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그것은….”
하벌트는 살찐 얼굴을 씰룩거리며 말할 듯 말 듯 망설였다. 다니엘은 조금 짜증이 났지만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덜컹-
“저, 전하!”
그러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인물을 보고는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레온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들어왔다.
하벌트는 들어오는 그를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회까닥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 그, 그러니까…!”
레온은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곧장 다니엘에게 다가갔다.
“없어졌다는 이야기 들었겠지.”
“예, 전하. 아힐 경께 듣고 급히 병력을 산 쪽으로 더 파견했습니다.”
“그걸로는 모자라, 시내 쪽도 뒤져야 할 것 같다.”
“예, 하지만 그럼 성의 경비가 좀 비게 됩니다. 괜찮으실는지…?”
“지금 적군이 쳐들어오고 있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다.”
레온의 단호한 답에 다니엘은 옆의 병사에게 간단한 문구를 적어 급히 전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온의 초조함은 멈출 길이 없었다.
다니엘은 그런 레온을 흘끔 보고는 아까 하다 못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답해, 전하께서 와 계시니 거짓말하지 말고.”
“그, 그, 그러니까 리안 펠리스가…!”
‘리안 펠리스’라는 이름에 레온이 서늘한 얼굴로 하벌트를 보았다. 그러자 하벌트는 하관을 덜덜 떨면서 묻지도 않은 말까지 줄줄 읊었다.
“다, 다, 전부 리안 펠리스가 한 일입니다. 저는 그자가 하자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아가씨를 죽인 것도 뒤늦게 들었고… 흐익.”
레온이 하벌트에게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그의 턱을 치켜들고 얼굴을 가까이 한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리안 펠리스가 다나 더니즈를 죽였다.”
확정적인 그의 말에 하벌트는 얼이 빠져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나 더니즈는 죽지 않았어. 문제는 그녀가 지금 사라졌다는 거지. 리안 펠리스가 이 일에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군.”
“무슨 말씀이온지….”
영문 모를 소리에 하벌트는 두 눈만 끔뻑거렸다. 하지만 레온은 그의 의문을 해소해주기보단 질문을 더해줬다.
“리안 펠리스가 환각초를 거래하고 있나?”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 그것도 그자 혼자 꾸미는 일입니다. 더니즈 상단의 유통망을 제공하긴 했지만, 거기 쓰이는 인력 같은 것은 리안 펠리스가 알아서 고용한 자들입니다.”
“좋아.”
레온은 굽혔던 허리를 숙이고는 차갑고 날 선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서 리안 펠리스에게서 다나 더니즈의 행방을 알아내라. 그리고 그 후 너의 처신을 지켜보도록 하지. 만일 거짓을 말하거나, 리안 펠리스에게 입을 턴다면….”
“아, 아닙니다! 제가 이곳에 온 건 모든 걸 말하고자…. 그런데 다나 더니즈라면, 그러니까, 비 전하… 를 말하는 거지요?”
하벌트는 아직 대공 옆에 있는 다나가 진짜 다나 더니즈인 걸 알지 못했다. 하지만 레온은 그것을 일일이 설명해 줄 만큼 친절하진 못했다.
“그녀가 다나 더니즈이다. 다른 말은 필요 없어.”
레온은 턱짓으로 하벌트에게 당장 나갈 것을 지시했다. 그것을 알아들은 하벌트가 우당탕 소리 내며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내뿜는 위압감 때문에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내보내주는 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가다 보니 정신이 들었다. 하벌트는 한숨을 쉬며 뒤를 보았다.
“다나 더니즈가 없어졌다고?”
어떤 경위도 설명해주지 않고 찾아보라니, 하벌트는 황당하긴 했지만 또 리안 펠리스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왔다.
“그놈이랑은 이제 엮이고 싶지 않은데….”
머리를 벅벅 긁으며 사라지는 하벌트를 다니엘이 창밖으로 내려다보았다.
“역시 저자가 바로 반응이 올 줄 알았습니다. 리안 펠리스가 범인이 맞았군요.”
다니엘은 손쉽게 얻은 성과에 조금 상기된 표정을 짓다, 레온의 착잡한 얼굴에 곧 입을 다물었다.
“아가씨… 아니, 비 전하는 금방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차라리 그녀의 의지로 나갔길 빌어, 지금은.”
의외의 말에 다니엘이 의문스런 얼굴로 그를 보았다.
“누군가에게 잡혀 고초를 겪고 있다면, 내가 이번엔 참지 못하겠지. 과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내 사람을 건드린다면….”
레온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얘지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다니엘은 침을 꼴깍 삼키다, 이제야 생각난 듯 서랍 안에서 준비했던 서류를 꺼내 들었다.
“지시한 문서를 미리 만들어 두었습니다. 여기… 전하의 인장과 새로 만든 다나 더니즈의 인장이 함께 찍혀 있습니다.”
레온은 말없이 다니엘이 건네주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 서류를 보고 있는 레온의 표정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딱 그런 상황으로 보였다.
“리안 펠리스의 행적을 알아보겠습니다. 전하,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쪽은 내가 직접 나가보겠다.”
