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아무리 내일 없이 사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눈에도 레온은 범상치 않아 보이긴 했다.
저벅저벅 레온이 그들을 향해 걸어가자,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아힐과 체르돈은 저러다 혹 저들이 무례를 범하면 어쩌나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방금 이곳에서 여자가 나왔다고 했나. 그 후에 여자를 잡아서 어떻게 했지?”
“뭐야, 넌? 갑자기 튀어 나와서 뭘 묻고 난리야?”
“야, 이, 미친놈아! 야, 대답하지 말고 이리 와.”
성질을 내는 자는 그때 다나를 잡은 동생 쪽이었고, 이상한 낌새를 느낀 형 쪽은 뒤에서 그를 불렀다.
“이 재수 없는 상판을 보라고! 그 여자는 우리가 잡았는데 도망쳤어. 막 먹기 직전에 다 잡은 고기를 놓쳐서 괜히 입맛만 버렸다고.”
“머리가 무슨 색이었지?”
“그게 왜 궁금… 형, 무슨 색이었지? 노란색?”
그 형제를 제외한 다른 유랑민들은 이미 슬슬 멀어져 있었다.
“전하, 말을 섞을 자들이 아닙니다. 제가 추궁하겠습니다.”
아힐이 흥분하며 앞으로 뛰어나왔다. 그는 레온에게 털끝이라도 닿았다간 베어버릴 기세로 검 손잡이를 잡고 앞에 있는 자를 노려봤다.
“그… 어… 내가 지금 바빠서….”
아힐이 레온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그제야 사내는 위험을 감지했다. 슬금슬금 뒤로 가려다 정강이에 부딪힌 강한 충격에 억 소리도 못 내고 앞으로 쓰러졌다.
“뭐… 으….”
레온이 다리를 구부려 앉아 그의 뒷덜미를 잡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아니지, 그냥 갈 순 없지. 잡았다는 건 건드렸다는 거잖아, 이 더러운 손으로.”
“그, 히… 익.”
사내는 흘끔 위를 보다가, 살의로 번뜩이는 레온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미쳤다, 이 새끼는.’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에 사내는 레온의 손을 떨쳐내려 했지만, 레온은 마치 더러운 바퀴벌레를 놓칠 수 없다는 듯 그를 뒷덜미 옷자락을 잡아 한 번에 뒤로 던졌다.
“저자도 잡아라.”
그리고 멀리서 그 남자와 대화하던 사내를 보며 말했다. 명이 떨어지자 아힐이 직접 쏜살같이 날아가 형 쪽을 잡아왔다.
그 둘을 잡고 나서야, 레온은 이성을 차리고 주위를 차분히 돌아봤다.
유랑민들 중 몇몇은 더욱 호기심을 보이며 이곳을 봤고, 나머지는 조금 관심을 보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먹을 게 아니고,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기 때문이었다.
“전보다 훨씬 수가 늘어난 것 같은데.”
“예, 국경지대에 가뭄이 든 이후부터 더 늘어났습니다.”
레온도 전부터 이들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이, 또 이런 상태로 있다는 사실은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이곳은 후문 중에서도 쪽문에 가까웠고, 성벽 주위는 온통 나무와 산으로 들러 싸여있어 와볼 일이 없었다.
“이대로 방치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예에, 하지만… 이들을 잡으면….”
체르돈의 고민 또한 레온은 알고 있었다. 레온도 처음 이들의 존재를 알았을 때 잠시 고민하다 넘겼던 일이었다.
이들은 주로 영주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도망친 농노들이었다. 원칙적으로는 직접 처형하거나, 잡아서 영지로 돌려보내야 했다.
물론 영지로 돌아가도 처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이 나라 국법이었다.
만일 잡았는데 돌려보내지 않거나, 처형하지 않을 시에는 국법을 어기게 된 것으로 간주하여 그 귀족까지 처벌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로 이들을 내버려뒀던 것이다.
‘내버려둔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에겐 그나마 살길에 가까웠고, 그 소문을 들은 유랑민들이 이곳에 모여 이렇게 많은 숫자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후문에 이렇게 모여 살게 할 순 없어. 이들을 다른 구역으로 이주시켜야겠다.”
“예? 어디로… 하지만 우리가 직접 개입하면 일이 커집니다.”
“꼭 직접 할 필요는 없지… 이 일은 다니엘이 오면 맡겨야겠다. 들어가자.”
문으로 들어가기 전, 레온은 이들을 한 번 더 돌아보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후문으로 나오는 수레 위에는 평소보다 멀쩡한 음식들이 훨씬 많이 나왔다.
물론 이걸로는 당장 배고픔을 채울지언정,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배고픈 아이의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날 밤은 평온했다.
***
눈을 뜨자 아직도 깜깜한 밤이었다.
지금 막 깨어난 다나는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직도 섬뜩한 공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손을 높게 들어 눈앞에서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목으로 가져가 손아귀에 힘을 줬다.
“읏….”
스스로 목을 조르며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며 다시 잠이 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쯤, 누군가 강한 힘으로 다나의 손을 잡아 목에서 떼어냈다.
“무슨 짓이야.”
“하아, 아….”
흐릿했던 다나의 동공이 차츰 돌아와 그를 바라보았다. 달빛에 어스름하게 비친 그의 얼굴은 왠지 화난 것처럼 보였다.
