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전하!”
다나가 뒤를 돌아보니 레온이 어느새 뒤에 와 있었다. 아까 그렇게 헤어진 후, 얼마 지나지 않고 본 거라 조금 어색하고 민망했다.
“여긴 왜 들어가려는 거지?”
“…테라라는 하녀를 만나보고 싶어서요.”
“테라? 아아.”
레온은 그 하녀가 누군지 기억해내며,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뒷짐 지며 다나를 보았다. 이번엔 다나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옆으로 돌렸다.
어쩌면 레온이 화가 났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나른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그 하녀는 죄인이라 심문을 받아야 해. 지금을 볼 수 없으니 돌아가.”
“저를 해하려고 한 사람인데, 제가 볼 수 없나요? 잠시면 돼요.”
“너를 해하려 했지만, 내 손님을 해하려 한 죄로 갇혀 있는 거야. 지금 나 없는 넌 이 성에서 아무것도 아니니까.”
일부러 그는 다나의 자존심을 긁으며 찍어 누르려 하고 있었다. 그가 그러는 이유는 뻔했다. 혼인을 거절한 것에 대해 비꼬고 있는 것이었다.
레온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기분 나쁠 법도 했지만, 어쩐지 그의 마음이 환히 보이는 것 같아 오히려 다나는 안심했다.
“제가 본다고 뭔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냥 왜 그랬는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어요.”
“지나치게 호기심이 많아졌군. 언제부터 이랬지?”
레온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다나는 밖에서 돌아온 이후, 그전과는 성격이 조금 변해 있었다.
“…….”
자신은 느끼지 못했지만,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이 맞춰질 때마다 그것들이 그녀를 충동질하고 있었다.
‘움직여, 가만히 있지 마. 뭐든 알아내, 그리고 기억해 내야 해.’
다나가 말이 없자, 레온도 입을 다물고 다나의 옆모습을 보았다. 속눈썹을 내리깔고 뭔가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면서, 뭔가 그는 초조함을 느꼈다.
“따라와. 여긴 듣는 귀가 많으니까.”
“…알았어요.”
둘이 함께 걷기 시작하자, 릴리와 아힐이 조금 더 멀리 떨어졌다. 레온은 뒤를 보며 그들을 조금 더 멀리 떨어지게 했다.
어느새 그들은 산책로를 따라 걷다, 후원의 유리 온실까지 가게 되었다. 릴리와 아힐은 온실의 문을 넘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다.
다나는 몰랐겠지만 그곳은 테라티우스 왕가 시절부터, 그들의 혈족과 배우자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 곳을 레온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나를 이끌고 들어갔다.
“혼인은.”
레온의 입에서 혼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다나가 움찔하며 그를 보았다.
“싫다 해도 어쩔 수 없어.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아. 그게 무슨…”
“왜, 취소할까? 그걸 원해?”
그 말을 하며 레온이 눈을 마주치자, 다나는 그 전과 다른 의미로 가슴이 철렁했다. 레온이 자신을 포기하는 걸까? 그에게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혼인이라면, 애초에 한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자신의 마음을 제외하고 생각한다 해도, 아직은 더 그의 곁에 있어야 했다. 그냥 이 혼인을 한다고 했어야 할까?
‘아니야, 옳지 않아.’
만일 진짜 다나 더니즈가 나타난다면 자신이 그 후 어떻게 될지 차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와 이별을 한다면, 그걸 견딜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나가 혼란스러운 마음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그때, 레온의 마음 또한 심란했다.
혼인을 취소한다니, 물론 그녀를 떠보기 위해 던진 말이었지만, 스스로 말을 꺼낸 그 자체가 후회됐다.
애초에 그녀에게 선택지는 없었고, 레온이 스스로 취소할 마음은 더더군다나 없었다.
그의 입장은 여전히 완강했고, 그녀의 의사마저도 상관없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 또한 변함이 없었다.
‘만일 이 여자가 취소하자고 한다면.’
정말 강제로라도 진행시킬 생각이었다. 물론 그랬지만, 머릿속에 울리는 경고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럼 미움받을 테지.’
스스로의 마음에 실소가 나왔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도, 미움을 받게 될까 염려하는 것도 생소한 일이었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복할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 이왕지사 묶어둔다 해도 그녀가 자신을 원하는 채로 있는 게 더 좋은 건 사실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은 사실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다음 순간 증명되었다.
“진심… 이세요? 혼인을 취소한다고요?”
“그야, 당연히… 아니….”
막 바로 대답하려던 레온이 잠시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식당에서는 냉정한 모습이었다면, 지금 그녀는 원망을 담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왜 우는 거야.”
“안 울어요. 잘못 보셨어요.”
다나는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며 휙 고개를 돌려 얼굴을 피했다. 그녀는 레온의 마음을 좀 더 확실히 알고 싶었다.
어차피 그의 뜻대로 결국 하게 될 혼인이라면, 자신이 질질 매달려서 얻어낼 일도, 덥석 쥐여주는 대로 받을 일도 아니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확실하게 보이는 마음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흔들고 주도권을 가져오고 싶었다.
이건 그녀가 다나 더니즈가 되냐 안 되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다.
“대체 왜 그러는 거지? 그 정도로 싫은가, 나와 혼인하는 게?”
