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레온에게 뭐부터 물어봐야 할까.’
다나는 하늘하늘한 푸른색 실내 드레스를 입고, 웬디와 릴리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다나의 뒤에는 아까 문밖을 지키던 아힐도 따라붙었다.
이들이 따라오는 기척을 느끼며, 어쩐지 다나는 어깨가 조금 으쓱해졌다.
그리고 1층으로 가는 계단 위에서, 로비의 레온을 발견하고는 가슴이 설렜다. 자신도 모르게 빠르게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레온.”
모처럼 조금 모양을 낸, 아니 레온으로선 거의 처음 보는 모습에 그는 잠시 시선을 뺏기다 계단 위를 올라갔다.
“저런, 천천히.”
치마가 치렁치렁해서 꼭 넘어질 것 같았다.
“아…!”
잡아주기 위해 손을 뻗자, 마음이 급했던 다나가 역시나 계단 하나를 잘못 디디며 휘청거렸다.
레온이 다나를 잡으려는 찰나, 아힐이 반사적으로 뒤에서 다나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레온의 손이 허공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방황하다 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형형한 눈동자가 곧 아힐을 향했다.
“휴,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아가씨,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레온의 눈을 보지 못했는지, 아힐은 다나를 연신 살피고 있었고 다나는 레온의 눈치를 살피며 겨우 대답했다.
“네, 네. 괜찮아요. 저기, 레온?”
레온은 한걸음 올라가 보란 듯이 그녀의 옆에 서서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아직도 다나의 허리에 올라간 저 망할 손을 자연스럽게 잡아 떼어냈다.
“으악, 대, 대공 전하?”
겉보기에는 자연스러웠지만, 아힐 입장에서는 그대로 손이 아작 나는 줄 알았다. 갑자기 느껴지는 통증에 경악하며 레온을 봤다.
“자네는 지나치게… 가까워.”
“예? 그야 호위를 명하셨으니까요.”
“그렇다 해도, 늘 세 걸음은 떨어져 걷게.”
“하지만 방금처럼 위험한 상황이 오면 어쩝니까?”
적당히 알았다고 하면 될 걸, 눈치도 없이 따박따박 대답하는 아힐이 오늘따라 굉장히 거슬렸다.
평소 그의 순진하면서 올곧은 성격은 레온의 신뢰를 얻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레온 입장에서는 이놈도 저놈도 다 다나와 가까이 있는 남자라면 거슬리기만 할 뿐이었다.
“레온, 이만 내려가요.”
미간을 찌푸리고 뭔가를 생각하던 레온은 다나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다나의 보폭을 신경 쓰며 내려가는 모습에, 웬디와 릴리가 서로 웃음을 보이며 약간의 간격을 띄워 따라갔다. 아힐은 여전히 이해 못 하겠단 표정이었다.
긴 식탁의 끝과 끝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대화만 간신히 할 수 있는 그럴 정도의 간격이었다.
물론 귀족끼리 단둘이 식사하기 위한 자리로는 더할 나위 없이 손색이 없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상대와 가까이 앉아 식사를 하는 것만큼 역겨운 일은 없었으니까.
다나의 의자를 빼주고 그곳에 앉힌 레온은 오늘에서야 그것을 눈치챘다. 실제로 둘은 그렇게 여러 날을 보내고도, 식당에서 단둘이 식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실컷 관계하고 난 후에는, 거의 방으로 음식을 가져오게 하여 같이 먹거나 보통 레온이 나간 후에 다나 혼자 따로 먹었다.
“저… 전하?”
음식을 나르던 시종들이 깜짝 놀라 레온을 불렀다. 레온은 대충 자신의 수프 그릇과 식기류를 가지고 다나와 가까운 대각선 자리에 놓고 앉았다.
“신경 쓰지 말고 먹어.”
다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자, 레온은 눈길 한번 슥 주고는 수프를 수저로 떠서 훌훌 삼키기 시작했다.
다나가 아무리 기억이 없고, 격식을 잘 몰라도 레온의 행동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저, 이래도 되나요?”
“내 집인데 무슨 상관이야. 신경 쓰지 말라니까.”
“그래도… 아, 으음.”
레온은 빵조각을 다나 입속에 넣어주고는 자신도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높은 대공답지 않은 격식 없는 모습이 오히려 그다워 보이기도 했다.
다나로선 그냥 그런가보다 넘어갔지만, 주위 사용인들에게는 꽤 놀랄만한 모습이었다. 늘 칼바람이 쌩쌩 부는 자신들의 주인이었고, 그가 식당을 오는 날은 늘 손님과 함께였다.
손님을 대동할 때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격식을 갖추던 레온이 이런 모습을 보며, 측근과 곁에 있던 자들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그들의 마음이 어떤가와 상관없이, 식사는 계속되었고 둘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그 얘기를 꺼내기 전까진.
다나는 어느 정도 배가 차오르자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틀을 중노동을 한 만큼, 꽤 많은 양을 먹었지만 아직도 식탁의 음식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다 먹었나? 얼마 먹지도 않은 거 같은데.”
“배불러요, 더는 못 먹어요.”
“잘 먹어두는 게 좋을 거야. 밤마다 잘 견디려면 말야. 나랑 맞추기엔 체력이 한참 모자란 것 같아.”
태연하게 말하는 내용이 무슨 뜻이 아는 순간, 다나가 화들짝 놀라며 작게 소리를 질렀다.
