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웬디의 서슴없는 질문에 다나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그래 보이나요?”
“저뿐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긴 해요. 아, 물론 아가씨가 잘못됐다는 건 아니에요! 마땅히 벌 줄 자격이 있으시죠!”
“웬디는 테라를 나보다 잘 알겠죠. 어땠나요? 나쁜 사람이었나요?”
자신에게 질문이 오자 웬디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빴어요. 마음에 안 들면 누군가를 잘 따돌렸거든요. 그거 때문에 울면서 나간 하녀도 많아요.”
“테라가 마음에 안 들어 하면, 다른 하녀들도 동조하나 보네요.”
“그게 어쩌다 보니… 테라가 말을 잘해서 은근히 따르는 하녀들도 많긴 했어요. 일을 오래 했으니까, 이것저것 잘 가르쳐주기도 하고.”
“그랬군요.”
다나는 다시 웃음을 거두고 테라가 있는 응접실로 걸어갔다. 며칠 만에 본 테라는 혈색이 조금 나아 보였다.
여전히 지하 감옥에서 손과 발이 묶인 채 지내긴 했지만, 하루에 한 끼 정도는 먹게 해주었다. 비록 그 식사는 마른 빵 한 조각에 묽은 수프 한 그릇이었지만, 그마저도 테라에게는 생명줄과 같았다.
테라는 그것이 다나를 만난 이후 일어난 변화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다나를 바라보는 표정에서 왠지 모를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잘 지냈어요? 전보다 나아 보이네요.”
“저, 제게… 이러시는 이유가 뭔가요?”
다나는 대답 없이 눈만 몇 번 깜빡이고는 다른 하녀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테라가 있는 자리에 의자 하나가 놓여졌다.
병사들은 테라를 부축하여 그곳에 앉혔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은 테라는 바닥에 무릎을 꿇을 때보다 한결 편해 보였다.
“이유를 지금부터 만들까 해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테라가 지금 바라는 건 뭐죠?”
테라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은 씻고 눕고 싶어요.”
“그다음은?”
“저에게… 죄를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약간의 망설임이 있긴 했지만, 테라는 뻔뻔하게도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말했다. 그녀는 어차피 다나에게 밑바닥을 보인 마당에, 굳이 가식을 떨 이유가 없다 생각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나요?”
그 말에 테라가 고개를 번쩍 들어 다나를 마주 보다, 다나의 여유 있는 모습에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럼요. 잘못했죠. 아가씨를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제가 대공님을 잘 안다 생각해서 그만 실수했어요.”
잘못을 인정하긴 했지만, 어딘가 뉘앙스가 미묘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 여기기보다는 앞날을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지금 잡히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은 안 했겠죠?”
“…아마도… 요.”
“아아, 정말 솔직해서 좋긴 한데.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니 용서는 못 하겠네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테라는 정말 알 수 없단 표정으로 다나를 보았고, 다나는 양손을 편히 소파 팔걸이에 앉은 채 등을 기댔다.
“제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해서 이러신 건가요?”
“아뇨, 전 당신이 쓸모 있나 보고 있어요.”
그 말에 테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번에 보니 이 예쁘장한 아가씨가 만만치 않다는 건 알았지만, 지금 느끼는 건 또 달랐다.
어쩐지 자신과 동류인 느낌이 들어 속이 간질간질거렸다.
“어떤… 쓸모를 원하시는지?”
“글쎄요, 스스로 증명해야겠죠.”
다나는 창밖의 해가 뉘엿하게 지는 걸 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게 해줄게요. 하지만 아직 풀어줄 순 없어요, 씻고 바로 감옥에 가두도록 하세요.”
“예, 아가씨.”
다나의 명령에 병사들과 하녀 하나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테라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사실 다나도 아직까지 자신이 테라에게 원하는 바를 모르긴 했다. 다만 그녀에게서 발견한 건 하나 있었다.
‘솔직하면서, 약아 빠졌고. 이익에 밝고….’
어쩐지 말을 하며 자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실 아직 다나는 테라를 싫어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사람에 대한 호불호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랫사람이면서 주변을 자기 의도대로 조종하는 사람….’
다나는 소리 없이 혼잣말을 되뇌며 응접실을 나가 복도를 걸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망설이던 그녀는 고민 끝에 살짝 방향을 바꿨다.
‘레온을 봐야겠어. 지금 가도 되겠지?’
***
밤의 산길은 위험하기 때문에, 리안은 오후쯤 출발하여 지금 막 산길을 지나치고 있었다.
서둘렀지만 슬슬 해가 지고 있었고, 산속의 어둠은 좀 더 빨리 찾아왔다. 보통 사람도 어두운 산길은 싫어했겠지만, 리안은 특히나 더 그랬다.
‘오펠 백작이 그렇게 길게 붙잡지만 않아도, 지금쯤 더니즈 상단에 도착했을 텐데.’
리안은 오늘 오후부터 삼 일간의 휴일을 받아 서둘러 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케밀턴 공작의 저택, 그러니까 헤일즈가 있는 자신의 집으로 가야 했지만 그는 다른 것이 더 급했다.
덜컹!
