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레온은 눈을 마주치자 슬쩍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행동은 자연스러웠고, 마치 춤의 한 동작 같았다.
그가 뭔가를 말하려,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치마 안쪽은 지금 어떤 상황이지? 다시 입었나? 입을 수가 없을 텐데.”
다나는 레온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다, 태연하게 묻는 내용에 새삼 귓바퀴를 빨갛게 물들였다.
내내 신경 쓰이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잠시 미뤄 둔 감각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아니요… 아무것도 없어요.”
“내내 딴생각을 하던데. 아까 못 다한 게 아쉬워서 질질 싸고 있나 했지.”
레온이 일부러 천박하고 노골적인 단어를 골라 쓸 때면, 뭔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다나는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일부러 자신도 모르게 실수할까 싶어 말을 아끼는 중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턴을 끝내고, 음악이 끝남과 동시에 움직임도 멈췄다.
다나와 레온은 한 걸음씩 물러나 서로를 향해 우아하게 인사했다.
레온은 역시나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이, 단정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춤이 끝나고 그들이 함께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귀족들이 하나둘 말을 걸기 위해 몰려왔다.
“잘 봤어요, 정말 우아하고 아름다운 춤이었어요. 한 쌍의 백조 같았다니까요.”
“아아, 아직 미숙한걸요. 칭찬 고맙습니다. 부인.”
다나는 레온의 곁에서 그들을 상대하며 애써 미소 지었지만, 점점 피로감이 쌓여가고 있었다. 정말 길고 긴 하루였다.
그것을 눈치 챈 레온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팔로 감으며 주위에 양해를 구했다.
“이 사람이 피로한 듯 하니 먼저 쉬게 하겠습니다.”
내내 이렇다 말이 없던 레온이 정중한 말투로 그녀를 위해 양해를 구하자, 주위의 여인들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많이 늦은 시간이죠. 저희도 이제 슬슬 숙소로 가봐야겠어요.”
“대공 전하, 다나 더니즈 님, 그럼 편히 쉬세요.”
금방 물러나는 그들에게 다나는 묵례를 한 후 레온을 올려다봤다. 레온은 그녀를 슥 밀면서 눈짓으로 호위기사 아힐을 불렀다.
아힐은 이 연회에 레온의 호위기사가 아닌 자신의 자작 지위로 들어왔지만, 무장만 해제했을 뿐 여전히 본래의 업무를 하고 있었다.
“먼저 숙소로 가 있어라. 아힐이 안내해 줄 것이다.”
“레온, 당신은요?”
“난 조금 있다 가도록 하지.”
다나가 왜냐는 눈빛으로 빤히 레온을 응시했다.
“혼자 있고 싶은 게 아니었나.”
그러자 레온은 무심하게 말을 툭 내뱉으며, 그녀의 곁을 지나쳐갔다. 조금 뜨끔 한 다나는 아무 말 하지 못한 채, 결국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다나가 완전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본 레온이 조용히 테라스로 나갔다. 테라스 벽 쪽, 밖에서 보이지 않는 방향에는 황실 시종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레온을 보자 고개를 까딱 숙인 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 아가씨께서 이곳에서 이야기한 남자는 리안 펠리스 백작입니다. 한 병사가 말하기를, 그는 연회장 안에 들어가지 않고 한참 주변을 서성거리다 아가씨를 보고는 이쪽으로 접근했다고 합니다.”
“우연이 아닌 게로군.”
“예, 아마도. 지금도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레온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다나가 사라진 방향을 매섭게 쳐다봤다.
“조금 더 주시해라.”
그 황실 시종은 테라티우스 가문의 심복이었고, 황궁에 심어놓은 첩자였다.
레온뿐만 아니라 수많은 귀족들은 자신의 가문 사람들을 황궁 안에 심어놓고.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빠짐없이 알고 싶어 했다.
살얼음 같은 정치판에서 자칫 정보가 부족하여 시류를 잘못 읽는 경우, 자신과 가문이 크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종이 사라지고 레온은 테라스 난간 위에 걸터앉았다.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다.
많은 이들이 돌아갔지만, 아직도 연회장에는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레온은 그곳에 앉아 수도로 오기 전, 다니엘이 했던 보고를 떠올렸다.
***
“전하, 계십니까.”
여느 때와 같이 노크와 함께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온의 집무실은 평소보다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레온은 다음 날 건국일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수도로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대공성에 쌓일 업무를 미리 처리하고 있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다니엘의 표정이 묘하게 밝았다. 그의 손에는 제법 두툼한 종이 뭉치들이 들려 있었다. 모두 레온의 결제를 기다리고 있는 문서였다.
레온은 한쪽 눈썹을 까딱거리며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봤다.
“그게 뭐지?”
“…뭐긴요, 전하께서 오늘 모두 처리하실 업무지요.”
그가 레온의 책상 한편에 쌓인 종이 더미 위에 그것을 툭 올려놓자, 중심을 잃은 서류 탑이 와르르 바닥으로 무너졌다.
“헉, 죄송합니다!”
다니엘은 아까까지 걸려 있던 미소를 싹 지우며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종이들을 주섬주섬 주웠다. 다 줍고 올리려는데, 레온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막았다.
