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북쪽 국경선 부근에 있는 아키네 성은 사신을 맞을 준비에 한창 분주했다. 레온 일행은 곧 크리스틴 왕녀를 비롯한 사신단이 도착한다는 전갈을 보고 받았다.
레온은 성문을 열고, 문밖 먼 곳을 응시하며 초조함을 애써 눌러 참았다. 언뜻 여유로워 보이는 붉은 눈동자 안은 마나의 소용돌이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최대한 시력을 돋구어 남들보다 더 먼 곳을 보았다.
‘…생각보다 늦는군.’
레온이 기다리는 것은 당연하게도 엘라드 왕국의 사절단이 아니었다. 그는 이틀 전 자신이 보낸 기사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 사이 거리로 볼 때, 이틀 만에 도착한다면 그리 늦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레온의 입장에선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렀다.
‘더 빠른 연락수단을 강구해야겠어.’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셸 제국의 군사력이 그의 고민 덕분에 한층 강화될 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잠시 후, 레온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다니엘은 갑자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자신의 상관을 보고 깜짝 놀라 따라갔다.
“전하, 전하?”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저 문을 통해 사신단이 들어오고 레온은 이 자리에서 황제를 대신하여 일단 그들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레온은 지금 자리를 이탈하여 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곧이어 그를 쫓아가는 다니엘의 귀에도 말발굽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잠깐, 멈추십시오! 지금 사신단이 곧 도착하여 이 문으로 출입할 수 없습니다.”
문을 지키는 기사가 말 타고 들어오려는 기사를 막는 것 같았다.
“아아, 테라티우스 대공 전하께서 직접 명령을 내리신 일입니다.”
“그렇다 해도….”
“전하!”
달려왔던 기사는 누군가를 보고 훌쩍 말에서 뛰어내려 부복 자세를 취했다. 그의 출입을 막고 있던 기사도 찔끔 놀라며 무릎을 꿇었다.
“보고해라.”
레온은 단도직입적으로 듣고 싶은 바를 요구했다. 하지만 급해보였던 기사는 우물쭈물하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저, 그것이….”
“전하, 자리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저기 엘라드 왕국의 깃발이 보입니다!”
다니엘이 레온에게 다급하게 전달했고, 레온은 어쩔 수 없이 기사에게 명령하며 뒤돌아섰다.
“따라오며 보고해. 빨리 일어나라.”
“예, 전하. 그것이, 사라라고 하는 분이 요 며칠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푸른색 카펫을 따라 걷던 레온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다니엘도 레온의 곁에서 기사의 보고를 들었기에, 무슨 이유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전하, 전하. 일단은….”
다니엘이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구르며 그를 재촉했고, 다행히 레온이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가자 때에 맞춰 사절단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사절단이 들어오자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로 모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저게… 뭐야?”
황금빛 마차.
마차 전체가 금으로 도색된 마차는 하셸 제국의 황제가 타는 것보다 화려하고, 또한 사치스러웠다.
그 마차 주위를 수행하는 인원만 해도 수십 명이었고, 뒤로는 짐 마차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짐 마차에 언뜻언뜻 보이는 물품들은 보석, 장신구, 모피와 양탄자 등이 있었고 식음료를 실은 것들도 보였다. 그것들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물건들로 보였다.
“흠흠, 엘라드 왕국이 가뭄으로 기근이라더니… 헛소문인가 봅니다.”
허허실실 웃으며 중얼거리는 다니엘의 말에 대꾸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레온은 한 자리에 서서 무표정하게 들어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도착한 사절단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왕녀가 마차에서 내리지 않자, 조용하던 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레온은 귀찮은 표정으로 짧게 숨을 내뱉고는 터벅터벅 단상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들은 레온이 다가오자 바로 길을 터 주었다.
똑, 똑-
“문을 열겠습니다.”
안의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레온은 마차의 문을 열어버렸다. 그리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 크리스틴 왕녀에게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왕녀 저하, 내려오시죠.”
왕녀는 문이 열렸지만 미동도 하지 않고 꼿꼿이 앉아 있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이 그녀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영 내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왕녀를 두고 레온은 손을 거뒀다.
“그대로 계실 겁니까.”
레온의 목소리에선 별로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하셸 제국의 신하들은 자신들의 주군, 혹은 제국의 대공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났고 삽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들의 표정을 읽은 엘라드 왕국의 신하 한 명이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마차 가까이 다가왔다.
“왕녀 저하, 이분은 테라티우스 대공 전하이십니다.”
그 말에 왕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며 옆을 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을 직접 맞이하러 온 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엄연히 말하자면, 제국의 대공은 한 나라의 왕과 버금가는 지위였다. 따라서 국외에서 본다면 왕녀는 대공보다는 아래였다.
