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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상속녀-43화 (43/92)

43화

레온은 절대 안 될 것처럼 얘기하더니, 다음 날 다나 앞에 테라를 떡 하니 가져다주었다.

손과 발이 꽁꽁 묶인 테라는 무릎이 꿇린 채 바닥에 앉혀졌다. 그녀는 갇힌 이후 아주 가끔 죽지 않을 정도의 물만 마실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헝겊으로 된 재갈 위에 물을 적셔주는 정도였다.

그 때문에 그녀의 몰골은 처참했다. 시커먼 볼이 쏙 들어가 있었고, 눈은 퀭했으며, 입술은 버석하게 마르다 못해 피가 터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다나는 속으로 동정심이 피어날 뻔했다.

‘아냐, 그렇다 해도… 마음 약해지지 말자.’

테라를 보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나는 눈빛을 또렷이 했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새삼 레온의 무자비한 성격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또한 레온이 자신에게는 나름 관대하게 굴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이런 거에 기뻐하면, 나도 참 미련하고 불쌍한 거겠지.’

다나는 테라를 한번 흘끔 보고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그녀는 2층에 위치한 별도의 응접실 가운데 소파에 홀로 앉아 있었다.

1층 메인 응접실은 주로 그 성의 주인과 안주인만이 차지할 수 있었다. 아직 소피아가 살아 있고, 다나와 레온이 정식으로 약혼한 사이도 아니라 1층을 사용하기엔 무리였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다나가 이 성의 윗사람이라는 건 충분히 보여주는 셈이었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다나의 찻잔이 비자마자 릴리가 옆의 하녀에게 눈짓을 했다. 하녀는 재빨리 찻잔에 찻물을 따라 넣었다.

“재갈을 풀어주세요.”

병사들은 다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테라가 물고 있던 재갈을 풀었다. 얼마나 세게 묶었는지 입술 옆 양쪽 뺨의 피부가 벌겋게 벗겨져 있었다.

원래 나이가 있는 편이었지만 며칠 사이 머리는 더 하얗게 세고 피부도 훨씬 주름져 있었다.

“…….”

테라는 재갈이 풀렸음에도 뭔가 말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다나는 그 모습에 현혹되지 않기로 했다. 순수한 악의로 다나를 모른다고 뻔뻔하게 거짓말했던 그때 그 모습을 아직 잊지 못했다. 그리고 이미 그 전에, 다나가 말 못 하던 시절 손찌검하려 했던 일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나는 무심하게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접시에 놓인 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다.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는 그녀의 손에서 테라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눈빛에 다나가 손을 멈추고 태연하게 물었다.

“이거, 먹고 싶어요?”

그러자 테라는 아래위로 고개를 힘차게 흔들었다.

“이거 줄 테니, 그럼 대답해 봐요. 날 지금도 싫어하나요?”

테라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조금 움찔하더니,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 다나는 슬쩍 하녀에게 손짓을 했고, 하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쿠키 하나를 들어 테라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럼, 싫어했나요?”

테라는 쿠키를 와작와작 씹어 먹더니, 이번에는 목이 막힌지 켁켁거렸다. 다나가 시원해 보이는 오렌지 주스 잔을 들고 흔들거렸다.

“대답해 봐요, 솔직히.”

테라는 아주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러자 다나가 다시 하녀에게 주스 잔을 건네줬고, 하녀가 테라에게 잔에 꽂힌 대롱을 물려주었다.

한 차례 주스를 들이킨 테라가 이제야 살 것 같단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저를 왜… 보자고 하셨어요?”

“왜 제 전속 하녀에 자원했어요?”

오히려 질문을 받았지만, 테라는 다나를 멀뚱멀뚱 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쿠키 접시만 뚫어져라 볼 뿐이었다.

다나는 여유 있던 웃음을 거두고 다시 소파에 기대앉아 그녀와 몸을 멀어지게 했다.

“제 질문이 귀찮은가 봐요. 그만 다시 돌려보내세요.”

“아, 자, 잠깐만요! 그냥 전속 하녀가 되면 편할 거 같았어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돈 많은 집 딸이라는 소문을 듣기도 했고.”

병사들이 그녀를 일으키려 하자 테라가 다급하게 대답하며 눈빛으로 애원했다. 그러자 다나는 까딱하고는 다시 쿠키 하나를 하녀를 통해 건네주었다.

몇 번인가 반복된 그 모습을 보며 사용인들이 눈으로 대화를 나눴다. 꼭 동물을 길들이는 것처럼, 다나는 테라를 당근과 채찍으로 길들이고 있었다.

별로 의미 없는 질문을 몇 개 던지고, 다나는 테라를 다시 가둬두라 명령했다.

“제발, 절 풀어주세요! 아가씨,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할게요.”

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대공 전하께서 명령하신 거라. 말씀은 한번 드려볼게요.”

테라는 유유히 응접실을 나가는 다나의 뒷모습을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예전 어리바리하고 순했던 그녀가 맞는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

수도 황궁 안에 위치한 각 부의 집무실은 늘 바빴다. 그중에서도 재상부는 특히나 바쁘기로 유명했다.

현 재상인 몬텔로 후작은 아랫사람들을 독촉하고 쪼아대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없는 지금, 그 틈을 타 아랫사람들이 중앙으로 슬금슬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중에서도 차석 서기관인 오펠 백작은 억울하단 표정이었다.

