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주오와 수호는 아침부터 짐을 챙기기 바빴다. 이미 각자 거대한 캐리어를 두 개씩 챙긴 후였지만 여전히 턱없이 모자란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열심히 이것저것 짐을 욱여넣는 주오를 수호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저건 너무했다.
“형, 그거 대체 어떻게 가지고 가려고요?”
“아…… 가는 길에 택배로 보내야겠다.”
아무리 한 달 동안 여행을 간다고는 하나 짐이 너무 많았다. 이미 택배로 먼저 보낸 옷들도 충분히 많을 텐데……. 수호는 시계를 힐끔 확인했다. 이제는 출발을 해야만 했다.
“형, 출발해야 돼요.”
“응……. 가자.”
주오는 한가득 챙긴 짐으로도 아쉬운지 작게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정말 제주도로 향할 시간이었다.
양쪽에 캐리어를 챙겨 현관을 나선 수호는 때맞춰 옆집에서 나오는 선우, 은기와 눈이 마주쳤다. 선우와 은기는 수호와 그 뒤로 주오가 가지고 나오는 무지막지한 캐리어들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그 무식한 짐들은 뭐야?”
“여행 가는 게 아니라 이사 가는 거예요?”
두 사람은 딱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건 수호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옷들을 왜 이렇게나 많이 챙기는 건지 수호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개를 젓는 수호의 뒤에서 주오가 입을 열었다.
“이사는 수호가 은퇴하고 생각해야지. 그런데 너네 어디 가?”
“국밥 먹으러요. 어제 김우찬 때문에 술을 너무 마셨어요.”
오늘부터 휴가의 시작이었다. 그렇기에 어제 우찬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팀원들을 붙잡고 술을 냅다 들이부었다. 물론 그곳에는 수호와 주오도 함께였다. 회식 끝 무렵에는 다들 개가 된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집으로 들어가던 게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개다웠던 우찬은 여전히 뻗어 있는 상태인 듯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선우와 은기의 얼굴색도 좋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 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은 주오와 술이 센 수호만이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선우가 크게 하품을 하며 무식한 짐을 내려다봤다.
“근데 뭘 챙겼는데 짐이 이렇게 많아?”
“옷이요.”
수호의 간결한 답에 선우와 은기가 눈가를 찡그렸다.
“……옷?”
“무슨 옷을 이렇게나 챙겨?”
아무리 겨울옷들이 두툼하다고는 해도 이렇게 거대한 짐으로 옷을 채운 수호와 주오가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수호도 주오가 챙겨준 대로 들고 나온 거라 두 사람의 질문에 주오를 힐끔 바라봤다.
세 사람의 시선의 주인공이 된 주오가 잠시 눈을 끄게 뜨고는 이내 수호를 보며 웃었다.
“수호한테 어울릴 옷들 챙기다 보니 이렇게 됐네.”
“……무슨 여행 가서 패션쇼 하려고요? 그냥 몇 개 가져가서 빨아 입으면 될 걸 뭐 이렇게 챙겼어요?”
보통 그랬다. 세탁하면서 입으면 될 분량만 챙겨 가는 게 보통이었지만, 주오와 수호의 옷은 정말 방대했다. 누가 보면 숙소에 세탁기가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연습 기간엔 이런 거 입을 일이 없잖아. 이김에 많이 입히고 사진도 찍어야지.”
들뜬 주오의 음성에 선우와 은기는 정말 가지 가지 한다는 눈빛을 빛냈다. 수호는 그저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이윽고 선우가 삐져나온 머리를 뒤로 넘기고 모자를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어후, 맘대로 해. 아무튼, 재밌게 다녀오고 올 때 간식거리 좀 많이 사 와라.”
“네.”
띵-
어느새 네 사람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사이좋게 내리고 아파트 현관을 빠져나오자 미리 불러놨던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는 거대한 주오와 수호의 짐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트렁크 안으로 캐리어를 집어넣었다. 결국 다 들어가지 못한 짐은 뒷좌석 한구석에 처박혔다.
짐을 싣는 동안 기다리고 있던 선우와 은기가 차에 탄 주오와 수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갔다 와라. 주오 형도 잘 다녀와요.”
“너네도 잘 쉬고 연습도 많이 하고 있어.”
방긋 웃는 주오를 보며 은기가 눈가를 찡그렸다.
“쉬라는 거예요, 쉬지 말라는 거예요.”
“둘 다 적당히 하라는 거지. 아무튼, 간다.”
“그래요. 다녀와요.”
“수호, 안녕.”
선우의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내렸던 창문이 올라갔다. 그렇게 두 사람을 태운 택시는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고 수화물을 처리한 후 둘은 비행기에 올랐다. 짧은 1시간의 비행을 끝으로 목적지인 제주에 도착했다.
숙소는 공항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2층 단독 주택으로 넓은 정원과 조용한 일대, 그리고 테라스에서 보이는 바다가 일품인 곳이기도 했다.
수호는 짐을 집 안 한쪽에 내려놓고 넓은 창으로 밖을 바라봤다.
관광지와도 먼 곳이기에 사람도 잘 보이지 않았다.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만 종종 지나다닐 뿐이었다.
조용한 거리가 좋아 수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 뒤로 주오가 다가왔다.
“조금 이따 바다 보러 갈까?”
“좋아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배고파요.”
“그래. 뭐 먹고 싶어?”
출발 시간이 촉박했기에 아침도 걸렀던 주오와 수호였다. 수호는 주오의 물음에 눈을 데굴 굴리고는 입을 열었다.
“된장찌개?”
“좋아. 식재료부터 사러 갈까? 올 때 미리 사 올 걸 잘못 생각했네.”
조용한 곳이다 보니 대형 마트도 차를 타고 가야 했다. 빨리 오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마트에 들르는 걸 잊은 주오가 미안한 듯 시무룩해졌다. 수호는 그런 주오의 뺨을 잡고 짧게 입을 맞췄다.
“괜찮으니까 빨리 가요.”
