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의식을 하고 보니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앉아 있는 침대부터 시작해, 가구며 벽지, 하다못해 문고리까지도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 보였다.
다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드레스를 입기 시작했다. 언제인지 모를 기억에 의존하여, 그녀는 아주 약간만 헤맸을 뿐, 입기 복잡한 드레스를 혼자서도 수월하게 그리고 익숙하게 입고 있었다.
사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말만 못 했던 게 아니라 모든 기억이 통째로 소실되어 아주 쉬운 일조차 하지 못했다.
‘완전히 바보나 다름없었어.’
차츰차츰 나아지며 머릿속이 정리되긴 했지만 여전히 말이 나오지 않아 혼자 전전긍긍하던 차였다.
정말 뜬금없는 타이밍에 입이 트였다. 새삼스레 떠오르는 어제의 기억에 목 아래가 화끈 달아올랐다.
거울 앞으로 가 머리를 정돈하며 부끄러운 마음을 다스렸다. 어젯밤 그에게 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노곤노곤한 몸에 기대 마치 ‘진심처럼’ 전해준 말.
‘당신이 좋아요, 곁에 있게 해줄래요?’
믿지 못할 수도 있었고, 그게 당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타이밍에 그 말을 하면 그가 흔들릴 것 같았다.
‘보통 그런 사람은 맹목적인 애정에 목마른 법이니까.’
머리를 하나로 묶고, 마지막으로 거울 속 자신과 눈을 마주했다. 푸른 눈빛이 이제 제법 또렷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
다나는 방에서 식사를 마친 후, 처음으로 제 발로 방문 밖을 나섰다. 로비로 내려가는 도중 마주친 하녀들은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꾸벅 절을 하고 지나쳤다.
자신들의 주인과 밤을 보냈기 때문일까? 라고 추측하며 아예 성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아직 초봄의 찬 공기가 훅 하고 그녀의 금발 머리를 휘날렸다. 겉옷이 없어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시린 바람이 정신을 맑게 해주는 기분이었다.
조금 더 걸어 나가서야 건물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웅장하고 거대한 성은 마치 어느 왕국의 성처럼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데.”
애써 기억을 되새겨 보았지만 역시나 소용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대체 이 상태로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걸까.’
부분부분 떠오르는 것들은 있었다. 언젠가 만졌던 드레스의 감촉이나 좋아했던 장신구의 모양, 어딘지 모를 길거리의 풍경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들이 빠져 있었다.
“난… 누굴까.”
다나는 정문 앞에 걸려있는 휘장의 문양을 잠시 보고 있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발밑에 버석거리는 잔디를 발끝으로 톡톡 두드리더니, 다시 성 주위를 천천히 구경삼아 돌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난 구해진 거지. 그리고 기억을 잃은 채… 그 전에 어디서 발견되었는지, 어떤 상태인지 듣지 못했어.’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말을 하기 시작한 게 불과 얼마 되지 않았고, 그때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까악-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첨탑 끝에 까마귀가 앉아 구슬프게 울었다. 가슴 속에 뻥 뚫린 구멍 속으로 까마귀 소리와 찬바람이 휘몰아쳤다.
다나는 지독하게 불안하고 외로워져, 두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추워.”
그때 뒤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어깨엔 남성용 재킷이 걸쳐져 있었고, 딱딱하게 굳은 레온이 어느새 자신의 뒤로 다가와 있었다.
“…어, 레… 온?”
이름은 알았지만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 얼버무렸다. 하지만 레온에게 지금 호칭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였다.
“왜 이 차림으로 나와 있는 거지? 어디 가려고?”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아 거칠게 돌려세웠다. 조금 상기된 얼굴이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아 보였다.
“그게… 어디 간다기 보단.”
그의 반응에 당황스러운 건 오히려 다나였다. 레온은 뜸 들이는 다나를 참지 못하고 마주 본 채 그녀의 어깨를 두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급하게 추궁했다.
“말해봐, 어디 가려 했는지. 기억이라도 돌아온 건가?”
혼란스러운 와중, 다나는 레온의 붉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불안해 보였다. 이유는 몰랐지만 일단 대답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니요, 안 가요 아무 데도. 그저 안에만 있기 답답해서 주변을 산책했어요. 기억은…….”
말끝을 흐리며 다나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기억은 거의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냥 이 성을 어디서 본 것 같긴 하지만 그게 다예요.”
“정말이야?”
다나가 크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레온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던 손을 스르르 내려놓았다. 뒤늦게 자신의 반응이 과하다 생각했는지, 낮게 헛기침을 하며 툭 내뱉었다.
“이런 날씨에 그런 차림은 산책하기에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데.”
레온은 그녀에게 걸쳐준 재킷 팔 부분의 소매에 손을 넣게 했다. 그러자 커다란 재킷 속에 다나가 폭 파묻힌 꼴이 되어버렸다.
다나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몇 번인가 깜빡거렸다. 그녀를 보고 있던 레온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내려왔지만 둘 모두 이유는 알지 못했다.
