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입술을 달싹이던 다나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리사의 팔을 덥석 잡았다.
“리사, 나… 아읏.”
“사라, 무리하지 마. 몸이 여기저기 다쳤던데… 진정하고 누워. 난 어디 안 가니까.”
“리사, 하아, 내 이름은 다나예요. 다나 더니즈예요.”
리사는 다나를 다시 눕히면서 무슨 뜬금없는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다나… 더니즈라고? 네가? 갑자기?”
“리사, 그것 때문에 연락을 보냈는데… 역시 못 받았구나.”
“펠리스 묘지에 보냈나 보구나. 거긴 일 년에 한 번 정도 들를 뿐이야. 그것보다 네가 다나 더니즈라고? 펠리스 가에 머물던 그 다나 더니즈 말야.”
“네, 맞아요. 리사…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다나의 대답이 확실해 보이자, 리사는 얼굴을 굳히며 그녀가 잡고 있던 팔을 탁하고 빼냈다.
“곤란해, 네가 정말 다나 더니즈라면.”
“왜요?”
“다나 더니즈는 내 적이니까.”
“리사?”
리사는 다정하던 손길을 거두고 팔짱을 끼며 다소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내가 아는 다나 더니즈는 리안 펠리스에게 푹 빠져서 그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주는 멍청한 여자였거든. 리안 펠리스가 내 적이니 그의 편인 다나 더니즈 또한 경계해야 할 인물이지. 그래서… 정말 네가 그 여자라는 거야?”
다나 바로 앞에서 딱딱한 말투로 또박또박 ‘멍청한 여자’라 말하는 리사의 태도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다나 또한 역시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 말은 사실이에요, 과거에는…. 하지만 리사, 나도 지금은 리안 편이 아니에요. 오히려 우린 같은 편이에요.”
‘같은 편’이라는 말에 리사의 눈이 움찔하긴 했지만 아직 경계하는 눈빛은 풀지 않았다. 더 설명이 필요하단 표정이었다.
“더니즈 상단의 주인은 제가 맞지만, 전 그 후에 리안에게 배신당했어요. 리안은 절 죽이려 했고… 그래서 기억까지 잃어버렸었죠. 내가 당신에게 사라라고 소개했을 땐,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였어요.”
“리안이 다나 널 죽이려 했다고? 또?”
“또요?”
“아, 아니야. 그래서 너도 지금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야?”
“맞아요, 그래서 당신을 찾았어요.”
리사는 가만히 다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몹시 지쳐 보였지만, 확실히 보이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원망하며 타오르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복수라는 건 원망만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리안이 어떻게 되길 바라는 거야?”
다나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잠시 고민했다.
“일단 제 것을 되찾고, 그가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어요.”
“네가 말하는 죗값에 죽음도 포함된 거야? 정말 리안이 죽어도 괜찮아? 한때 네 연인이었잖아. 그리도 끔찍하게 여기던.”
기이하게도 다나는 ‘네 연인’이라는 단어에 레온을 떠올렸다. 동시에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맞다. 리사, 여기가 어디죠? 레온에게 알려야 하는데….”
“레온?”
“테라티우스 대공이요. 제가 그의 약혼녀예요. 지금쯤 제가 사라졌다는 걸 알면 엄청 걱정할 텐데.”
리사는 아까와 조금 다른 의미로 놀라며 표정을 굳혔다.
“그게 사실이었구나, 더니즈 상단의 상속녀가 대공비가 될 거라는….”
“맞아요, 뭐 사연이 있긴 하지만 지금 설명하긴 복잡해요. 제가 그의 약혼녀라는 게 복수하는 데 문제가 되나요?”
다나가 조심스럽게 묻자, 리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쪽에 세워둔 그녀의 검을 들고 검집째 허공에 가볍게 휙휙 휘둘렀다.
“그럴 리가.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게 뭐야? 이 나라에서는 평민이 귀족을 죽이거나 크게 다치게 하면 거의 사형이야. 하지만 차기 대공비가 내 편을 들어 준다면 어떻게 목숨은 구하지 않겠어?”
“아… 리사.”
“그래서.”
리사는 뭉툭한 검집 끝을 다나에게 겨누며 다시 한번 분명한 목소리로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
“최종적으로 리안이 죽어도 괜찮아? 죽일 각오가 되어 있어? 물론 쉽게 죽이기보단 죽을 만큼 고통받게 하는 게 일차 목적이지만. 어디까지나 각오를 묻는 거야.”
다나가 서서히 고개를 들며 푸른 눈동자가 또렷이 떠올랐다.
“물론이에요, 그도 저를 죽이려 했는걸요.”
다나의 대답에 리사가 시원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 영광이야, 차기 대공비와 한 배를 타다니 말이야.”
띄워주는 그녀의 말에 다나는 쑥스러운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럼 대공한테 말해줘야 하나? 네가 여기 있는걸.”
“아, 그건….”
다나는 바로 그러라고 대답하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레온은 기별을 받는 즉시 바로 데리러 올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이 일에 나서는 것을 반대하고, 성에서 나가지 못하게 감시할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잠시라도 그에게 멀어진 것이 어찌 보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곧 돌아갈 거니까.’
약간의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나는 결심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리사는 의아한 듯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다나의 말에 딱히 토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
레온은 크리스틴 왕녀의 이야기를 듣고, 리안이 환각초에까지 손을 뻗었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하긴, 아무리 상단 경영권을 쥐고 있다고는 하나 정상적인 경로로는 그렇게 개인 재산을 빠르게 불리기는 어렵지.’