“…레온.”
“죽고 싶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설명하려는데, 갑자기 몸이 떨리고 눈물이 맺혔다. 아,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물밀 듯이 밀려 나왔다.
그녀에게 화를 내던 레온은 갑자기 다나가 눈물을 보이자 당황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나는 미끄러지듯 그에게 안겨들었다.
“무서운 꿈을 꿨어요.”
“단지 그것뿐이야?”
“누군가 내 목을 조르는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레온은 무언가 짐작이 가는지 가만히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대로 내가 죽었는데. 분명히 죽었는데, 의식은 살아있고.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어요.”
다나는 숨을 몰아쉬며, 아직도 무서운지 어깨를 떨었다. 그러자 투박한 손길이 머뭇거리다 다나의 등 위를 쓰다듬었다.
“나는… 레온. 누군가에게 목이 졸리고 산에 버려진 건가요? 그런… 거죠?”
겁에 질린 파란 눈동자가 레온을 바라보며 잘게 진동했다. 다나는 레온의 옷자락을 꼭 잡고 그에게 더욱 바싹 붙었다.
“그럼 그 사람은,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면 또 날 죽이려 들 텐데. 난,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왜 죽어야만 했는지도….”
그 말을 꺼내며 이런 반응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것 같다. 레온은 책임을 느끼며, 다나를 좀 더 힘 있게 안아 토닥거렸다.
“다나.”
다나는 이제 다나라 부르는 레온에게 굳이 토 달지 않았다. 한번 자신이 다나 대역이라 생각하고 행동했기 때문인지, 다나라는 이름이 사라보다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졌다.
“괜찮아, 다나. 괜찮으니 나를 봐.”
파란 달빛에 비춰 더 파래진 눈동자가 그를 보았다.
“내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거라면. 죽을 만큼 잘못한 거면 어떡해요.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해. 그게 누구든, 어떤 이유이든.”
레온은 두 손으로 다나의 뺨을 감싸 쥐며 가깝게 눈을 마주했다. 두 이마와 코끝이 닿는 거리에서,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으로, 그는 그녀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 건드리게 할 생각도 없었다.
만일 다나가 희대의 살인마라 해도, 그녀를 노리는 사람이 황제라 해도.
그 전에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는 낯 뜨거웠고, 스스로 미친 집착이나 소유욕이라 정의 지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망가지더라도 곁에만 있다면 상관없다 생각했었다.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젖은 속눈썹이 한 번씩 깜빡일 때마다, 고여 있던 눈물이 방울지며 흘러내렸다.
그것을 보며 레온은 가슴 어딘가가 시큰거리는 낯선 감각을 느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다나의 볼을 감싸 쥔 그대로, 다가가 입술로 조심스레 눈물을 훔쳐냈다.
너무나 소중한 듯, 깨진 유리를 다루듯, 그녀의 뺨과 눈가, 이마에 키스하다 콧등을 타고 내려왔다.
“아.”
코끝을 살짝 깨물자, 그녀가 살짝 움츠러들며 작게 소리 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아아, 역시나 낯설었지만 이건 사랑스럽다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레온은 소리 없이 탄식했다.
“레… 아… 응….”
그것을 느낀 다나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부드럽게 입술이 겹쳐졌다.
조금 놀란 다나가 눈을 깜빡거리다 살포시 감아 내렸다. 그리고 레온의 커다란 어깨와 등에 팔을 둘러 매달렸다.
그녀의 말랐던 입술이 촉촉하게 적셔지며 그의 입안에 머금어졌다. 그동안의 거칠고 맹목적인 키스와는 사뭇 달랐다.
레온은 정말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혀로 핥다 살짝 아랫입술을 빨아들였다. 그러자 도톰한 입술이 조금 더 부어올라 말랑거렸다.
그 사이로 천천히 말캉한 혀를 갖다 대었다. 들어갈 듯 말 듯, 입술 사이를 오가는 그의 혀에 다나는 슬슬 애가 타기 시작했다.
다나는 그의 목을 좀 더 세게 끌어안으며, 자신의 혀를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혀끝과 혀끝이 서로 닿았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밀고 당겼다.
다나의 뺨을 감싸 쥐던 손이 그녀의 귓가로 가 귓바퀴를 쓸고,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조금 튀어나온 그녀의 혀를 강하게 안으로 흡입했다.
“흐… 읍.”
혀가 얼얼해질 지경이 되어서야 놓아줬다가, 이번에는 그가 깊게 들어왔다. 귀를 만지작대던 그의 손은 뒷목을 타고 올라가 머리칼 사이 사이로 손가락을 파고들게 했다.
두피를 스치는 감각에 쭈뼛 소름이 돋았고, 그 바람에 입안에 있는 레온의 혀를 콱 깨물고 말았다.
‘아, 어떡해.’
다나는 속으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레온은 조금 움찔했을 뿐 입맞춤은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레온이 조금 움찔하긴 했지만, 타액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져 그에게 너무 미안했다.
다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그와 혀를 섞으며 상처를 어루만졌다.
그러다 조금씩 레온의 무게가 자신에게 실리는가 싶더니, 그가 다나의 뒤통수를 감싸며 서서히 그녀를 침대 위로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