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오늘 그 드레스 너에게 무척 잘 어울려, 다나.”
그녀의 다리는 리안의 손아귀 힘에 이끌려 아예 바닥에서 동동 떠 있었다. 푸른 눈의 흰자위에 실핏줄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윽… 끅…….”
“네가 준 것들도 요긴하게 잘 쓸게. 저 위임장까지도. 절대 헛되이 쓰지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
고통스러워하는 다나를 보면서 리안은 차분히 마지막 말을 전했다.
“나는 사실 아쉬워. 너만큼 내 아랫도리를 만족시켜 주는 여자가 없거든. 지금도 이렇게 꼴린다니까.”
다나는 아래를 흘끔 보며 허허 웃어대는 그를 발로 차고, 손톱으로 꼬집었다. 하지만 팔다리가 점점 느려지고 힘이 빠졌다.
“그런데 넌 이제 방해가 될 것 같아. 미안해, 다나. 이제 사라져줘야겠어.”
원망으로 가득 찬 푸른 눈동자가 눈물을 머금은 채 눈꺼풀 아래로 잠겨 사라졌다.
리안은 완전히 축 늘어진 그녀를 바닥으로 서서히 내려놓았다. 방문 밖의 기척을 가늠하며 커튼을 뜯어 다나의 몸을 둘둘 말아 감쌌다.
그는 문을 열고 주위를 살피다 다나를 어깨에 들쳐 메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갔다.
리안이 오늘 이곳에 다녀갔단 사실은 리안과 다나 둘만 알고 있었다.
***
“헉, 헉.”
리안은 땀을 뻘뻘 흘리며 어두운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절대로,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되는 일이기에 그는 인부도 부르지 않았고 마차도 쓰지 않았다.
한쪽 어깨에는 다나가, 다른 손엔 삽이 들려 있었다.
‘다나 더니즈.’
비록 귀족은 아니었지만, 한때 다나의 아버지인 루셸 더니즈가 살아있을 적에는 그의 결정 하나로 나라의 경제가 휘청할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자랑하는 대상인이었다.
그리고 루셸이 어느 날 갑자기 죽고 난 후, 그의 모든 재산은 유일한 딸 다나 더니즈에게 상속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열다섯이었다.
리안은 그때 그녀를 만났다.
‘천운 같은 기회였지. 이제 그 모든 것이 내 손 안에 들어왔어.’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리안은 결국 원래 가려던 높이의 절반도 오르지 못하고 다나를 땅에 내려놓았다. 아직 겨울이 가기 전이었지만, 그는 이마에서 땀을 비 오듯이 쏟아내고 있었다.
리안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두워서 사위가 분간되진 않았지만, 이쯤이면 적당할 것 같았다.
그는 낙엽을 걷어내고,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아직 녹지 않은 땅을 파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리안은 그것에 열중하느라 천에 감긴 다나가 움찔거리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하… 이 정도면.”
한참을 그렇게 삽질하던 리안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다나를 바라보았다.
“천사는 할 일을 다 했으니, 하늘로 돌아갈 시간이야. 아니, 땅이라고 해야 하나?”
리안은 성큼 다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렴, 다나. 믿진 않겠지만… 한때는 나도 널 진심으로 사랑했어.”
드러난 고운 이마에 비열한 입을 맞추려, 리안이 몸을 숙였다.
그때, 멀리서 덜컹거리는 마차 소리가 들렸다. 리안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 시간에 마차가…?”
저편에서 불빛이 보이는 걸로 보아 이미 꽤 가까이 다가온 것 같았다. 마차 자체에 저렇게 밝은 조명이 달린 것은 그 주인이 꽤 고위 귀족이란 것을 의미했다.
리안은 올라오며 지친 탓에 길가에서 미처 많이 떨어지진 못했다.
“젠장, 하필 이럴 때.”
리안은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낙엽으로 대충 다나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 일단 그 자리에서 몸을 피했다.
***
달각, 달각.
팔꿈치를 창틀에 대고 주먹 쥔 손 위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댔다. 검고 긴 앞머리가 흔들리며 그의 눈가 근처를 간지럽혔다.
이렇게 빨리 돌아올 일정은 아니었지만, 레온 테라티우스 대공은 수도에서 일을 모두 마치자마자 하룻밤도 있기 싫다는 듯 서둘러 자신의 영지로 마차를 몰았다.
황제와 그의 측근들 그리고 귀족들은 레온을 자신의 세력 가문 사람과 혼인시키고 싶어 아주 안달이 나 있었다. 온갖 여자를 소개시키고, 연회에서 춤추게 하며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의 아버지인 오웬 테라티우스 공작은 그를 불러 가문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여인을 찾아 혼인하라 종용했다.
‘그 노인은 아직도 정정하군.’
테라티우스 가문의 부자지간은 서로 다른 황자를 지지했고, 결국 아들인 레온이 지지한 황자가 황제에 올랐다.
황제는 자신의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신하이자 친우, 당시 백작이었던 레온 테라티우스에게 파격적으로 ‘대공’의 작위를 하사했다. 지금 하셸 제국에서 대공은 그가 유일했다.
그 결과, 아버지가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대공인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겨우 상인 집안의 딸이라니. 내 정치적 입지를 아직도 견제하는 것인가, 아버지는.’
피곤이 가득한 붉은 눈동자가 스르르 드러나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다. 느리게 깜빡이던 눈꺼풀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추며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마나를 끌어 올려 밤눈을 밝혔다.
평상시에도 일반인보다는 눈이 밝은 편이었지만, 이상한 기척이 보여 좀 더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다.
