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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상속녀-61화 (61/92)

61화

방에 있던 다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힐이 성큼 다가섰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저… 이것 좀.”

그녀는 지금 막 써서 넣은 것 같은 편지봉투를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내밀었다.

“제가 어디로 좀 보내려 하는데요. 어떻게 보내야 할지….”

“제게 주시면 시종을 시켜 전달하겠습니다. 어디 있는 누구에게 보내실 예정입니까?”

다나는 레온의 호위기사인 아힐에게 이런 심부름을 시켜도 되는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딱히 그 말고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펠리스 영지에 있는 묘지기에게 전해주세요. 수신인은 ‘리사’로 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제가 처리하겠으니 편히 주무십시오.”

“고마워요, 아힐 님.”

다나는 문을 닫고 다시 방 안을 서성거렸다. 레온과 춤을 출 때만 해도 조금 안정되는가 싶더니, 다시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다.

뭔가 해야 할 것 같으면서도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초조했다. 그래서 떠올린 게 리사였다.

‘리사도… 분명 리안에게 원한이 있었어.’

지금 상단의 대리인으로 있는 사람은 분명 자신이 지정한 리안 펠리스이다. 그 젊은 귀족을 리사는 증오했다.

그때는 자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같은 상대에게 원한을 갖고 있다면 뭔가 서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유도 궁금하고.’

리사는 일 년에 한 번 그곳에 들른다고 했다. 어쩌면 자신의 편지가 너무 늦게 전달될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다나는 그녀와의 만남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방문 밖에서 낮고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다나는 그 익숙한 소리를 듣자마자 얼른 램프를 끄고 침대 위에 누웠다.

방문이 열리고, 다나는 자는 척 눈을 감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너무 여러 가지 일이 겹쳐 잠은 전혀 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저 지금은, 지금 당장은 머리와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그와 대화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대화만 피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는 필시 대화보다 섹스를 우선할 것이다.

다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눈을 감고 고민했다. 지금은 레온의 말대로 조용히 있고 싶었다. 하지만 아까 그에게 매달렸던 걸 생각하면, 지금 거부하는 게 어색해 보일 수도 있었다.

‘갑자기 싫다 하면 이상하다 생각하겠지. 몸이 안 좋다고 해볼까.’

뚜벅뚜벅 소리가 침대 옆 옷장 쪽에서 멈추더니, 이어서 사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옷을 벗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예상대로 레온은 다나가 누워 있는 침대 머리맡까지 다가왔다. 이다음은 아마 자는 다나를 깨워 키스할 것이다.

“후우.”

다나가 눈을 감고 꼼짝없이 누워 있는데, 그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의아했지만 자는 척하고 있는 다나가 그것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어…?’

입술이 다가올 거라는 그녀의 생각과 달리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머리에 닿았다. 곧 가만가만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다나는 그것에 의아해하다, 노곤 노곤한 기분이 들며 복잡했던 생각이 스르륵 사라지는 경험했다. 그러다 그의 손이 떨어질 땐 아쉬움마저 느꼈다.

발소리가 욕실로 향하고 문이 닫혔다.

‘씻으러… 갔구나… 아무래도 오늘은 잠을 못 이룰 거 같아.’

그럼 그 이후일까. 꼭 그와 함께 자는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복잡하여 쉽게 잠들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듣고 있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곤히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깨어났을 땐 자신의 옆에 레온이 자고 있었다. 다나는 옆에 있는 그를 보고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와 침대에서 보는 건 이제 익숙한 일인데도, 놀라는 자신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물론 여기가 대공성이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레온도 어제는 피곤했는지 다나가 들썩거리는데도 잘 자고 있었다. 푹 잔걸 보아 아무 일도 일어난 것 같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놀라웠다.

‘난 대체 언제 잠든 거야.’

다나는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레온은 특별히 잠버릇이 없었다. 대부분 다나가 먼저 잠들고, 늦게 일어나 레온이 자는 모습을 많이 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가끔씩 보고 있으면 신기했다.

까맣고 결 좋은 머리가 반듯한 이마 위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그 아래 짙은 눈썹과 얌전히 닫혀 있는 속눈썹이 아주 가끔 미세하게 떨리곤 했다.

오뚝하게 솟아 있는 콧대와 굳게 닫힌 입술이 보기 좋았다. 자는 와중에도 한 점 찡그림이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나는 잘생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 다른 의미로 한숨을 쉬었다. 문득 그 꿈이 다시금 생각났다.

까만 머리에 함께 뛰어 놀았던 아이. 기억을 잃기 전에도, 이미 까맣게 잊어버렸던 어린 어느 날.

‘그때… 이 사람과 계속 인연이 이어졌더라면. 그래서 좀 더 자연스럽게 만났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잠시 잊어버렸지만, 이제 기억이 돌아온 이후에는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다나는 레온의 얼굴을 응시하며, 리안과의 첫 만남을 생각했다.

***

열세 살의 다나 더니즈는 흔히들 생각하는 어여쁜 소녀의 모습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이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다나는 커다란 배 안에서 먹고 자고 했다. 이쪽 대륙과 동대륙 사이를 횡단하는 큰 상선 안에서 거의 일 년을 지냈다.

