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레온이 답답했던 타이를 풀자, 곁에 서 있던 다나가 무의식중에 그것을 받아 걸어두었다.
레온은 그 상황이 나쁘지 않았지만, 다나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낮에 있었던 일을 들었어.”
“네? 아… 테라 일이요.”
“난 네가 그 하녀로 뭘 할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시시하더군.”
“뭘… 기대하셨는데요?”
다나가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묻자, 레온은 셔츠를 벗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혀를 자른다 해도 놀라지 않았을 거다.”
“무슨 그런 말을.”
“네가 말하지 않았으면 어차피 오늘 죽었어.”
“…….”
가끔 사람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게 적응되지 않으면서도,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하녀는 이 성의 고용된 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영지인이었다. 영주는 영지의 주인이자 왕이고 곧 법이었다.
주인이 아끼는 물건을 잘못 건드려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게, 이 신분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레온이 평소 사용인들에게 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목숨을 거둔 편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살벌한 데는 다나가 관련됐기 때문이었다.
“저한테 그런 자격이 있나요. 저는 아직….”
레온이 셔츠에 이어 바지까지 벗으려 하자, 다나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이미 갈 데까지 다 간 사이에, 그녀의 새삼스런 반응이 레온에겐 우스웠다.
“그런 거 치곤 꽤 능숙하던데. 사람 다루는 게 말야. 그 하녀를 네 사람으로 만들 셈인가?”
“테라는 솔직하고 이기적이죠. 누군가에게 충성하거나 의리를 지키지 않아요. 하지만 눈치가 빨라서 이 성에서 오래 일했고….”
“더 말해봐.”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퍽 다정했다. 다나는 안심하고 자기의 생각을 줄줄 읊었다.
“누구의 사람이 되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호불호가 확실하고, 이익에는 민감하고 적극적이라 쓸모가 있어 보여요.”
“그래서 사람이 아닌 개처럼 다뤘단 소리군. 먹이로 훈련시키면서 말야.”
“꼭 그런 의미는…!”
뒤를 홱 돌아본 다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온이 옷을 다 갈아입었다 생각했는데,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벗은 그는 늠름하고 당당했다. 오히려 다나가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얼굴이 벌게졌다.
“잘했다는 소리다. 본격적으로 안주인 행세를 할 모양인데, 마음은 정한 건가?”
“그… 어차피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서요.”
다나는 필사적으로 아래를 보지 않으면서,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왠지 내 핑계를 대는 것 같지만, 그렇다 치고.”
레온이 다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지금 씻으러 갈 건데, 같이 갈 텐가?”
“전… 조금 전에 씻었어요.”
그와 함께 씻는다는 게, 단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가볍게 거절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녀는 슬쩍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레온이 다나를 확 끌어안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럼 더 수월한 거고.”
다나는 그에게 끌리는 본능적인 욕망에서 눈 돌리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다나 더니즈로서의 혼인을 수락하는 대신, 그 위치를 적극 활용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아무 기억도 없으니,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거지.’
욕실 문이 닫히고, 잠시 후 하녀들이 나타나 문 앞에 타월과 가운 등을 놓고 사라졌다. 둘이 만나기만 하면 불이 붙는 일상이 하녀들에게도 이제 꽤 익숙한 풍경이었다.
***
“후우.”
하벌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초조하게 마차 창문 밖을 보았다. 저 너머에 위풍당당한 대공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대공성은 더니즈 상단에서 제안한 물품들을 모두 수용하고 구매했으며, 값도 넉넉하게 쳐주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계속 찝찝했다. 바로 자신이 대역으로 내세운 ‘다나 더니즈’를 대공성에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듣기로는 무슨 대공이 그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해서 정부로 삼는다는 말이 있던데.’
그렇게 생각하면 대공 쪽에서 자신들에게 호의적으로 나오는 것도 말이 되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도 그것이 득이 될지는 더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가짜라는 게 들키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상단 전체가 쑥대밭이 될 것이다. 가족들까지 몰살당하며 대대손손 성에서 노예로 부려지겠지.
“후우.”
그러니 절대로 들키면 안 된다.
그래서 하벌트는 상황을 직접 보기 위해 지금 대공성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초대받은 적은 없었지만, 지금 거래 중인 상단이니 적당히 들여보내 줄 것이다.
문제는 대역인 다나를 만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정말 정부가 된다면 앞으로 만나기 더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 전에 만나야 했다.
‘제깟 게 양심이 있으면 나오겠지.’
대공에게 귀여움 좀 받는다고, 본분을 착각하면 안 될 것이다.
하벌트는 긴장한 얼굴로 성문을 바라보았다. 성안에 들어가기 위해 길게 늘어선 마차 사이로 병사들이 오고 가며 신분은 확인했다.
똑똑-
“실례하겠습니다.”
하벌트가 탄 마차에도 병사가 다가왔고, 그는 커튼을 걷어 신분증을 내밀었다. 병사는 그의 신분증과 마차를 번갈아 보더니, 큰 소리로 물어왔다.
“더니즈 상단 관계자이십니까?”
“그렇네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단장님!”
병사가 누군가를 부르자, 훨씬 높아 보이는 기사가 다가와 문을 열었다.
