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다나가 재빨리 엎드린 남자를 지나쳐 갔다. 뛰어가던 다나는 문 쪽을 향하다 멈칫했다. 얼굴이 피범벅 된 동생이 대자로 그 앞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으으, 야! 정신 차리고 일어나! 저년 도망간다! 흐억!”
형은 통증에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동생을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다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동생 쪽의 다리를 넘어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얌전히 있던 그의 다리 한 짝이 올라갔다.
“아앗!”
그 바람에 다나가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저 병신은 그걸 또 놓치네.”
다나를 넘어뜨린 남자는 상체를 일으켜 그녀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다나가 좀 더 빨랐다. 욱신거리는 무릎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일어나 간발의 차로 손아귀를 벗어났다.
“아, 이게…!”
남자도 서둘러 일어나려 했으나 삭신이 쑤셔 조금 굼떴다. 다나는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빨리, 빨리… 어디로든.’
끼익-
“젠장, 어디로 간 거야?”
뒤편에서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다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거꾸로 매달려 왔던 다나는 이곳이 어딘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경사진 내리막길 아래 수풀이 보였고, 다나는 그곳으로 최대한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내려갔다.
저녁이 되어 사위가 잘 분간되지 않았지만, 다나에겐 오히려 그편이 나았다.
다나는 수풀 안쪽으로 들어가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두 형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쥐새끼 같은 년, 감쪽같이 사라졌네.”
“멀리 못 갔을 거야, 이 근처 어디 있을 텐데.”
수군대는 음성과 함께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안 돼, 제발.’
다나 숨소리가 새어나갈까 무서워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을 감았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렸다.
저벅, 저벅, 저벅.
“…….”
풀을 밟는 소리가 어디론가 향하다, 이내 우뚝 멈춰 버렸다.
‘들켰나?’
“어이, 이봐! 지나가는 여자 못 봤어?”
다시 남자들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내 낯선 음성 하나가 끼어들었다.
“여자라고? 버러지 같은 자식들이 여자를 왜 찾는 거야? 무슨 수작질을 부리려고?”
들리는 소리에 다나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자신이 숨은 수풀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낮고 걸걸했지만, 그 음성은 분명 중년 여자였다.
“뭐야, 이것도 계집이잖아?”
“그래서, 뭐?”
“늙은 계집이라도 우린 상관없거든, 몇 해를 굶어서… 어엇!”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맑은 금속음이 울렸다.
“검, 검? 여자가 검을 써?”
“이 자식들, 뭘 어쩌고 저째?”
“으아아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두어 번 들리고 남자들의 비명이 점점 멀어졌다. 다나는 이 모든 걸 수풀 속에서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나와.”
“…….”
잠시 망설이던 다나는 몸을 웅크리고 수풀 밖으로 빠져 나왔다. 머리카락과 옷에 잔가지와 나뭇잎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아휴, 칠칠치 못하게.”
여자는 툭툭 다나의 몸을 털어주었다. 다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평범했다. 풍만한 덩치에 앞치마를 두른 채, 붉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땋아 길게 늘어뜨린 모양이었다. 바닥에는 그녀가 들고 온 것 같은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한 손에 검을 들고 있다는 것 외에는 평민 가정집의 여인 같은 모습이었다.
“이 길을 지날 때 잡것들이 잘 붙는단 말야. 너도 조심하라고.”
“…네.”
다나는 얼떨결에 대답하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새삼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여 절로 한숨이 나왔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다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고, 여인은 그런 다나를 빤히 쳐다봤다.
꼬르르륵-
‘핫.’
다나는 얼른 두 손으로 배를 가리며 민망한 표정으로 흘끔 여자를 보았다.
“뭐야, 배가 고픈 거야?”
“그게….”
그러고 보니 성에서 쫓겨난 이후, 물 한 모금 먹지 못했다. 여자는 바구니를 챙겨 들었다.
“괜찮으면 따라올래? 지금 갈 데 없지?”
“아.”
다나는 잠시 우물쭈물하다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어차피 성에는 지금 못 들어가니까. 나쁜 사람 같지는 않고….’
“저….”
어디로 가냐고 물으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지금 자신의 빈약한 기억으론 어디가 어디라고 해도 모를 가능성이 컸다.
“내 이름은 리사야. 너는?”
“…사… 라. 사라예요.”
자신의 진짜 이름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나는 레온이 붙여준 이름을 그대로 말했다.
걷다 보니 아까 쫓겨났던 후문이 보였다. 낮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성벽을 따라 사람들이 앉거나 누워있었다.
대충 더러운 거적을 주워 덮는 사람도 있었고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 쿨쿨 잘 자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소란도 없고 고요했다. 힘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그들 모두의 눈빛에서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리사는 그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빙 둘러 갔다.
“저 사람들은 누구예요?”
“아아, 저것들?”
리사는 슥 눈길을 돌리다 다시 앞을 보았다.
“이곳 사람들은 아니야, 다 외지인들이지.”
질색하는 말투와 달리, 리사의 눈빛에선 약간의 동정심이 묻어나왔다.
“주변 영지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대다수일 거야. 도망은 쳤는데 갈 데는 없고, 잡히면 그대로 사형이고.”
“그런데 왜 이곳에 모여 있는 거죠?”
“테라티우스 대공성 근처잖아.”
다나는 쉽사리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리사를 보았다.
“만약 다른 귀족이 저것들을 잡는답시고, 대공성 근처로 병사들을 끌고 오면 어떻게 되겠어?”
“으음, 어떻게 되는데요?”
“내전으로 간주하고 전쟁이 일어나겠지. 십중팔구 보낸 놈들은 초토화될 거고.”
“그렇군요….”