“봤나?”

“봤습니다. 대놓고 달라진걸.”

“아니, 누가 봐도 그자가 틀렸는데 재상께선 왜 나에게 성질이야?”

“자네 뒷배가 없으니 어쩌겠나, 케밀턴 공작 사위쯤 되면 틀린 계산도 저절로 맞춰지나 보지 뭘!”

그들이 툴툴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원래 경력대로라면 재상부에서 잔뼈가 굵은 오펠 백작이 수석 서기관이 됐어야 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갑자기 뚝 떨어진 리안 펠리스 백작이 수석 서기관이 되어, 그는 차석으로 밀리게 되었다.

“그래도 학술원 성적이 좋다고 하던데, 그것도 다 짜고 친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흠흠, 원래는 근본도 제대로 되지 않은 사생아란 소문이….”

“쉿.”

철컥, 하는 소리에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차마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공중으로 흩어졌지만 아쉬워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다들 표정 관리가 능숙했다.

그중, 오펠 백작은 한술 더 떠 지금 막 들어온 리안 펠리스에게 말을 건넸다.

“아까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펠리스 백작 각하.”

리안 펠리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오펠을 보았다. 리안도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다. 몬텔로 재상이 아까 굳이 리안을 두둔한 건 순전히 정치적인 계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씩씩거려도 모자랄 오펠이 웃으며 다가오는 게, 속이 좋은 건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리안 역시 그것을 티 낼 순 없었고, 그도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각하라는 호칭은 과합니다. 엄연히 몬텔로 후작 각하가 계시질 않습니까. 편히 불러주십시오.”

“허허, 겸손하기까지 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수석 서기관님. 앞으로 저희 재상부를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

오펠의 사람 좋은 웃음에 다른 이들도 소리 없이 비웃음을 흘렸다. 제일 불만이 많았던 오펠이 결국 리안에게 아부하는 형세를 보니 우스우면서도 애잔하게 보였다.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한시라도 빨리 부서를 바꾸려 했던 리안으로선 친근감 있게 다가오는 오펠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이곳에 온 며칠간, 리안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업무를 익혀야 했다.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다른 귀족들에 비해 이곳은 너무 일이 많았다.

‘내가 이렇게 일만 하자고, 죽어라 귀족이 된 게 아니란 말야.’

케밀턴 공작의 뜻은 리안이 그곳에서 나라 전반적인 일을 꿰뚫고 앞으로 정계를 주도하길 원한 것이었지만, 리안의 꿍꿍이는 달랐다.

‘결국 돈이 지배하는 세상일 것인데.’

더니즈 상단을 발판 삼아 부를 축적하여 자신의 힘을 기를 생각이었다. 그는 상단이 가진 대륙의 유통망을 통해 온갖 불법적인 거래를 계획하고 있었다.

리안은 잠시 책상에 앉아 일을 하는가 싶더니 결국 얼마를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섰다. 잠시 밖을 서성이는데, 수풀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리안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그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하인이 숨어 있었다.

“알아봤어? 상단은 어떻게 됐지?”

리안은 지금 발이 묶여 상단에 직접 관여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인을 보내 간접적으로나마 소식을 들으며, 의사를 전달했다.

“그게 테라티우스 대공성과 거래를 성사시켰다고 합니다.”

“뭐? 그게 정말이야? 그년은 찾았고?”

“결국 도망간 여자는 못 찾고, 다른 비슷한 인물을 급하게 찾아서 보냈다고 하더군요.”

“…그게 됐어? 대공성에서 속았다고?”

거래가 됐다는 건 기쁜 일이었지만, 그 명망 높은 테라티우스 대공성에서 대역에 대해 아무런 의심 없이 흔쾌히 넘어갔다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예에, 누가 봤는데 저번 여자보다 훨 미인이라고 합니다. 대공성에서 아예 며칠 묶고 가라 해서 지금 돌아오질 않고 있답니다. 뭐 대공과 어릴 적 아는 사이라나 뭐라나….”

“그것참… 그건 더 이상한데.”

다나를 쭉 알아왔던 리안으로선, 다나가 테라티우스 대공성과 인연이 있다면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특히나 대공과 다나가 어릴 적 아는 사이라는 건 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 테라티우스 대공은 공작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겨우 상인의 딸과 대귀족의 자제가 만날 일도 없거니와 만난다 해도 무슨 인연이 생긴단 말인가?

‘그냥 잡아 두기 위한 핑계 같은데. 대공 마음에 들었나 보지? 도대체 어떤 여자기에… 내가 미리 봤어야 하는 건데.’

리안은 아쉬운 듯 아랫입술을 혀로 축이며 입맛을 다셨다.

“여자가 돌아오면 나에게 바로 알려. 그리고 거래를 텄으니 대공성에 드나들며 나오는 정보들도 바로 나한테 알리고.”

“예에, 그럼 가 보겠습니다.”

리안은 금화 하나를 하인의 손바닥 위로 툭 던져주었다. 하인은 넙죽 받아 절을 하며 쏜살같이 그길로 사라졌다.

‘하, 진짜 답답한데. 황궁 계집들은 영 틈도 없고.’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황궁에서 일하는 여인들을 훑어보다 툴툴대며 다시 집무실로 돌아갔다. 아직은 케밀턴 공작의 면을 세워줘야 했기 때문에, 너무 자리를 오래 비울 순 없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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