다나와 개인적인 일만으로는 법적으로 리안을 완전히 추락시키기엔 조금 무리가 따랐다. 증인과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찢어 죽여도 모자랐지만, 그럼 그 후의 일이 상당히 골치 아파질 것이다. 어쨌든 리안은 케밀턴 공작의 비호 아래 있었다.
하지만 환각초 건과 연결시키면 케밀턴 공작의 비호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불러놓고 아무 말도 안 하시는군요.”
크리스틴 왕녀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으면서도, 어쩐지 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웠다.
테라티우스 대공이 크리스틴 왕녀와 독대를 청한 것은 다음 날 아주 이른 아침이었다.
아무리 철없는 왕녀라지만, 대공이 어제 일어난 일을 문제 삼는다면 꽤 크게 번질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왕녀께서는 이곳에 왜 온 겁니까. 단순히 사절단으로 왔다기엔 꽤 오래 머무시는데.”
“그거야….”
“혹시 혼인 상대를 찾기 위해 오셨습니까.”
레온의 선답에 크리스틴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신기한 듯 맞장구쳤다.
“맞아요, 어떻게 알았죠?”
“뻔한 일이니까요. 결혼 적령기의 왕녀가 다른 나라에 행차하는 이유 같은 건.”
“…다 아신다니 뭐, 사실 대공을 점 찍고 왔었어요.”
자신을 마음에 두고 왔다는 말에도 레온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것은 이미 불가하니, 빈손으로 돌아가셔야겠군요.”
“…그렇겠죠, 여기 더 있기도 민망한 일이에요. 하지만 돌아가도….”
크리스틴 왕녀는 순순히 물러나면서도 착잡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사실 레온은 그녀에게 묻기 전, 이미 크리스틴 왕녀가 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이렇게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간다면, 현재 정권을 쥐고 있는 1왕자는 그녀를 무능력하다 몰아세우며 강제로 혼인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 상대는 보통 다루기 까다로운 이민족 국가거나, 충성심이 부족한 변방의 귀족일 경우가 많았다.
크리스틴 왕녀가 차라리 후궁의 자식이라면 관심 외였겠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두 번째 정비의 소생이었고, 왕위계승권이 있었다. 그래서 왕자에게는 견제의 대상이었다.
“혼인에 버금가는 명분이라면 어떻습니까.”
“…네? 무슨 말씀이신지.”
“엘라드 왕국에서 오랫동안 바란 일이 있었지요.”
“그 말이라면… 케세나 항구를 말씀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엘라드 왕국은 해양 국가였고, 무역업을 중시 여겼다. 하지만 나라의 위치상 엘라드 왕국에서 출발한 배가 다른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하셸 제국 내에 있는 케세나 항구를 지나쳐야 했다.
더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곳에서 연료와 식량을 공급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제국은 그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통행세와 자릿세를 요구했고, 엘라드 왕국은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지불해야 했다.
그 금액은 상당하여 국가적으로도 부담되는 수준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만일 크리스틴 왕녀가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돌아간다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성과였고, 그것은 그녀를 지켜줄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레온은 크리스틴 왕녀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사실 타국의 왕녀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왜 갑자기 저에게 그런 제안을 하시는 거죠? 바라시는 게 있는 거겠죠?”
“당연합니다, 상당히 어려운 부탁을 드릴 겁니다.”
크리스틴 왕녀는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레온의 말에 집중했다. 그가 무엇을 요구하든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만큼 레온이 제안한 것은 파격적이고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리안 펠리스 백작에 대한 증언을 해주셔야겠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왕녀에겐 모욕적인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레온의 이어지는 설명에 크리스틴 왕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리안에 대한 증명을 하는 즉시 엘라드에도 그에 대한 소문이 퍼질 것이다.
개인적인 불명예와 국가적인 이익를 함께 안고 가는 조건이었다. 그는 냉혈한이라는 소문답게 레온은 그런 제안을 하면서도, 그녀에게 어떤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리안 펠리스를 노리시나 보군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어찌하겠습니까, 거래를 하실 생각인지?”
“대공의 말만으로 케세나 항구의 통행세가 낮춰지는 건가요? 어떻게 믿죠?”
“폐하께선 허락하실 겁니다. 설사 허락하지 않으셔도, 그곳은 또한 테라티우스 영지에 속하는 곳이지요. 영지세를 낮추면 되는 일입니다.”
충분히 납득되는 설명이었다. 크리스틴 왕녀의 얼굴에 고민이 어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되도록 빠른 결론이었으면 좋겠군요.”
결국 그녀는 이 제안을 응할 것이다.
엘라드 왕국에서 개인 사생활에 관한 불명예는 스스로 창피할진 몰라도, 공적인 일과는 무관했다. 그곳에선 워낙 선을 넘는 일이 허다했고, 하나의 허물을 들추면 엮이는 이들이 줄줄이 뒤따르기 때문에 대놓고 지적하며 문제 삼는 것은 꺼려 하는 분위기였다.
레온이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를 일어나려던 차였다.
“전하! 대공 전하!”
급박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레온과 크리스틴이 동시에 그곳을 봤다. 기사 하나가 숨이 턱 끝에 차도록 헉헉대며 달려오고 있었다.
잠시 그를 보던 레온은 그가 다나와 함께 보낸 기사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벌떡 일어났다.
“전하, 산길을 가던 중… 아가씨께서 사라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