수호의 입맞춤 한 번에 주오의 표정이 사르륵 풀렸다. 주오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숙소에서 나온 둘은 차에 올라탔다. 착실히 안전벨트를 맨 수호는 출발하지 않는 잠잠한 차에 눈을 깜빡였다. 뭐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자 주오가 어느새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 수호는 놀랍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을 깜빡였다. 저도 모르게 주오에게 무슨 잘못을 한 건가 싶어 수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수호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수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제가 뭐 잘못했어요?”
평소와 같지만 어딘가 조금 의기소침해진 수호의 음성에 주오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수호는 안전벨트도 잘 매고 정말 바른 사람이야. 잘못한 거 없어.”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그런데 대체 왜 저렇게 주오가 시무룩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의아함이 가득한 수호의 물음에 주오가 힐끔 수호를 바라봤다.
“그냥……. 내가 해주고 싶었어. 드라마에서도 그런 걸로 설레어하고 그러잖아. 수호도 설렜으면 했어.”
이렇게 말하면 수호가 자신을 구질구질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주오가 조심스럽게 수호를 바라봤다.
주오는 몰랐겠지만 수호는 이런 주오의 모습이 좋았다. 자신에게만 조심스럽고, 자신에게만 다정하고, 자신에게만 애정을 갈구하는 주오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수호는 망설임 없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형이 해주세요.”
“정말?”
“네. 형한테 설레고 싶어요.”
사실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수호는 주오를 보며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설렜다.
수호가 웃으며 안전벨트를 가리키자 주오가 불쑥 조수석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주오는 원위치로 돌아간 안전벨트를 잡아당기며 그대로 고개를 숙여 수호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맞닿기 전 자신을 보면서 기쁜 듯 환하게 웃는 주오를 보며 수호도 마주 웃었다. 심장이 더는 안 된다는 듯 바들바들 떨렸다. 쿵쿵 울리는 소리와 함께 수호는 주오의 혀를 가볍게 빨아 당겼다.
그러자 주오의 혀가 움찔거렸다. 떨어진 입술이 타액으로 반짝 빛났다.
주오는 눈을 깜박이며 수호를 내려다봤다. 자신의 아래에서 평온하게 몸을 내맡긴 수호를 물끄러미 보던 주오가 다시 입을 겹쳤다.
방금 전보다 다급해진 주오를 받아내며 수호는 그의 목을 감싸 당겼다.
한참을 서로에게 비비고 뭉개던 입술이 떨어지고 주오는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또 운전대를 잡지 않고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손가락을 벌려 수호를 힐끔 봤다.
“수호를 설레게 하고 싶었는데 내가 설레 버렸어.”
원망 어린 주오의 음성에 수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형한테 설렜어요. 이래서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이 아직도 많이 나오나 봐요.”
클래식 이즈 베스트. 많이 나오는 장면은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경험해 보지 않았을 때는 저런 걸로 왜 주인공이 두근거려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막상 직접 당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까이 보이는 주오의 얼굴과 서로 얽히는 숨결, 그리고 훅 파고드는 그의 체취까지 모든 게 가슴을 떨리게 했다.
“조금만 진정하고 출발할게. 지금은 눈에 뵈는 게 없을 것 같아.”
주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작게 심호흡했다. 수호는 그런 주오를 보며 웃었다.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귀여울 수 있을까 수호는 진지하게 주오를 보며 생각했다.
“형은 알면 알수록 귀여운 것 같아요.”
“응? 아냐. 나보단 수호가 더 귀엽지.”
“아니에요. 형이 귀여워요.”
“아니라니까? 수호가 더 귀여워.”
오랜만에 시작된 실랑이에 결국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뭐든 어떤가. 서로가 좋다면 좋은 일이었다.
한참을 웃고 나서 두 사람이 탄 차가 출발했다.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 도착한 주오와 수호는 카트를 끌며 마트를 종횡무진했다.
“두부는 한 모면 되려나?”
주오의 물음에 수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한 모는 부족해요. 두 모 사요.”
“음? 애호박도 두 개나 샀는데?”
당황스러운 주오의 물음에도 수호는 여전히 단호했다. 야채는 많은 수록 좋다는 게 수호의 된장찌개 지론이었다. 평소에는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지 않는 수호가 눈을 부릅뜨자 자연스럽게 두부 두 모를 카트에 넣었다.
“뭐 또 먹고 싶은 건 없어?”
“딱히 없어요.”
딱히 간식거리는 좋아하는 편이 아닌 수호가 고개를 젓자 주오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갈까?”
“좋아요.”
“시간 많이 늦었네.”
주오는 어느새 2시를 넘어간 시계를 보며 혀를 찼다. 어서 수호의 배를 두둑하게 채워줘야만 했다. 주오는 서둘러 수호를 이끌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손과 발을 깨끗하게 씻은 둘은 나란히 부엌에 들어섰다. 요리를 못하는 수호였지만, 그래도 주오에게 얻어먹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수호가 패기롭게 부엌에 들어서자 주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호의 앞을 막아섰다.
“수호는 쉬고 있어. 이런 건 내가 할게.”
하지만 수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같이해요. 언제까지고 형이 다 해줄 순 없잖아요.”
수호도 이제는 주오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물론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지라 할 줄 아는 건 없지만 그래도 주오에게서 하나하나 배워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수호의 마음을 모르는 주오는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수호는 주오가 오늘따라 시무룩해지는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또 왜 저럴까.
수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주오가 아쉬움이 가득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수호가 나에게서 독립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슬프다. 나는 언제까지고 수호한테 이것저것 해주고 싶은데…….”
“저는 형 자녀가 아니에요.”
단호한 수호의 말에 주오가 더욱 시무룩해졌다. 수호는 그런 주오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주오의 뺨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자신을 보는 주오의 다정한 다갈색 눈을 보며 수호가 말을 이었다.
“형이 저한테 해주고 싶어 하는 만큼 저도 형한테 많은 걸 해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많이 함께해요. 저만 받는 거 이제 싫어요.”
이미 주오에게 많은 것을 받았다. 주오는 모르겠지만 수호는 주오를 만나고 많은 변화를 느꼈다. 사람이 좋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됐고, 질투라는 감정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그런 감정들을 알게 한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해줬다.
