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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상속녀-57화 (57/92)

57화

다나는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그 남자도 나비 가면을 쓰고 있었다.

정원에는 여러 귀족들이 산책을 핑계 삼아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등장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다나를 보며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 혹시? 어쩌지, 레온이 곧 올 텐데.’

다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레온이 나간 테라스 유리문 쪽을 바라보았다. 다나는 다가오는 남자가 자신에게 춤 신청이나 데이트 신청을 하기 위해 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거의 다 왔을 때쯤 가면 속 눈매를 싱긋 휘어 보였다.

“바람이라도 쐬러 나오셨나 보군요? 레이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다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나는 가면 속의 남자를 알지 못했다. 모르는 게 실은 당연했다. 그녀는 오늘 연회에서 처음 데뷔했고 귀족과 오늘 처음 인사를 나누거나, 아직 안면도 익히지 못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테라스에 설치된 조명이 은은하게 빛을 내며 그 남자의 실루엣이 모두 드러났다. 그러자 남자는 망설임 없이 가면을 벗었다.

“…아.”

“가면이 영 답답하네요, 레이디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다갈색의 곱슬거리는 머리와 날카롭게 찢어진 잿빛 눈동자, 호리호리하고 키 큰 체형이 한눈에 들어왔다.

다나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리다, 그의 시선을 피하듯 아래로 슥 내려갔다. 그녀는 숨을 훅하고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더니 난간에서 내려섰다.

“저는 괜찮아요.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저기. 다… 레이디!”

다나는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서둘러 테라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몇 걸음 걷자마자 잔 두 개를 들고 오는 레온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하아, 레… 온….”

“어디 가? 거기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잖아.”

다나는 레온의 물음에는 아랑곳없이, 갑자기 그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레온은 혹 그녀에게 쏟을까 싶어 양손에 든 잔을 높이 들었다.

“왜 이래? 무슨 일이지?”

“그냥… 레온, 잠시만….”

다나가 레온의 상체를 팔로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레온은 결국 들고 있던 잔을 지나가던 시종에게 건네주고는 다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말해 봐, 무슨 일인지.”

다나의 몸이 크게 부풀었다 훅 꺼졌다. 몇 번인가 숨을 크게 고르고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의외로 다나의 눈은 아주 잠시 떨렸을 뿐 곧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괜찮아요. 그냥… 누가 갑자기 말을 걸어서 좀 놀랐을 뿐이에요.”

“말을 걸었다고? 누가?”

다나는 레온의 품에서 조금 벗어나며, 주위를 살피는 척 휙휙 고개를 돌렸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누군지 못 봤어요. 아아, 레온 이제 춤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에요.”

다나는 일부러 주제를 돌리려는 듯 중앙홀을 가리키며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다나.”

레온이 급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 세웠다. 다나는 그를 보며 눈이 조금 커지다, 가늘게 호선을 그려 보였다.

“네? 우리도 구경 가요… 아, 하지만 오늘 춤추는 건… 무리인 것 같아요. 피곤하네요.”

“그게 다인가? 누가 말을 걸어서 놀란 게 다냐는 말이야.”

레온이 재차 캐물었고, 다나는 순간 입을 다물며 표정을 굳히다 다시 본래대로 돌아와 미소 지었다.

“…그럼요.”

그리고 그가 잡고 있는 손을 살짝 뿌리치며 유유히 홀이 잘 보이는 밝은 곳으로 걸어갔다.

레온은 그런 다나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방금 그녀의 손을 잡았던 손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모두 다나의 손에서 나온 땀이 묻은 것이었다.

“뭔가… 숨기는 게 있군.”

그가 중얼거리며 손가락 하나를 위로 까딱 움직이자,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누군가가 다가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레온은 그에게 짧게 뭔가를 지시하고는 다시 다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곧 중앙홀에 조명이 환히 켜졌다.

음악이 흐르고, 무도회의 첫 번째 춤은 늘 그랬듯이 황제와 황후가 춤을 췄다. 그 둘을 중심으로 전문 춤꾼들이 그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안무를 선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해 있었다.

***

리안은 다나가 앉아 있던 테라스 난간 위에 툭 걸터앉았다. 그리고 유리창 너머로 포옹하다 사라지는 레온과 다나의 모습을 빠짐없이 보고 있었다.

‘진짜 날 못 알아본 건가? 그 반응은 뭐지?’

리안은 헤일즈에게 가지 못한다고 전달했지만, 실은 내내 연회장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다 가면무도회가 시작되는 타이밍에 맞춰 잽싸게 다시 들어왔다.

가면을 쓰고 먼발치에서 다나를 보고 있다가, 그녀가 혼자된 틈을 타 슬쩍 자신을 드러내보였다.

정상적인 반응이라면 자신에게 심한 적의를 드러내야 옳았다. 아니면 무서워서 벌벌 떤다거나, 그녀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른다 해도 그다지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무덤덤한걸.’

그녀는 조금 놀란 기색이긴 했지만, 그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남자를 피하기 위해 가볍게 그 자리를 벗어났을 뿐이었다.

‘그새 내 얼굴을 잊었을 리는 없고… 이상해, 뭔가.’

게다가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바로는 레온의 옆에 있는 저 여자는 ‘다나 더니즈’의 대역으로 더니즈 상단에서 보낸 여자였다.

그런데 저 여자는 진짜 다나 더니즈이다.

그럼 다나가 처음부터 계획하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일부러 하벌트에게 접근한 걸까? 하지만 진짜 그녀라면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뭐란 말인가.

