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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상속녀-47화 (47/92)

47화

“제 신부요?”

어린 레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오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아직 어리긴 했지만, 레온은 자신의 위치와 지위를 알고 있었다.

“어느 집안인가요?”

그리고 당연히 가문 대 가문으로 정략결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웬은 아들의 질문에 난처한 웃음을 짓다, 그의 정수리를 탈탈 쓰다듬었다.

“아주 귀한 집 여식이니 각별히 신경 써서 대해주거라.”

“전하.”

어느새 루셸이 그의 앞까지 다가와서 허리를 숙였다. 그의 절제되지 않은 몸가짐과 인사를 보며 오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셸은 몸에 밴 기사로서의 습관을 완전히 버려 버렸다. 그 노력의 흔적을 오웬만은 알아보았다.

“들어가서 얘기하지, 레온. 멀리 가지 말고 이 근처에 있거라.”

“…예.”

두 어른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아이들은 정원에 남겨졌다.

“아무리 봐도 누군지 기억이 안 나는걸. 도대체 어느 가문이지? 네가 왜 내 신부야?”

아이 치곤 고압적으로 묻는 레온의 말에 다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지나갔다. 그녀는 발소리를 낮추고 무언가를 향해 조심조심 다가가고 있었다.

“내 말 안 들려?”

“쉿, 조용히 해.”

다나가 검지를 들고 단호하게 말하며, 다시 그것을 노려보며 다가갔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키 큰 풀잎 위에 잠자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

조금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레온은 잠자코 다나를 지켜봤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녀와 같이 긴장하고 있었다.

작은 손가락 두 개를 집게 모양으로 만들어 잠자리의 날개 끝을 향해 살며시 뻗었다. 하지만 닿기도 전에 잠자리는 휙 하고 날아가 버렸다.

“아….”

다나는 아쉬운 얼굴로 날아간 잠자리를 바라보다 푹 고개를 숙였다. 레온은 자신의 신부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작은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게 왠지 신경 쓰였다.

“여기 널린 게 잠자리야.”

“응?”

“기다려 봐, 내가 잡아줄게.”

“정말?”

청명한 가을 하늘을 그대로 담은 것 같은 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작은 손으로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모습에 레온은 으쓱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왠지 모르게 부담이 됐다.

“응, 따라와.”

그래도 자신만만하게 외치며 정원 안쪽을 향해 갔고, 다나도 그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 들어갔다.

오웬과 루셸은 2층 방 창가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둘은 아주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장례는 잘 치러 줬는가.”

“예, 화장하여 양지바른 곳에 뿌려두었습니다.”

오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창밖을 더 주시했다. 루셸은 옆으로 그를 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합니다. 전하.”

“자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는가.”

“그분을… 모시고 함께 오랫동안 도망치다 보니… 정이 들어….”

“내가 그걸로 자네를 탓할 거라고 생각했는가.”

오웬은 고개를 돌려 루셸을 보다 그의 어깨 위를 툭툭 두드렸다.

“오히려 자네라서 더 안심이었네. 책임감 있고 좋은 사람이니까, 그녀를 행복하게 해줬겠지.”

“예, 여기저기 떠돌며 힘들기도 했지만… 아이를 낳고 정말 기뻐했죠.”

“아이를 잘 지켜주게. 소피아는… 집요한 사람이야. 내가 계속 지켜보겠지만 엘리사 때도 쥐도 새도 모르게 일을 벌였으니 말야.”

오웬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아내인 소피아를 범인으로 몰고 갈 순 없었다.

더군다나 엘리사는 몰락 귀족의 여식이었고, 지명 수배가 내려진 상태라 더욱 그랬다.

루셸이 주먹을 쥐며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예,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여럿 골라 일부러 데리고 다니곤 했습니다. 저 아이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은 상단에도 거의 없습니다.”

“그럼 아이는 주로 누가 돌보는가.”

“말 못 하는 보모를 붙여두었습니다. 조금 더 크면 펠리스 백작 부인께 교육을 부탁드리려 합니다.”

“펠리스 부인이라면… 어떻게 아는 사이지?”

루셸은 믿음직한 목소리로 펠리스 백작 부인에 대해 설명했다.

“예, 저희 어머니 쪽 친인척 되시는 분입니다. 엄하고 강직하신 분이니 좋은 선생님이 되어 주실 겁니다.”

“그 아이는 로모크 가문의 마지막 핏줄이야. 그들에겐 죄스러운 마음뿐이야… 아니지, 이제는 사라진 왕국 모든 이에게 죄스럽지.”

“그땐 그게 최선이었지 않습니까. 그래도 하셸 제국에서 이쪽을 많이 배려한다고 들었습니다.”

한 나라가 된 지 오래였지만, 아직 그들은 마치 타국을 말하듯 하셸 제국에 대해 말했다.

“배려라, 글쎄.”

오웬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루셸의 말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그랬으면 엘리사가 그렇게 도망치며 떠날 일도, 그렇게… 죽지도 않았겠지.”

“전하.”

“오늘 우리가 만난 걸 알면 또 가만있지 않을걸세.”

“예, 한동안 아이를 데리고 대륙을 떠돌아다닐 예정입니다. 많은 것을 보게 하고, 경험시키고 싶습니다.”

오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고, 루셸은 그런 그를 보다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전하.”