그렇기에 수호는 주오에게 모든 걸 내주고 싶었다. 주오가 준 만큼 자신도 주오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면 주오도 쉽게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될 것 아닌가. 이제 주오가 없는 시간이 상상이 가지 않는 자신처럼 말이다.
“수호야…….”
주오는 흔들림 없이 확보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수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수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주오가 웅얼거렸다.
“앞으로도 계속 나랑 함께 있어줘. 너무 좋아해.”
“저도요.”
수호는 주오를 끌어안으며 웃었다. 행복한 건 수호뿐만이 아닌 듯 귓가에서 주오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수호는 주오의 웃음소리가 좋아 고개를 돌려 주오에게 입을 맞췄다.
주오의 뺨에 수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자 주오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 잠깐……!”
이윽고 주오가 식탁 정중앙에 놓인 거대한 마트 봉지를 뒤로 밀고는 수호를 그 위에 앉혔다. 수호의 다리 사이에 선 주오가 수호의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췄다.
수호는 언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신혼 때는 눈만 마주치면 그곳이 침대가 된다는 말을. 이제야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된 수호였다.
수호는 어느새 달뜬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주오를 보며 두툼한 후드티를 벗어 던졌다.
실내온도를 높여두긴 했지만, 그래도 옷이 벗겨지자 자연스럽게 한기가 느껴졌다. 수호는 두 팔을 벌리며 입을 열었다.
“형, 저 추워요.”
“수호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주오는 다시는 수호가 아픈 건 보기 싫다며 수호를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주오의 옷을 벗긴 수호는 다리로 주오의 허리를 감쌌다.
수호가 감기에 걸리면 안 된다던 주오는 한참 동안이나 수호를 놔주지 않았다. 뜨겁다 못해 열기에 녹아버린 수호가 축 늘어질 때까지 주오는 멈추지 않았다.
* * *
결국 열심히 장을 봐온 재료들을 저녁에 사용되었다. 아침부터 점심까지 거른 둘은 유난히도 맛있게 식사를 했다.
“간은 잘 맞아?”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한참 동안 식혀 먹는 수호를 보며 주오가 물었다. 주오는 고슬고슬한 흰 쌀밥을 한 수저 입에 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막 지은 밥이 뜨거웠는지 수호가 차가운 물을 벌컥 마셨다.
주오가 수호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수호는 야금야금 씹을 밥알을 삼키며 주오에게 물었다.
“형은 언제부터 요리했어요?”
주오는 음식을 잘했다. 맛도 맛이지만 이것저것 많은 것을 뚝딱뚝딱 만들어주기도 했다. 레시피 같은 걸 따로 보는 편도 아닌 것을 보면 제법 숙달된 요리사인 게 분명했다.
주오가 의외의 질문에 놀랐는지 깜빡거리다가 이윽고 눈을 둥글게 휘어 웃었다.
“중학생 때부터 했어. 부모님 두 분 다 일을 하셔서 나랑 동생을 챙겨줄 시간이 없으셨거든.”
수호네 집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수호는 형과 누나에게 챙김받는 쪽이었고, 주오는 챙겨주는 쪽이었다는 게 달랐다. 갑자기 주오의 동생이 부러워졌다.
“형 동생 부럽네요.”
“김주열이?”
언제 한번 들었던 주오의 동생 이름에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오가 방긋 미소 지었다.
“나도 수호 형이랑 누나가 부러워. 작고 아담한 수호를 매일 보다니…….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
주오는 수호와 한 핏줄로 태어나지 못한 게 정말 아쉽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지금과 딱히 다를 게 없는데도 주오는 어린 시절 수호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정말 슬픈 듯했다.
수호는 소시지 하나를 집어 수저도 놓고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그의 입술을 툭 건드렸다.
수호는 입술에 묻은 케찹을 혀로 핥고는 수호가 준 소시지를 받아먹었다. 그런 주오를 보며 수호가 옅게 웃었다.
“형이 제 친형이었으면 우리 같이 키스도 못 하고 섹스도 못 해요.”
“아…….”
주오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이윽고 그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건 정말 안 돼.”
“그렇죠?”
“응.”
주오는 지금 관계가 더 좋다며 웃어 보였다. 수호도 그랬다. 물론 자신이 모르는 주오의 옛 모습들이 궁금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볼 수 있으니까 괜찮았다.
수호와 주오가 도란도란 얘기를 하는 동안 찌개는 수호가 먹기 좋은 온도로 알맞게 식었다. 주오는 뚝배기를 수호 쪽으로 밀었다.
“많이 먹어. 그런데 우리 내일은 뭐 할까? 하고 싶은 거 있어?”
그렇게 물어서는 수호에게 적극적인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주오는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수호는 호로록 찌개를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딱히 없어요. 그냥 해안도로 따라서 드라이브해요.”
“바다는 안 가고?”
보기만 해도 괜찮겠냐는 주오의 물음에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수호가 보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바다보다 더 보고 싶은 것.
“그것도 괜찮은데 저는 형 운전하는 모습이 더 보고 싶어요.”
“응? 운전?”
담백하게 내뱉어진 수호의 대답이 뜬금없었는지 주오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수호는 야금야금 계란후라이를 조각내며 입을 열었다.
“아까 형 운전하는 거 처음 봤는데 멋있어서요. 저도 면허 딸까 봐요.”
“……어?”
주오는 여전히 수호의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수호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주오에게 말을 이었다.
“형 멋있다고요.”
1년간 같이 팀에 있으면서 수호는 주오가 운전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연습실과 숙소가 가까워 차를 탈 필요도 없었고, 경기가 있는 날에도 코치가 데려다줬었기에 운전할 일이 없기도 했다.
그러다 오늘 처음으로 운전을 하는 주오를 보며 수호는 새삼 설렘을 느꼈다. 사실 주오가 뭘 해도 멋있어 보이는 콩깍지에 씐 수호였지만, 그래도 멋있는 건 멋있는 거다.
혼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수호를 보던 주오의 귓가가 붉어졌다. 부끄럽고 황송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주오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이내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는 진짜 너무해.”