“내려서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뭐? 갑자기? 난 여자… 아, 대표님만 뵈면 되는데. 좀 나오시라 전달해주시게.”
“대공 전하께서 만일 상단 관계자가 온다면, 직접 기별을 넣으라 하셨습니다. 지금 말씀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하벌트는 대공이란 말에 서둘러 내렸지만, 선뜻 이해가 가진 않았다.
‘대공이 직접 나온단 말야? 나를 보러? 보고 싶었으면 왜 미리 따로 부르진 않은 거지?’
부랴부랴 기사를 따라 들어가니 큰 응접실이 아닌 손님을 맞이하는 정원 테라스로 안내되었다. 소박하게 핀 봄꽃들이 아름다웠지만, 지금 그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먼저 앉아 있던 사람이 있었다. 우아하게 찻잔을 손에 들고 앉아 있는 중년의 신사를 보며, 기사가 급히 부복 자세를 취했다.
“공작 전하! 여기 계셨군요. 휴식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손님을 다른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닐세. 난 곧 일어날 참일세. 그런데 함께 오신 분은 누구신가?”
하벌트는 공작이라는 말에 그가 누군지를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더니즈 상단에서 온 하벌트라고 합니다. 현재 상단에서 부대표를 맞고 있습니다. 잠시 상의드릴 일이 있어 이렇게….”
“오오, 더니즈에서 나왔군. 이리 와서 앉게, 차나 한잔하지.”
오웬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의외의 환대에 그는 얼떨떨하게 오웬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굽어진 허리는 여전히 펴질 줄을 몰랐다.
기사는 눈치껏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대공 전하께 아뢰고 오겠습니다.”
“저, 잠시만요.”
“예?”
하벌트가 머뭇거리며 기사를 불러세웠다.
“저희 상단 대표님을… 꼭 만나 뵙고 싶다고 청을 올려 주십시오.”
“하긴, 이곳에 머문다고 했지. 나도 보고 싶으니 한번 와 달라 청 드리게.”
하벌트가 말할 땐 시큰둥하던 기사가, 오웬이 말하자 바로 묵례하고 돌아섰다.
기사가 사라지고 하벌트는 가시방석에 앉는 기분으로 의자에 앉았다.
하녀들이 향긋한 꽃차를 내왔고, 오웬은 기분 좋은 미소로 그를 봤다.
“더니즈의 부대표라면 전 대표랑도 잘 아는 사이였겠군.”
“한때 같이 있다 저는 타지역 지점을 맡아 하느라 꽤 떨어져 있었습니다. 부대표가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전 대표님과 아는 사이인 건 맞습니다.”
“그렇게 떨어진 채 오래 일을 맡았다는 건 신뢰받았다는걸세. 훌륭한 인재로군.”
하벌트는 쏟아지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정원으로 통하는 후문으로 남녀 한 쌍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하벌트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공작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다나가 기억을 잃었다던가, 그 전에도 대공성에 머물렀단 사실은 하벌트는 당연히 몰랐다. 오웬은 그녀가 가짜라는 사실만 빼고, 다나가 예전에 레온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머문 적이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다니엘을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예? 그게 무슨.”
하벌트는 오웬의 말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외모적으로 볼 때야 선남선녀였으니 더할 나위 없었지만, 그 둘에겐 넘지 못할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물론 ‘다나 더니즈’ 본인이라면야, 신분을 넘을만한 재력이 있다 해도, 하벌트는 그녀가 가짜인 걸 알고 있었기에 선입견을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광경은 그 선입견마저 날릴 정도였다.
오늘 처음 봤지만, 대공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감정 없는 냉혈동물이라는 소문.
하지만 저 눈빛은 뭔가.
저건 불이었다.
언뜻 보면 양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간 입매가 다정해 보일 법도 했지만, 실제 그녀를 보는 눈빛은 누가 봐도 알 만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푹… 빠졌구나. 완전히. 저 계집, 아주 요물이었어….’
“오… 셨어요.”
다나가 먼저 하벌트를 보고 입을 열었다.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려다, 레온이 슬쩍 그녀의 앞에 서서 그것을 막았다.
“네가 감히 성의 안주인을 오라 가라 했다지.”
하벌트는 그의 말뜻을 단번에 파악하지 못한 채 벙찐 표정으로 그를 봤다.
그의 말에 오웬은 소리 없이 미소 짓다 얼른 두둔해주었다.
“상단의 사람이니 대표를 만나보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 아끼는 건 좋지만, 너무 과하구나.”
하지만 말을 하는 내내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것이, 그는 레온의 태도가 매우 흡족한 듯했다.
레온은 오웬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오웬은 다나를 진짜 다나 더니즈로 알고 있는 편이 좋았다. 레온이 의자를 빼주자, 자연스레 다나가 그 의자에 앉았다.
하벌트는 여전히 멍하니 믿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개 돌려라.”
“예?”
“빤히 쳐다보지 말라고.”
들려오는 음성은 레온이었다. 레온은 다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하벌트에게 불쾌한 듯 시선을 돌리라 명하고 있었다.
여전히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긴 했지만, 서늘한 음성에 그는 바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흠흠, 허허허, 것 참. 녀석도….”
오웬은 헛기침을 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