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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상속녀-40화 (40/92)

40화

“네, 테라티우스 전하. 저는 혼인에까지 다나 더니즈의 대역을 맡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요.”

다나는 꽤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일부러 ‘전하’라는 호칭까지 써가며 그에게 거리감을 표했다.

다나가 이렇게 거절할 줄은 몰랐던 건지, 다급해진 마음에 그녀를 불렀지만 다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나.”

“그렇게 부르지 말아주세요, 사라, 사라라는 이름 있잖아요.”

“내 말 들어봐. 난 다나 더니즈와 혼인하고 싶은 게 아냐. 너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생각조차 안 한 일이었어.”

“하지만…하지만요, 전하.”

다나가 쓰게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몸짓이 우아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표정은 레온이 본 것 중 가장 차갑고, 감정이 없어 보였다.

“제가 다나 더니즈로 오지 않았더라면 전하께선 저와 혼인하려 하지 않았을 거예요. 안 그런가요?”

“…….”

레온은 바로 아니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그녀에게 느끼는 집착과 갈망의 결론이 혼인으로 도달한 건, ‘다나 더니즈’라는 이름이 가져다준 게 사실이었다.

다나는 푸른 눈동자로 고요하게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 눈을 보던 레온이 소리 없이 한숨 쉬며 시선을 내렸다.

그가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들어가 볼게요.”

“…다나.”

레온이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다나는 확 뿌리치진 않았지만, 은근히 손목을 빼며 다시 그를 빤히 보았다.

“오늘은 푹 좀 자고 싶어요. 부탁해요.”

다나는 연약한 미소를 보이다, 휙 돌아 식당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레온은 빈 손바닥을 보고 있다, 다시 나간 문을 보았다. 바로 쫓아가려던 그는 멈칫거리며 다시 그 자리에 멈췄다.

“잠을 재우긴 해야겠지….”

마치 그가 스스로 그렇게 판단했다는 듯, 합리화하며 조금 느린 걸음으로 식당 문을 나섰다.

2층 계단을 올라가서도 다나의 방, 그러니까 자신의 침실을 몇 번이고 고개 돌려 바라보다 결국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안에서도 책상 위에 앉았다, 다시 일어서 방 안을 서성거렸다.

뭔가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왜 내가 그녀를 어려워하고 있는 거지.’

놓칠 수 없다, 그러니 혼인해야겠다는 단순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반대에 부딪힐 게 뻔하니, 조금이라도 편하기 위해 ‘다나 더니즈’라는 이름을 빌리기로 했다. 그럼 오웬이 기꺼이 그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이것은 상단 측에도 나쁘지 않을 제안이었다. 그들의 대표이자 상속녀인 ‘다나 더니즈’가 대공비가 된다는 건 엄청난 뒷배를 갖게 되는 셈이니까.

게다가 다나에게는 ‘다나 더니즈’가 아프다고 했지만, 실제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실종된 지 오래였다. 아직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급하게 대역을 세운 것이었다.

‘물론 만일 진짜가 나타난다면 일이 복잡해지겠지만….’

진짜 ‘다나 더니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녀가 왔을 때는 이미 돌아올 자리가 없을 상황으로 만들 셈이었다.

미치도록 갖고 싶은 것 앞에서는 어떠한 거리낌도 없었다.

원래의 레온은 그런 사람이었다.

원리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듯하면서도, 때로 원하는 걸 위해서는 자신의 높은 지위를 이용해 남을 짓밟는 것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미처 생각지 못한 복병을 만난 것이다. 바로 그녀의 마음.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레온이 마른세수를 하며 아직 밝은 창문 밖을 보았다.

조금 피곤이 드리운 붉은 눈동자가 잠시 매섭게 빛났다.

‘그래서, 그 여자 마음이 어쨌다는 말인가.’

자신답지 않았다. 혼인은 애초에 자신 곁에, 이 성에 가둬두기 위한 구실이었다.

애초에 그녀의 동의 여부는 이 일이 성사되는 데 필요조건이 아니었다. 본래의 이기적인 성격이 꿈틀거렸다.

레온은 주먹을 꽉 쥐고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엇, 전하! 드릴 말씀이…!”

“나중에.”

문 앞에 서 있던 다니엘이 부딪힐 뻔하여 깜짝 놀라 레온을 불렀다. 레온은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쳤다.

레온의 집무실과 다나의 침실은 같은 2층이었다. 하지만 모서리를 두 번 돌아야만 다다를 수 있었다.

곧 다나가 있는 문이 보이고 그 앞에 있는 하녀 웬디와 마주쳤다. 웬디를 본체만체하며 문을 열려다, 아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힐은 어디 갔지?”

“아가씨께서 나가신다 하셔서 따라가셨어요.”

“나갔다고? 언제? 어디로?”

레온은 그녀가 나갔다는 말에 또다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얼마 전 다나가 사라졌던 그 순간이었다.

“당장 말해. 어서!”

다급하게 추궁했지만, 웬디는 그런 레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밝게 대꾸했다.

“방금 나가셨어요. 잠깐 걷고 싶다고 하셨으니 성안에 계실 거예요.”

“…그래.”

레온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담담한 척 대답하고는 재빨리 다시 1층을 향해 갔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동요한 티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포커페이스는 그의 변함없는 특징이었으니까.

하지만 웬디는 사라지는 레온을 보며 토끼처럼 손을 모아 발을 동동 굴렀다.

“왜 대공 전하께서 저렇게 화나신 거지? 가서 아가씨에게 화내시는 건 아니겠지?”

***

나름 단호해보였던 다나의 속도 그리 평온하진 않았다. 먹은 게 그대로 체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방에 있지 못하고 결국 산책을 택했다.