“레온! 여기서 무슨 말을!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매일… 나랑 그것만 할 셈이에요?”
“일단은. 질릴 때까지는 해야 하지 않겠어? 싫은가? 싫다기엔 어젯밤에도….”
능구렁이처럼 창피한 말을 줄줄 읊어대는 레온의 입을 다나가 벌떡 일어나 손바닥으로 막아버렸다.
레온은 피식 웃으면서도 그녀가 하는 대로 놔두었다. 아힐을 비롯한 호위 기사들 역시도 조금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원래대로라면 레온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는 이가 있다면, 칼을 뽑아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레온은 암묵적으로 남자든 여자든 자신에게 손대는 걸 매우 싫어했다.
그의 성향을 아는 기사들은 애초에 꼭 필요할 때 하는 악수를 제외하고는 일정 거리 이하의 접근을 원천봉쇄 했다.
하지만 ‘연인’의 경우는 어떨까. 그녀는 ‘연인’인가? 예비 안주인인가?
무엇이 됐든, 다행히 아무리 눈치 없는 아힐이라도 약간 당황하는 눈동자만 드러났을 뿐, 이 상황에서 칼을 뽑진 않았다. 물론 지금 아힐은 레온이 아닌 다나의 호위 기사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잠시 레온의 입을 막은 채 버티던 다나는 스르르 손을 내리고 자리에 앉았다. 얼떨결에 그런 행동을 했지만, 이건 레온이 자신을 봐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다나.”
그녀의 손이 떨어지자, 레온은 담담하지만 자기 딴엔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다나가 그 파랗고 예쁜 눈동자를 자신에게 향하고, 레온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번졌다.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이리 편한 것을. 하지만 저 웃음은 오로지 내 것이어야만 한다.
레온은 눈짓으로 주위를 물렸다. 그러자 사용인들과 호위 기사들은 눈치 있게 식당 밖으로 나가 대기했다. 이 공간에는 다나와 레온 둘뿐이었다.
“다나 더니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언젠가 나올 주제였다. 하지만 왜 다나 더니즈로 오게 된 건지를 추궁하지 않고, 그 인물에 대해 물으니 의아하긴 했다.
“더니즈 상단의 대표라고 들었어요. 상속녀이고… 모든 권한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몸이 안 좋아서 약속에 오지 못하게 됐고, 상단은 대공성과 거래를 꼭 하고 싶었죠. 그래서 그 사람과 닮은 저를 대역으로 쓴 거였어요.”
레온은 다나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턱밑을 쓸었다. 일단 상단에는 아직 아무것도 추궁하지 않은 상태였다.
상단 측에는 진짜 ‘다나 더니즈’를 보내줘서 고맙다는 말고 함께, 그녀가 어릴 적 대공과 친구라는 설명을 덧붙여 보내지 않는 것에 대한 부분을 납득시켰다.
레온은 지금의 다나를 ‘다나 더니즈’라는 가정하에 그들과 모든 일을 진행시켰다. 그들이 뒤늦게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원하는 조건을 모두 들어준 상태였다.
하지만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 지금부터 그녀에게 설명해야 했다.
“내 아버지는 더니즈 상단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그걸 내게 어릴 적부터 말해주었지.”
레온의 아버지라면 그 다정한 중년 신사분일 것이다. 당시 레온은 그 아버지와 다나가 아는 사이라고 오해하며 자신을 속인 것인가 의심하기도 했지만, 다나가 대역이라는 사실을 듣고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자신이 그 아버지를 속이는 셈이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상단의 상속녀인 다나 더니즈를 꼭 만나보길 원하셨다.”
“그녀를 왜요?”
“그녀와 혼인하길 바라셨거든.”
레온은 말을 하며 찬찬히 다나의 얼굴을 살폈다. 예상대로라 해야 할지, 다나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보여주는 그 반응이 기꺼우면서도 걱정스러웠다.
“물론 난 만남을 계속 피했지. 이번 만남도 내가 원해서 하게 된 건 아냐. 나도 모르는 새에 일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만.”
“혼인… 을 약속한 여자가….”
“뭔가 마음에 걸려 나가보니 네가 있었어, 다나 더니즈의 대역으로.”
슬슬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다나는 멍하니 중얼거리면서도 애써 납득하려 애썼다. 애초부터 부인의 자리는 가당치도 않았다. 자신은 출신도 불분명하거니와, 대공의 부인이면 대공비이다.
그저 마음이 이어졌다 해서 탐낼 자리는 분명 아니었다. 그도 처음부터 정부를 운운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다나 자신이 원하는 게 그와의 혼인인지도 아직 스스로 확신하지 못했다.
‘맞아, 그랬지. 하지만….’
왜 이렇게 가슴이 시린 건지. 조금 전 전담 하녀를 배치해줬다며, 기뻐하던 자신이 조금 우스워졌다.
“다나. 나는 너를 진짜 다나 더니즈로 여기고 혼인할 셈이다. 내가 어젯밤 말했었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제가...다나 더니즈 대신 당신과 혼인을...잠시만요, 그 말을 꼭 따라야 하는 건가요?”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과 달리 다나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못해 냉정할 지경이었다. 어딘가 얼어붙는 마음을 파란 눈동자가 대변해주었다.
그 순간 눈에 띄게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 건 레온이었다.
“혼인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