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다나는 리사의 말을 들으며, 필기구를 받아 들고는 구겨진 종이를 평평한 서랍 위에 펼쳐놓았다.
“생각해보니까 죄도 밝히지 않고 그냥 죽여 버리면, 난 그냥 살인자가 되는 거잖아.”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건가요?”
“아냐, 그놈을 죽이더라도 죽을만한 놈을 죽였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어. 그래도 나는 사형이었겠지만, 최소한 정당했다는 것만이라도. 하지만 널 만났으니….”
리사는 말끝을 흐리면서도 눈동자를 다나에게로 향하며 생략된 의도를 전달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나 또한 바라는 바였다.
“도와주세요, 리사. 저도 저 혼자만으론 어려워요.”
“네가 왜 혼자야, 대공비가 될 몸인데…. 내가 오히려 도움이 필요해. 이건 좋은 기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리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나가 편지를 쓰게끔 자리를 비켜 주기 위해서인지, 그대로 볼일이 있다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나는 문이 닫히는 걸 보고는 작게 한숨 쉬며 목탄을 들었다. 실제 평민들은 글을 쓸 일이 거의 없었고, 쓴다 해도 이런 목탄으로 쓰곤 했다. 다나에게 익숙한 도구는 아니었다.
게다가 끝이 뭉툭했기 때문에, 작은 종이 위에 많은 글자를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조금 망설이던 다나는 결국 짧은 메세지를 남기기로 했다.
「 걱정하지 말아요, 곧 돌아갈게요. - 다나 더니즈. 」
모든 것을 설명하기엔 터무니없이 짧은 말이었지만, 구체적인 장소를 쓰면 그가 금방이라도 찾아올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편지를 쓰지 않더라도, 그가 찾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샅샅이 뒤질 것이다.
그런 식으로 돌아가게 되면, 결론은 뻔했다.
‘갇히겠지.’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안으며 설득할 것이다. 다나가 걱정이 되는 건 그런 그의 행동뿐 아니라 거기에 약해질 자기 자신이었다.
‘최대한 빨리 그것만 찾고 돌아가는 거야.’
종이를 곱게 접고 있는데, 밖에서 웅성웅성거리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왠지 익숙해서 들어보니, 자신을 구해준 두 명의 사내인 것 같았다.
다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가보니 리사가 그들에게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이 정도 물건으로는 택도 없어. 더니즈 상단이 어떤 곳인데 이런 하급을 받겠어.”
“그래도 리사, 우리가 전문 약초꾼도 아닌데 이 정도면 훌륭한 거라고. 어차피 진짜 파는 게 목적도 아닌데 이거라도 들고 가지 그래?”
다나가 그들 사이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아후, 깜짝이야.”
남자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다나의 모습을 보고 반가워했다.
“어이고, 이제 괜찮은가 보네.”
“네, 덕분에요.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나중에 꼭 보답할게요.”
“허허, 보답은 무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건데.”
다나가 살포시 눈웃음을 보이자 남자는 사양하면서도 기분 좋은 듯 껄껄댔다.
“아무튼 톰, 이런 건 가져갈 수가 없어. 일회성으로 끝날 일이 아니란 말야.”
“뭔데 그래요?”
다나는 쪼그려 앉아 그들이 말하는 물건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자루 안을 뒤적거리니, 산에서만 자라는 약초 같은 것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건, 로사베리아라는 약초네요. 이걸 어디서 구하셨어요?”
“글쎄, 이 근방엔 지천에 있던데. 아무도 안 캐더라고.”
“다나, 그걸 어떻게 알아봤어?”
다나는 무릎을 펴고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했다. 단순히 기억만 되찾은 게 아니라 그때 관련된 지식들 까지 되살아났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예전에 아버지 따라서 돌아다니면서 주워 들었어요. 로사베리아는 약효가 탁월하지만 재배가 안 돼서 귀하다고…. 그런데 이걸 어쩌려고요?”
“더니즈 상단 측에 접촉하는 구실로 약초를 좀 팔아보려 했지.”
“리사, 원래 그곳에서 일하다 나오지 않았어요?”
리사는 자루를 주섬주섬 챙겨 들며 말했다.
“그래, 좀 더 자유롭게 돌아다녀야 해서. 리안 놈도 황궁으로 갔으니까, 그래도 더니즈 상단에도 갈 구실을 만들어 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요….”
다나는 다시 한번 자루 속 약초들을 만지작거리며 살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만 더 늘리면 되겠어요. 더니즈 상단이 의약 쪽 물건엔 제법 후한 편이니까요. 로사베리아는 흔치 않기도 하고… 한번 가져가 보세요. 가는 길에 저도 같이 데려가 주시고요.”
“너도 간다고? 괜찮겠어? 몸은 괜찮아?”
“네, 다행히 어디 부러진 것도 없고… 약초 캐는 것도 도와 드릴게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리사는 팔을 걷어붙이며 의욕을 보이는 다나를 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다나가 상냥하게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가져올 물건이 있어요. 그것만 가져오면 얌전히 성으로 돌아갈 거예요. 이 편지만 성으로 좀 전해주세요.”
“알았어, 이왕 한 배를 탔으니… 네가 위험하지 않게 우리도 널 지킬게.”
“고마워요, 리사. 정말 든든해요.”
