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레온은 욕실로 옮겨진 잠든 다나를 기다리며 벽에 기댔다.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에서 탁한 분노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리안에 대한 복수는 당연했다. 철저하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근잘근 밟아줄 생각이었다. 다나가 자신의 복수를 스스로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드는 감정이 레온에겐 더 컸다.
‘정말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다니.’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다나와 리안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예전에 다나의 목숨을 노렸던 리안이기 때문에, 그녀가 또 다시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건 레온이 더더욱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으로 볼 때, 레온이 말린다고 해서 다나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레온답게 아예 리안과 마주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그대로 다나를 테라티우스 영지로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일이 마무리 될 때 까지만 내보내지 않는다면.’
덕분에 다나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마차 안에 있었다. 산길을 넘어가던 마차가 돌길에 덜컹거려 잠이 깨버렸다.
“여기가, 대체… 어디지?”
아직 사태가 파악되지 않아 멍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다, 이곳이 마차라는 걸 알고는 화들짝 놀라 창문을 열었다.
“저, 저기요! 아힐 님!”
다나가 마차 옆에서 말을 타고 호위하는 아힐을 불렀다. 아힐은 그러자 즉각 마차를 세웠다.
“일어나셨습니까? 세 시간쯤 더 가면 테라티우스 성이 나옵니다.”
“테라티우스 성이라고요? 지금 돌아가고 있는 건가요? 대공님은요?”
아힐은 연속된 질문에도 침착하게 답을 해주었다.
“예, 대공 전하의 명을 받고 지금 돌아가는 길입니다. 대공 전하는 수도에서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오실 겁니다.”
다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피곤했다고 해도, 이렇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전혀 깨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잠든 사이 자신을 옮기는 레온의 의도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그렇게 무모하게 굴 생각은 없었는데….’
예상대로 그는 다나가 이 일에 나서면서 리안과 접촉하는 그 자체가 싫었던 게 분명했다. 물론 레온의 뒤에 숨어 있다면, 자신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복수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게다가 꼭 찾아야 할 것도 있는걸. 그것이 있는 곳은 나만 알고 있어. 아직 발견 못 했겠지?’
“이제 출발해도 될까요?”
아힐이 공손하게 질문을 했고, 다나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쑥스러운 듯 말을 꺼냈다. 이대로 무작정 끌려갈 순 없는 일이었다.
“잠깐… 내리고 싶은데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전하께서 하차를 허락지 않으셔서….”
아힐은 예상대로 다나가 내리는 것을 썩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다나는 일부러 시선을 내리깔며 우물쭈물 말문을 열었다.
“저… 제가, 급해서… 잠시면 되는데요.”
이 정도쯤 했으면 아무리 눈치 없는 아힐이라도 알아들을 것이다. 아힐은 예상대로 말에서 훌쩍 내리더니, 벌게진 얼굴로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저희가 주변을 먼저 경계하겠습니다. 내려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힐은 주변에 기사들과 병사들을 풀어 수상한 사람이나 산짐승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완전히 안전하다고 판단되자, 다시 다나를 불렀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저희가 주위에 있을 테니, 안심하고 다녀오십시오.”
“저… 돌아보지 말아주세요.”
“물론입니다.”
다나는 살포시 치마를 들고 아힐이 알려준 수풀 쪽으로 들어갔다. 정말 볼일이 급하다기보단, 이대로 성으로 가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성에 가면 아예 나가지 못하게 할 거야.’
그렇다고 해서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도망친다? 그러기엔 너무 대책이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가 없었고.
“여기가 어디쯤이지? 반은 온 건가?”
다나는 조금만 더 돌아보려 깊숙한 곳으로 갔다. 아직 저녁까진 시간이 남았는데도, 수풀이 우거진 산속은 그리 밝지 않았다.
“너무 멀리 가시면 안 됩니다!”
아힐은 이쪽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큰 소리로 외치자, 메아리치며 다나에게 닿았다.
다나는 아힐이 있는 곳을 향해 흘긋 시선을 돌리려다.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뒤로 뺐다.
풀과 나뭇잎에 몸을 숨긴 뱀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배…뱀이.”
다나는 제대로 살피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뒷걸음질 치다, 발뒤꿈치에 무언가 툭 닿았다.
“아…!”
그대로 몸이 뒤로 기울었다.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을 거라 예상했지만, 닿는 순간이 생각보다 늦었다.
그 뒤는 가파른 내리막길이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치마까지 발에 걸려 멈추지도 못한 채, 다나는 산 밑으로 굴러 떨어져버렸다.
다나는 어떻게든 팔로 머리를 감싸며 버티려 했지만, 깊게 파진 구덩이 안으로 쑥 빠지면서 떨어진 충격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꽤 오래 걸리시는데….”
아힐은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하늘을 봤다. 이미 해가 산 너머로 완전히 지고,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마차 주변에 불을 밝혔다. 레온이 쓰던 마차이니만큼 불이 밝긴 했지만, 산길만 환히 비출 뿐 수풀 안쪽은 여전히 깜깜했다.
