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다나 양.”
“예, 공작… 아, 아버님.”
다나는 아직 호칭이 어색해 보였다. 그녀를 에스코트하여 함께 걷던 오웬이 걸음을 늦추며 그녀를 불렀다.
“아까 보니 궁금한 게 많아 보이던데 더 물어볼 게 있는가.”
“그게, 제가 어쩌다 보니 예전 일들을 잘 기억 못 해서요.”
“음? 그게 무슨 소리지?”
다나는 머뭇머뭇거리며 그럴듯하게 말을 지어냈다. 자신에게 친절한 오웬을 속인다는 게, 양심에 꺼려졌지만 그래서인지 더더욱 철저하고 싶었다.
“제가 얼마 전에 사고를 당해 머리를 다쳤어요. 그래서… 옛 기억들이 종종 잘 떠오르지 않곤 해요.”
다나는 말을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오웬의 눈치를 봤다. 자신의 말을 무리 없이 납득할까? 오웬은 다나의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굳어지며 다급히 되물었다.
“사고라니, 큰 사고였나? 더 다친 곳은… 기억을 잃을 정도면 아주 큰 사고를 당한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 전에 이곳에 며칠 있었다지?”
“아, 음. 심각한 건 아니에요. 잠깐 대공 전하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냥 가끔… 기억에 문제가 있긴 해도 지금 사는 데는 지장 없고요.”
과하게 걱정하는 오웬을 보니 더 가슴 한구석이 콕콕 찔렸다. 사실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무엇을 물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기억을 조금 잃었다고 둘러대어 놓았지만, 자신이 누군지 모를 정도로 잃었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건 곤란했다.
오웬은 잠시 말이 없었다. 다나는 그 침묵에 잠시 불안을 느껴 슬쩍 그를 봤다.
그는 다나를 빤히 보다 ‘으음.’ 소리를 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릴 적 이곳에 왔던 건 기억하는가?”
“아… 그게.”
다나는 화들짝 놀라 눈이 커지다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를 어떻게든 숨겨야 했다.
‘어릴 적… 내가 여기 왔다고? 그건 꿈에서 본 장면인데.’
단순히 우연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역시 그럴듯하게 대답하며 넘겨야 한다.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와 같이 왔던 것 같은데요. 어렸을 적 일이라 역시 거의 잊어버렸어요.”
“하긴, 그럴 만도. 레온 그 녀석은 그날을 전혀 기억 못 하니까 말야. 헤어지기 싫다고 그렇게 아쉬워하더니… 거참.”
“제가 대공 전하를 만난 적이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렇단다. 저쪽 정원에서 함께 뛰어놀았지. 다나 양은 루셸 더니즈, 자네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왔었네. 그 이후 단 한 번도 그자와 난 만나지 않았어. 그래도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다나는 땅에 붙어 있는 발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웬이 말하는 건 진짜 ‘다나 더니즈’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왜, 그가 지금 이야기하는 내용 속에 자신이 꿨던 꿈과 같은 장면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오웬을 붙잡고 뭔가 묻고 또 묻고 싶었다.
‘아냐, 아니야.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다나 더니즈는 몸이 아파서… 나오지 못한다고 했어.’
하지만 더니즈 상단에 있던 자들은 다나 더니즈를 실제로 보여준 적이 없었다. 한 번쯤 직접 보면 더 잘 따라 할 수 있었을 텐데도, 또한 그들은 진짜 ‘다나 더니즈’에 대해 제대로 얘기해준 적도 없었다.
겨우 작은 꿈 한 조각이 맞춰진 것뿐이었지만, 그것이 다나에게 가지는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확신은커녕, 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생각하면서도 심장이 쿵쿵거리며 요동쳤다. 두려움과 희미한 설렘이 함께 찾아왔다.
“그때… 왜 저희 아버지가 이곳에 오셨었나요?”
목소리가 떨리지나 않을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오웬은 여전히 자상하게 그녀에게 설명했다.
“바로 오늘을 약속하러 왔었단다. 바로 레온 녀석과 다나 자네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였지. 그리고 또….”
말을 이어가던 오웬은 다나의 뒤편을 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내렸다.
“저기 레온이 오는구나. 아쉽지만 내 에스코트는 여기까지 해야겠다.”
“아….”
레온이 온다는 말에 다나가 뒤를 돌아 바라보았다. 짙은 검은 머리가 걸음마다 찰랑찰랑 흔들렸고, 자신에게 고정된 눈동자는 피처럼 붉었다.
‘그때 그 아이도… 그랬지.’
그때 ‘전하’라는 사람은 오웬을 닮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럼 그 아이는 레온이 맞았던 걸까?
‘아냐, 나는 다나 더니즈가… 아니잖아.’
“다나 양.”
“네? 네.”
“레온을 잘 부탁하네.”
오웬은 아버지로서 할 법한 짧은 말을 남기고는 성큼성큼 가던 길로 걸어갔다. 다나는 그 자리에 서서 자신에게 오고 있는 레온을 보았다.
‘레온에게 당장 말을….’
다나는 그렇게 생각하다 멈칫하고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그는… 원치 않아.’
레온이 자기 입으로 그렇다 말한 적도 없고, 특별히 그렇게 느낄 만한 계기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다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레온은 내가 기억을 찾길 원치 않고 있어.’
게다가 그 이유 또한 알았다. 자신이 떠날까 봐 두려운 거겠지.
“안색이 좋지 않아. 무슨 일이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레온이 다나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는 때때로 난폭했다. 주로 다나가 자신을 거부하거나, 떠날 수도 있는 상황이 올 때 그랬다. 불안감은 지독한 집착과 강압적인 태도, 독설로 나타났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상했다. 다나는 커다랗고 푸른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그를 봤다.
