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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상속녀-3화 (3/92)

3화

잠시 후, 레온은 다시 욕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누워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다 결심한 듯 그녀를 덮은 이불을 한쪽으로 걷어냈다. 그녀의 가슴을 조이고 있는 드레스의 끈을 풀며 레온은 피식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했지.’

확실히 자신이 생각해도 의외였다. 레온 자신은 그리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적이었던 아버지 테라티우스 공작이 자신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며 치를 떨 만큼 냉정한 편이었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를 제외하고, 아버지와 뜻을 함께한 귀족과 수하들을 모두 도륙 내버렸다. 오웬 테라티우스 공작이 아들을 외면하는 것도 실은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레온의 눈길이 그녀의 잠든 얼굴 위에 머물렀다.

‘…이 얼굴 때문인가.’

다시 한번 실소가 나왔다. 확실히 어여쁜 얼굴이긴 했지만 자신이 단지 외모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래, 어쩌면 이건 일종의 일탈이었다.

골치 아픈 관계나 정무로부터 잠시 잊고 싶은 마음에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운 대상이 여자가 아닌 고양이나 강아지, 혹은 남자였을지라도 자신은 이리했을 거라고, 레온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침착하게 끈을 풀고 드레스의 어깨 부분부터 천천히 벗겨 내렸다. 그녀의 하얗고 가녀린 쇄골과 어깨가 드러나자, 레온은 슬쩍 시선을 다른 곳을 돌렸지만 은근히 눈길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더 투박한 손길로 결국 그녀의 드레스를 모두 벗겨냈다. 안에는 목 부분이 끈으로 된 얇은 슬립을 입고 있었다. 그것마저 벗겨내야 하나 고민하다가, 레온은 결국 그대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까부터 드는 생각이었지만, 안겨있는 무게가 한 사람치고는 꽤나 가볍다고 느꼈다.

발로 욕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욕조에서는 온수가 넘쳐흐르고 있었고, 하얀 김이 모락모락 공기 속에 스며들었다.

레온은 허리를 숙여 그녀를 그 안에 넣으려 했다.

“…으…….”

물속에 몸이 반쯤 잠기자, 여자가 가느다란 신음을 내며 스르르 눈을 떴다. 자연스레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레온은 순간 당황하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를 놓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 버렸다.

푸른 눈동자가 빤히 자신을 바라보자 레온은 그답지 않게 얼굴까지 붉어진 채 억눌린 목소리로 변명부터 내뱉었다.

“그저… 몸을 녹이려 했을 뿐이다.”

그의 말을 듣고는 있는 건지, 다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확인하고는 스르르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기 전, 그녀는 괴로운 듯 누군가를 불렀다.

“…리… 안, 하… 지 마…….”

‘리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레온의 얼굴이 멈칫 굳었다. 그는 곰곰이 그 이름을 되뇌며 그녀를 마저 물속으로 눕혔다.

“리안이라.”

어디선가 최근에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그게 언제 어디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이름을 가진 자가 이 여자를 죽이려고 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얀 목에 새겨진 검붉은 자국에 다시 눈살이 찌푸려졌다.

‘대체 어쩌다.’

하지만 레온의 상념은 곧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멈추고야 말았다. 물에 젖은 얇은 슬립이 그녀의 몸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곧게 뻗은 두 다리가 힘없이 벌어져 있었고, 그곳을 가리는 또 다른 천은 보이지 않았다.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물속에 잠겨 슬립 아래 부슬대는 음모가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레온은 재빨리 시선을 위로 돌렸다. 그곳에는 뚜렷한 쇄골과 가녀린 어깨가 있었다. 그리고 봉긋한 가슴 위의 불그스름한 정점 또한 지나치게 선명했다.

레온은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손의 감각으로 그녀를 더듬으며 팔과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살결에 자신의 무언가가 반응했지만, 애써 의식하지 않으며 손을 움직였다. 레온의 걷어 올린 소매가 다시 팔목까지 내려와 물에 닿아 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하는 일에 집중했다.

“후우.”

따뜻한 물속에서 계속 마사지를 해주자 차가웠던 다나의 손끝이 점점 물속에서 데워지며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눈을 감고 있으니 더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아 다시 눈을 떴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 곳에 머물렀다. 그것은 이제 막 핏기가 돌기 시작한 그녀의 입술이었다.

붉게 물든 것이 마치 체리 같았다. 젖은 손을 들어 엄지로 메마른 입술 위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촉촉하게 젖으며 위아래가 가볍게 벌어졌다. 그 안으로, 자신도 모르게 엄지를 넣어보다 말캉한 혀에 닿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레온은 입안을 어금니로 짓씹으며 욕조에서 조금 뒤로 몸을 물렸다.

‘내가… 그동안 너무 오래 참았나.’

그는 조금 더 서둘렀다. 그녀를 물속에서 건져내어 옆에 있는 간이침대에 눕혔다. 젖어 있는 모습은 더욱더 레온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물기를 머금고 반투명해진 슬립이 몸에 착 달라붙어 벗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는 한숨을 쉬며, 결국 그녀의 남은 옷까지 벗겨냈다. 어차피 몸의 물기를 닦으려면 별수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거지.”