다나가 나서자 자연스럽게 릴리가 따라붙었고, 그 뒤로 아힐이 따라왔다. 그는 아직 납득하지 못한 대공의 명령에 따라 다나로부터 세 걸음 떨어져 걷고 있었다.

지금 심란한 마음에 그들까지 따라붙으니 더 마음이 시끄러웠다. 아직 누군가를 데리고 다닌다는 게 익숙지가 않았다.

“저… 성안에만 있을 거라 안 오셔도 되는데요. 저번처럼 별궁 쪽에도 안 갈 거고….”

“절대 안 됩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갈 곳 가십시오.”

아힐은 칼같이 대답하고는 주위를 경계하려 휙 휙 시선을 돌렸다. 다나는 난처한 웃음을 짓다 릴리를 향해 말했다.

“릴리, 들어가도 돼요. 난 혼자 다녀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전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을 거니까요!”

릴리 역시 다나의 말을 들어 줄 기세가 아니었다.

다나는 하는 수 없이 뒤에 둘을 붙이고 가던 길을 더 걸어갔다. 지금 그녀는 이 성안에서 레온의 ‘약혼녀’ 쯤으로 되어 있었다.

‘난 레온과 뭘 하고 싶은 걸까.’

솔직히 말하면 뭘 한다고 말하기에 앞서,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게 중요했다.

혼인을 하자는 말에 속으로 기뻐하면서도, 몹시 겁이 났다. 하지만 그 상대가 ‘다나 더니즈’로서라는 사실을 들었을 땐 오히려 피가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듣자마자 거부감이 밀려 올라왔다. 정확히 말하면,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내가 욕심이… 커진 거야. 주제도 모르고.’

좀 더 자기 자신으로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다. 그런 마음에 어쩐지 실소가 나왔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라는 말인가.

이런 자기 상태로 그의 곁에, 아니 누군가의 곁에 서는 게 가당키나 할까.

‘그렇다고 그의 정부로 살고 싶어? 그것도 아니잖아.’

레온이 다나를 정부가 아닌 정실부인으로서 맞이한다 했을 때, 그의 제안은 아마 손쉬운 방법일지도 몰랐다.

긴 한숨과 함께 먼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서쪽 별궁을 바라보던 다나는 뭔가 생각났는지 급하게 몸을 돌려 릴리와 아힐을 봤다.

“그러고 보니… 저기, 릴리. 그때 그 하녀 이름이 뭐라고 했죠?”

“누구 말씀하시는 거세요?”

“그때… 전담 하녀로 자원했다고 하는 하녀요. 저랑 사이가 안 좋았는데….”

“테라요?”

다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릴리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나의 의중을 물어보았다.

“테라… 는 왜 찾으세요?”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제가 볼 수 있을까요?”

“다른 하녀는 다 되지만 테라는 지금 안 될 거예요.”

“왜죠?”

릴리는 그녀답지 않게 대답을 조금 망설였다. 그러자 아힐이 대신 대답했다.

“테라라는 하녀는 지금 지하 감옥에 있습니다. 별궁 쪽 시녀들이 증언했다는군요. 그녀가 아가씨를 모른척했다고 말입니다.”

“아….”

다나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물론 아힐의 말은 사실이었고, 그녀는 거짓말 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마 그 말이 사실이면….”

아힐은 말끝을 흐리며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상전을 모함하고 위험에 빠트렸으니 아마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다만 그때의 다나가 ‘상전’이라 할 수 있냐면, 사실 아니었다.

그 때문에 아힐은 헷갈려 하고 있었다. 릴리가 침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테라가 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아가씨를 유독 미워하는 것 같아요. 마지막에 아가씨 수발을 든다고 한 것도 의심이 되고….”

“테라는 성에서 오래 일했다고 했죠.”

“네, 맞아요. 우리 중에 가장 오래됐어요. 대공 전하께서 아주 어릴 적부터 있던 하녀예요.”

“그래요.”

다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테라를 만나봐야겠어요.”

“네? 감옥에 가시겠다고요?”

“예, 제가 갈 수 있나요?”

다나는 갈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면서도 발길을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릴리가 염려하며 따라붙었다.

“거긴 아가씨가 가기엔 좀… 테라는 왜 만나려고 하시는 거예요?”

“글쎄요… 만나봐야 알 것 같네요.”

아힐은 그녀가 지하 감옥에 가는 것에 대해 별로 말리거나 하지 않았다. 아힐의 입장에서 지하 감옥은 오히려 보안이 철저해서 안전한 곳이었다.

다나는 조금 긴장하면서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는 그것을 지키는 병사 둘과 기사가 있었다.

아직 다나를 알아보지 못한 기사가 딱딱한 어투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여기는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첸 경, 대공 전하의 약혼녀이십니다.”

“아, 아힐 경. 그게 사실입니까?”

첸이라는 기사는 눈을 크게 뜨고 다나를 살폈다. 성안의 소식을 그도 듣긴 들었다.

다나는 예전과 달리 고급 소재의 옷과 장신구를 착용했고, 하녀를 한 명이지만 대동하고 있었다. 또 무엇보다 아힐이 함께 있었다. 아힐은 대공이 늘 데리고 다니는 기사 중 제일 실력이 좋기로 유명했다.

“알겠습니다. 안에 있는 병사들에겐 이것을 보여 주십시오. 어두우니 발밑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첸의 말투가 한결 정중해졌다. 그는 출입 패를 꺼내 다나에게 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를 막는 목소리가 갑자기 날아들었다.

“거둬라, 그녀는 거기 갈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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