“제가 뭘요?”
“사람을 너무 설레게 해.”
그렇게 말하는 주오가 더 사람을 설레게 한다는 걸 모르는 걸까. 수호는 멀뚱히 주오를 바라봤다.
이윽고 주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는 수호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곤 양 뺨을 감싸 쥐고 얼굴 곳곳에 입술을 찍기 시작했다. 수호는 얌전히 주오에게 얼굴을 내주었다.
“밥 먹다 말고 뭐 하는 거예요.”
“수호가 너무 좋아서 그래.”
볼을 맞대며 비비적거리는 주오를 끌어안은 수호가 그의 어깨 위에 턱을 올렸다.
“밥부터 먹어요. 오늘 한 끼도 안 먹었잖아요.”
“응, 알겠어. 일단 수호부터 먹고.”
수호는 어딘가 핀트가 나간 주오의 대답에 뚱한 얼굴을 했다.
“전 먹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전에도 분명 말했던 부분이었다. 자신은 음식이 아니라고. 하지만 여전히 주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듯했다. 주오는 고개를 돌려 수호의 하얀 뺨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알아. 근데 그래도 자꾸 입에 넣고 싶어.”
주오가 이번엔 입술을 꾹꾹 찍는 주오를 밀어냈다. 수호는 주오를 밀어냈지만 괜히 덩치가 큰 게 아닌 주오는 수호를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완강한 주오의 힘에 밀어내는 것을 포기한 수호는 그가 얌전히 떨어지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호는 한동안 주오에게 볼을 내줘야만 했다.
* * *
“와, 바다 예쁘다.”
주오는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를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주오의 옆에 나란히 선 수호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수호에겐 바다보다 주오가 더 예뻐 보였다.
수호는 목에 걸고 있던 주오의 폴라로이드를 켜 바다를 보는 주오를 찍었다. 플래시가 터지며 지잉, 울리는 소리에 주오가 고개를 돌려 수호를 바라봤다.
“나 너무 얼빠진 얼굴 하고 있지 않았어?”
“아니요. 되게 멋있었어요.”
“정말? 그러면 다행이다.”
주오는 활짝 웃으며 수호의 목에 걸린 폴라로이드를 가져갔다. 그러고는 수호를 찍기 시작했다.
“수호도 멋있어. 아, 잠깐 그렇게 서 있어봐.”
한번 사진을 찍자 의욕이 불타오른 주오는 그대로 모래사장에 반쯤 누워 수호를 찍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프로 사진작가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열정이었다.
“형, 모래 묻어요.”
“괜찮아. 옷은 세탁하면 되는 거고, 지금 아니면 수호 사진 언제 찍어.”
화사하게 웃는 주오는 정말 옷에 모래가 묻는 것 따윈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열심히 플래시를 터뜨렸다. 수호는 거절하지 않고 주오의 피사체가 되어주었다. 이 사진 또한 주오의 집 한 벽면에 장식된 수호 컬렉션에 추가될 것이다.
주오는 그렇게 스무 장가량의 사진을 찍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호가 주오의 옆에 붙어 섰다.
“바다 배경으로 하나 찍어요.”
좋다며 고개를 끄덕인 주오는 바다를 등진 채 수호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수호는 어깨에 놓인 주오의 손을 힐끔 보고는 옅게 웃었다.
관계가 이렇게 발전하고 난 뒤에도 그의 손길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수호는 변하지 않는 주오의 태도에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 플래시가 터졌다.
“수호랑 제주도 다시 오게 돼서 정말 너무 좋다. 사실 그때 수호가 이대로 나랑 멀어지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했었어.”
“그래요?”
그런 것치고 주오는 그때 굉장히 차분한 얼굴이었다. 조곤조곤하게 자신에 대해 잘 생각해 보라고 하던 주오가 속으로 불안해했다는 걸 수호는 전혀 몰랐다. 의아함이 가득 담긴 수호의 눈을 보며 주오가 미소 지었다.
눈을 둥글게 휘며 웃는 주오에게는 이제 불안함 같은 거라고는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응. 수호는 나를 많이 불편해했으니까. 그래서 불안했어. 우리가 가까워졌다고는 해도 1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수호가 그대로 멀어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었어.”
주오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주야장천 주오에게 벽을 세우고 피해왔던 수호였다.
수호 본인도 자신의 행동이 어땠는지 알고 있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있었다.
“전에도 말한 적 있는데 저는 한번 좋아한 건 계속 좋아해요. 형이 좋아진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다 해도 좋은 건 좋은 거잖아요. 그때 만약 제가 형한테 거리를 뒀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형한테 다가갔을 거예요.”
“……진짜?”
“전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는 성격이에요. 형이 좋은데 어떡하겠어요. 좋아해야지.”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고, 또 그 상대가 남자여서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그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도망쳤더라도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주오를 찾았을 것이다.
“그 말 꼭 지켜야 해. 한번 좋은 건 계속 좋아한다는 말.”
“네.”
간결한 답이었지만 그 안에 수호의 확고한 마음이 느껴져 주오는 활짝 웃었다.
“좋다. 아, 수호야. 우리 사진 찍은 거 자랑해도 돼?”
“하세요.”
요즘 주오의 취미였다. 수호와 일상을 보내고 자랑하는 것. 4년 동안 못 해봤던 걸 제대로 풀 생각인지 요즘 주오의 인스타 게시물에는 늘 수호의 얘기뿐이었다.
주오는 가득한 수호 게시물 사이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김주오] [jpg]
수호와 바다에 왔어요!
수호랑 같이 와서 너무 좋다 :0
내년에도 계속 같이 와줘 #forever
[레인빠: 바다가 좋은 건가요. 수호가 좋은 건가요...김레인 씨...]
[좆같은 좆모: 사진이 바다보다 수호 지분율이 더 큰데요...?]
[303_ff: 와, 진짜 둘이 여행 가는 걸 살면서 보게 될 줄이야...]