“아가씨! 아직이십니까?”
아힐은 초조한 마음에 실례를 무릅쓰고 결국 다나를 재촉해봤다.
까악-
하지만 스산한 새소리만 한 번 울릴 뿐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했다. 그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뒤를 돌았다.
“아가씨?”
크지 않은 목소리로 부르다 마차에 달려 있던 불을 들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곁에 있던 기사 하나와 병사들은 그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아힐 경?”
“잠시만, 뭔가 이상해.”
아힐은 일부러 저벅저벅 발소리를 크게 내며, 다나가 사라졌던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어느 쪽에 계십니까?”
불을 비추며 큰 소리로 외쳤지만,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다들 흩어져서 아가씨를 찾아봐! 어서!”
주인 없는 텅 빈 마차를 산길 한가운데 세워두고, 그들은 주변부터 샅샅이 뒤지며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나가 그저 갑자기 쓰러져서 대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생각하던 그들은 점점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두운 산속에서 램프에 의지하며 수색 범위를 넓히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힐 경, 이 인원으론 무리입니다. 너무 밤이 깊어졌습니다. 게다가 날이 습한 게 곧 비가 올 것 같습니다.”
“안 돼, 반드시 찾아야 돼! 만일 찾지 못하면….”
“그래도 인원은 보강해야 합니다!”
“제길…!”
아힐은 답답한 상황에 욕설을 내뱉다 결심한 듯 다시 명령을 내렸다.
“경은 수도로 가서 전하께 이 사실을 보고하게, 그리고 넌 최대한 빨리 테라티우스 성으로 가서 서둘러 병사들과 기사들을 보내라고 해라, 가능한 최대한 많이. 이걸 보여주고.”
“예,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
아힐은 기사 한 명은 레온에게 보냈고, 병사 중 가장 날랜 자에게 말과 자신의 신분 패를 건네주었다.
“나머지 인원은 수색을 계속한다!”
***
동그랗고 하얀 이마 위로 물방울이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똑똑 떨어졌다. 그 물방울은 긁힌 상처가 난 뺨 위로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다나가 의식이 들자마자 제일 처음 느낀 건 젖은 흙냄새였다. 그리고 몸의 반절 가량이 물속에 잠겨 있었다.
물에 젖은 탓인지, 엄청난 피로감이 다나를 짓누르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아직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눈을 감은 채 가늠해보려 하던 다나는 위쪽에서 두런두런거리는 말소리를 들었다.
“오늘은 뭐가 좀 잡혔나? 간밤에 비가 와서 혹시 알아? 가다 미끄러진 곰이라도 있을지.”
“저걸로 진짜 뭐가 잡힐 거라 생각하는 거야? 토끼 한 마리라도 있으면 다행이겠네.”
“잠시만, 이봐. 뭐가 있는데?”
“뭐?”
버석거리는 소리와 함께 흙더미가 몇 차례 머리 위로 쏟아졌다. 다나는 그제야 눈을 떴다.
캄캄한 구덩이 속으로 빛줄기가 들어왔고, 두 남자가 조심스럽게 안을 살피다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 사람이…!”
“뭐라고? 왜 여기에 사람이? 살아 있어?”
“이봐요! 내 말 들려요?”
다나는 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여기저기 부딪힌 탓에 너무 아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살려… 주세요….”
하지만 살아야 한다는 집념에 힘을 짜내며 겨우 소리를 냈다. 남자 둘은 그 소리를 듣고는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어어, 저기…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저쪽 가서 밧줄을 당겨!”
“아아, 그래!”
“거기 기다려요! 곧 꺼내 줄 테니까.”
그 구덩이는 산짐승을 잡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였다. 전문 사냥꾼이 아닌 듯 어설프게 설치한 함정에 설마 사람이 걸려들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다.
남자 둘은 양옆 나무에 걸쳐진 밧줄을 낑낑대며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구덩이 안에 깔려 있던 그물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안에 있던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자 둘은 조금 더 놀란 듯 소리를 질렀다.
“여자, 여자야.”
“이봐요! 괜찮아요? 정신 좀 차려 봐요!”
다나를 땅 위에 올리고 남자들은 그녀를 감싸던 그물도 풀어헤쳤다. 하지만 올려지는 사이 다나는 이미 기절하고 의식이 없었다.
남자들은 더욱 당황했다. 옷이 젖어 무거울 뿐 아니라 안이 다 비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떡하지? 여자라 우리가 함부로 건드리기도….”
“일단 숙소로 데려가자, 리사가 그나마 여자니까 어떻게든 해주겠지.”
“아아, 그래.”
그들은 자신들의 옷을 벗어 대충 덮어준 후, 그대로 다나를 들고 산 바로 아래 있는 작은 오두막으로 향했다.
다나가 눈을 떴을 땐,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사라, 정신이 들어? 다시는 마주칠 일 없을 줄 알았더니…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야?”
그 사람은 바로 리사였다. 짧게 자른 붉은 머리와 전보다 마른 몸짓을 하고 있었지만,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리사….”
다나는 간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고, 리사는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