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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상속녀-63화 (63/92)

63화

크리스틴은 몹시 불안해 보였지만 오히려 아까보다 눈빛이며 말투가 또렷했다. 어제보다 빨리 정신이 돌아온 건, 리안이 준 차를 한모금만 마신 덕분이었다.

레온은 더더욱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크리스틴 왕녀는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레온에게 소리쳤다.

“내 말 안 들려요? 왜… 내가 갑자기 당신과 있는 거지? 여긴 어디냐니까요?”

“직접 발로 찾아왔습니다만. 여긴 내 방입니다.”

“그럴… 리가 없….”

크리스틴은 부정을 하다말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곳까지 온 과정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고개를 좌우로 잘게 흔들다 일단 바닥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녀가 손을 뻗자 레온이 검집을 내밀어 잡게 해주었다.

“정신은 좀 차렸습니까.”

레온이 기억하기로 크리스틴 왕녀는 제정신인 순간에도 딱히 성격이 바른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질문이 무슨 소용이 있나 속으로 잠시 생각했다.

크리스틴 왕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기억이 안 나, 또….”

“뭐가 말입니까.”

“여기까지 온 게, 내가 직접 왔다는데… 기억이 전혀 안 난다고요!”

크리스틴 왕녀는 겁에 질린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를 지켜보던 레온이 입을 열었다.

“여기 오기 전에 누구랑 있었습니까.”

“그건 왜 묻는 거죠?”

크리스틴 왕녀는 왠지 리안이랑 엮였다는 사실을 레온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레온에게 가지는 털끝만 한 미련 때문인지, 아니면 기억나지 않는 순간에 리안과 있었을 일들에 대한 수치감 때문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그건 기억하고 있는가 보군요. 말하지 않겠다면 성의 경비대를 부르도록 하죠. 엘라드 왕국의 왕녀가 남의 방에 함부로 찾아왔다는 사실이 국외에도 알려질 겁니다.”

“모른단 말이에요, 그놈 이름을.”

“누구랑 있긴 있었나 보군. 외모를 말해 보시죠.”

크리스틴은 레온의 담담한 추궁에 호흡을 고르며 리안의 생김새를 읊기 시작했다.

***

“분명 이쪽으로 간 것 같았는데.”

리안은 빠른 걸음으로 다나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얼마 걷지 않고도 발견할 수 있었다.

리안의 시선 끝에 다나가 보였다. 그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다시 보니 더욱 욕심이 났다.

‘역시, 예뻐. 너무 놀라게 하면 도망갈 테니까.’

다나는 별관 후원 쪽을 서성이며, 마치 꽃을 감상하는 것처럼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리안이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다가갔다. 다나는 조금 놀란 기색으로 그를 보다, 담담한 얼굴로 살짝 묵례했다.

“레이디, 일찍 나오셨군요.”

“아… 펠리스 백작께서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하? 저를 역시 아시는군요.”

리안이 뭔가를 아는 듯 숨기는 듯 시시덕대자 다나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제 대공 전하께 소개하셨잖아요. 저도 옆에 있었는걸요.”

“그게 답니까? 그전에는 전혀… 저를 모르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다나는 살포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확 치켜뜨며 리안과 눈을 마주쳤다.

“제가, 알아야 하나요?”

그녀가 갑자기 정면으로 마주 보자 리안은 잠시 움찔하더니 곧 머리를 굴리며 대답했다.

“그야… 알아야 하죠.”

리안은 은근히 다나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그녀의 귀 근처에서 능글맞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나는 당신이 가짜인 걸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슬쩍 던져보았다. 다나가 지금 자신을 모른 척하는 건지, 진짜 모르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말한 것은 조금 더 아는 이가 많은 비밀이었다. 물론 진실은 아니었다.

다나는 매끄러운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역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떻게 아셨는 지는 몰라도, 그걸로 절 어찌할 수 있다 생각하시나요?”

그러자 리안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며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야 두고 보면 알 일이죠.”

“그런 짓을 하면 대공께 무사하지 못할 텐데요.”

“황제 폐하를 속인 죄는 대공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다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듯 받아쳤다.

“원하는 게 뭐죠?”

리안은 그녀의 물음에 턱 밑을 긁으며 잠시 고민했다. 원하는 것? 자신이 다나에게 원하는 게 뭘까.

“그저 미래의 대공비 전하와 좋은 연을 맺고 싶다는 순수한 바람일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부디 저에게도 기회를 주시길.”

그렇게 말하며 리안은 부드럽게 허리를 숙이고, 손 하나를 내밀었다. 손등에 키스를 허락해달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 ‘불륜’ 상대가 되자는 뜻을 내포했다.

“무슨 뜻을 갖고 계시던… 저와 관계없는 일이에요.”

“그렇지, 관계없는 일이지.”

다나와 리안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동시에 옆을 보았다.

레온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둘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리안이 재빨리 손을 빼며 머쓱한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테라티우스 대공… 전하 나오셨습니까.”

레온은 쭉 다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다, 리안의 목소리에 그를 응시했다.