타월이 발끝부터 다리까지 오르다 가랑이 사이에서 머뭇거렸다. 얇게 덮인 수풀 아래 보일 듯 말 듯 갈라진 틈이 그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아래가 점점 더 뻐근하게 올라왔다. 그는 잠시 헛기침을 한 후, 그곳을 대충 지나치며 상체의 물기를 마저 닦았다.

가슴 위를 지날 때에도 그의 반응은 아까와 비슷하게 나타났다. 겨우겨우 물기를 닦아내고는 커다란 타월로 그녀의 몸을 감싸 팔로 안아 들었다. 가슴에 기댄 채 새근새근 숨을 내쉬는 모습이 아까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정말 환장하겠군.’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신이 자처한 일이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신체 건강한 남성이니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지, 이 일은 이 여자를 처음 구한 순간부터 이상했다.

그가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고는 서둘러 다시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욕실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안에서는 남자의 낮은 신음 소리 몇 번과 살을 비비며 치대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목욕을 끝낸 그는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방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리고 크게 놀라 자신을 보는 마부를 무시한 채, 그의 옆에서 쭈그려 잠을 청했다.

물론 잠은 오지 않았고, 그는 그 상태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레온이 구한 그녀는 안락한 침실에서 편히 잠든 채, 들어 올려져 다음 날 성에 도착한 이후로도 한참 동안 깨어나지 않았다.

“별 이상은 없는데…….”

“그런데 왜 깨어나지 못하는 거지?”

레온은 팔짱을 낀 채 굳은 표정으로 의사를 다그쳤다. 테라티우스 대공저의 주치의는 당황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게, 정신적인 충격에 깨어나는 게 늦어질 순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몸에는 이상이 없으니 조만간 깨어날 겁니다.”

레온의 못마땅한 표정에 의사는 찔끔했지만, 곧 그가 나가라는 손짓을 하자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얼른 뒤돌아섰다.

“잠깐.”

“예, 예? 대공 전하.”

“함구해라.”

“물론입니다.”

레온은 이렇게 그녀를 본 사용인들의 입을 일일이 단속시켰다. 물론 들어오면서 마주친 시종들이며, 지금 방을 치우고 있는 하녀들까지 입이 여럿이니 언젠가는 새어 나가겠지만 일단 당분간만이라도 알려지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죽을 위기에 처했던 여자가 어떤 신분인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혹 자신이 엮여 곤란해질까 싶기도 했고, 또 다른 이유는 여자의 신변을 위해서였다.

‘그래, 아직은.’

조금 마음이 쓰이긴 했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만일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인물이라면 그는 여자가 죽든 말든 반드시 저택 밖, 아니 아예 영지 밖에 버릴 것이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발끝으로 딱딱 바닥을 두드리던 레온은 곧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흘긋 창문 밖을 보았다. 달려오는 기사를 보며 그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수도에서 사람을 보냈군.”

그는 누워 있는 여자를 한번 슥 보고는 성큼성큼 문밖으로 나섰다. 레온이 집무실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가벼운 경장 차림의 기사는 레온에게 부복 자세를 취한 후, 두루마리를 건네주었다.

“이거 하나뿐인가?”

“예, 수도에서 온 것입니다.”

자신의 가문인 테라티우스의 인장이 찍힌 것이었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것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역시나 하며 다시 둘둘 말아 책상 귀퉁이에 던져놓았다.

“물러가라.”

“확답을 받아오라 하셨습니다.”

“확답이 가능한 일이어야 그리하지, 일단 돌아가.”

기사는 앞에 앉은 남자의 눈치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조아렸다.

“예, 대공 전하.”

기사가 나간 후, 레온은 더 무거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장 자신의 어머니 소피아 테라티우스 공작 부인이 기거하는 방으로 걸어갔다.

그의 보좌관인 다니엘은 눈치를 보며 발소리를 죽인 채 그의 뒤를 따라갔다. 레온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 있어라.”

레온을 본 공작 부인의 시녀들은 깊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방주인의 허락도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가 이 성에서 제일 높은 지위라서가 아니었다. 안에 있는 부인이 대답할 수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시녀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상태를 보고했다.

“다행히 지금은 정신이 온전하십니다.”

레온은 침통한 표정으로 어두운 방 안을 살피며 침대맡으로 조용히 발을 옮겼다. 그곳에는 병색이 완연한 소피아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누워있었다. 늘 잠든 모습만 보고 갔는데, 웬일로 오늘은 그녀가 깨어 있었다.

“어머니.”

“레… 온.”

잔뜩 가래 낀 목소리가 끊어질 듯 그를 간절하게 불렀다. 레온은 그녀의 다음 말을 알고 있었다.

“오웬… 그는…….”

“…….”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보게 해다오. 제발, 레온…….”

버석하게 주름진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레온은 가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차마 선뜻 긍정할 수가 없었다.

“…쉬세요, 어머니.”

그는 무뚝뚝한 말투로 툭 내뱉고는 이불을 조금 당겨 그녀의 목 아래까지 덮어주었다.

문을 나서는 그의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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