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제대로 말해라.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어디로 사라진다는 거지?”
레온이 끓어오르는 흥분을 억누르며 다시금 설명을 요구했다.
“그게, 급하게 내리셔야겠다고 하여 잠시 마차를 멈췄는데…. 저희가 고개를 돌리고 기다렸사온데.”
레온의 붉은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더 말하라는 무언의 재촉에 기사는 재차 말을 이어갔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시지 않아서 찾아보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도망친 건지, 사고를 당한 건지도 모른다는 말이지.”
“그… 그렇습니다.”
“돌아간다.”
레온은 더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크리스틴 왕녀가 따라 일어나 다급히 그를 불렀다.
“대공! 지금 한 이야기는요?”
그러자 레온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보며 단호히 내뱉었다.
“결심이 서면 성으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약속은 지켜질 겁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크리스틴 왕녀는 그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묘한 부러움을 느끼긴 했지만, 곧 닥쳐온 고민에 금방 잊어버렸다.
***
리사는 다나의 팔다리에 매어진 붕대와 양초를 갈아주었다. 투박하지만 익숙한 솜씨로 가는 모습에 다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 입을 열었다.
“리사는… 어떤 사람이에요?”
“그것보다 내가 왜 리안을 죽이고 싶어 하는지가 궁금한 거 아냐?”
리사의 돌직구에 다나는 정곡이 찔린 듯 입을 다물며 눈을 깜빡거렸다.
리사는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침대 곁 의자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난 펠리스 백작 부인의 전속 하녀였어. 호위기사이기도 했고.”
“아….”
“난 너를 몇 번 봤지만, 넌 나를 잘 몰랐을 거야. 어리기도 했고, 가까이서 본 건 몇 번 없었으니까.”
다나는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려 봤지만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리사는 기억에 없었다.
백작 부인과 마주한 건 거의 저택 안에서였고, 저택 안에서까지 호위기사를 대동하고 다니는 귀족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봤다 해도 관심이 없으면 기억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부인이 미혼이었을 때부터 곁에 있었고, 펠리스 가문과 혼인할 때도 따라와서 쭉 그 저택에서 지냈지. 부인과 나는… 그래, 내 쪽에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가족이고 친구 같은 사이였어.”
“그랬군요.”
담담하게 말하는 리사의 얼굴엔 서글픈 추억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지금 복수하는 이유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나는 몹시 궁금했지만, 재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리안은 어릴 때부터 잔인했어. 그건 불쌍한 환경이 만든 게 아니고 선천적인 거야. 선악의 구분이 모호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애는 처음 봤어.”
리사의 말에 다나는 문득 리안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을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을 볼 때, 확실히 잔인하다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처음엔 백작 부인이 아끼던 고양이였지. 아아, 오해하지 마. 부인은 그 전까지는 리안에게 나름 동정심을 갖고 있어서 잘 대해 줬으니까. 다섯 살 때 같이 키우려고 성안으로 들였는데, 부인의 고양이를 잔인하게 죽여 버렸어.”
“다섯 살 때… 고양이를 죽였어요?”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어린아이가 뭣 모르고 그랬나 생각했지, 그렇다 해도 끔찍했지만. 그 후로도 하녀의 젖먹이 아들을 다치게 하는 등… 사고가 몇 번 있었고, 결국 친모에게 돌려보내졌어.”
리사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 다나를 바라보았다.
“리안이 널 죽이려 했다고 했지.”
“네, 바보같이… 그에게 속아 상단 경영권을 맡긴 직후에….”
목 졸린 과거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이렇게 선명한 기억을 자신을 어떻게 까맣게 잊어버렸을까.
그날 만일 레온이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죽거나, 아니면 영원히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면.
“어쨌든 리안이 너에게는 껌뻑 죽고 못 살았으니까. 그래도 그 녀석이 유일하게 진심인 줄 알았어, 너에게는…. 나조차도 아까 멍청하다고 하긴 했지만 말야.”
“아니에요, 제가 어리석었던 맞아요.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것 같아요. 순간순간 분명 보였는데….”
특히나 마지막 즈음 리안이 보여준 태도는 분명 그녀를 함부로 대하고 있었음에도, 그가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무서워 다나 스스로가 외면했었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리안이 변했다기보단 슬슬 본모습을 드러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다섯 살짜리 리안은 부인이 고양이를 아끼니까, 고양이를 죽이면 자기를 더 아껴 줄 거라 생각했던 거야.”
리사는 숨을 크게 들이쉬다 내쉬었다.
“그리고 펠리스 가문의 후계자를 죽이면, 자신이 후계자가 될 거라 생각했겠지.”
추측이었지만 거의 확신에 가까운 리사의 말에 다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거기서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둥, 근거가 뭐냐는 둥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안 되니까 마지막으로… 자신을 거둬준 백작과 백작 부인마저 죽여 버렸어. 사용인들도 퇴직금을 준다 속이고 하나하나 없애버렸지, 이 일을 알건 모르건.”
“리사, 리사는 어떻게 그 일을 알았어요?”