“아, 아닙니다. 전하, 전하께서 나서시면 일이 더 어려워집니다. 아직 그자는 케밀턴 공작의 사위입니다. 반드시 정식 재판에 회부되어야만….”
“자네는 내가 리안을 보자마자 죽일 거라 여기는 거로군.”
레온의 말이 맞았는지, 다니엘은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지금 후회하고 있어. 어제 아침에라도 죽여 버릴걸. 그놈이 이일에 연관됐는지 안 됐는지 상관없이 죽어 마땅한 놈인 것을.”
“전하, 제가 나가보고 오겠습니다.”
다니엘은 아까의 서류를 챙기며, 레온에게 인사한 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다니엘을 보는 레온의 눈빛에는 음울한 다급함이 묻어나왔다.
***
레온의 예상대로 리안은 다나가 수도가 떠난 것을 확인하고는 케밀턴 공작에게 대충 둘러대며 뒤따라 떠났었다. 당연히 테라티우스 성으로 갔을 거라 예상하고는 그 근처에 마차를 세웠다.
하지만 아무리 간 큰 리안이라도 성안까지 들어갈 수는 없었다.
성문을 바라보며 발로 바닥만 툭툭 쳤다.
‘어떻게 밖으로 유인해낸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서성이는데, 그의 눈에 익숙한 사람이 들어왔다. 바로 하벌트였다.
뭔가 초조한 듯 보이면서도 급하게 뛰어나오고 있었다.
리안은 바지춤에 손을 넣고 휘적휘적 걸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이봐.”
“으악! 리안… 펠리스 백작?”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군. 왜 성에서 나오지?”
“그것은… 물품 몇 개에 하자가 있다고 하여 확인차 다녀왔습니다.”
하벌트는 당황했지만 노련한 상인답게 적당한 말로 둘러댔다. 리안도 별로 의심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혹시 막 도착한 마차를 봤나? 그 여자가 타고 있었을 텐데.”
“여자… 라고요?”
하벌트는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댔다.
대공은 여자를 리안이 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이 반응은 리안도 모른다는 게 아닌가.
“글쎄요,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았어요. 병사들이 우르르… 저것 보세요.”
하벌트가 가리킨 곳에는 테라티우스 성에서 나온 병사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펴보기도 하고, 뭔가를 묻기도 하며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다. 리안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뭔데, 왜 저러는 건데?”
하벌트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리안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병사들이 먼저 그에게 물었다.
“누구를 찾고 있는 거지?”
그러자 병사는 뚱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 입을 열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혹 보셨습니까?”
“금발에 푸른 눈? 혹시 그럼 이 성에 사는 여자를 말하는 건가?”
“그건….”
병사 하나가 대답을 하려 하자, 옆에 있던 자가 팔을 붙잡으며 말을 잘랐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이만.”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무례한 태도에 성낼 거라 예상했지만 리안은 히죽히죽 입술 끝을 올렸다.
“사라졌단 말이지?”
하벌트는 괜한 것을 알려줬나 싶어 식은땀이 흘렀다. 어쨌든 지금 다나를 데려간 사람은 리안은 아니다. 그럼 어디로 갔다는 거지?
***
리사와 다나 일행은 더니즈 상단 맞은편 건물에 방을 잡았다.
“리안은 수도에 있을 거예요. 그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해요.”
“정말 들어가려고? 네가 장소를 말해주면 내가 다녀올게.”
“아니에요, 그 장소는 저만 알아요. 아무도 오지 않을 거예요. 제가 다른 방향으로 들어갈 테니… 리사가 시선을 좀 끌어줘요.”
리사와 다나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는 동안, 상단 주변을 살펴보던 제라스가 돌아왔다. 그는 테라티우스 성으로 다나가 쓴 편지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하벌트도 자리를 비운 모양이야. 상인들도 자기 구역으로 다 떠나고, 몇몇 중간 관리자만 남아 있어.”
제라스의 설명에 다나가 리사와 눈을 마주쳤다. 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다나에게 다짐시켰다.
“그 물건만 갖고 바로 나가는 거야. 시간을 길게 끌진 못해, 이상해 보일 테니까.”
“금방 나올게요. 그 통로는 저만 알고 있어요.”
“근데 그게 뭔데 그래?”
“저도 아버지가 장소만 말해준 거라서… 그냥 더니즈 상단이 다른 사람에게 장악되면 찾아내라고만 말하셨어요.”
제라스는 그들을 다시 재촉했다.
“어서 일어나, 하벌트나 다른 고위 관리자가 오면 골치 아파지니까. 리사를 알아보는 사람도 많고.”
톰이 밖에서 약초가 든 자루들을 챙겼다. 리사에게 타박받을 때와 달리 이제는 제법 많은 양이었다.
“갑시다.”
일단 다나는 리사 일행과 함께 상단 안으로 들어갔다. 다나는 긴 금발을 둘둘 말아 검은 두건 안에 숨겼고, 위아래도 여전히 검은색 상하의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굴곡진 몸매를 보아, 여자임을 알아보는 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여성스러운 옷보다는 훨씬 그녀에게 오는 시선을 가려주는 것도 사실이었다.
제일 먼저 리사가 앞서 들어가 아는 얼굴에게 반가운 척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