의사부터 불러와라.”
“저… 괜찮은데.”
다나가 머쓱하게 중얼거렸지만,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온은 웬디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후, 리사에게도 말을 건넸다.
“자네는 언제까지 머무를 예정이지?”
“…아무래도 일이 마무리될 때까진 함께 있을 생각입니다만.”
상대가 대공이라는 걸 알지만, 리사는 주눅 들지 않고 자기 할 말을 다 했다. 특유의 성격도 한몫했겠지만, 다나라는 방패를 꽤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막 마중 나온 가솔들은 조마조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의에 어긋난 말투도 문제였지만, 기본적으로 레온은 타인이 자기 성에 머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집사장 체르돈이 눈동자를 굴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 맞아요. 리사도 리안 펠리스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있어요. 도움이 될 거예요.”
다나는 그들의 사정을 모르고 리사의 말에 한몫 거들었다. 아주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던 레온이 다나와 리사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레온?”
다나가 대답을 재촉했다. 레온이 결국 뭔가 입을 열려는데, 저쪽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대공 전하, 비전하!”
다나를 찾았다는 소식에 아힐이 수색을 중단하고 급하게 돌아오는 중이었다. 레온은 그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보고 상으론 자네가 검을 쓸 줄 안다고 들었는데, 실력을 확인하고 싶군.”
그리고 레온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신의 검을 풀어 통째로 리사를 향해 높게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검을 리사가 받아들었다.
“있으려면 쓸모를 증명하라는 말이군요.”
“저기 오는 저자가 좋겠군.”
레온은 즉답을 피하며 다가오는 아힐을 가리켰다. 다나는 영문도 모른 채 레온과 리사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리사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망설임 없이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하앗!”
기합 소리와 함께 리사가 검을 뽑아 든 채 아힐에게 달려들었다.
전혀 이 상황을 모르던 아힐은 갑자기 달려드는 리사에게 조금 당황하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서 검을 세우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제법 매섭게 울려 퍼졌다. 다나는 두 손을 모으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레온은 그 와중에 슬그머니 다나의 옆으로 가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다나는 익숙한 온기에 흘끔 고개를 들며 레온의 귀 근처에 대고 소곤거렸다.
“왜 갑자기 이런 걸 하는 거예요?”
“빈둥빈둥 놀고먹는 걸 이 성에 둘 순 없으니까.”
“네?”
챙챙챙 소리가 연속해서 들렸다. 처음 나타난 둘의 실력은 언뜻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리사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아힐은 흘끔흘끔 자신의 주군을 보며 어찌해야 할지 눈치를 봤다. 아무리 봐도 손님인 것 같은데, 다치게 해도 될지를 묻는 모양이었다.
슬슬 리사의 움직임도 점점 둔해지고 있었다.
다나가 초조한 얼굴로 레온의 옷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그러자 느긋하게 감상하던 레온이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그만.”
별로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아힐은 바로 검을 물리며 뒤로 떨어졌다. 리사도 겨누던 검을 거두고 그 자리에 섰다. 그녀는 짧은 사이 꽤 지쳐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해 보였다.
“게으름 부린 티가 톡톡히 나네.”
리사는 다나를 보며 멋쩍게 웃으며 검을 칼집 안에 꽂아 넣었다.
아힐은 대결이 끝나자마자 레온과 다나를 향해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