“내 안사람에게 무슨 볼일인가. 리안 펠리스 백작.”

“그저 인사를 드렸을 뿐입니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그들 사이에는 날 선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과하군, 아무리 궁이라고는 하나 사석에서까지 그렇게 예의를 차릴 건 없네.”

레온은 보란 듯이 다나를 품에 안으며 가소롭단 표정을 지어보였다. 리안의 얼굴이 조금 뒤틀리는가 싶더니 금세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예에… 전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리안은 그 길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가 사라졌지만, 다나는 어쩐지 레온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사선으로 내리며 괜히 딴소리를 했다.

“자는 줄 알고 잠깐 나왔는데… 언제 일어났어요?”

“다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다나는 새삼 뜨끔하면서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다나 더니즈.”

힘줘 부르는 그의 억양에 무언의 강요가 느껴졌다. 다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레온을 봤다.

화가 난 게 분명했다. 레온은 질투가 많은 사람이니까,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장면에 불쾌했을 것이다.

“정말… 그냥 인사를 나눈 것뿐이에요.”

“인사라.”

다나의 말을 재차 반복하면서, 레온은 목소리에 비아냥을 섞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다나가 조금 더 변명을 해보려 입술을 달싹이는데, 턱 양쪽에서 압통이 느껴졌다. 레온이 그녀의 턱을 한 손으로 거칠게 잡으며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게 만들었다.

“왜 저놈을 감싸지?”

“아니에요, 감싸긴요. 레, 레온. 놔줘요.”

슬슬 늦게까지 놀던 귀족들도 일어난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기척이 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레온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옛 연인을 보니 다리 사이가 근질거리는가 본데.”

다나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모른 척하려던 레온의 인내는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끝나버렸다.

다나는 레온의 험악한 말보다, 그 뜻의 진위를 알아듣고는 눈을 크게 떴다. 레온이 거칠게 그녀의 턱을 놔버렸고, 다나는 너무 놀라 그 순간 얼얼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 떻게.”

다나가 당황하면서도 부정하지 않자, 레온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휙 돌아섰다.

“따라와, 여기서 박히며 질질 싸고 싶지 않다면.”

다나는 독설을 내뱉고 빠르게 걷는 레온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 번뜻 정신이 든 듯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아갔다.

그들은 다시 테라티우스 대공 숙소로 향했고, 한쪽에서는 크리스틴 왕녀가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그들을 지나치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레온과 다나를 흘깃 보았지만, 레온과 다나는 각자의 상념에 빠져 있었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이 닫히고, 레온은 다나를 밀어붙였다. 다나는 딱딱한 문에 등을 기대며 사나운 눈빛의 레온과 눈을 마주했다.

“레온, 난….”

레온의 거친 숨결이 다나의 뺨과 귀 옆을 스치며 부서졌다. 결국 그에겐 말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장면을 먼저 보였다는 게, 괜히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아 찜찜했다.

다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내가… 다나 더니즈예요.”

레온은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으며 다나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다정한 손길과 달리 레온은 아직 날 선 눈으로 그녀를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이 구도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여, 다나는 파란 눈동자를 흠칫 떨면서도 자신을 다독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냐, 이 사람은 리안이 아냐. 날 구해준 사람이야.’

“…기억이, 돌아왔어요.”

“…….”

레온은 구불구불한 다나의 금발을 만지작거리며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역시 싫어할까? 다나가 긴장감에 그를 보았고, 레온은 다나의 머리끝을 바라봤다.

“그래, 다행이야.”

잠시 후에 들려온 목소리는 섬뜩하리만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뭐가 다행이라는 걸까.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거든.”

그 말을 하며, 레온이 드디어 한 걸음 물러났다. 커다란 위압감이 사라지고 다나는 숨을 훅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돌이켜 볼 때 어떤 의미에서는 레온이 자신에게 가장 위험한 남자였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순식간에 차분하게 돌아가더니, 테라스 쪽으로 걸어갔다.

제국에 하나뿐인 대공에게 주어진 숙소는 당연히 별궁에서 제일 좋은 방이었다.

그의 방 테라스에서는 별궁의 구조가 한눈에 들어왔다.

레온은 커튼을 젖히다 말고 무엇을 발견했는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눈매가 다시 매서워졌다.

“어떻게 해줄까.”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다나가 그의 곁으로 가다 멈췄다.

“…네?”

레온은 대답 없이 창 너머 어디론가 시선을 고정한 채, 다나에게 한쪽 손을 뻗었다. 이쪽으로 오라는 의미였다.

어쩐지 등 뒤에서도 그가 몹시 화난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아까 다나에게 보였던 흥분된 모습과 달리 냉정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왜….”

다나는 그의 곁에 다가서며, 레온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 응시했다. 그녀의 미간에 가느다란 주름이 잡혔다.

아까 갈 것같이 굴었던 리안이 나무 뒤에 숨어 자신들의 방을 훔쳐보고 있었다. 둘에게 들켰는데도 아직 그러고 있는 걸로 보아, 저쪽에서는 이쪽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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