“아니요, 햇살이 아주 좋은걸요. 사실 좀 귀찮았는데, 나오길 잘 한 것 같아요.”
다나는 말갛게 웃음 지었고, 레온은 늘 그렇듯 그녀의 웃음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따라서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린 그의 모습에 다나 또한 푸른 눈이 더욱 예쁘게 휘어졌다.
“그럼 한 바퀴 돌고 들어가지.”
레온이 내민 팔 위에 다나가 손을 얹었다. 그녀의 보폭에 맞춰 걷는 걸음이 이제는 그에게 꽤 익숙해 보였다.
***
오웬은 건물이 꺾어지는 골목 모퉁이에서 레온과 다나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면서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나의 마지막 질문에 답하지 않은 건, 레온이 나타난 덕분이었지만 반쯤 의도적이었다.
“그래, 굳이… 말할 필요 없지. 내가 안고 가면 그만인 것을.”
옛일은 옛일일 뿐이다. 약속을 지켜서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그 또한 생각해보면 자신의 욕심이었다.
오웬은 레온과 다나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 나와 걸어가려다, 서쪽 별궁 쪽을 힐끔 보았다.
‘소피아가 제정신이라면 이 일도 순조롭지 못했겠지. 차라리 다행인 건가.’
씁쓸히 웃으며 다시 걸었다. 오웬은 그녀의 질문에 결국 답해주지 않았지만, 덕분에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그날의 기억이 다시 생생히 떠올랐다.
***
아주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한사코 서로를 피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봐야 한단 생각에 오웬은 루셸에게 기별을 넣었다.
루셸 더니즈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곧 찾아오겠다고 답을 했다.
옛 친우이며, 자신의 충직한 기사 ‘루시안’은 이름까지 ‘루셸 더니즈’로 바꿔버렸다. 바로 자신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저 사람도 꽤 나이가 들었군.”
먼 곳에서 아이와 함께 오고 있는 루셸을 보며 오웬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마침 부인인 소피아와 그녀를 따르는 가신들이 친정 가문에 방문한 때였다. 물론 일부러 그녀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만날 날짜를 잡았다.
루셸을 전혀 그동안 몸을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근육질로 다부졌던 몸은 꽤 줄어들어 있었고, 짙은 갈색이었던 머리도 은은한 회색빛이 돌았다.
루셸을 보던 오웬의 시선을 자연스레 그 옆에 손을 잡고 걸어오는 아이에게 향했다.
햇살 아래 레몬 빛 금발 머리가 찰랑거렸고, 연신 궁금한 듯 이리저리 굴려대는 눈동자는 푸른빛이었다.
‘엘리사.’
아이는 루셸보다 엘리사를 꼭 빼닮아 있었다.
정원의 입구에 서서 그들을 멍하니 보는데, 자신을 아래에서 보고 있는 눈길이 느껴졌다.
“레온, 언제 온 거냐.”
“아버지께서… 서재에도 보이지 않으시기에.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도 없고요.”
소피아가 많은 가신들을 데리고 갔기도 했지만, 오웬은 미리 사용인들 여럿을 휴가 보내거나 이 정원에서 먼 곳 위주로 배치해두었다.
“그랬느냐, 손님이 온다 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오는구나.”
“누가 오는 거죠?”
“네 신부란다.”
물론 지금 발언은 오웬의 독단적인 말이었다.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아이를 보는 순간 결심이 굳어졌다.
‘어쨌든 저 아이도 로모크 가문의 핏줄인 것을. 그 대단했던 가문에 남은 핏줄이 저 아이뿐이라니.’
로모크 가문은 테라티우스 왕국 시절, 늘 왕비를 배출한 대귀족 가문이었다.
엘리사는 로모크 가문의 영애였고, 또한 차기 왕자비로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 테라티우스 왕국의 왕자였던 오웬과 왕자비 후보인 엘리사는 어린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며 친구이자 연인으로서 서로를 생각했다.
하지만 하셸 제국이 성장하여 점점 대륙을 집어삼키며, 급기야 테라티우스 영토를 포위하고는 그들에게 항복을 권했다.
왕국 안에서 온갖 설전과 회의가 열리는 동안, 하셸 제국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병력을 국경선 앞에 집결시켰다.
결국 테라티우스 왕가는 백성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하셸 제국에 무리하게 대항하기를 포기했다. 그렇게 스스로 성문을 열려는데, 그것을 마지막까지 반대한 게 로모크 가문이었다.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고, 테라티우스 왕가는 하셸 제국에 흡수되어 ‘공작’ 작위를 새롭게 받았다.
하지만 하셸 제국을 반대했던 로모크 가문은 귀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가주는 숙청당했다.
테라티우스의 왕이었다, 하셸 제국의 공작이 된 오웬의 아버지는 나라를 넘겼다는 죄책감과 모멸감에 몇 년을 시름시름 앓다 죽고 말았다.
그리고 오웬이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그 후로 겉으로는 평화로웠다. 하셸 제국은 테라티우스 공작의 권위를 인정해 주었고, 그의 왕토도 영지로 하사하여 직접 다스리게 해주었다.
그때까지도, 오웬은 엘리사와 연인으로 지냈다. 비록 그녀가 평민이 되었지만, 그에게 그녀는 변치 않는 존재였다.
하셸 제국의 황제는 겉보기엔 테라티우스 공작가에 너그러웠고, 때문에 잘만 얘기하면 그녀와 혼인할 수 있을 거라 안일하게 생각했다.
소피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