다나가 톰과 함께 약초를 캐기 위해 사라지고, 리사는 다나가 맡긴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일이 어떻게 될 줄 알고….”
리사는 한숨을 쉬며, 다나가 적은 글귀 밑에 무언가를 더 첨가해서 적었다. 그리고 발이 빠른 제라스에게 편지를 맡겼다.
***
하루 종일 인원을 대폭 늘려 온 산을 헤맸지만 다나를 찾을 수 없었다. 어디 빠졌을까 싶어 구덩이며, 계곡 아래까지 샅샅이 찾았지만 흔적조차 없었다.
아힐은 절망에 빠진 얼굴로 앞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아아, 어떻게 이런 일이….”
“아힐 경! 전하께서 오십니다!”
아힐은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말발굽 소리가 요란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먼지가 일 정도로 맹렬하게 달려오는 말들이 보였다. 아힐은 그들이 도달하기도 전에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전하!”
레온은 급히 말을 세우고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직인가.”
옆의 기사가 헉헉대며 말도 못 하고 있는 것에 반해, 레온의 목소리는 급하긴 했지만 평온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 실수로 그만….”
“일어나, 찾는 게 먼저다.”
“예!”
레온은 아힐에게 대략적인 수색 범위를 들었고, 들으면서 내내 미간을 찌푸렸다. 산에서 조난을 당했다면 벌써 발견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는 건,
‘일부러 도망갔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거나.’
레온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득 전에 다나를 처음 봤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 일에 리안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은 없는 걸까.
극심한 불안을 애써 억눌렀다. 지금 흥분해봐야 판단력만 흐려질 뿐이었다.
“이쪽 방향으로 사라졌다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급하다 하여 내려드리고 한참을 기다렸는데 영 오지 않으셔서….”
“아무 소리도 못 들었고?”
“예, 그렇습니다.”
기억을 찾고 도망간 걸까. 다나는 자신이 직접 복수하기를 원했으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왠지 명치 아래가 답답해졌다.
“여기부터 사라진 방향으로 쭉 훑으면서 산 아래까지 내려가라. 민가가 보이면 그곳도 확인하고, 짐승의 덫 같은 것도 살펴라.”
“예, 알겠습니다.”
아힐은 이미 한번 훑어본 곳이지만 레온의 지시가 떨어지자 군말 없이 수용했다.
“만일 발견되지 않으면….”
레온은 그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입이 바짝 말라 잠시 말을 끊었다.
“시가지 근처까지 뒤지고 내게 보고하라.”
“예, 전하.”
마음 같아서는 이들과 함께 산을 헤매고 싶었지만, 레온은 애써 참았다. 다나가 이미 산에 없을 확률도 있었기 때문에 성에 돌아가 상황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여 다시 말에 올랐다. 그리고 아힐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대로 다시 출발했다.
***
“그리 긴장할 필요 없네. 우리가 억지로 끌고 온 것도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말만 해주고 돌아가면 되네.”
다니엘은 친절한 말투로 상대를 안심시키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서류를 보며 팔랑팔랑 넘겼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제 안전만 보장된다면요.”
하벌트는 다리를 연신 달달달 떨며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 와중에 용케도 자신의 할 말을 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그것을 흘끔 보고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도 겉으로는 모른 척 덮어주었다.
“물론이지, 모든 걸 털어놓으면 따로 죄를 추궁하진 않을 걸세.”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니라면?”
다니엘이 그제야 고개를 들고 하벌트를 똑바로 보았다.
어쩐지 하벌트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겁에 질려 있었다. 흘긋 문을 보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며 영 안정을 찾지 못했다.
“제대로 말을 해보게.”
“절 지켜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제 목숨을요…. 그리고 제 가족들까지.”
“무엇으로부터?”
다니엘은 아예 서류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그를 보았다. 어쩐지 다음 말이 짐작될 것도 같았지만, 일단 끈기 있게 기다렸다.
“제가 오늘 이야기한 걸 그자가 알게 된다면, 배신자라며 복수하려 들 겁니다.”
“그런데 용케도 우리에게 왔군.”
다니엘은 이전에 하벌트에게 먼저 사람을 보낸 일이 있었다. 털어놓을 게 있다면 찾아오라는 말만 남기고 내버려두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하벌트는 고민이 역력한 표정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
“장사치에게 손익계산은 생명과도 같으니까요.”
말 그대로 이제 발을 빼야 했다. 아니 이미 늦어버린 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리안과 한 배를 탄 게 실수였다.
리안이 계획과 다르게 다나를 너무 일찍 죽였을 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나 더니즈의 첫 번째 대역이 도망치고, 두 번째 대역이 대공의 마음에 들었을 때는 이미 일이 많이 틀어져 있었다.
게다가 지금 당장은 리안과 하벌트가 손을 잡았다 해도, 자신의 일에 방해된다 싶으면 언제든 하벌트의 목을 조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리안이 먼저 발을 빼고 하벌트를 밀고해버릴지도 모른다. 그 전에 먼저 도망쳐야 했다.
다니엘은 이미 누군지 짐작하고 있지만, 그의 입을 통해 확인한다는 차원에서 물어보았다.
“그래서, 당신이 말하는 그자라는 건 누구지? 복수한다는 사람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