오웬은 그런 그를 딱히 말리지 않은 채, 고맙고 미안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더니즈 상단의 돈은 모두 테라티우스 왕가의 재산입니다. 전하께서 제게 맡기신 종잣돈으로 이루어낸 일입니다. 절대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필요한 순간엔 다시 돌려 드릴 겁니다.”

“자네가 지금까지 불려온 걸 어떻게 그렇게 홀랑 받겠나. 그런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지.”

“그게 무슨 방법입니까?”

오웬은 루셸에게서 시선을 떼고, 창문 밖을 응시했다. 정원 사이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 한동안 시선이 머물렀다.

“레온이 꽤 까다로운 녀석인데, 자네의 딸과 제법 잘 어울려 노는구만.”

오웬의 말투에 어딘가 모르게 진지한 장난기가 배어나왔다. 그의 말에 루셸도 일어나 다나와 레온을 바라보았다.

“로모크의 핏줄이 우리 테라티우스와 이어온 인연은 단지 한두 세대에 걸친 게 아닐세. 옛 영광을 되찾는다는 거창한 생각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저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하지 않나?”

“전하, 혹시….”

“아니, 아니야. 그건 또 피를 부르는 일이지. 하지만 조금은 더 견고해질 필요가 있어. 또 저 아이에게도 걸맞은 지위를 다시 줘야지. 안 그러면 먼저 간 엘리사도, 로모크 가의 가주도 볼 낯이 없을 거야.”

그들은 말소리를 낮추고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다. 문을 나선 둘의 표정에는 착잡함이 감돌았지만, 다가오는 아이들을 보자 다시 밝아졌다.

오웬은 다나를 지그시 바라보다 눈웃음 지었다.

아이들은 꽤나 뛰었는지, 어린 레온도 두 뺨이 발그레 달아오른 채 다나를 옆에서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참, 그녀와 많이 닮았어. 자네에겐… 늘 고맙네.”

“아닙니다, 전하. 늘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아무쪼록 오래도록 건강하시길….”

“내가 자네에게 미안한 일이지. 고개를 들 수조차 없어. 옆에 있으면서도 막지 못했으니… 내가 약속하지. 이 아이는 테라티우스 부인으로 꼭 맞이할걸세.”

“…전하.”

루셸은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기사의 예로서 정중히 오웬에게 인사했다. 다나가 아래에서 루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다른 손은 레온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벌써 가요…? 아직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다나는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별말 없는 레온 역시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모처럼 오웬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두 아이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녀석들, 훗날에 지겹도록 같이 있게 될 거다.”

그 말에 레온은 새삼 오웬이 아까 다나를 두고 신부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말? 우리 또 봐?”

다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온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레온이 맞잡고 있던 다나의 손을 힘껏 잡은 뒤 놓았다.

“응, 또 보자.”

두 아이는 머지않아 또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다음이 되기까지는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그사이 각자에겐 많은 일이 일어났고, 서로에 대한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

티테이블 위로 가느다란 손가락이 톡톡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내가… 다나 더니즈일 가능성이 있을까? 아니야, 아냐. 내가 나를 대역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그럼 저쪽에서 처음부터 알았어야지.’

다나는 손 위로 턱을 괸 채, 멍하니 고민에 빠져 있었다. 차가 다 식어갈 동안 다나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저… 아가씨.”

“…어, 으응?”

지켜만 보던 웬디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테라를 다시 데려다 놓을까요?”

“아, 그렇지. 지금 갈게요.”

다나는 테라를 다시 불러놓고는 생각에 빠져 있느라 깜빡 잊고 있었다. 웬디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벌떡 일어났다.

서두르는 듯한 행동에 웬디가 잠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옷매무시를 만져주었다.

“상대는 죄인이에요. 아가씨, 천천히 가셔도 괜찮아요. 그리고 저희한테도 이제 말씀 낮추시고요.”

“그래도 아직… 제가 뭐라고.”

아직 정식으로 혼인한 사이도 아닌데, 대놓고 주인 행세를 하기는 아직 민망했다. 물론 이미 테라를 오라 가라 하는 것부터가 월권이긴 했지만, 직접적인 피해자란 생각에 스스로 합리화했다.

“무슨 소리세요. 대공 전하의 약혼녀신데… 내일부터 정식으로 교육도 받으신다면서요.”

“아… 그랬죠.”

레온과의 혼인은 단순한 혼인이 아니었다. 무려 하셸 제국 유일한 대공의 부인, 대공비가 되는 일이었다.

황실 사람들을 제외하고, 이 나라 사교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이다. 원래 귀족 영애였다 해도 처음부터 다시 배울 만큼 익힐 것이 많았다.

레온은 다나가 바쁜 것이 싫어 그 모든 걸 생략하려 했지만, 다니엘의 끈질긴 설득에 최소한의 선생만을 붙이기로 했다.

“아무튼 일단 테라를 보러 가야겠어요.”

다나가 문을 나서자, 웬디가 뒤로 따라붙었다. 릴리는 다나의 말이라면 뭐든 옳다 하며, 맞장구쳤지만 웬디는 가끔씩 자기의 생각을 가감 없이 말하곤 했다.

“저는 아가씨께서 왜 테라를 보시려는지 모르겠어요. 뭔가 궁금한 게 있으신 것 같기도 한데… 또 하시는 거 보면… 아, 혹시 복수하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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