최대한 그녀를 다정히 대하려던 레온은 그만 답답한 마음에 다나의 손목을 잡아 거칠게 돌려세웠다.
그 바람에 다나의 몸이 휘청하며 탁 하고 그에게 부딪혔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네, 저는 그런 식의 혼인은 원치 않아요.”
레온에게 앞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사실 다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은연중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혼인을 원치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는 다나의 말이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입속에서 못된 말이 튀어나왔다.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지껄이는군. 원치 않는다고? 너에게 선택권이 있을 거라 생각하나?”
레온이 다나의 턱을 잡아 올려 더 가까이 당겼다. 그의 붉은 눈이 다나를 보며 잡아먹을 듯이 이글거렸다. 모순되게도 다나는 그 눈을 보며 조금씩 안도하고 있었다.
조금 더, 자신도 모르게 그를 도발했다. 뭔가 계속 갈증이 났다.
“혼인을 신부 동의 없이 강제로 하기라도 하겠다는 말이에요?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세요?”
“내가 원해서 되지 않는 것은 없었어. 그건 너 또한 마찬가지야. 싫다면 어쩔 건데. 왜, 이번에야말로 도망갈 셈인가?”
“못 할 것도 없죠, 아! 흣… 흐읍.”
한순간에 다나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칠게 파고든 그의 혀가 미친 듯이 입안을 휘젓고 돌아다녔다.
다나는 그 기세에 휘청거리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 눈을 감았다. 키스를 거부하기엔, 지금 너무 갈증이 났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맞부딪힌 입술이 얼얼하게 아파 왔다. 다나는 그가 뻣뻣하게 선 채로 턱을 놔주지 않는 바람에, 높이를 맞추려 까치발을 해야 했다.
이 순간에도 그의 남성적인 체취가 정신없이 밀려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아, 나 정말 밝히는 여자구나.’
아찔함에 균형을 잃을까 싶어 그의 팔 하나를 잡아야만 했다.
점점 숨이 모자랐다. 그의 팔을 잡고 흔들어보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코로 들이마시는 호흡은 한없이 부족했고, 점점 다나는 목까지 벌게져 올라왔다.
레온은 그 와중에 그녀의 허리를 감싸 더 도망가지 못하게 꽉 끌어안았다. 다나가 눈을 뜨자, 처음부터 뜨고 있던 레온의 붉은 눈이 곧바로 보였다.
야성적이고, 광기에 사로잡힌 눈. 아주 가끔, 보여주는 그 눈을 다나는 무척이나 섹시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달리는 호흡 탓인지 치솟는 열기 탓인지 모를 어지럼증이 올라올 무렵, 드디어 레온이 입술을 뗐다.
“하아, 아, 하아….”
그의 입술은 타액으로 젖어있었고, 붉은 입술이 더 도톰하게 부어올라 핏빛이 감돌았다. 다나의 입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레온은 다나에게 손을 떼고 자유롭게 풀어주며,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도망가 봐, 어디 한번. 잡히면 사지를 부러뜨려서라도 내 곁에 둘 테니까.”
저 섬뜩한 말에 두근거리는 건,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런 거겠지. 아아, 하지만 뭔가 계속 부족하다. 뭘까, 대체 뭐가 문젤까.
다나가 아주 조금 뒷걸음질 쳤다. 그가 그만큼 다가올 때마다 기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조금 더 뒤로 갔다.
곧 유리벽에 등이 닿았고, 커다란 레온이 앞을 가로막자 시야가 그로 가득 찼다.
“이게 다야? 왜 더 도망가지 않고.”
다나가 전혀 겁먹지 않았다는 건 레온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은 다나가 레온을 당긴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녀가 그를 거부한단 생각에 잠시 흥분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대신 가깝게 붙은 다나의 체온이 꽤 달아올라 있단 사실이 그의 다른 부분을 자극했다.
“봐, 이 상황에도 넌 나한테 끌리잖아. 이렇게 안달 난 주제에, 네가 감히 혼인을 거절한다고?”
레온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고 쓰다듬다, 겨드랑이와 옆구리를 타고 내려갔다.
엄지 부근에 갈비뼈가 만져지자 슬쩍 힘을 줬다. 아마 조금 아플 것이다. 예상대로 고운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혼인하겠다고 말해.”
“…안 해요. 아읏.”
레온은 힘준 그대로 조금씩 아래로 더 내려갔다. 골반까지 내려간 손이 잠시 멈춘 채, 레온이 그녀에게 몸을 딱 붙였다. 딱딱한 중심부가 다나에게도 느껴졌다.
“그럼 상냥하게 대해주지.”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바닥에 슬쩍슬쩍 닿을 만큼 긴 치맛자락이 그의 손에 의해 말려 올라갔다. 새하얗고 곧게 뻗은 다리가 드러났다.
“그럼? 정확히 말을 해.”
“왜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면서… 아!”
손은 아래부터 파고들어 맨살의 허리까지 닿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연약한 살을 세게 쥐고 주물대자, 다나가 통증에 몸을 비틀었다.
“내가 뭘 안다는 거지? 아아, 네 그 대책 없는 욕심 말인가?”
입술이 또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가 그녀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정곡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