‘저게 뭐지?’
길 저편 나무 뒤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다 재빨리 산 아래로 사라지는 장면이 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도적들이 매복해 있는 건가?’
그는 마차의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마부가 즉시 마차를 멈추게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테라티우스 대공 전하.”
마부가 문을 열고 공손히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여기 있거라.”
레온은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에 슬그머니 손을 올리고 가볍게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마부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를 보다 잠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시키는 대로 대답했다.
“예, 전하.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이 나라 최고의 검사인 그의 신변을 걱정하는 말은 오히려 무례를 범하는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레온이 소리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마부는 잽싸게 달려가야 했다.
“불! 램프를 가져와라!”
마부는 마차 양쪽에 있는 램프 중 하나를 손에 들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것은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마법 램프로 일반 램프보다 100배는 밝고, 수명도 길었지만 값 또한 매우 비쌌다.
“여기!”
다 와서 헤매는 마부를 향해 레온이 손짓하며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부는 헐레벌떡 달려와 램프를 비춰보았다.
“헉…! 대공 전하, 이것은!”
“사람이다.”
붉은 천에 둘둘 싸여있는 웬 인영과 떨어진 삽, 파놓은 구덩이가 어떤 상황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레온은 입을 굳게 다물고 천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마부는 혹시나 끔찍한 시체가 보일까 싶어 슬그머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
안쪽을 본 레온이 별말이 없자 마부는 실눈을 뜨고 흘끔 그것을 보았다.
“여자… 가 아닙니까.”
언뜻 보기에도 아주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왜 이런 곳에서 이런 꼴이 되었는지 사연이 궁금하리만큼.
램프의 불빛 아래 반짝이는 금발 머리가 드러났다. 하얀 이마와 오뚝한 콧날, 붉은 입술까지. 죽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레온의 생각도 그러했나 보다. 레온은 가만히 그녀의 목 아래 손가락 두 개를 대어보았다. 그리고 작게 숨을 내뱉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직 숨은 붙어 있는 것 같군.”
“그렇… 습니까? 그럼…….”
레온은 아주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 결국 그녀를 감싸고 있는 천과 함께 안아 들었다.
“데, 데려가실 겁니까?”
“그래, 이대로 놔둘 순 없잖아. 넌 절대 이 일을…….”
“예, 절대 아무 곳에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꽤 눈치 있는 녀석이군.’ 하고 중얼거리며 레온은 팔을 한번 들썩여 그녀를 고쳐 안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마부는 허둥지둥 그의 앞으로 가 길을 밝혔다. 레온이 마차에 오르자 문을 닫아주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마차를 몰았다. 과연 까다롭기로 유명한 테라티우스 대공 저택에서 오래 일한 사람다웠다.
레온은 무심한 듯 흥미로운 시선으로 맞은편에 눕혀진 다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선명하게 새겨진 손자국에 시선이 멈췄다.
‘한 손으로 쥐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데.’
혀를 한번 차고는 레온은 다시 창밖을 보았다. 아직도 사방은 어두웠고, 마차의 바퀴 소리와 말발굽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그녀를 애써 외면하던 레온은 감싸던 천을 조금 당겨 여자의 목까지 덮어주었다. 이런 섣부른 동정으로 사람을 구하다니. 스스로 기가 막혔다.
‘내일 날이 밝으면 돌려보내야겠어.’
***
레온은 그녀를 안고 들어가 여관의 침대 위에 눕혔다. 밝은 방 안에서 보니 그녀의 상태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가 입은 코발트블루 드레스 원단은 먼 이국땅에서 수입해 온 값비싼 옷감이었다. 게다가 잘 손질된 머릿결과 뽀얀 피부, 고생한 흔적 없는 고운 손도 눈에 들어왔다.
‘어느 귀족의 여식인가.’
하지만 귀족의 여식이 왜 아닌 밤중에 목이 졸려 생매장이 된단 말인가. 그리고 자신의 영지 근처의 이런 용모의 귀족 영애는 생각나지 않았다.
이 정도 외모의 여인이라면 반드시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했을 것이고, 아무리 자신이 사교계에 관심이 없다 해도 한 번쯤은 듣거나 보았을 것이다.
어쩐지 그녀의 파리한 안색이 마음에 걸린 레온은 여자의 뺨에 슬쩍 손등을 대어 보았다.
‘역시.’
살갗에 닿은 감촉이 서늘했다. 목을 졸려진 것도 그랬지만, 아직 추운 날 정신을 잃은 채 바깥에 오래 있던 것 또한 위험한 일이었다.
습관처럼 하녀를 부르려던 레온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 하녀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마차가 산길을 넘어오던 도중,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고 성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레온 혼자였다면 마차는 마부에게 맡기고 홀로 돌아가도 되었겠지만 다 죽어가는 여자가 있어 그리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마을 외곽에 있는 가까운 여관에 들러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그마저도 같은 사정의 이들이 모여들어 빈방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원래 가격의 세 배를 치르며 겨우 방 하나를 잡을 수 있었다.
남녀 둘을 한 방에 넣어주며, 쭉 태연하던 마부의 눈빛이 이채를 띄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건만, 이런 의미였던 모양이다.
레온은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여자를 보며, 일단 두터운 이불을 그녀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언 몸만 녹으면 좀 나을 텐데.’
나름대로 이불로 덮은 그녀의 손과 발을 주무르며 기다려봤지만, 좀처럼 따뜻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여자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고, 가느다란 숨은 끊어질 듯 얕아졌다.
레온은 입술을 가로로 굳게 다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뚜벅뚜벅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