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들여진 상속녀-70화 (70/92)

70화

“어어, 리사 웬일이야.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가버리더니?”

“물건을 좀 팔러 왔지.”

“에이, 리사. 더니즈 상단이 어디 자질구레한 거 취급하는 거 봤어?”

리사를 상대하는 상인은 중간관리자였고, 그는 상단에 유통하려는 물건들을 고르고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대부분 대량생산하거나, 소량이면서 특별한 물건 위주로 매입하는 터라 개인인 리사가 가져온 것에는 큰 흥미가 없어 보였다.

“일단 보고 말해.”

리사가 당당하게 나오자 상인은 으쓱 어깨를 올렸다 내리고는 느긋하게 그들에게 다가왔다.

다나는 리사의 귓가에 그가 들릴만한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리사, 저, 잠시만….”

“아, 응. 급하다고 했지? 다녀와, 건물 밖으로 돌아가면 있어.”

리사는 다나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치며 그녀가 볼일을 가는 것처럼 대꾸했다. 다나는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갔고, 중간관리자는 딱히 그녀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자루에 담긴 것을 살펴보던 상인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어어, 이거 로사베리아네? 이걸 어디서 구했어?”

“그건 말해줄 수 없지. 내가 일단 보라고 했잖아.”

사실 리사도 그게 약초인 줄로만 알았지 로사베리아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지는 몰랐다. 상인의 반응으로 보아 꽤 값어치 있는 약재인 것만은 분명했다.

“흐음, 하지만 뿌리가 많이 상했어. 이건 뿌리가 중요한 건데….”

“그래서 안 살 거야? 여기 아니면 근처 약재상에 팔아버리지 뭐.”

“아니, 안 산다는 게 아니라….”

리사와 상인이 흥정을 위해 운을 띄우는 와중에 문이 열렸다. 그는 리사가 여기서 일을 하며 종종 봤던 사람이었다.

“하벌트님,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그가 리안과 함께 뭔가를 한다는 낌새는 그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리사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조금 사나워지는가 싶더니, 톰이 툭 치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아, 그냥 잠시.”

하벌트는 약간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귀찮다는 듯 한 손을 휘휘 젓고는 그대로 그들을 지나치려 했다.

“저기, 로사베리아가 조금 들어왔는데요.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계속 찾긴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상태가 좀….”

“아! 그런 것까지 내가 일일이 지시해야 하냐! 너 일 여기서 일한 지가 몇 년 째야?”

하벌트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상인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수도에 있던 귀족 놈이 벌써 온 것도 그렇고, 하여간 골치 아픈 일 투성이구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벌트는 짜증 섞인 어조로 중얼거리며 마저 2층을 향해 갔다.

‘귀족 놈?’

리사는 언뜻 들린 그 말이 왠지 찝찝해서 하벌트의 뒷모습을 눈을 쫓았다.

***

테라티우스 성문을 지키던 병사는 어떤 종이쪽지를 전달받았다.

“이걸 대공 전하께 전해달라고 말했습니다.”

“대체 누가? 대공 전하가 그렇게 한가한 분인 줄 아나….”

병사는 일단 그것을 자신의 상관 기사에게 보고했다. 보고받은 기사는 안 그래도 비상령이 떨어져 바쁜 와중에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야 하니 몹시 짜증이 났다.

“귀한 분이 보내셨다고, 최대한 빨리 보여드리라고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귀한 분?”

기사는 구깃구깃하게 접힌 종이를 펼쳐 들었다.

「 걱정하지 말아요, 곧 돌아갈게요. - 다나 더니즈. 추신, 우리는 지금 더니즈 상단 근처로 가고 있음.」

짧은 두 개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위와 아래의 필체가 조금 달랐는데, 그것보다는 ‘다나 더니즈’ 라는 이름에 시선이 갔다.

“다나 더니즈….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뭐였지?”

“뭐 때문에 그러나?”

기사의 어깨 뒤에서 얼굴 하나가 쑥 튀어나왔다.

“으앗! 고, 공작 전하!”

기사는 화들짝 놀라며 종이를 한 손으로 구겨들고는 그에게 예를 갖췄다. 오웬은 그 구겨진 종이를 봤다.

“그게 뭔가?”

“아, 누가 대공 전하께 전해 달라며 주고 갔다 합니다.”

“이리 줘 보게.”

기사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오웬에게 그 종이를 건네주었다. 비록 ‘대공’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받았지만, 신분도 모르는 자의 부탁을 곧이곧대로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사람도 이 성의 또 다른 주인이며 최고 어른인 오웬 테라티우스 공작이었다.

“이런…!”

오웬은 그것을 보자마자 짧게 탄식했다. 그리고는 어떠한 설명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버렸다. 남겨진 기사와 병사는 영문을 모른 채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오웬은 일단 다니엘을 찾아가려 했다. 하지만 집무실로 가는 도중, 레온이 자주 타고 다니는 말을 발견했다. 그는 말을 끌고 가는 병사를 멈춰 세웠다.

“레온이 성에 왔느냐?”