[SuuuuuuHO: 레인 형ㅠㅠㅠ 저도 같이 데려가요ㅠㅠ]
[Holmes: 솔직히 말해봐요. 둘이 사귀는 거 맞죠]
[GER.D DOYOU: 해시태그 무슨 일인데;;]
[GER.D 이진형: 미쳐 가지고... 빨리 돌아와.]
빠르게 올라오는 댓글들 사이에서 주오는 Holmes의 댓글에 하트 버튼을 꾹 눌렀다. 대놓고 말은 못 하지만 이렇게라도 티를 내고 싶은 게 주오의 마음이었다.
열심히 사진들을 올리는지 핸드폰을 만지는 주오의 손이 빨라졌다. 행복해하는 주오를 멀뚱히 보고 있던 수호는 외투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움찔거렸다.
한두 번으로 진동이 끝나지 않는 것이 전화인 모양이었다. 수호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발신인은 박선우였다.
오래도록 팀메이트로 지내고 있지만 선우와 수호는 서로에게 전화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다. 애초에 서로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연락을 하는 성격도 아니다.
그런 선우에게서 갑작스럽게 전화가 오자 수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요?”
-전화 받자마자 용건부터 말하라고 하냐.
“용건이 있으니까 전화했겠죠.”
선우가 시시껄렁하게 농담을 하자고 전화를 하진 않았을 거다. 수호가 난데없이 전화를 건 선우에게 본론을 얘기하라고 전하자, 수화기 너머로 선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별건 아니고 방금 주오 형 인스타 봤다가 생각난 게 있어서 전해주려고 전화했어.
수호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주오 형 게시물을 보는데 난데없이 무엇이 떠오른다는 걸까.
“뭘요?”
“응? 수호야, 누구야?”
토독토독 손가락을 움직여 수호의 사진을 업로드하던 주오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핸드폰을 자주 만지지 않는 수호가 무슨 일인지 통화를 하고 있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의아함이 가득한 주오의 다갈색 눈동자를 보며 수호가 입을 열었다.
“선우 형이요.”
“선우? 걔가 갑자기 왜…… 애들한테 무슨 일 생겼대?”
갑자기 주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연락을 잘 안 하는 선우가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오니 주오도 심각한 일로 받아들인 듯했다. 수호는 주오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형 게시물 봤대요.”
“응? 그래도 걔가 그런 일로 전화할 애가 아닌데…….”
-약간 상처받는데? 그러면 내가 무슨 일로 전화하는 사람이라는 거야?
수호는 양쪽에서 울리는 음성에 주오와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윽고 주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무슨 용건인지 들어볼게요. 형은 마저 자랑하고 있으세요.”
“그래. 수호랑 여행 왔다니까 다들 부러워하는 거 있지? 우리 진짜 사귀고 있는 거 아니냐는 댓글도 달렸어. 진짜 사귀는 거 맞다고 얘기하고 싶다.”
온 세상에 수호도 자길 좋아하고 있다고 얘기하고 싶다는 주오가 행복과 설렘이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질 만큼 환한 미소를 짓는 주오를 보던 수호는 살며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좋아하고 자주 봤다고 해도 주오가 저렇게 환하게 웃을 때면 여전히 수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당장에라도 끌어안고 싶고, 주체하지 못할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주오가 원한다면 정말 당장에라도 김주오라는 사람을 너무 좋아한다고 세상에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호는 진정이 되지 않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내가 전화로까지 이런 얘길 들어야겠냐.
선우가 한숨과 함께 한탄을 늘어놓았다.
“뭐가 생각났는데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수호의 대답에 수화기 너머로 선우의 얕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별건 아니고, 그냥 곧 주오 형 생일이라고 알려주려고 전화했다. 너는 생일 같은 거 신경 안 쓰니까 모르고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거 안 챙겨준다고 너랑 주오 형이랑 싸울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여행 갔는데 재밌게 즐기다 와야지.
선우의 말에 수호의 눈가가 살며시 뚱해졌다.
“전 주오 형 뺏길 마음 없어요.”
어째서 선우가 주오의 생일을 신경 쓰는지 모를 일이었다. 수호도 그렇지만 선우도 타인의 생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주오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어딘가 엇나간 질투심에 수호가 부루퉁하게 대답하자 선우는 침묵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이수호, 미쳤냐?! 줘도 안 가져! 나도 오늘 감독님이 말해서 안 거라고!
극도로 화난 경우가 아니면 언성을 높이지 않는 선우가 소리를 질러댔다. 수호는 귀가 아파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뜨렸다. 반응이 격한 것을 보면 정말 주오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수호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애초에 줄 마음도 없어요.”
-하, 됐다. 끊어라.
“네. 그리고 생일인 거 알고 있었어요.”
-……네가?
이수호가 타인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는지 선우가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수호 본인도 주오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는 스스로가 신기했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았다.
이제까지 주오에게 받은 것은 많고 준 것은 딱히 없었기에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남의 생일을 챙겨준 적이 없던 터라 수호는 지금까지도 막막했다. 선물을 준비해 두긴 했는데 그걸 주오가 마음에 들어 할지 의문이었다. 너무 보잘것없는 선물이라 주오가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수호는 괜히 돌멩이 하나 없는 모래사장을 발로 푹푹 찍었다.
“선물 준비한 거 주오 형이 좋아할까요.”
불안한 듯 낮아진 수호의 음성과 대비된 높은 하이톤의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울려왔다.
-아하하하! 하하! 쓸데없는 걱정은 집어치워라. 그 형은 네가 모래 한 주먹 가져다 줘도 좋다고 병에 담아서 보관할걸?
잠시 그런 주오의 모습을 상상해 본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주오라면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가 있는 거니까.
생각에 빠진 수호가 대답을 하지 않자 선우가 말을 이어왔다.
-어쨌거나 알고 있다면 다행인 거니까 나는 그럼 끊는다. 올라와서 보자.
“……알겠어요.”
선우는 대답도 않고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치대기는 잘 치대면서 의외로 이런 부분에선 유난히 매정한 사람이었다. 박선우라는 사람은.
