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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상속녀-53화 (53/92)

53화

“아아, 어릴 적부터 남다르셨군요. 어떤 준비를 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원래 돈이란 것에는 주인이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돈을 잘 굴리고 부풀릴 수 있는 사람이 갖고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마빈은 콕 집어 어디라고 말할 순 없지만, 리안의 말이 어딘가 애매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동의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고개만 가볍게 까딱 흔들었다. 리안은 역시나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운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많은 돈은 짐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짐을 덜어주고 편히 쉬게끔 해 주었지요.”

내내 표정 관리를 하던 마빈의 얼굴이 모호해졌다.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어쨌든 리안은 누군가에게 많은 돈을 받았다는 말을 그렇게 이상한 논리를 내세우며 돌려 말했다.

마빈이 별다른 말이 없자, 리안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난 듯 앞선 주제를 꺼내 들었다.

“하긴, 그래서 대공 전하가 그 여자를 택했겠군요. 나와 같은 이유로… 하지만 어려운 길을 가려 하십니다. 큭큭, 어쨌든 귀족과 평민은 엄연히 피가 다른데, 훨씬 편한 방법이 있는데 말이죠. 물론 그것도 사실 다 소용없는 일이지만, 하하하.”

리안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핏줄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귀족과 평민의 피를 구분 지으며 말하고 있었다.

마빈은 굳이 그 모순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리안은 독한 술에 취했는지, 점점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다 그 자리에 엎드린 채 잠들어 버렸다.

그를 보고 있던 마빈이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 자리를 벗어나며, 리안의 잠꼬대를 듣고 말았다.

“그래도… 살려는 둘걸….”

‘…상대가 죽었어?’

그대로 가려던 마빈이 리안을 잠시 바라보다 표정이 굳은 채 유유히 스필플라츠를 빠져나왔다.

마빈이 나와 궐련을 입에 물자, 어떤 남자가 어둠 속에서 다가와 성냥을 이용해 불을 붙여주었다. 마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보자, 그가 씨익 웃어 보였다.

“어떻게 알고 하필 오늘 온 거냐? 다니엘. 혹시 나한테 뭐 붙였냐?”

마빈은 마치 보란 듯이 휙휙 주위를 둘러보며, 의심스런 눈으로 다니엘을 봤다. 하지만 다니엘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보니, 뭔가 한 건 잡으셨군요.”

“아직은, 딱히. 나야말로 묻자, 레온이 정말 그 레이디랑 결혼한대?”

다니엘은 입을 다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빈은 충분히 알아들었는지, 그의 입이 반쯤 벌어지며 물고 있던 궐련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진짜구나. 젠장, 진짜라니. 왜? 아니지, 아니야. 아아, 내가 더 빨리만 만났어도.”

마빈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진심으로 통탄스러워했다. 그는 그의 인생 통틀어 처음으로 반한 여자를 레온에게 뺏긴다는 게 억울하고 분했다.

실제로 딱 한 번 본 그 여자의 신분이나 정체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진심으로 아쉬웠다. 따지고 보면 마빈이야말로 정말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게 비록 여자에 한정한 것이었지만.

“그 말을 전하 앞에서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저희 전하와 가까운 친구분이시래도….”

“아아, 아무렴. 그럼 그놈 그때 그 반응이 정말이었다는 거잖아. 하지만 놀리긴 해야지, 그건 말리지 마라.”

이제야 땅에 떨어진 궐련이 보였는지, 마빈은 그것을 발로 툭 치면서 아쉬워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래서 정말 오늘 들은 얘기는 그게 다입니까?”

“뭐 좀 궁금했던 놈이랑 이야기하긴 했는데, 열등감도 심하고 어딘가 지독하게 꼬여 있어서… 나중에 큰 사고 치겠더라. 레온에게 말해서 굳이 가까이하지 말라고 해.”

“그게 누굽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데요?”

“리안 펠리스 백작. 너도 알지?”

다니엘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쩐지 그의 표정이 조금 밝아 보였다.

“케밀턴 공작의 사위가 아닙니까. 안 그래도 대공 전하께서 그자에 대해서도 알아보라 하셨는데, 제가 원체 업무가 많아서… 하하, 조금 늦어졌네요. 저에게 내용 공유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보감찰부 최고 사령관님.”

다니엘은 일부러 그의 공식적인 직함을 불러 자극시켰다. 그가 감찰관, 그것도 최고 사령관이라는 건 극소수를 제외하고 아무도 몰랐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는 알려졌지만 누군지는 절대 비밀이었다.

마빈은 그의 투명한 의도에 고개를 저으며, 난색을 표했다.

“인마, 황제 폐하의 명으로 공무를 수행 중인 사람한테 한낱 귀족 나부랭이 보좌관이 정보를 요구하다니… 쯧쯧. 자네 솔직히 완전히 까먹고 있었지?”

다니엘은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래를 제안했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레온 테라티우스가 한낱 귀족 나부랭이가 아니라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알려주시면, 각하께서 알고 싶어 하는 걸 저도 하나 알려드리죠.”

