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네?”
뒤를 돌아보는데, 늙은 여인이 절뚝이는 다리로 다나에게 다가왔고, 다나는 슬슬 뒷걸음질 쳤다.
“…저 여자! 아직도… 아직도 살아있어! 정말 끈질기구나. 어서 이 성에서 나가지 못해? 오웬에게서… 당장, 당장 떨어져…!”
두서없이 뱉는 말들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인은 시녀들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몸부림치며 악을 썼다. 그녀는 다나를 향해 엄청난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마님! 무슨 일이십니까!”
성내를 순찰하던 병사들이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다나는 오도 가도 못 한 채 눈만 깜빡이며 얼어붙었다.
“저년을 어서 끌어내! 어떻게, 어떻게… 이 성에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아니 왜… 살아있는 거야? 내가 분명! 뭐 해! 당장!”
병사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이 성의 안주인이 명령하자 어쩔 수 없이 다나에게 다가갔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다나는 별안간 벌어진 소란에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대답했다.
“대공 전하의 손님으로 본성에 머물고 있어요. 확인해보세요.”
“당장! 끌어내지 않고 뭐 해! 당장! 아아악!”
“마님…!”
여인을 발작하듯 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녀들은 혹 이 여인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부축했다. 보다 못한 시녀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뭐 하시는 거예요! 마님이 말씀하시는데! 빨리 내보내요!”
병사는 다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여쁜 외모에 시선이 가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다나의 차림이 깔끔하긴 했지만 귀족이라기엔 너무 단출했다. 그들은 ‘대공의 손님’이라면 당연히 그녀도 귀족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공 전하의 손님이 맞으십니까? 어떻게 확인하죠? 아, 그래! 거기 이봐!”
병사는 먼발치에서 구경하던 하녀 하나를 불러들였다. 이곳의 하녀들은 맡은 구역마다 복장이 미묘하게 달랐고, 그 하녀는 대공이 머무는 본성의 하녀였다.
그리고 다나가 이미 안면을 익힌 적이 있는 테라라는 하녀였다.
“테라, 넌 본성에 오래 있었으니 잘 알겠구나. 이분이 전하의 손님으로 오신 게 맞느냐?”
병사가 다나를 손짓으로 가리키자, 테라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설레설레 가로 저었다.
“그래? 네가 모른다면….”
“…저기요! 저 아시잖아요?”
“글쎄요, 내내 본성에 있었지만…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녀의 뻔뻔한 대답에 다나가 기가 막힌 듯 따졌지만, 테라는 단호하게 대답하고는 자리를 피해버렸다.
테라는 얼마 전에 다나와 실랑이를 벌이던 하녀였다.
다나와 그 일이 있은 후, 테라는 대공으로부터 직접적인 꾸지람은 없었지만 스스로 불이익을 겪고 있다 여겼다. 오랫동안 일한 경력에 맞지 않게, 신참들이나 가곤 하는 빨래방에 배정된 것이었다.
그 일에 복수할 기회라 여기며 그녀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뒤돌아 선 테라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어차피 대공의 어머니가 쫓아내라 한 이상 저 여자는 쫓겨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자신에게 뒤탈이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내 눈앞에서 없애줘! 제발! 아…!”
이 와중에도 늙은 여인을 고래고래 거품을 물고 소리를 질렀다. 악에 받친 그녀의 목소리는 흡사 공포에 질려 보이기도 했다.
“테라도 모른다잖아요! 어서요!”
시녀가 재촉하자 병사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비록 정신 나간 노인이었지만, 그녀는 현 대공의 어머니였고 대공은 그런 어머니를 끔찍하게 보살폈다. 그리고 대공이 혼인하지 않은 시점에, 여전히 그녀는 이 성의 안주인이었다.
병사들의 낌새가 심상치 않자, 다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저 하녀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다시 다른 사람에게 물어… 아앗!”
병사들은 다나의 양팔을 결박하듯 양쪽에서 잡았다.
“성에 워낙 많은 사람이 드나든다고, 이렇게 깊숙이까지 오는 연놈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
“게다가 뭘 잘 모르는 모양인데, 대공 전하는 남이 본성에 머무는 걸 무척 싫어해. 그래서 친구이신 마빈 코스트 백작님도 하루 이상 계신 적이 없어. 거짓말을 해도 그럴듯해야 말이지! 귀족도 아니고 말야!”
“정말… 정말이에요…! 놔주세요! 네? 증명해보일게요! 아얏!”
병사는 귀찮다는 듯 다나의 뒤통수를 세게 내려쳤다.
“조용히 해! 입 닥쳐! 너 때문에 저 마님이 잘못되시면 우리 모두 대공 전하께 죽은 목숨이니.”
실제로 이들은 다나가 본성에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도 듣지 못했다.
성이 워낙 크고 본성과 별궁이 별도로 운영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레온이 워낙 주변인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했기 때문이었다.
레온 자신은 함구하라 명령하면서도 금방 퍼질 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성격을 아는 사용인들은 그 수가 많았음에도 생각보다 그의 당부를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결국 다나가 아무리 해명하려 했지만, 그들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그녀를 성문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그녀의 말을 듣고 확인해주기엔, 그들은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앞서 지나간 테라라는 하녀는 이 성에서 꽤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과 아주 익숙한 사이였고 그녀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에잇! 저리 가!”