“동작 그만.”
“예?”
“그대로 가져가.”
“예?”
다니엘이 영 알아듣지 못하자,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레온이 그를 흘끔 보며 친절하게 다시 일러 주었다.
“그거 그대로 가져가서 네가 하라고.”
“아하하, 전하 농담도….”
“내가 농담할 사람으로 보이나?”
레온의 목소리에 진심 어린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러자 다니엘이 찔끔하며 훨씬 작은 목소리로 나름대로 이유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전하. 이 일들은 제 권한으로 처리할 수가 없는 일이온데….”
“내가 오자마자 처리할 수 있도록 자네 선에서 검토해놓으라는 말이지.”
레온의 말에 다니엘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상사가 장기간 자리를 비우면, 한동안 눈치 보지 않고 푹 쉬려 했던 계획이 모두 허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예에, 그리고 또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
일이 어찌 되었건 해야 할 일은 마저 해야 했다.
레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목소리를 고쳐 세우며 마빈에게 들었던 정보를 꺼내 놓았다.
“전에 말씀 주셨던 리안 펠리스 백작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레온은 그 일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다니엘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으며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자는 어쩐지 이 성에 아가씨가 오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공비가 될 수도 있다는 것까지….”
다나가 언급되자 레온이 고개를 들어 다니엘을 봤다. 갑자기 자신에게 던져진 시선에 조금 긴장하면서 다니엘은 말을 이었다.
“신분이 귀족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재산이 많다는 것까지 꽤 자세히 아는 걸로 보아 더니즈 상단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레온은 듣는 내내 리안 펠리스라는 이름이 주는 불쾌감이 어디서부터 오는 건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건 전달한 자의 사견이온데.”
“말해.”
“엄청난 자금을 누군가에게서 받은 거 같은데, 그게 케밀턴 공작은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어쩌면 리안 펠리스가 누군가의 재산을 노리고 살해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그것을 듣는 순간 레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머릿속에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리… 안, 하… 지 마…….’
다나를 처음 봤던 날, 의식을 잃은 그녀가 하지 말라며 애원하던 상대가 리안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다니엘의 말을 듣고 왜 이때가 떠올랐는지, 레온은 알 것 같으면서도 뭔가 더 확실한 게 필요했다.
“더니즈 상단과 리안 펠리스가 어떤 관계인지 더 깊이 조사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진짜 다나 더니즈의 행방은 아직인가?”
“예, 그 전엔 여기저기 실종된 이유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는데, 아가씨가 다나 더니즈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소문도 잠잠해졌다고 합니다.”
레온은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더니, 멍하니 서 있는 다니엘에게 앞선 명령을 반복하며 내보냈다.
“그래, 그럼 일단 다나 더니즈보다 리안 펠리스에 대해 더 집중적으로 알아봐.”
“예, 전하.”
다니엘은 상관이 어디를 가든 말든 자신의 업무가 줄지 않는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끼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
새벽까지 지속된 연회도 슬슬 마무리되고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마차를 타고 돌아가거나 황실에서 배정해준 숙소로 흩어졌다.
황궁 안에 마련된 숙소는 연회장에서 가까운 별관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빠져나가는 그때까지, 레온은 내내 테라스 난간에 앉아 있었다.
‘리안 펠리스가 다나 더니즈의 재산을 노리고 죽였다.’
레온은 한 가지 가설을 세워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일들을 하나씩 퍼즐처럼 맞춰보기 시작했다.
‘여자는… 산속에서 목이 졸려 기절한 상태로 발견됐지.’
냉정하게 사건을 짚어보던 레온은 그때 다나의 처참했던 모습이 떠오르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직 이렇다 할 물증은 없다 해도, 뭔가 그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리안이 어떻게 다나가 기억을 잃고 산에 버려지기 전에 상단을 넘겨받았던 건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뜬소문처럼 떠돌던 다나 더니즈의 비밀연인이 그가 아닌가란 생각에 미치자, 레온은 갑자기 질투에 사로잡혔다.
정말 사실이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하여 리안을 지옥 속에 빠뜨리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꽉 쥐고 있는 주먹에 핏줄이 붉어졌다.
“후우….”
길게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회가 거의 파장에 이를 무렵, 그는 문 앞에서 하나하나 귀족에게 인사하며 배웅하고 있는 황실 시종장에게 갔다.
“헛, 대공 전하! 아직까지 계셨습니까.”
“그래. 황제 폐하께 전해주게. 내가 이 시간에 돌아갔다고 말야.”
“예에, 그리하겠습니다. 흡족해하시겠군요.”
황제는 늘 그가 사교계에도 관심 없고, 행사 때마다 눈도장만 찍고 간다며 투덜대곤 했었다.
레온은 포마드로 단정히 넘긴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숙소로 가는 길, 다나가 그곳에 있었지만 레온의 걸음은 그리 밝지 않았다.
연회 내내 다나는 숨긴다고 숨겼지만, 그가 보기에 그녀는 리안 펠리스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 또한, 레온은 짐작이 갔다.
그는 그녀가 언제쯤 자신에게 진실을 털어놓을지, 시험해보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