수호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돌리자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주오가 얌전히 수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호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걸어오는 주오를 수호는 멍하니 바라봤다. 선물을 받아주지 않을까 싶어 침울해졌던 마음이 다시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수호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가슴을 꾹꾹 눌렀다. 그러자 주오의 표정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수호야, 어디 아파? 체한 건가? 약 먹으러 가자. 그래도 불편하면 내가 손도 따줄게.”
주오가 조심스럽게 수호의 손을 잡아 주물거리기 시작했다. 체했을 때는 여기 눌러주는 게 좋다고 하면서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을 부드럽게 눌렀다.
수호는 어서 숙소로 돌아가자며 자신을 이끄는 주오를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형은 제가 선물이라고 모래 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정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질문을 받게 된 주오는 잠시 눈을 깜빡이고는 눈을 둥글게 휘어 웃었다.
“유리병에 담아서 보관해야지. 예전에 초등학교 때 문구점에서 그렇게 편지지도 팔았잖아. 편지라기보다는 쪽지인가?”
주오가 말하는 게 무엇을 말하는지 수호도 모르지 않았다. 작은 병에 색색의 모래와 함께 들어 있는 돌돌 말린 쪽지 한 장. 오랜만에 떠오른 기억과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주오의 답변에 수호가 옅게 웃었다.
모래도 좋다고 받을 사람에게 수호가 한 걱정은 너무나 쓸데없는 것이었다. 옅게 웃는 수호를 보며 주오는 환하게 웃었다.
“손잡을까?”
“좋아요.”
두 사람은 서머 시즌 전, 제주도에서 잡지 못했던 손을 마주 잡았다. 한적한 동네라 사람이 많은 편도 아니었기에 둘은 거칠 게 없었다.
손을 잡고 나란히 모래사장을 걷는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서로가 몰랐던 옛날이야기부터 앞으로 둘이서 만들어갈 미래까지 얘깃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겨울이었지만 바람도 불지 않았고 햇빛도 따사로웠다. 두 사람은 여름에 즐기지 못했던 바다를 겨울에 와서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 * *
[게임/13104578] 김레인x이수호 관계 정리했던 글 올린 사람임
둘이 사귀는 거 진짜 빼박이라고... 추가 자료 가져옴.
오늘 오후에 올라온 김레인 인스타 글임.
[김주오] [jpg]
수호와 바다에 왔어요!
수호랑 같이 와서 너무 좋다 :0
내년에도 계속 같이 와줘 #forever
[레인빠: 바다가 좋은 건가요. 수호가 좋은 건가요...김레인 씨...]
[좆같은 좆모: 사진이 바다보다 수호 지분율이 더 큰데요...?]
[303_ff: 와, 진짜 둘이 여행 가는 걸 살면서 보게 될 줄이야...]
[SuuuuuuHO: 레인 형ㅠㅠㅠ 저도 같이 데려가요ㅠㅠ]
[Holmes: 솔직히 말해봐요. 둘이 사귀는 거 맞죠]
[GER.D DOYOU: 해시태그 무슨 일인데;;]
[GER.D 이진형: 미쳐 가지고... 빨리 돌아와.]
저기서 김레인이 유일하게 하트 누른 댓글이 뭔지 알아?
[Holmes: 솔직히 말해봐요. 둘이 사귀는 거 맞죠] 이거임.
제라드 감독이랑 두유가 댓글 달았는데 거기에는 하트 안 누르고 모르는 사람 댓글에 하트를 누른다? 그것도 저 댓글에????????????
아무리 봐도 둘이 사귀는 거 맞다니까;;
그리고 김레인 곧 생일이잖아. 근데 수호랑 제주도 여행을 한 달 동안 간다는데 여친 두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함??
내가 만약 김레인 여친이었으면 진짜 다리 분질러서 여행 못 가게 했음. 그런데도 간 거면 진짜로 둘이 사귀니까 간 거 아님??
또 팬으로 수호 좋아한다고 저렇게 수호 사진으로 도배질하는 레인이 죽고 못 사는 애인 사진을 단 한 장도 안 올린다는 것도 이상함. 이미 은퇴한 사람이고 하니까 데이트 사진 같은 거 개인 sns에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까지 단 한 장도 안 올라왔음.
아무리 봐도 둘이 진짜 무슨 관계있는 것 같음.
└ 생각해 보니까 그렇긴 하네. 아무리 수호 좋아한다고 해도 생일에 여자친구랑 보내지 수호랑 보내고 싶진 않을 것 같은데...
└ 이렇게 보니까 맞네. ㅅㅂ 여친 두고 고추 달린 놈이랑 왜 보냄.
└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개웃기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니 근데 전에도 말했잖니. 남자 둘이 일반인도 아니고 나름 유명한 애들이 사귀는데 저렇게 당당하게 굴겠냐고;;;;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
└ 22 애초에 둘 다 게이면 그렇겟거니 하겠는데 둘은 커밍아웃 한 적도 없잖음. 말이 안 됨.
└ 어후 답답이들. 꼭 그런 거 해야만 남자랑 사귀게 되는 거냐;; 어쩌다 보면 만날 수도 있는 거지.
└ 너는 그럼 어쩌다 보니 남자 만나냐?
└ 아니;; 그건 아닌데...
└ 너도 안 되는 걸 왜 쟤네는 된다고 해ㅡㅡ 역시사지 똑바로 해라.
└ 됐어. 그냥 사실이 어쨌건 내 머릿속에선 둘이 이미 떡도 쳤고, 애도 낳았음.
└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너 이거 신고당한다.
└ 미쳤나 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역겨운 소리 마셈;;
└ 역겨우면 꺼지시든가. 내가 달린 머리로 상상하겠다는데 왜 네가 역겹다 뭐다 지랄이야. 대가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냐?
└ 이 형인지 누나인지 박력 미쳤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이런 글은 대체 왜 올리는 거냐;; 여기가 게임 커뮤지 김레인x이수호 커뮤냐?
└ 그러면 프로게이머 얘기를 식물 커뮤 가서 할까?
└ 왜 이렇게 극단적인뎈ㅋㅋㅋㅋㅋㅋㅋ
└ 그 와중에 둘이 사이 진짜 좋네... 레인 형... 난 형이 행복하면 됐어...