다나는 그녀의 옆을 걸으며 신기한 듯 눈을 깜빡였다. 굉장히 아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기들의 영주가 여기는 절대 못 건드리는 걸 알고 저것들이 저기 저렇게 모여 있는 거야. 성과 가까울수록 더 안전하지.”
“그럼 대공성에선 쫓아내진 않는 건가요?”
“원래대로라면 다 잡아서 처형하거나 돌려보내야 하지만….”
다나는 그녀의 생략된 설명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사는 길가로 가서 지나가는 공용마차를 멈춰 세웠다.
그녀는 테라티우스 광장 근처에 있는 상단에서 부엌일을 담당한다고 했다.
‘검도 쓰고, 뭔가 어울리지 않는데.’
다나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리사 옆에 앉아 마차 창문 밖을 보았다. 상대가 말하지 않는 것을 굳이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녀는 자신의 일만으로도 지금 충분히 심란했다.
‘결국 레온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
“전하.”
뒤늦게 도착한 다니엘이 레온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의 목적지는 하셸 제국의 국경선이었다.
가는 데에만 나흘이 걸리는 거리라, 그들은 밤을 보내기 위해 중간에 있는 성에 머물렀다.
성주는 레온이 도착하자 감격에 겨워하며 최선을 다해 대접하려 했다. 그 최선이 과한 나머지 술과 여자를 들이밀었다가, 레온의 차가운 반응에 풀이 죽었다는 말을 지금 막 다니엘이 듣고 오는 길이었다.
다니엘은 살살 눈치를 살피며 레온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지금 레온은 엘라드 왕국의 사절단을 마중하여 수도까지 이송하는 임무를 받고 나와 있었다.
보통의 사절단이라면 한 나라의 대공이 직접 갈 리 만무했다. 그러나 이번 사절단의 대표로 엘라드 국왕이 애지중지한다는 크리스틴 왕녀가 직접 방문하며 레온을 지명했다.
그렇다 해도 공사다망한 대공이 꼭 나가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황제는 북쪽 야만인에 대한 공동 방어선을 언급하며 은근히 그가 가줬으면 하는 의사를 전달했다.
쉽사리 명령을 내릴 수 없었던 건, 사절단을 맞이하는 건 통상적으로 백작, 높아 봐야 후작급 귀족이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레온은 황제에게 열흘간이라는 조건을 붙여 다녀오겠다고 답했지만, 떠나고 보니 후회가 막심했다. 생각보다 날짜가 일러 급하게 출발해야 했고, 그 때문에 성안의 일들을 제대로 처리하고 오지 못했다.
‘차라리 데려올 것을.’
팔짱을 낀 레온의 손가락이 연신 톡톡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잠자코 기다렸다. 레온이 저러고 있을 때는 뭔가 진지하게 골똘히 생각할 게 있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면 서쪽 경계의 군량 보급로 확보 문제라든가…?’
“더 줄일 순 없나?”
“…예?”
다니엘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예상하는 찰나, 레온이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질문을 던지자 멍청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수도까지 가는 시간 말야.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 너무 돌아가는군.”
“아, 음. 물론 산길로 가면 훨씬 빠르지만 마차가 가기엔 무리니까요. 명색이 그래도 왕녀인데 말 등 위에 태울 순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레온이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엘라드 왕국의 정기 사절단은 연례적인 행사였다. 이런 식의 마중은 오로지 왕녀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녀가 왜 정기사절단과 함께 오는지는 엘라드 쪽에서 밝히지 않고 있었다.
이런 와중 레온은 정작 자신이 왜 이렇게 마음이 급한지 알면서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때때로 어머니 소피아의 병증이 걱정된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지에 나와 황제의 명을 수행하는 것이 이렇게 짜증나거나 초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레온이 몇 마디 꺼낸 후 다시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다물자, 다니엘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 전하. 오기 전에 그분을 뵈었습니다.”
“그분?”
다니엘은 낮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골랐다. 레온과 사적으로 가까운 사이인 건 알았지만, 정체불명의 여자를 부를 호칭이 마땅히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여인’을 칭하는 포괄적인 단어를 택했다.
“그, 성에 머무시는 레이디 말입니다.”
다니엘이 다나를 언급하자 레온이 입매를 굳히며 그를 빤히 보았다. 어디 한번 무슨 말을 지껄일지 보겠다는 듯이.
“그, 어, 그러니까.”
그 위압감에 살짝 기가 질린 다니엘은 원래 말하려던 용건에서 살짝 방향을 틀어 말을 이어갔다.
“계속, 성에 계신다면, 어떤… 역할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 보기에도….”
“내가 침대에서 여자를 안는 것까지 눈치 봐야 하나?”
직설적인 물음에 다니엘은 화들짝 놀라며 손바닥을 흔들었다.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전하!”
당연히 아니었다.
하셸 제국 귀족들의 성생활은 개방적이고 문란했다. 어떤 이성, 혹은 동성을 침실로 부르더라도 그것은 누구의 눈치를 볼 일은 아니었다.
배우자가 있다면 조금 다르겠지만, 그들 또한 서로 모른 척해줄 뿐 실상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다니엘은 너무 금욕적인 레온이 혹 어딘가 문제가 있나 싶어 전전긍긍하던 차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니엘도 다나의 존재를 은근히 반겼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레온이 그녀를 단순한 잠자리 상대 이상으로 대하는 것 같아 슬슬 걱정이 되고 있었다.
“단지 그런 상대로 여기시면서 계속 곁에 두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다니엘.”
“네, 네.”
“월권이 지나치군. 내 사생활까지 들먹이다니 말야.”
레온의 목소리엔 한 점의 흥분도 담겨있지 않았다. 냉정을 되찾은 듯 보였지만, 그래서 더 위험했다.
다니엘이 ‘아차.’ 하고 레온의 표정을 살피다, 곧바로 사과하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주제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