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들여진 상속녀-45화 (45/92)

45화

“다나 양.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되어 반갑네.”

“…예, 공작 전하.”

“편하게 아버님이라 해도 괜찮아. 레온의 말대로 곧 대공비가 될 몸 아닌가.”

“그럼 아버님이라 부를게요.”

하벌트는 이들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나가 이곳에 도착한 건 채 일주일이 조금 더 지났을 뿐인 데다, 어쨌든 상인의 딸이었다. 그런데 대공비라니, 공작을 아버님이라 부르라니?

아무리 대공의 마음에 들었다 한들, 그 아버지인 공작까지 다나에게 빠졌단 말인가.

“저, 안주인, 어, 대공비란 말씀은… 그러니까… 저희 대표님을…?”

하벌트는 자신도 모르게 다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그러자 다시 레온의 서슬 퍼런 경고가 날아들었다.

“그 손가락으로 누굴 가리키는 거냐. 당장 잘라줄까?”

“아, 아니! 죄송합니다!”

“상단에 무슨 일이 있나요?”

다나가 생긋 웃으며 하벌트를 보았다. 그녀의 태연하고 여유로운 미소에 하벌트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대충 맞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대공 전하께서 워낙 배려해주셔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갑니다.”

“그렇군요… 레온, 너무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다나는 이치에 맞는 말을 레온에게 흘리면서, 하벌트를 향해 슬쩍 비웃음을 날렸다. 그러자 하벌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뭐라는 거야, 저년이.’

다나는 이곳에 오기 전, 그가 장난쳤던 계약서를 잊지 않고 있었다. 물론 하벌트는 그때 그녀가 글을 모른다 생각하며 한 것이었지만, 계약서에는 일이 끝난 후에도 더니즈 상단에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계약서였다.

잠시 말이 없던 오웬 테라티우스 공작은 다나를 보고 있다 옛일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다 보니, 다나 양이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꽤 닮았군.”

“…제가 말인가요?”

이 자리에서 다나를 진짜 ‘다나 더니즈’로 생각하는 건 오웬 한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말에 쉽사리 동의할 순 없었지만, 반박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다나 더니즈’의 외모와 흡사하다 생각하여 내세운 대역이니, 사실 닮았다고 말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 둘… 모두 나와는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지. 들은 적 없는가?”

다나로선 자신이 ‘다나 더니즈’도 아니거니와, 과거의 기억마저 없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떠오르는 꿈 하나가 있었다. 바로 커다란 어른의 손을 잡고 이 대공성에 왔던 꿈이었다.

그리고 성의 정원에서 자신과 함께 온 남자 어른과 대화하던 인물의 얼굴은 꿈에서도 생생히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오웬이 조금 젊으면 딱 그 얼굴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처음 꿈을 꿨을 땐 레온과 조금 닮았다고 느꼈지만, 생각해 보니 둘은 부자지간이라 어느 정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확실히 그 꿈속의 인물은 레온보다는 오웬에게 더 가까웠다.

‘왜… 지? 그땐 공작님을 알기 전인데. 레온을 보고 영향을 받았던 걸까?’

“피곤하면 먼저 들어가도 된다.”

다나가 심각한 얼굴로 말이 없자, 레온은 그녀가 곤란하다 생각했는지 들여보내려 했다. 하지만 다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오웬을 봤다.

“조금만 이야기를 더 들려주시겠어요? 듣고 싶어요. 부모님… 이야기.”

다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꿈이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정말 다나 더니즈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그녀에 대한 배경지식을 조금이라도 더 알아야 했다.

“하긴, 둘 모두 일찍 여의었으니 아는 게 없을 수도 있겠군.”

오웬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부터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모든 걸 알려줄 순 없었다. 이곳에는 다나뿐 아니라 레온과 상단의 관계자도 있었고, 결국 자신만 알고 묻고 가야 할 내용도 있었다.

오웬은 또 하나의, 그 일을 잊지 말아야 할 인물 중 소피아를 떠올리며 씁쓸함을 느꼈다.

“자네는 루셸과 얼마나 같이 일했지?”

“전 상단이 처음 생기고 한 5년 후부터 합류했습니다. 대륙 곳곳에 지사가 생기기 시작했을 무렵입니다.”

“그럼 역시 별로 아는 게 없겠군.”

“예… 뭐 사적인 부분은 워낙 말씀을 안 하시기도 하고.”

실제 루셸과 친했던 이들은 모두 하벌트와 리안이 상단을 장악하며 모두 실각시켜버렸다.

“루셸은… 원래 기사였다. 테라티우스 기사단에서 가장 용맹하고 실력이 좋은 기사였지.”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 듯, 레온도 흘긋 오웬을 보았다. 선대 더니즈와 자신의 아버지 오웬이 어느 정도 인연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지금 처음 들었다.

“기사였던 분이 어떻게 상인이 돼서… 이렇게 크게 만들 수 있었던 거죠?”

다나는 그의 얘기에 집중하며, 궁금한 질문들을 서슴없이 물었다. 오웬은 다나를 보며 입매를 길게 늘였다.

“물론 그 친구의 장사 수완이 좋아서였다. 하지만 그에겐 그래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지. 바로 나와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어떤 약속을…?”