└ 쓸데없이 아련하네;
└ ㅅㅂㅋㅋㅋㅋㅋㅋㅋ 실연당했냐
└ 222222222222 레인... 당신이 없는 체이스는... 단무지 없는 김밥 같아... 하지만 그래도 형이 행복하다면 내가 참아볼게...
└ 김레인...
└ 레인...
└ 우리의 레인...
└ 얘네 단체로 약빨았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원래 김레인 팬들 중에 이상한 애들 많음;;
└ 김레인을 부러워해야 되는 거냐, 수호를 부러워해야 되는 거냐.
└ 양쪽 다 부러워 미침.
└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잘난 놈들끼리 만나는 게 낫다.
└ 넌 누굴 갖고 싶엇는데?
└ 나? 난 둘 다.
└ 욕심 미쳤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그래도 수호 덕에 레인이가 글 많이 올려줘서 행복함... 보통 은퇴하고 bj 해서 자주 볼 수 있는데 레인은 코치 전향하고, 방송도 이제 안 해서 이런 거 아니면 볼 기회가 없음...
└ ㅇㅈ... 원래도 sns 잘 안 하는데 수호랑 친해지고 나서 글 자주 올리더라. 은퇴해도 이렇게 자주 근황 얘기 들을 수 있다는 거에 만족함...
└ 레인...
└ 정글...
└ 우리의 토템...
* * *
수호와 주오가 제주도에서 시간을 보낸 지 2주가 지났다. 그리고 오늘 1월 10일, 주오의 생일날을 맞았다.
주오는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고 수호에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같이 아늑한 이불 속에서 눈을 떴고, 소소하게 집 안에서 영화를 보고 게임을 했다.
수호도 어떻게 선물을 건네야 할지 망설이고 있던 탓에 축하한다는 말을 건넬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수호는 창밖으로 보이는 어둑어둑해진 하늘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머니 속 작은 케이스가 손가락에 툭 닿았다. 수호는 괜히 선물 상자를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렸다. 언제 주지.
차라리 10일이 되는 그 순간 줄 걸 그랬다. 하지만 그때는 경황이 없었다.
‘형, 흣, 아! 주……오, 형!’
‘수호야, 하아…… 내 수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만큼 몸을 섞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선물을 줘야 한다는 것도 잊긴 했지만, 어쨌거나 기억했다고 해도 주기 애매한 상황이었다.
이후 수호는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정신을 차리느라 힘들었고, 그 후에는 주오와 함께 게임을 하느라 바빴다.
더군다나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던 주오와 수호는 게임이 끝날 무렵에 두 사람을 알아본 팬들에게 붙잡혀 있느라 정신이 없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늘어져 버린 수호의 다리를 들고 그 아래에 앉은 주오가 입을 열었다.
“수호야, 많이 피곤해?”
“……조금요.”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많이 알아볼 줄 몰랐어.”
게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 역대 어떤 프로게이머들보다 이름난 두 사람이 수호와 주오였다. 그런 둘을 게임에 대한 관심이 지극히 높은 피시방 손님들이 몰라볼 리가 없었다.
주오는 늘어진 수호의 길쭉한 다리를 큰 손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수호는 알맞은 세기로 근육을 꾹꾹 누르는 주오의 손길에 축 늘어졌다. 이 형은 게임도 잘하고 음식도 잘하면서 마사지도 잘한다. 못하는 게 뭔지 모를 지경이었다.
노곤노곤하게 몸을 내맡기고 있는 수호를 향해 주오가 입을 열었다.
“옷 벗겨줄까? 외투라도 벗고 눕는 게 편할 것 같은데.”
두툼한 외투를 입고 그대로 누워 있던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주오가 외투를 벗겨주다 선물 상자를 들키면 큰일이었다.
수호는 다시금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타이밍에 선물을 전해줘야 할까.
사실 선물이라고 해봤자 큰 건 아니었다. 주오는 물욕이 없는 편이었고, 필요한 것들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값지고 귀한 것을 주려고 했으나 수호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수호는 관심이 없었지만 수호의 친구들은 시계에 관심이 많았다. 다른 건 몰라도 시계는 비싼 걸 껴야 한다는 친구들의 지론이 떠올라 은근슬쩍 주오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코치님은 시계 안 차요?’
새로운 밴픽 패턴에 대해 깊게 생각에 빠져 있던 주오는 뜬금없는 물음에 수호를 바라봤다. 갑자기 무슨 시계일까, 곰곰이 고민하던 주오는 이내 자신의 빈 손목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 아, 손목시계?’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고 있지 않다면 선물로 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불편해서 안 하고 다녀. 게임할 때 걸리적거리니까. 수호도 그렇지 않아?’
그렇다. 마우스랑 키보드를 빠르게 움직이고 쳐야 하는데 시계를 차고 있으면 상당히 불편했다. 그렇기에 수호도 그렇고 제라드의 모든 선수가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았다.
수호는 날아가 버린 시계 선물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그리고 수호의 기분이 침울해진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주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호에게 다가왔다.
‘수호야, 왜 그래? 혹시 시계 갖고 싶어? 주말에 보러 갈까?’
당장에라도 괜찮다는 듯 주오의 눈동자가 다정하게 빛났다.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시계는 필요 없었다.
‘아뇨. 갖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래? 그래도 원하는 거 생기면 말해줘.’
말하는 즉시 어디서든 수호가 원하는 시계를 공수해 올 것처럼 주오의 시선이 굳은 의지로 반짝거렸다. 수호는 정말 필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건 없어요? 갖고 싶은 것도 괜찮아요.’
수호는 주오가 명쾌한 답을 내려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주오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호의 기대감은 한껏 바닥으로 추락했다.
‘딱히 없어. 아, 갖고 싶은 건 있는데…… 음.’
말을 잇던 주오가 갑자기 멈칫하고는 수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는 것 같은 주오의 태도에 수호가 입을 열었다.
‘뭔데요?’