바닷바람과 햇볕에 오랫동안 노출된 피부는 어린데도 거칠고 거뭇거뭇했다.

긴 머리가 거추장스러웠는지, 뱃사람이 아무렇게나 자른 금발 머리는 짧고 끝이 지저분했다.

그런 다나가 오랜만에 육지를 밟고, 루셸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곳은 펠리스 영지였다.

“다나, 이곳에서 지내면서 잘 배우고 익히도록 해라. 종종 찾아오마.”

다나는 겉보기엔 영락없이 개구쟁이 소년 같아 보였지만, 실제로는 나이에 비해 성숙했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며, 배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나는 자신을 홀로 이곳에 둔다는 사실에 많이 서운했지만, 티 내지 않고 루셸을 배웅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빡빡한 스케줄로 바쁜 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외롭기도 했다. 펠리스 백작의 하나뿐인 자식은 지금 수도에 가서 이곳에 없다고 했다.

펠리스 백작 부인은 부탁받은 대로 다나를 보살피며 선생까지 붙여가며 가르치고 있었지만, 그 외의 시간은 거의 다나 혼자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라곤 다나 외에 찾아볼 수 없었던 저택에 또래 소년이 들어왔다.

소개할 때 자식이 하나뿐이라더니, 하녀의 말로 아이는 펠리스 백작의 혼외 자식이라고 했다. 밖에서 어머니 손에 자라던 아이는 그 친모가 죽고 홀로 남겨져 어쩔 수 없이 백작이 거둬야만 했다.

그때, 다나는 리안 펠리스를 처음 만났다.

다나는 주로 저택의 별관 2층에서 공부를 하고 1층에서 잠을 자곤 했다.

외부계단을 이용해 오르내렸고, 그날도 강의가 끝난 후 내려가던 중이었다. 별관은 늘 그렇듯, 가끔 관리해주는 하인들이 오는 것 외에는 한적했다.

책을 두 손으로 안고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다나를 힘껏 떠밀었다. 다나는 몸이 기울자 책을 바로 포기하고, 간신히 난간을 잡아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 만일 자칫 잘못했으면 계단 아래로 추락해서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그렇게 계단에서 쓰러져 위를 보니,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뭐야? 왜 이 집에서 살고 있는 거지? 아버지 자식은 나로 충분해, 당장 꺼져. 죽어버리라고.”

소년은 다나가 멀쩡한 걸 보고는 다시 한번 그녀를 발로 밀어버리려 했다. 다나는 그의 발이 닿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난 원래부터 이 집 사람이 아니야. 손님이라고.”

그리고 화가 난 다나가 오히려 그를 밀어버리려는 듯 손을 뻗자, 소년은 당황한 눈으로 사과도 없이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버렸다. 실제로 서보니 다나가 조금 더 컸다.

도망가려던 아이는 뭔가 생각난 듯 다급하게 소리치며 다시 뛰어갔다.

“너 이르지 마!”

***

‘나중에… 내가 여자이고, 더니즈란 성을 갖고 있다는 걸 안 후에… 친절해졌지.’

다나는 생각에 잠긴 채 무심결에 레온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 스스로 놀라 손을 떼냈다.

자꾸 레온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입술로 계속해서 시선이 가 생각에 방해가 됐다.

다나는 조심스럽게 그가 깨지 않도록 침대에서 내려왔다.

‘생각해 보면, 리안은 그때도 날 죽이려고 했던 거야.’

왜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리안은 분명 백작의 아들이었지만 사생아란 이유로 아무도 관심 가져 주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리안은 어딘가 불안정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게 못내 신경이 쓰였다.

이후 다나를 대하는 리안의 태도가 친절하게 바뀌기도 했고, 그는 자신의 불행한 상황에 대해 다나에게 자주 털어놓았다. 그렇게 무심결에 리안과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곳에 머물며 외로웠던 감정도 가까워지는데 한 몫 했던 것 같다.

다나는 짧게 회상하며 얇은 스웨터를 걸치고, 침대에 누워 있는 레온을 잠시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기 전, 자신은 바보처럼 그에게 모든 걸 줄 만큼 리안을 사랑했다. 지우고 싶은 과거였지만, 어쨌든 그건 사실이었다.

‘그때의 마음과는 다른데….’

다나는 그때 리안에게 품었던 마음과 지금 레온에게 느끼는 감정을 비교했다. 레온에게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게 훨씬 많았다. 심지어 자신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를 이용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리안은 맹목적으로 믿었다면, 레온에게는 어딘가 조심스러웠다.

지금도 다나는 레온에게 자신이 기억을 찾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를 신뢰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다나는 잠시 산책이라도 하기 위해 소리를 죽여 방을 나섰다.

낮은 이제 제법 더웠지만, 아침 공기는 아직 쌀쌀했다.

‘아힐은 돌아간 건가?’

아힐은 없었고, 대신 황궁 경비들이 곳곳마다 배치되어 있어 안전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나는 잠깐 주변만 돌고 들어가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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