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높고 멀게만 느껴졌던 성문이 활짝 열리고 마차는 안까지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다나는 마차에서 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하면서도 조금 낯선 곳이었다.
‘아아, 여기는 외궁이구나.’
테라티우스 성은 여타 귀족들의 저택과 규모와 구조면에서 아주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은 예전 왕궁이었기 때문이다.
정식 왕궁답게 외궁과 내궁이 나뉘어 있었다. 다나가 주로 머물렀던 곳은 내궁이었고, 레온의 집무실은 내궁과 외궁에 모두 존재했다.
정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들은 거의 외궁 쪽에 볼일이 있어 드나들었다.
다나가 아주 잠깐 딴생각을 하자마자, 이마에서 딱 하고 소리가 났다.
손버릇이 안 좋은 허먼은 뭔가 말을 할 때마다 사람을 치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상대는 자신보다 약하거나 만만한 이들로 골라 때렸다.
“야, 두리번거리지 마.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된다.”
다나는 상단 관계자 둘과 함께 이곳에 왔다. 허먼은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이었고, 덩치가 큰 스테인은 호위인척 따라왔지만 다나가 도망가지 못하게 감시하라는 명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다나를 둘러싸며 험상궂은 얼굴로 뭔가 말하려던 차였다.
“오신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건물에서 시종이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허먼과 스테인은 바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풀었다. 다나와 일행은 시종의 안내에 따라 외궁의 응접실로 향했다.
외궁은 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업무 공간으로 이루어져, 내궁보다 좀 더 실용적이고 단순하게 꾸며져 있었다.
다나는 그것들을 보며 어쩌면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차를 내오겠습니다. 이쪽에 앉아서 기다려주십시오.”
“저, 그런데 대공 전하께서 정말 직접 나오시나요?”
“그런 말씀은 못 들었습니다. 보통 이런 일을 대공 전하 같은 분이 직접 나오실 것 같진 않습니다만….”
시종은 예의 있게 말하면서도, 조금 기가 막힌 듯 답해주었다. 그로서는 하늘만큼 높은 대공을 상대로 장사치들이 만날 생각을 한다는 게 가소로웠다.
실제로 이 정도 일은 성의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만나 처리했고, 이렇게 성까지 부르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그렇게 말한 시종은 곧 차를 내어왔고 더 이상의 말을 아낀 후 자리를 떠났다.
초조한 와중,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약속한 상대는 나오지 않았다.
다나는 점점 불안해졌고, 허먼이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럴 거면 왜 이 시간에 오라고 한 거야? 벌써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귀족들이 다 그렇죠, 뭐. 우리 같은 천한 사람들 상대로 약속 시간을 지킬 리가 있겠습니까.”
다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들어오는 입구만 초조하게 쳐다봤다.
***
이제 제법 날이 풀려있었다. 오후의 햇살은 산책을 다니기 딱 좋았다. 서쪽 별궁부터 본성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봄꽃이 소담스럽게 피어있었다.
“어머머, 저기 봐. 두 분이….”
“정말 잘됐어. 마님께서 그렇게 애타게 찾으셨는데.”
소피아의 별궁에서 일하는 시녀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며 기뻐했다. 이 성에서는 정말 드문, 아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레온은 창문 아래 보이는 기이한 광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절대,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누군가에게 들어도 믿지 못할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
소피아가 오웬의 부축을 받으며, 함께 나란히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레온에게 보란 듯이 그의 방에서 아주 잘 보이는 벤치에 두 사람이 앉았다.
레온에게 그들의 대화가 들리진 않았지만, 소피아의 환하게 웃는 얼굴은 선명하게 보였다. 오웬은 등지고 앉아 있어, 그의 표정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딱 봐도 보여주기 위한 쇼임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보는 소피아의 밝은 모습은 참 보기 좋았다. 그래서 도리어 불편했다.
촤르륵-
그는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치고 시야를 가려버렸다. 뻔히 보이는 오웬의 술수에 놀아나는 상황이 답답하고도 한심했다.
아예 혼인할 마음이 없다면, 처음부터 다나 더니즈와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오웬의 말을 무시한다면, 소피아의 저런 모습을 또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답답해하는 와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전하! 아힐입니다.”
레온은 대답도 하지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아힐이 깜짝 놀라 주춤거렸다.
“찾았나.”
아힐은 레온이 최측근으로 데리고 다니는 기사였고, 사라, 그러니까 다나를 찾으라 명을 받고 수행 중이었다. 매번 그가 올 때마다 실망했지만, 그래도 기대를 완전히 안 할 수는 없었다.
“찾진 못했습니다. 다만….”
역시나 싶은 결과에 고개를 돌리려던 레온이 뭔가 덧붙이는가 싶어 다시 아힐을 빤히 보았다.
“우연히 들은 이야기인데, 출처가 영 미덥지 못해서요.”
“뭐든 말해라.”
“술집에서 병사가 옆 테이블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장사치들이 하는 이야기가 최근 더니즈 상단 본점 쪽에 예쁜 아가씨가 새로 들어왔다고.”
“더니즈?”
레온은 익숙한 이름에 되물으며 더 이야기하라 신호했다.
“예에, 언제 기회 봐서 꼬실 거라면서 자기들끼리 내기를 걸더랍니다. 그런데 언뜻 그 여자가 금발이라 했다고….”