다나는 리사가 쏟아내는 엄청난 말들을 들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질문하는 다나의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리사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고는 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도 퇴직금 받으러 갔었으니까…. 리안이 나에게 부인이 죽었을 때 뭘 하고 있었냐고 물었어. 그 질문이 참 묘하더라고. 실은 내가 늘 저녁을 챙겨드렸는데 그날만 일이 있어서 못 챙겨드렸고…. 아무튼 리안이 고용한 자객이 돌아가는 길에 날 죽이려 했어. 내가 아무런 힘없는 여자인 줄 알았던 거야.”
“세상에, 리안이… 백작은 자기 아버지잖아요. 어떻게, 어떻게….”
“원래 그런 놈이니까. 그렇다 해도 리안이 널 그렇게 죽이려 했다는 건 좀 놀라워. 아니, 당연한 건가? 그놈은 거슬리는 누군가를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으니까.”
다나의 눈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나는 한때 자신을 보살폈던 백작과 백작 부인을 떠올리며, 미안함을 느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전 리안이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생각해서 더… 잘해줬는데.”
다나는 백작 부부가 죽었다며 서글픈 모습으로 자신에게 찾아왔던 리안을 떠올렸다.
품고 있던 분노가 더 진해졌다. 그것은 리안에게 또한 어리석었던 자신에게 동시에 향했고, 다나를 괴롭게 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 나도 정말 오랫동안 자책했거든. 그날 자리를 비웠던걸….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것도 돈이랍시고, 퇴직금까지 받으러 갔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이야.”
리사의 말을 끝으로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나는 치솟는 감정에 결국 눈물을 쏟아냈고, 리사는 굳이 그녀를 달래주지 않았다.
***
레온은 다나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이라도 말을 타고 달려갈 것처럼 가더니 갑자기 우뚝 멈췄다.
“전하?”
“잠시 들를 곳이 있다.”
레온이 곧장 향한 곳은 별궁의 1층이었다. 그는 로비를 지나쳐 숙소들이 모여 있는 복도로 향했다. 그 복도 입구에도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레온을 본 병사들이 묵례를 하고는 찾아온 목적을 물었다.
“저, 대공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펠리스 백작이 방으로 들어갔나?”
“어엇, 그게, 본 적 있어?”
질문을 받은 병사가 당황하며 동료에게 묻자, 동료 병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들어가는 건 못 봤습니다.”
예감이 썩 좋지 않았다. 리안은 과거에도 다나의 목숨을 노린 전적이 있었고, 다시 마주친 지금도 어떤 의미로든 다나를 내내 주시했다.
그런 리안이라면, 다나가 수도에서 떠났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만일 그가 지금 이 성에 없다면, 혹 다나를 따라간 건 아닌지. 엄습하는 불안감에 레온은 병사를 재차 다그쳐 물었다.
“그럼 백작이 어디로 갔는지 전혀 모르나?”
“그건….”
“식당으로 가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럼 아직 성에 있다는 건가?”
레온의 혼잣말 같은 질문에 뒤쪽에서 대답이 날아들었다.
“아닙니다, 제 사위는 조금 전 이곳을 떠났습니다, 대공 전하.”
뒤를 돌아보니 케밀턴 공작이 뒷짐 진 상태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떠났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급한 볼일이 생겼다고 저에게 허락을 맡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제 사위는 왜 찾으시는지?”
케밀턴 공작은 진심으로 궁금하여 물었지만, 레온은 그의 궁금증을 풀어줄 만큼 여유가 없었다.
다만 곧 리안 펠리스에 대한 죄를 물을 예정이니 한마디쯤 해주기로 했다.
“케밀턴 공작, 집안에 사람을 잘못 들이면 큰 화를 입을 수 있습니다.”
레온의 뜬금없는 말에 케밀턴 공작은 눈만 끔벅거렸고, 레온은 그를 지나쳐 갔다. 사실 그는 지금 수도에 남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 때문에 다나를 먼저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다나가 없어진 지금, 그에게는 물불 가릴 여유가 없었다.
***
“그런데 정말 대공에게 안 알려도 되겠어?”
다나는 리사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딱히 그를 일부러 걱정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레온이 나를 믿고 도와준다면 좋겠는데….’
자신이 직접 이 일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조건 감싸 돌려는 레온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일단 편지를 보내고 싶어요, 테라티우스 성으로.”
다나는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더럽고 찢어진 드레스 대신 위아래로 검은색 활동복이 입혀져 있었다.
“아아, 고마워요. 리사가 입혀줬군요….”
“미안, 그런 옷밖에 없어. 멍청이들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웬 여자를 봐달라고 하더니….”
“그런데 리사는 왜 여기 있는 거예요?”
리사는 뒤돌아서 서랍 하나를 뒤지더니 꼬깃꼬깃한 종이 하나와 뾰족한 모양의 목탄을 내밀었다.
“원래는 그놈을 직접 죽이려 했었어. 그런데 너무 마음만 앞서고 어설펐어. 보기 좋게 실패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