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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상속녀-73화 (73/92)

73화

“재판장으로 간다.”

“네? 벌써요?”

남자는 대답 없이 다나의 손을 뒤로 모아 묶어버렸고, 그대로 끌고 밖으로 갔다.

“귀족을 다치게 했다지? 영락없이 사형이겠군.”

복도를 지나가며 그는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다나는 그의 말에 마음이 좀 더 심란해졌지만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쯧쯧, 어쩌다 젊은 여자가…. 내가 안타까워서 그래. 좀 도와줄 수 있는데, 어때?”

그가 멈춰선 곳은 비스듬히 열린 방문 앞이었다. 언뜻 보이는 안쪽에는 낡은 침대가 보였고,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걸로 봐서는 일종의 휴게실 같았다.

“뭘 어떻게 도와주시겠다는 건가요?”

다나는 그가 자신을 정말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실낱같은 기대로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번들거리는 얼굴을 히죽거리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자, 이리로…. 일단 얘기부터 들어보라고. 내가 다 생각이 있으니.”

불쾌한 감각에 다나는 속으로 역시나 하며 그의 손을 피해 한 발자국 물러났다.

“괜찮아요, 그냥 갈게요.”

하급관리는 다나의 팔을 덥석 쥐고는 팔뚝 안쪽 살을 슬슬 만지려 했다.

“어허, 이대로 가면 십중팔구 죽는다니까.”

“상관 하지 말고 이 더러운 손 치워.”

“뭐라고? 이 년이 어디서 반말이야.”

보통 사형을 앞둔 여자들은 겁에 질려있어 판단력이 흐렸다. 그래서 이 정도만 해도 쉽게 넘어오는 게 다반사였다.

다나가 생각보다 완강하게 버티자 그는 조금 더 거칠게 그녀를 잡아당겼다.

“곧 죽을 년이 뭐가 이리 뻣뻣해? 살려준다는데도 마다하네.”

사실 시간이 많은 건 아니었다.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이미 한번 끝내고 말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남자는 마음이 급했다.

사형이 분명한 여죄수를 겁간하는 건 아무도 문제 삼지 않을 테지만, 상관을 기다리게 하는 건 문책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이대로 포기하긴 아까웠는지 그는 강제로라도 다나를 끌고 가려 했다.

그때, 복도 한편에서 뚜벅뚜벅 울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

소리의 주인을 본 다나의 입에서 짧지만 분명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것에는 짙은 반가움도 녹아있었다.

“후우, 상황을 보아하니…. 조금 늦은 것 같네요.”

날카로운 눈매를 갖고 있는 그 남자는 제법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하급관리는 다나의 팔 한쪽을 그대로 잡은 채 퉁명스럽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이곳은 죄인들이 재판을 받는 곳입니다.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크, 실례.”

다니엘은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관리의 손을 떼어내고는, 다나를 그에게서 조금 떨어지게 했다.

“무슨…!”

“이분의 변호인으로 왔네만.”

“변호인? 겨우 이런 재판에 무슨 변호인씩이나….”

다니엘은 씩씩거리며 항의하는 관리를 가뿐히 무시하고, 다나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다나에게 굳이 책망의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도 그녀를 필사적으로 찾긴 했지만, 내내 마음 졸인 건 어쨌든 레온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그녀는 레온과 같이 모셔야 할 주인이니. 자신이 이래라저래라 할 대상이 아니었다.

“어떻게 알고…. 미안해요.”

“가시죠, 비전하. 최대한 빨리 끝내겠습니다. 그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니엘이 몸에 닿지 않게 그녀의 뒤를 감싸며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손을 뻗어 안내했다.

다나는 고개를 숙이며 그가 안내하는 길로 걸었다.

‘레온이… 기다린다고.’

레온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어렴풋이 그것을 믿고 있었지만, 사실 한편으론 불안했다. 그래서 안도하면서도 조금은 겁이 났다. 그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할수록 마음이 착잡해졌다.

‘많이 화가 났을까.’

도망치려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 후에 벌인 일은 무모한 게 맞았다.

방금까지 씩씩거리던 하급관리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는 걸 느꼈는지 금세 조용해졌고, 그들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재판장이라 하는 곳의 문을 열었다. 그곳은 귀족들이 정식 재판을 받는 곳과는 매우 달랐다.

작은방에 달랑 의자 하나와 테이블 하나. 그리고 법관으로 보이는 자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심부름을 해줄 사람과, 죄인의 죄를 고할 치안대 대원 하나, 혹여나 죄인이 도망칠까 싶어 배치한 병사 둘이 다였다.

법관은 의외의 인물이 함께 들어오자 누구냐는 듯 관리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다니엘이 딱딱한 어투로 대신 대답했다.

“테라티우스 대공성에서 나왔습니다. 귀한 분을 이런 불온한 곳에 모셔온 죄는 나중에 묻기로 하고, 빨리 재판 진행하죠.”

법관은 다니엘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다니엘의 뻔뻔한 태도에 오히려 불쾌한 듯 되물었다.

“뭐, 무슨 말을…. 어디서 왔다고요?”

“어서 서둘러 진행하세요.”