쿵.
레온이 벽을 주먹으로 내려치자, 둔탁한 진동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아힐은 그럴 리 없지만, 혹여나 이대로 방이 무너지진 않을지 염려되어 힐끔 천장을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 병사들을 더니즈 상단으로….”
레온은 ‘금발’이라는 단어만으로 그야말로 섣부르게 명령을 내리다 말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힐은 그의 명령이 끝나길 기다리다, 그가 말이 없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
“아니다, 일단은.”
“그럼, 저는 어떻게.”
“수색은 계속하라 하고, 너는 다음 명이 있을 때까지 대기해라.”
아힐은 주인의 명령이 선뜻 이해되진 않았지만, 바로 대답하고는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차피 더니즈 상단이 이곳에 방문한다고 했다.
‘우연인가.’
그럴 확률이 컸다. 거기 있다는 금발의 여자가 다나가 아닐 수도 있었고, 애초에 그런 여자 자체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설사 있다 해도 더니즈 상단의 이번 방문은 그것과 별개의 일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일단 나가는 봐야 하나.’
다나 더니즈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이미 한참 전에 들은 뒤였다. 일부러 그들이 지쳐 돌아가길 기대하며 잔뜩 시간을 끌고 있었다.
만일 아힐이 더니즈를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레온은 결국 나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지금도 실은 꺼림칙했다.
레온은 조금 느린 발걸음으로 그들이 도착한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
소피아를 보는 오웬의 표정은 어딘가 복잡했다.
“아버지, 제가 결국 해냈어요. 그 여자를 치워버렸죠. 안주인이 되려면 독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
소피아는 마치 꿈을 꾸듯 멍한 눈으로 해맑게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오웬은 처음부터 내 사람이었는데, 그 여자를 먼저 만나는 바람에 괜히 일이 꼬여 버렸죠.”
“아니야, 소피아. 난 이전부터 그녀와 혼인을 약조했고, 당신이 끼어들어 억지를 부린 거야.”
“이제 괜찮아요. 내 것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갚아 줬으니. 아버지, 어때요? 이제 오웬이 나만 바라보겠죠?”
“그래도 노력했어, 레온이 태어났으니까. 당신이 그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서로 전혀 딴소리를 주고받았지만, 소피아는 오웬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의식은 젊은 시절 언젠가로 돌아가 있었고, 눈앞의 오웬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쭉 비밀이었던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그래도 레온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게 해주려 했건만, 이래서야 그녀 스스로 죄를 밝히게 될지도 몰랐다.
당장 시녀들이 꽤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왜 그랬어. 그녀는 당신과 나의 혼인이 결정되자마자 날 떠난 사람인데. 떠나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여자를 왜 죽인 거야? 그녀의 가족들까지도… 대체, 왜…하아. 소피아, 제발.”
오랫동안 묵혀둔 원망을 당사자 앞에서 쏟아내면서도 전혀 속 시원하지 않았다. 오웬은 아직 정정하건만, 갈색 머리가 허연 백발이 되도록 홀로 나이 든 소피아는 여전히 자신밖에 몰랐다.
그리고 계속해서 헛소리를 하는 소피아를 보며, 오웬은 원망과 함께 절대 없을 것 같았던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레온에게 보여주려는 의도로, 정신이 든 소피아를 밖에 나오게 했지만 전혀 뜻밖의 상태에 오웬 역시 몹시 당혹스러웠다.
그는 결국 더 이상 그녀를 보고 있기 힘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멀찌감치 있는 시녀들을 손짓하며 불렀다.
“이제 그만 모시고 들어가거라.”
시녀들은 쪼르르 달려와 익숙하게 소피아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건, 노망 든 여자의 헛소리일 뿐이니 믿지도 말고, 말을 옮기지도 말아야 한다. 입을 잘못 놀리다 발각되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 예. 알겠습니다, 공작 전하.”
오웬의 경고에 시녀들은 바로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오웬은 그대로 몸을 돌려 외궁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정말 ‘다나 더니즈’가 왔다면, 그로서도 직접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어릴 땐 참 닮았었는데, 지금은 어떨지.”
***
“돌아갑시다. 안 올 모양인데요.”
“실무자라도 나와야 하는 거 아냐? 하벌트 님이 그냥 돌아가면 엄청 화낼 텐데.”
“그렇다고 해도 …어? 누구….”
누군가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듬성듬성 희끗한 흑발의 남자는 그들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그의 눈은 다나에게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우린 구면이군요.”
“…아, 그때 광장에서…!”
“당신이 다나 더니즈 양입니까?”
오웬은 실은 묻기도 전에 확신하고 있었다. 일전에 보았을 때부터, 다나라는 이름을 몰랐을 때도 너무 닮아 눈길이 갔던 그녀였다.
하지만 다나는 난감해졌다. 레온을 만나면 바로 사실을 말할 생각이었지만, 이 사람에겐 어찌해야 할까.
“그렇습니다, 이분이 다나 더니즈 양입니다. 선대 대표이신 루셸 더니즈 님의 유일한 따님이시고, 현재 상단의 대표입니다.”
“아….”
다나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허먼이 바로 끼어들어 소개를 했다.
어찌할지 고민하던 다나는 말할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결국 정말 ‘다나 더니즈’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