“그대의 어머니를 지켜주라는 약속.”

다나는 그의 말에 입을 다물고 눈을 깜빡였다. 많은 것이 생략되었지만, 어쨌든 루셸 더니즈는 원래 테라티우스 기사였고, 오웬의 명령에 따라 다나 더니즈의 어머니를 지키고 상단을 만들어 부흥시켰다.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야. 게다가 그런 인연이 있는데, 내가 그 딸의 대역을 해도 되는 걸까?’

“무엇으로부터 지킨단 말씀입니까.”

조용히 듣고만 있던 레온이 담담한 눈으로 오웬을 보며 물었다.

하지만 오웬은 애매모호한 미소만을 지을 뿐, 그것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상단의 일은 자네가 많이 하고 있겠군. 대표인 다나 양이 아직 경험이 부족하니까 말야.”

하벌트는 눈으로 슥 다나를 보더니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에, 그렇습니다. 여기 계신 다나 더니즈 님이 대리인에게 위임장을 주셨기 때문에 저와 그분이 함께 상단을 꾸려나갈 것입니다.”

“대리인이 있다고? 다나 양, 아예 상단 일에 손을 뗄 생각인가?”

오웬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조금 당황하던 다나는 그렇다고 하려다가, 문득 생각을 바꿨다.

“당분간은 맡기겠지만, 곧 제가 모든 일을 찾아 해야죠. 대표는 저니까요. 그동안 잘 부탁드려요, 부대표님.”

그녀의 당찬 대답에 오웬은 흐뭇하게 끄덕였고, 하벌트는 입이 반쯤 벌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더 할 얘기가 없다면 그만 일어나시죠, 아버지.”

레온은 어쩐지 이 자리가 불편한 듯, 서둘러 자리를 파하려 했다. 그러자 나머지 셋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자와 따로 할 말이 있으니, 아버지와 먼저 돌아가거라. 곧 따라가마.”

“네? 아… 네, 알겠어요.”

오웬은 기꺼이 다나를 에스코트하여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그들이 테라스를 완전히 벗어난 걸 확인하자마자 레온이 하벌트를 서늘한 눈으로 보았다.

하벌트는 그의 눈빛을 받자마자, 자동으로 부동자세가 되어 굳어버렸다. 레온은 그런 그에게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무슨 커다란 맹수가 어슬렁거리며 오는 기분이 들어, 하벌트는 등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너.”

“히익, 예.”

“목소리 낮춰라.”

레온은 그에게 가까이 가더니, 귀 근처에서 작게 목소리를 깔았다. 오싹한 느낌에 한 차례 부르르 떨던 하벌트가 레온의 경고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진짜는 어디 있는 거지?”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에 심장이 멈출 뻔했다.

‘대공이… 가짜인 걸 알고 있어? 그런데 왜?’

“어서 말해. 진짜 ‘다나 더니즈’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걸 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해야 할지, 하벌트는 일생일대의 위기 앞에 일단 모른 척해 봤지만 당연하게도 별 소용은 없었다.

“죽고 싶나.”

차갑기만 했던 레온의 음성이 마치 칼날처럼 살기를 띠고 흘러나왔다.

“흐익, 그… 러니까, 다나 더니즈는…!”

“목소리 낮추라고 했다.”

“크억… 컥…!”

레온이 커다란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딱히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위협적인 몸짓에 하벌트는 숨이 턱턱 막히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다나 더니즈… 는 없습니다.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제대로 말해라. 없어졌다는 게 무슨 말이야.”

하벌트는 최대한 머리를 쥐어짰다. 뭐라 말하는 게 자신의 생명에 유리할까. 대공은 가짜인 걸 알면서 왜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나.

‘지금 있는 가짜가 마음에 드는 거지, 그래.’

그렇게 결론 내린 하벌트가 알아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완전히 없어졌다는 건… 죽었다는 겁니다.”

다나 더니즈가 죽었다는 말에도 레온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그가 예상했던 일들 중 하나였다. 대역을 세운다는 건 문제가 생겼다는 거니까.

그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단 눈으로 하벌트를 빤히 보았다.

“그게 어느 날 없어져서, 한참을 찾았는데…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자살? 타살?”

“아마도… 자… 살로.”

거짓말을 하려니 한도 끝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리안 펠리스가 목 졸라 죽였다는 말을 그대로 할 순 없지 않은가.

왜 자살했냐 물으면 뭐라 답해야 하지, 하벌트가 또 머리를 굴리던 중이었다.

레온은 그에게서 몸을 떨어트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어쨌든 어느 날 갑자기 진짜가 나타나서, 훗날 대공비를 곤란하게 할 일은 없다는 거군.”

어차피 레온이 마음에 걸려 하던 부분은 해결됐으니, 그녀가 어떤 이유로 왜 자살했는지까지는 관심 없었다. 심지어 자살인지, 타살인지조차 실은 관심 밖의 일이었지만.

‘타살’이라면 혹 다나 더니즈를 누군가 다시 노릴 수도 있는 일이라 다시 확인했던 것이다.

“물론입니다. 그럴 일 없을 것입니다.”

확정적인 대답에 레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벌트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다나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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