다나는 밖으로 떠밀리는 힘에 못 이겨 바닥으로 쓰러졌다.
“…말도 안 돼.”
순식간에 성 밖으로 쫓겨난 다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성의 정문이 아닌 후문 쪽으로 밀려나왔다.
“여긴….”
다나는 쓰러진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전에 성안에서 언뜻 본 정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똑같이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후문 쪽 사람들의 눈빛은 퀭하고 어딘가 음산했다.
그들 중 한 명과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소름 돋고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냐, 괜찮아. 침착해.’
다나는 손과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일어났다. 기억을 잃고 난 후, 다나는 아직 낯선 사람이 무서웠다. 그러니 이 느낌은 그것의 연장 선상이라 생각했다.
다나는 높은 성벽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자신을 아는 이에게 이 상황을 알릴까. 레온은 열흘간 없다고 했다.
아는 사람이라 봐야 본성의 사용인 몇 명과 보좌관 다니엘 정도. 아까의 반응으로 봐선 그들이 설사 본다 해도 자신의 편을 들어줄까.
“하아….”
더럽고 꾀죄죄한 차림의 사람들은 성벽 아래 아무렇게나 앉아 있거나, 혹은 누워있었다. 힘없이 축 처져있으면서도, 그들의 눈동자는 다나를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다.
다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어딘가 앉으려 했다. 하지만 부담스러운 시선과 코를 찌르는 악취에 차마 선뜻 그들 사에 앉을 수가 없었다.
‘다른 곳으로 가볼까.’
하지만 아주 혹시라도, 누군가 자신의 부재를 알아차리고 찾으러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이 자리에 있는 편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나는 후문과 제법 떨어진 성벽 아래 젊은 여인들과 소년, 소녀들이 모여서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자연스레 그녀는 그곳으로 향했고, 그 소녀들과도 아주 조금 떨어져 홀로 앉았다.
무릎을 세워 모으고 그곳에 얼굴을 묻었다. 문이 열리는 쇳소리가 들릴 때마다 고개를 들었지만 매번 실망했다.
주로 오물이나 쓰레기를 버리기 위한 수레들이 그곳으로 드나들 뿐이었다.
“하루 정도만….”
하루만 기다려보자. 그리고 아무도 안 나온다면 다른 방법을 찾기로 그렇게 마음먹었다.
‘어차피 열흘 후면 온댔으니까.’
철컹, 끼익-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또다시 철문이 열렸다. 이번에도 아니겠거니, 반쯤 체념하며 다나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주변인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벌떡 일어났고, 젊은 여인들은 갑자기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그리고 후문 가까이 있던 사람들도 늘어졌던 몸을 일으켜 어슬렁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묘하게 보다 보니 문에서 가까울수록 덩치 큰 남자들이 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조금 서두르면서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결연한 눈빛을 한 채 열린 문 안쪽을 집중했다. 오직 다나 만이 그들의 모습을 앉은 자리에서 멀뚱멀뚱 지켜볼 뿐이었다.
“대체 왜….”
덜컹거리며 수레가 밖으로 나왔다. 수레 안에는 커다란 원형의 통이 여러 개 들어있었다. 갖고 나온 병사는 수레를 밖에 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아아…!”
순식간에 사람들이 그 수레를 향해 달려들었다.
덩치가 큰 남자들은 달려드는 사람들을 툭툭 밀며 무언가를 챙기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 또한 밀려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달려들었다. 그중에는 가녀린 여인도, 다리를 절뚝이는 노인도 있었다.
다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실체를 안 순간 표정이 일그러졌다.
“오늘은 고기가 별로 없네. 아 씨, 비켜! 걸리적거리게!”
그 수레에는 성에서 먹다 남은 음식들이 들어있었다.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것들도 있었지만, 악취가 나고 상한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별로 상관없어 보였다.
당연하게도, 이 많은 인원에게 음식은 한없이 모자랐고 주로 성문 가까이 앉았던 덩치 큰 남자들이 차지했다.
덩치 큰 남자들은 한 패거리 같았다. 그들은 멀쩡한 음식의 대다수를 쓸어 담았다. 각각이 음식을 담은 자루들을 모아 놓고 비교하며 세고 있었다.
그때 아까부터 몇 번이나 밖으로 밀려난 아이 엄마가 한 남자에게 매달렸다. 아이는 멀찌감치 떨어져 간절한 눈으로 그 어미를 보고 있었다.
그 남자는 음식을 자루에 담고도 남을 만큼 많이 차지했다.
“제발, 조금만 나눠주세요…! 아이가 너무 오래 굶었어요.”
“뭐라는 거야, 나 먹고 죽을 것도 없는 마당에. 음식을 공짜로 달라는 거야? 뭐라도 내놓고 달라 말을 해야지. 널 공짜로 주면 저 인간들은?”
남자가 밀려난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사람들은 함께 굶주리는 처지에 남자를 원망하면서도, 또한 그 말에 동의하듯 조용히 있었다. 여자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 하지만… 전 가진 게 없는데요….”
“그럼 당장 꺼….”
남자는 험상궂은 얼굴로 다리에 매달린 여자를 툭툭 털어내려다, 갑자기 멈추고는 히죽 웃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여인을 이리저리 보더니 선심 쓴다는 듯 말을 꺼냈다.
“크큭, 생각을 잘 해봐, 정말 가진 게 없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