법관을 재촉하는 다니엘은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법관은 치안대 대원에게 짜증 섞인 얼굴로 턱짓했다.

“시작해.”

“이 여자는 오늘 낮 리안 펠리스 백작의 머리를 내리치고 중상을 입힌 죄로 잡혀 왔습니다. 현재 백작은 매우 위급한 상태이며….”

“잠시만요, 제가 그 사람을 때린 게 아니라…!”

실제와 매우 다른 내용에 다나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하지만 다니엘이 조용히 손을 올려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다나는 당황한 눈을 숨기지 못했지만, 일단 다니엘이 신호한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분은 자신을 다치게 한 자에 대해 중형을 원하고 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이유나 가해자에 대한 신상에 대한 정보도 없는, 그저 피해 사실만을 나열한 졸속 진술이었다. 법관은 역시나 심드렁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주 악질이군. 감히 평민 주제에 귀족을 때려 중상을 입혔으니…. 반성할 기미도 안 보이고. 쯧, 법대로 처리할 수밖에.”

거기까지 말하던 법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고민하는 척 책상 위의 손가락을 톡톡 쳤지만, 그의 눈동자는 이미 딴생각에 빠져있었다.

리안 펠리스에게 뭘 요구할지, 그리고 저 시건방진 놈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서 나가자마자 저놈을 들여보낸 관리인에게 욕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자, 그럼 판결을 하지. 항소는 귀족만 할 수 있으니 꿈도 꾸지 말고.”

법관의 말대로 평민은 1심 재판, 그것도 주로 약식 재판을 받았다.

항소는 귀족의 권리였다. 귀족은 죄의 경중과 상관없이 2심까지 재판을 받을 수 있었고, 1심과 2심 모두 법관 세 명으로 이루어진 정식 재판이었다.

이쪽이 평민이라 해도, 귀족 측에서 항소한다면 2심 재판이 열렸지만 그렇게 하는 귀족은 한 명도 없었다.

법관이 다시 입을 열려는 데, 누군가 다급하게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그, 지금 오고 있어서, 어서 빨리…!”

그는 치안대의 총 책임을 맡고 있는 치안대 단장이었다. 나름 자작의 지위를 받고 언제나 이곳에서 거들먹거리며 다니는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뭔가 겁에 질려있었고, 말까지 더듬거렸다.

“단장님, 잠시 기다리세요. 곧 끝날 겁니다. 흠흠, 아무튼 그 죄가 중하여 엄히 다스릴 수밖에 없으니 목숨을 거두는 것으로 그 죗값을 치를 것이다.”

“아니, 이사람아…!”

치안대 단장은 더욱 경악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목숨을 거둔다는 말에 다나가 법관과 다니엘을 봤다. 다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다니엘은 그녀가 놀랐을 거라 생각하고 진정시키려 했다.

“저, 비전하. 걱정마세요. 아무 일도….”

단장이 들어오며 반쯤 열어둔 문이 휙 젖혀졌다. 날 선 침묵이 흐르는 방안으로 억누른 분노에 물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내가 오래 기다리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다니엘.”

“아, 전하…!”

다니엘은 다나를 달래다 말고, 그에게로 다가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전하, 조금만 기다리시면 제가 금방 처리하고 모시고 간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잠깐을 못 참으시고.”

“이만하면 충분히 기다렸어. 애초에 기다릴 이유도 없었고.”

다나는 석상처럼 굳은 채, 뒤돌아서지도 못하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쿵쿵거리며 널뛰는 심장이 두려움인지, 설렘인지조차 판단되지 않았다.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에 더욱 움츠러들었다.

“가자.”

다나의 손목을 쥐는 손길이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다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뒤따라 걸어갔다.

법관이 벌떡 일어나며 노성을 터뜨렸다.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지금! 어디 재판 중에 함부로 죄인을 데려가는 겁니까!”

“아이고, 제발 조용히 하세요. 재판장님.”

“아니, 단장님. 도대체….”

다니엘은 땅이 꺼져라 크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본래의 사무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뒤적이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항소장입니다.”

“평민은 항소할 수 없다는 걸 모르나?”

그러자 다니엘은 대꾸 없이 다른 서류를 쑥 내밀었다.

“이걸로 될 겁니다.”

다니엘은 약간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내뱉은 후, 더이상 설명 없이 방을 나섰다.

다니엘도 자작이긴 했지만, 사교계나 정계에서 치안대 단장과 마주쳤다면 한참 윗줄이었다. 치안대의 비리는 예전부터 유명했고, 곧 목이 날아갈 자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법관은 황망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서류를 봤다.

그것은 레온 테라티우스와 다나 더니즈의 혼인증명서였다. 법관은 여전히 상황파악이 안 되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안대 단장은 벽에 기대 털썩 주저앉았다.

“대공비를 건드렸으니…. 아이고….”

법관은 그제야 혼인증명서에 적힌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 테라티우스….”

점점 그의 얼굴이 두려움에 물들다가 문득 분노로 바뀌더니 누군가를 향해 욕지거리를 날렸다.

“그럼 그 새끼, 혹시 알면서…? 젠장, 나한테 뒷감당을 어떻게 하라고.”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자신의 살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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