레온의 태도는 사절단을 맞이하는 입장에서 레이디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기 위해 나온 행동이었다. 물론 더 깊숙이 들어가자면, 미적대는 왕녀를 좀 더 빨리 움직이게 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
왕녀는 레온의 깎아놓은 듯한 잘생긴 이목구비와 딱 벌어진 어깨, 그리고 그의 존귀한 신분을 증명하는 테라티우스 인장이 찍힌 갑옷을 순식간에 훑어보았다.
그를 본 왕녀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셨군요. 대공, 만나서 반가워요. 하지만 나는 그런 더러운 곳을 밟고 내려갈 순 없어요.”
무슨 말인가 하고 봤더니 마차의 발받침에 흙먼지가 조금 묻어있었다.
레온이 손을 거두고 왕녀를 빤히 올려다보자, 왕녀는 당연한 듯한 표정으로 살짝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죄송합니다!”
왕녀를 모시는 시녀 하나가 자신의 소매로 먼지를 털기 위해 재빨리 다가왔다. 하지만 레온이 손바닥을 보이며 그녀가 오지 못하게 막아 세웠다.
“어차피 바로 출발할 예정이었으니, 계속 마차에 타고 계시면 되겠습니다.”
레온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하며, 마차의 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 다급한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들려왔다.
“잠깐만요!”
레온은 닫으려던 문을 잡고, 더 할 말이 있냐는 얼굴로 왕녀를 보았다. 크리스틴 왕녀는 이미 표정 관리에 실패하여, 당황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하지만 레온의 얼굴에선 일말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왕녀 입장에선 황당하고 어려운 순간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요구하면, 왕국에서는 누군가 왕녀를 안고 내려주거나 신분이 미천한 자는 엎드려서 등을 대주곤 했다. 물론 대공을 상대로 했으니, 그녀를 안아서 내려주길 기대하고 한 말이었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바로 출발이라니 무슨 말씀이죠?”
“폐하께서 기다리시니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크리스틴 왕녀는 조금 초조해보였다. 미간을 한 차례 찌푸리던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레온이 물끄러미 그 손을 보면서 태연하게 대꾸했다.
“발판이 아직 더럽습니다만.”
크리스틴의 얼굴은 아예 벌겋게 달아올랐다. 중간에 멈춰 섰던 시녀가 후다닥 다가와 마차 아래 엎드렸다.
“전하, 밟고 내려오세요.”
그러자 왕녀는 머쓱했던 손에 대한 분풀이인지 시녀의 등을 신경질적으로 콱 밟고 땅에 내려섰다. 시녀는 땅에 머리를 박은 채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크리스틴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레온을 슥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외교적으로 상당히 무례한 태도였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고 고압적인 목소리로 명령했다.
“먼저 목욕물을 준비해주세요. 난 지금 지쳐서 움직일 수가 없으니 며칠 푹 쉬었다 출발해야겠어요.”
그녀는 막무가내로 나왔고, 별말 없는 레온을 지나쳐 성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다니엘이 왕녀가 사라지자 분통을 터뜨렸다.
“너무 무례한 거 아닙니까! 일부러 대공 전하께 수행을 부탁했다면서, 왕녀의 저 태도는 뭡니까. 게다가 엘라드 왕국은 오래되긴 했어도, 국력은 우리가 한참 위란 말입니다. 사절단이 온다는 거부터가 자기들이 아쉬운 게 있다는 건데.”
레온이 자신을 슥 쳐다보자, 길게 투덜대던 다니엘이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레온의 기분은 생각보다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래, 자네가 보기에도 이상하단 말이지.”
“네, 대공 전하. 아무리 국왕이 아끼는 크리스틴 왕녀라 해도, 지나치게 오만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제국의 위엄을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가 눈치 볼 이유가 뭡니까! 차라리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맞는 말이야.”
레온은 잠시 허공을 보며 침묵했다. 몇 초간의 짧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나는 그만 영지로 돌아가겠다. 몇 명만 데리고 갈 테니 나머지 인원들은 성에서 대기하다, 대신할 자가 오거든 함께 출발해라.”
“저, 전하? 가신다고요?”
다급하게 되묻는 다니엘에게 레온은 꽤 단호히 말했다.
“그래, 뭔가 확실히 수상하니까. 그리고 자네 의견에 동의하네. 내가 이 일을 하는 건 제국의 위엄이 서질 않는다고 했지.”
“하지만 폐하께는….”
“폐하께는 내가 말씀드리지. 자네는 남아서 저들을 따라가도록 해.”
레온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호위 기사들이 돌아가겠단 명이 떨어지자 가타부타 말없이 떠날 준비를 했다.
다니엘은 당황하여 입을 뻐끔거리면서도, 조금 전 자신이 홧김에 뱉은 말 때문에 차마 말리지 못했다.
‘설마 아까 그 일 때문에 가신다는 건 아니겠지?’
자신이 한 생각에 다니엘은 고개를 저으며 얼빠진 표정으로 웃었다.
“내가 저 대공 전하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