“호오, 레온이 그걸 알고도 가만히 있을까?”

“각하께서만 말 안 하시면 전하께서도 모르는 일이 되실 겁니다.”

“흐음, 뭐든 가능한 건가?”

“네, 대신 단 하나만요.”

마빈은 구미가 당기는 듯 눈을 빛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어차피 레온에게 알려줄 이야기였고, 잠깐 튕긴 덕분에 자신은 다니엘의 정보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솔직히 반은 술에 취한 헛소리 같긴 해. 무슨 정보랄 것도 없어. 돈을 엄청, 정말 엄청 좋아한다는 거랑.”

마빈은 곰곰이 머리를 쥐어짰다. 머리는 좋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단순했다. 하지만 욕심은 누구보다 많아 보였다.

“뭔가 구린내가 난다는 점. 누구한테 돈을 받은 거 같은데 그게 누군지 모르겠어. 죽은 건지…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해서도 알고 있더라? 이거 벌써 소문이 나도 괜찮은 거야?”

“설마요, 물론 대공성에 여자가 있다는 정도야 이제 꽤 알려졌겠지만… 그분의 신상까지는 아무도 모를 텐데요.”

심지어 본인도 잘 모르고.

“흐음, 그게 뭐라더라. 신분이 다른데 어떻게 대공비가 될 수 있냐는 둥, 레온도 혹시 돈이 목적인 건가 하더라. 근데 소용없을 거라고도 했고. 그 여자, 아니… 그 레이디가 돈이 좀 많은가 봐?”

그 말을 들은 다니엘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 그래? 다니엘.”

“아… 그러니까.”

다니엘조차도 다나가 더니즈 상단의 대표 ‘다나 더니즈’의 대역으로 왔다는 사실은 어제에서야 알게 되었다. 외부에는 아직 레온과 함께 있는 여자가 다나 더니즈라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

아무리 마빈과 정보를 거래하기로 했다지만, 이 일을 공유하기엔 시기상조였다.

‘그나저나 리온 펠리스 백작이 어떻게 그분이 더니즈 상단과 관련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지? 설마 대역이라는 것까지 아는 건가?’

다니엘은 돌아가는 대로 펠리스 백작과 더니즈 상단과의 관계를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공식적으로 더니즈의 상속녀와 테라티우스 대공이 부부가 될 예정이었기에, 레온에게 피해가 없으려면 더니즈 상단에 대해 샅샅이 알아두어야 했다.

물론 다니엘도 꾸준히 조사해왔고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아는 것과 뭔가 다른 것이 있다는 걸 감지했다.

대답도 없이 고민에 빠져 있는 다니엘을 마빈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를 불렀다.

“이봐.”

“예, 예?”

다니엘은 조금 놀라며 마빈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긴장했다.

‘이 내용을 알려달라고 하면 어쩌지?’

다니엘은 ‘무엇이든.’이라고 말한 아까를 바로 후회했다.

다니엘의 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빈은 이리저리 딴청 피우며 뜸을 들이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 레이디는….”

그리고 서두가 들리자마자 다니엘은 뭔가 변명을 하려 했다. 하지만 곧 마빈의 다음 대사가 바로 이어졌다.

“어떤 남자를 좋아하시나? 레온같이 고위 귀족을 좋아하나? 아님 외모를 보시나? 좋아하는 음식은 혹시 알고 있나?”

다니엘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의심하며, 조금 짜증 난 표정으로 귀를 후벼 팔 뿐이었다.

***

다니엘은 복잡한 얼굴을 한 채 성으로 복귀했다. 어두운 밤에 나갔던 그가 돌아온 시간은 막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는 이상 어느 정도 조사에 대한 계획만 잡고 쉴 예정이었다.

넓은 1층 로비를 지나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보좌관 집무실은 당연하게도 레온의 집무실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2층 복도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났다.

다니엘은 조금 당황스러워하면서도 걷는 속도를 늦췄다. 그쪽도 다니엘을 발견하고 멈추긴 했지만, 어딘가 안절부절못해 보였다.

다니엘은 씁쓸함을 느끼며 공손한 태도로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일찍 일어나셨군요.”

상대는 흘긋 다니엘을 보고는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고개만 살짝 숙였다. 다니엘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전에 제가 드린 말씀은….”

다니엘이 과거의 일을 꺼내자, 상대는 더 그를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다음 말이 이어지자 놀란 눈으로 다니엘을 보았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때도 사과드렸지만,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대공비가 될 분을 몰라 뵙고… 용서가 안 되신다면 어떤 벌을 내리셔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니엘은 허리를 깊게 숙이며 다나에게 용서를 구했다. 다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으니… 그만 가보세요.”

용서하는 듯한 뉘앙스의 말이 떨어지자 다니엘이 고개를 들고 다나를 살펴보았다.

아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지만, 다나는 뭔가를 손에 쥐고 등 뒤로 숨기고 있었다. 다니엘은 그게 뭔지 몹시도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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