잘 가고 있던 마차가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뭐야, 갑자기?”
편한 자세로 앉아 있던 리안이 당황하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려는 순간이었다. 마차 차체가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으아악!”
리안은 마차 안에서 뒹구는 자신을 지탱하려 좌석 등받이를 잡고 필사적으로 버텼다.
바깥에는 말의 고삐가 풀렸는지, 말이 다그닥다그닥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날뛰었다.
“으윽, 대체, 갑자기 무슨 일이야. 마부는 뭐 하고….”
리안은 끙끙대며 일어나 머리 위에 있는 문을 열었다. 겨우겨우 팔로 매달리며 마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봐! 어디 갔어!”
이름도 모르는 마부를 어두운 산길 위에서 소리쳐 불렀다. 자세히 보니 마차의 바퀴 하나가 툭 빠져서 저 뒤쪽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리안의 멈칫하며 굳어 버렸다.
‘아니야, 우연이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을 애써 털어버리려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지금은 걸어서라도 이 산에서 내려가야 했다.
뭔가 짐을 챙기려 마차를 둘러보는데, 갑자기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 소리도 없이 뒤로 다가와 리안의 목에 칼날을 들이대고 있었다.
“히익, 누, 누구야… 원하는 게 뭐야? 돈, 돈을 원해? 돈이라면 얼마든지… 억!”
하지만 뒤에 있는 괴한은 그의 말이 듣기 싫은 듯 무릎 뒤를 세게 걷어찼다. 리안은 불같은 통증에 그곳을 감싸려 했으나, 목이 베일까 무서워 꼿꼿이 서 있어야만 했다.
말을 하면 또 때릴까 무서워 입도 뻥긋 못 했다.
“백작님…!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산길 아래에서부터 누군가가 소리치며 허겁지겁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마부였다.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산 아래로 굴러떨어진 것 같았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는지 절뚝이며 계속 올라왔다.
그러자 칼날이 흠칫 떨리고, 그대로 거둬졌다. 리안이 잽싸게 고개를 돌렸지만, 괴한은 하나로 땋은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어느새 반대편 산속으로 잽싸게 사라지고 있었다.
“저, 저놈을…!”
리안은 소리치면서도 겁이 나서 차마 따라가진 못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 사이가 어쩐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젠장, 누가 날 노리는 거야.”
산길로 완전히 올라와 리안을 살피는 마부와 달리, 리안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괴한이 사라진 곳만 떨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마차 바퀴가 빠진 건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마치 ‘그날’ 있었던 일을 재현하는 것처럼.
‘관련된 놈들은 다 죽었는데. 대체 왜 이런 식으로 날 노리는 거지?’
리안의 이복형이며, 펠리스 가문의 장자였던 타논 펠리스는 마차 전복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마차 바퀴 하나가 빠져 일어난 사고였다. 그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지만, 그를 아는 자는 리안 펠리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졌다.
리안은 초조함에 이를 아득 깨물며, 신경질적으로 마부에게 소리 질렀다.
“넌 뭘 꾸물대고 있는 거야? 빨리 마차를 고쳐라!”
“하지만, 이 산중에 어떻게 마차를….”
“그럼 나보고 지금 이 산을 걸어 내려가라는 거야? 가만, 안 되겠다. 저 말을 데려와.”
마차를 고친다 해도 다시 타고 내려가는 건 어딘가 지금은 꺼림칙했다. 리안은 방금까지 혼자 날뛰다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을 가리켰다.
“이 어둠에 승마는 위험하실 텐데….”
“잔말 말고 어서 데려오라니까.”
리안의 다그침에 마부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데려왔다. 말은 아까 놀란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듯 푸르륵 소리를 내며 끌려왔다.
리안은 두어 번 말을 두드리다 훌쩍 그 위에 올라탔다. 그대로 출발할 것 같은 기세에 마부가 다급히 물었다.
“저… 저는 어쩝니까?”
“어쩌냐니? 마차를 고쳐서 알아서 내려와야지.”
“그걸 어떻게 저 혼자….”
“이랴!”
리안은 그의 벙찐 표정을 뒤로한 채 말을 몰아 달렸다.
턱-
“으악!”
그리고 마부의 걱정처럼 그는 얼마 못 가 돌부리에 걸려서 낙마하고 말았다.
“아아, 내 다리… 으아아.”
말도 다리를 다쳤는지 일어나지 못했다. 정말로 말도 쓸 수 없는 상황이라 리안은 결국 절뚝거리며 걸어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더니즈 상단에 도착한 건, 해가 중천에 뜬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였다.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상인과 인부들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리안은 그런 그들을 무심코 지나쳐 올라가려다 귀를 붙잡는 소리에 걸음을 늦췄다.
“그럼 우리 상단 대표가 정말 대공비가 되는 거야?”
“그런데 얼마 전까지 아파서 누워 있었다며, 언제 대공이랑 그렇고 그런 일이 진행된 거야?”
상단의 몇몇 핵심인사를 빼놓고는, 다나의 실종이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당연히 지금 대공에 머무르는 여자가 ‘다나 더니즈’의 대역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하지만 리안은 알고 있었고, 지금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대공비? 이게 무슨 헛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