‘도대체… 알 수가 없군. 뭐가 뭔지.’

리안은 하벌트에게 자초지종을 더 물어보려다 일단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난간에서 내려와 조금 전 다나가 들어갔던 테라스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저 멀리 다나의 곁엔 레온이 딱 달라붙어 있었다.

‘저래서는 다시 말 걸기도 힘들잖아.’

속으로 투덜거리며 기회를 엿보는데, 반대편 기둥 쪽에서 자신과 같은 눈으로 둘을 보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저 여자는….’

하셸 제국의 복식과 꽤 동떨어진 드레스를 입은 여자, 주위에 시녀 둘이 붙어 있었고 연신 그녀의 비위를 맞추며 시중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의 기분은 영 좋지 않아 보였고, 짜증 난 얼굴로 레온과 다나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리안은 그녀가 누군지 머리를 굴리고 굴려 드디어 기억해냈다.

‘크리스틴 왕녀? 맞나?’

더운 남부지방에 위치한 엘라드 왕국의 복장은 노출이 더 많고 옷감도 얇았다. 단연 눈에 띌 법했지만, 크리스틴 왕녀는 의외로 눈빛만 매서웠을 뿐 구석에 얌전하게 있어서 별로 주목받진 않고 있었다. 주목을 받지 않는 것을 넘어서 어딘가 동떨어져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가면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리안은 눈을 여전히 다나에게 고정한 채, 천천히 크리스틴 왕녀 쪽으로 이동했다. 그녀의 뒤쪽에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갔다.

왕녀 주변에는 의외로 사람이 별로 없었다. 리안은 다가가자마자 왜 그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뭐 해? 빨리 잔을 채우지 않고.”

“왕녀 전하, 이미 술을 과하게 드셨사온데….”

“알게 뭐야, 이런 지루한 연회에 술이라도 없으면 무슨 재미야?”

“하오나….”

“아아! 정말…귀찮게!”

크리스틴 왕녀가 손을 높게 치켜들어 시녀의 뺨을 내려치려 했다.

“이크.”

리안은 철저히 계산된 몸짓으로 그녀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뭐야? 무엄하게, 어디 손을 대는 거야?”

이렇게 가까이 오니 알 수 있었다. 다른 귀족들이 그녀의 주변에 없는 이유는 타 왕국의 왕녀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주위에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고, 혹시 아랫것들에게 피우는 진상이 자신들에게까지 불똥 튈까 염려되어 다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것이었다.

물론 그 상황 또한 크리스틴 왕녀에게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왕국에서 그녀는 늘 주목받는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리안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놓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왕녀 전하. 이 고귀한 손이 미천한 것에 닿아 봐야 더럽혀지기만 더하겠습니까? 대신 제가 한 잔 드려도 괜찮으실지요.”

리안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크리스틴 왕녀의 허락도 없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샴페인 병을 집어 들었다.

그가 스스로 수완이 좋은 편은 아니라 여겼지만, 헤일즈를 유혹했던 방식을 최대한 떠올리며 활용했다.

왕녀는 이미 흐려진 눈동자를 최대한 치켜뜨며 도도하게 말했다.

“따라봐.”

“감사합니다.”

“그런데 계속 한곳을 보시던데… 저기 뭐가 있습니까?”

리안은 잔을 채워 주며 무심한 듯 이어서 말을 건넸다. 이렇게 쉽게 다가올 수 있었던 건 지금 그녀는 지루해 보였고, 누군가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기, 저 인간.”

“누구… 말씀이신지?”

“저 인간이 날 갖고 놀았어. 감히 엘라드 왕국의 왕녀인 날…!”

“그러니까 테라티우스 대공… 전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리안은 뻔히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재차 확인하며 질문했다. 지금 이 장소에서 대공을 상대로 저 인간이라 지칭하는 것을 맞장구 치기엔 위험부담이 컸다.

사실 리안이 하셸 제국의 귀족이라는 걸 안다면, 왕녀가 이런 식으로 발언하는 것은 상당한 무례를 범하는 일이었다.

“그래, 자기 성에 고양이가 아프다고 날 두고 돌아갔단 말야.”

“고양이… 말씀입니까? 저… 대공 전하께서요?”

적당히 왕녀를 상대해주려던 리안은 그 말을 듣고 그녀가 완전히 술에 맛이 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리안은 다시 왕녀에게 집중했다.

“그래서 알아봤는데 고양이 같은 건 성에 있지도 않다고 했어! 고양이라는 건 저 여자를 두고 한 말이겠지.”

“…그러셨군요, 정말 화가 나셨겠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였습니까?”

“넌 그것도 모르니? 내가 사절단으로 온 날이잖아. 국경선을 넘어온 날 말야.”

왕녀가 언제 국경선을 넘었는지, 리안이 알 게 뭐란 말인가. 관련 업무를 하고 있지도 않았고, 엘라드 왕국의 사절단이 오는 날짜 같은 건 하셸 제국에서 그다지 중요한 이슈도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무에 눈이 어두워… 죄송하지만 언제인지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잔을 호로록 들이켜 비우는 왕녀에게 비굴한 웃음을 보이며, 다시 술을 따라주었다.

“딱 두 달 전이야. 내가 왕국에서 출발한 게 그 전날이니까.”

리안이 그 말에 입을 다물고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가만… 두 달? 그때라면 아직… 메리를 데리고 있을 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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