재킷의 단추까지 완전하게 채워주고서야 레온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나직이 읊조렸다.
“좀 걷지.”
다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레온이 먼저 걸었다. 몇 걸음인가 걸으니 다나와 거리가 금세 벌어졌다.
그는 다나의 보폭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그녀의 옆에서 조금 뒤처진 채 따라 걸었다. 다나는 그런 레온의 은근한 배려에 뱃속이 조금 간질간질해졌다.
‘지금이 기회야.’
그와 차분히 이야기할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것들을 지금 물어야만 했다.
“저기…….”
그와 잠자리까지 한 사이였지만 아직은 어려웠다. 그리고 묻기 전에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작스런 인사에 레온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다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이것만큼은, 정말 진심이었다. 레온이 누구든, 자신이 또 과거에 누구였든, 그는 자신의 은인이었다.
지금 당장 그에게 매달려야 살 수 있는 절박한 처지였고, 그 때문에 이런저런 의도된 행동도 있었지만 그래도 감사 인사는 꼭 전해야 했다.
“하아.”
머리 위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다나는 굽혔던 허리를 펴고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곤란한 듯 표정 지으며 한 손바닥으로 눈 근처를 가린 채, 관자놀이 양쪽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저기요.”
끝날 줄 알았던 다나의 말이 더 이어지자, 레온의 어깨가 티 나게 움찔거렸다.
“뭐, 또?”
레온은 속으로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투가 너무 무뚝뚝한가 싶었지만, 다나에게는 그게 오히려 익숙했다.
“전 어디서, 어떻게 발견하신 거예요? 저에 대해… 모르세요?”
그녀로선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레온은 대답을 회피하듯 다나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몰라, 아는 바 없어.”
“그럼 전 어디 있었어요? 전, 아무것도 기억이…….”
그가 대답을 피하자 이번에는 다나가 다급해졌다. 하지만 레온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급하게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참, 약속이 있다는 걸 깜빡했군. 추우니 그만 방으로 돌아가라. 나중에 보지.”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해 버리고는 레온은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다나의 표정이 더욱 황당해졌다. 누가 봐도 그것은 대답해주기 싫다는 의미로 보였다. 왜 이걸 대답해주기 싫어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티 나게 행동하는 그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가 안 가네.”
그녀는 그가 떠난 자리를 서성거리다 곧 자신도 성안으로 들어왔다. 슬슬 정말 한기가 들기도 했고, 정리하려는 생각도 결국 그에게서 대답을 들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가 입혀준 재킷을 벗어 한쪽에 걸어놓으며, 다나는 벽을 보고 중얼거렸다.
“…언제 오려나.”
바쁘다 했으니 오늘은 그가 당연히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
복도를 성큼성큼 빠르게 걷던 레온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자기 자신이 요즘만큼 이해되지 않을 때가 없었다. 레온은 눈을 가리는 짙은 검은색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은연중에 그녀가 기억을 되찾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오늘 잠깐의 만남으로 확실히 인지했다.
‘도대체 왜.’
정상이라면 그녀가 하루라도 빨리 기억을 찾아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까 잠깐 방에 들렀다 다나가 없는 것을 보고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억을 찾은 그녀가 그대로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하아….”
한숨 속에 약간의 피로감이 배어나왔다.
어젯밤 내내 그녀가 잠들기 전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아서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겨우… 그 말 때문에.’
또다시 한숨을 쉬며 다시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색다른 경험이긴 했지.’
물론 살면서 여자의 고백을 받아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와 닿지 않았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만 의지하는 가냘픈 존재가 마음을 드러내자, 레온은 가슴 안의 뭔가가 건드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후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복도를 거닐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의 보좌관 다니엘이었다. 그는 레온을 보고 급히 뛰어오더니, 의아한 듯 빤히 바라보았다.
“뭘 봐?”
다니엘의 반응에 퉁명스레 묻자, 다니엘은 순진한 눈으로 되돌려 질문했다.
“대공 전하, 뭐 좋은 일 있으십니까?”
“뭐?”
“아, 표정이 워낙 밝으셔서 뭔가…….”
그 말 한마디로 레온의 얼굴이 확 구겨지며, 다시 얼음장같이 차가운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용건은.”
상관의 심기를 정확히 읽어낸 다니엘은 역시 눈치 빠르게 주제를 바꿔 말했다.
“말씀하신 ‘다나 더니즈’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관심 없는 주제였는지 상관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얼핏 보면 딴생각을 하는 것도 같았다.
다니엘은 대충 아는 대로 빠르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일단 부재중이라 직접 만나보진 못했습니다. 상단에서 그녀의 행방에 대해 모르고 있더군요. 이미 남자가 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건 오히려 잘됐군.”
“네?”
레온은 자신의 집무실 문고리를 잡아 열며 말했다.
“적어도 나에게 있지도 않는 애정을 바라진 않을 테니 말야.”
“…결혼할 마음이 조금은 있으셨던 겁니까?”
다니엘은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의외라는 듯 물었다.
“글쎄.”
전과 달리 애매한 대답에 다니엘은 뭔가 초조한 듯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