“예? 예, 그렇습니다. 한참 전에 도착하셨습니다.”

무도회는 이제 겨우 시작이었고, 예정대로라면 레온은 빨라도 열흘 후에나 돌아왔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성안의 병력도 왠지 비어 보였고, 남아있는 기사나 병사들도 어딘가 분주해 보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오웬은 그 병사에게 다시 물었다.

“뭐 때문에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거지? 어떤 명을 받았느냐.”

“어, 저, 그게 저는 마사를 관리하는지라….”

“똑바로 말해라.”

“…이 성에 계시던 아가씨께서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색 명령이 떨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또 실종이라니….”

오웬은 그 말에 아연실색하며 다시 집무실을 향해 갔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곳에는 레온이 있었다.

레온은 오웬이 들어오자 예전처럼 표정을 굳히는가 싶더니, 체념한 듯 말을 건넸다. 오웬의 다급한 얼굴에서 이미 그의 용건을 알아챘다.

“지금 샅샅이 수색 중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걸 봐라.”

레온은 설명 없이 내밀어진 종이를 받아들었다. 받자마자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 아이는 왜 바로 오지 않고 이런 편지를 보낸 거지? 설명해봐라.”

“하아…. 정말.”

오웬이 다그쳐 물었지만, 레온은 그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듯 벽에 손을 대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정말 다나가 보낸 건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어쨌든 작은 희망이 생겼다는 것에 적지 않게 안도했다.

“레온.”

오웬은 그런 아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며,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그를 재촉했다. 그에 레온이 다시 정신을 가다듬으며 오웬과 눈을 마주했다.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웬은 다나를 아꼈고, 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덕분에 레온이 그녀와 이어졌다.

오웬에게도 진실을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봐라.”

오웬은 그 말에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었다. 오웬 역시도 레온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으니 딱히 화낼 입장이 못 됐다.

오웬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댔다. 레온은 그를 보면서도 따라 앉진 않았다.

“다나 더니즈에게 예전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들었다. 충격을 받아 약간 기억 소실이 있다지. 대체 어떤 사고였느냐.”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뻔했습니다.”

오웬은 섬뜩한 단어에 입을 굳게 다물면서도 레온의 다음 설명에 귀 기울였다.

“그 누군가는 지금 다나에게 상단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자입니다.”

“저번에 대리인이 있다고 했지. 설마 그자인가?”

“맞습니다, 그날 온 자는 대리인과 한통속이었지만 조금 전 사실을 털어놓고 돌아갔습니다.”

오웬은 잠시 말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조합하여 사실에 가까운 가설을 내놓았다.

“다나가 위임장을 써준 이후, 상단을 차지하기 위해 죽이려 한 것이로군.”

레온은 말없이 긍정했다. 하지만 오웬의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자가 누구지?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느냐.”

“그자는…. 리안 펠리스, 지금 케밀턴 공작의 사위입니다. 사건 이후 다나는 완전히 기억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를 만큼.”

“펠리스라면…. 흐음, 케밀턴 공작이 그를 비호한다면 끌어내리기 쉽진 않지.”

펠리스 가문을 잘 안다고 할 순 없지만 루셸 더니즈에게서 들어본 적 있었다. 다나가 그의 집에 머물 거라 했었고, 그때의 악연이 이어졌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케밀턴 공작이란 얘기를 듣고 오웬은 레온이 그자를 바로 죽이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이 나라에서 귀족에 대한 살해죄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매우 엄하게 다스려졌다. 죽인 자가 레온같은 최고위 귀족일지라도, 꽤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물론 평민은 말할 것도 없이 사형에 처해졌다. 귀족은 재판을 통해 죄가 드러나야 벌을 받았다. 중죄인의 경우 작위를 박탈한 후 평민의 신분인 채 사형을 집행했다.

‘귀족’으로서의 죽음은 명예로워야 한다는 게 그들의 통념이었다.

“그럼 기억을 되찾은 건 언제냐.”

“바로 얼마 전에 기억을 되찾았습니다. 무도회에서 그자를 마주친 직후였죠.”

레온은 말하면서도 불쾌한 듯 낮은 목소리가 더 탁해졌다. 오웬은 그의 반응을 보고 눈치껏 다나와 리안이 무슨 사이였는지 묻지 않았다.

“지금 돌아오지 않는 건, 기억을 찾은 것과 연관이 있겠구나.”

“아마도….”

레온은 손에 들린 편지를 다시 물끄러미 보았다.

「 걱정하지 말아요, 곧 돌아갈게요. - 다나 더니즈. 추신, 우리는 지금 더니즈 상단 근처로 가고 있음.」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던 레온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칫했다.

‘우리…?’

앞 문장과 다른 필체, 거기다 ‘우리’라는 단어는 다나가 혼자 있지 않다는 걸 나타냈다.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버지, 설명은 어느 정도 다 드렸습니다, 저는 이만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라, 일단 넌 다나를 찾는 일에 집중해라. 그리고 상단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웬은 꽤 단정적인 어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지나쳐 나가려던 레온은 의아한 눈으로 테라티우스 공작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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