‘음, 그게…… 전부터 갖고 싶던 건데 혹시 수호 자는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주오가 수호를 바라봤다. 불안한 듯 흔들리는 주오의 눈빛이 꼭 혹시나 자신을 변태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듯했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게 왜 필요하냐고 물었을 수호였다. 하지만 이제는 필요가 없더라도 주오가 원한다면 주고 싶은 게 수호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생일 선물로 주기에는 부족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찍을 수가 있을까. 생각에 빠져 대답을 하지 않는 수호를 보며 주오는 어깨를 늘어뜨렷다.
‘그게 안 되면 아무거나 다 좋아. 수호가 주는 건 뭐든지.’
제일 어려운 말이었다. 뭐든지 좋다. 다 좋다.
수호는 그 후로도 주오에게 무엇을 줘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그렇게 고민하고 고민해서 고를 것이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시계는 부피가 있어서 불편하니 그렇다면 불편하지 않을 정도는 괜찮다는 것 아닌가.
사실 이럴 땐 쥬얼리 선물이 가장 편하긴 했다. 선물 센스가 없는 수호에게는 유일한 동아줄과 같았다. 그리고 수호는 본인의 왼손 약지에 고이 끼워진 반지를 바라봤다.
먼저 이런 것을 하자고 하는 것을 보면 이런 류의 선물은 싫어하지 않을 것 같았다.
수호는 손안의 상자를 꼭 쥐었다. 상자 안에는 얇은 가죽 줄 안쪽에 수호의 이름이 새겨진 팔찌가 들어 있었다.
싫어하진 않겠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수호는 떨리는 마음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주오는 갑자기 자신을 향해 돌아누운 수호가 열렬한 눈빛을 보내자 고개를 갸웃했다.
“수호야,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
수호는 의아한 눈을 한 주오에게 붙잡힌 다리를 빼내고는 주오의 옆에 앉았다. 대답 없이 어딘가 굳은 결심 어린 얼굴로 자신을 보는 수호로 인해 주오의 의아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수호는 주오의 옆에 앉아 주머니 속 상자를 꽉 잡으며 입을 열었다.
“형, 생일 축하해요.”
“어……? 알고 있었어?”
수호가 알고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주오가 놀란 얼굴을 했다. 수호는 조심스럽게 주머니 속에 푹 박혀 있던 상자를 꺼내 주오에게 건넸다.
“선물이에요.”
“……내 생일 선물이야?”
“네.”
“와아. 수호야, 정말 고마워. 정말 너무너무 고마워.”
주오는 감격스럽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으며 조심스럽게 수호에게서 상자를 받아 들었다. 소중하다는 듯 케이스를 어루만진 주오가 반짝이는 다갈색 눈동자로 수호를 바라봤다.
“열어봐도 돼?”
“……네.”
주오는 환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케이스를 열었다. 검은 가죽끈 중앙에 심플하게 각인을 박은 은이 장식된 팔찌였다. 수호는 혹시나 주오가 싫어하면 어쩌나 싶어 주오의 표정을 살폈다.
수호의 긴장이 무색하게도 주오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환하게 미소 지으며 수호를 바라봤다.
“고마워. 너무 마음에 들어. 여기 각인 박힌 건 RAIN이야?”
“네.”
뭐라고 적을까 고민하다 그의 선수명이 떠올라서 그렇게 정해 버린 수호였다. 주오는 앞으로 선수로 다시 뛰지 않는 이상 선수명이 적힌 유니폼을 입을 일이 없었다. 코치에게 지급되는 유니폼에는 선수명이 적혀 있지 않았다.
수호는 언제까지나 그가 그의 선수명을 잊지 않기를, 그리고 영원히 기록되며 남기를 바랐다.
역대 최고의 정글러라는 수식어가 붙은 RAIN. 수호는 그의 팬이 되어버렸다.
“정말 고마워. 매일 차고 다니고, 절대 빼지도 않을게.”
주오는 수호가 건넨 팔찌를 왼쪽 손목에 걸고는 수호를 향해 보여줬다.
“잘 어울려?”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 수호는 주오가 낀 팔찌를 보지 못했다. 수호에게는 그저 아주 기쁘게, 행복한 기운을 내뿜으며 웃는 주오만이 보였다.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어 해줘서 다행이었다.
불안해하던 수호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주오가 팔찌를 낀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흐뭇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수호가 입을 열었다.
“그 각인 뒤쪽에 제 이름도 넣었어요. 형이 제 거라는 의미예요. 이름표 같은 거니까 잊어버리면 안 돼요.”
주오는 황급히 ‘RAIN’이라고 적힌 각인의 뒷면을 확인했다. 그곳에 ‘SUHO’라는 다른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주오는 본인의 선물에 수호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더욱 좋은지 활짝 웃었다.
“응. 안 잊어버릴게. 차라리 ‘SUHO’를 앞면으로 할까? 남들한테 다 보여줄 수 있게?”
‘SUHO’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기쁘게 얘기하는 주오를 두고 수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오는 갑자기 침실로 향하는 수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호야?”
“잠깐만요.”
수호는 갑자기 캐리어를 뒤적거리더니 제일 안쪽 수납공간에서 공책을 꺼내 들었다. 정확히는 공책이라기보단 파일 같았다. 수호는 그것을 주오에게 건넸다.
“제가 자는 모습은 제가 못 찍으니까 줄 수가 없었어요. 그건 형이 찍으세요. 그리고 이건 본가에서 몇 개 가지고 온 건데 형 드릴게요.”
“……어?”
파일을 받아 든 채 눈을 깜빡이는 주오를 보며 수호가 입을 열었다.
“제 사진들이에요. 형 갖고 싶어 했잖아요.”
주오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파일을 열어봤다. 그 안에는 수호의 일대기가 있었다. 탄생일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의 사진들이었다. 주오는 첫 장부터 너무나 귀여운 수호의 모습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감격 어린 눈으로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주오에게 수호가 한 걸음 다가갔다. 수호의 발소리에 주오의 시선이 수호에게 향했다.
수호는 올곧게 자신을 향한 다정하고, 예쁘고, 반짝이는 주오의 다갈색 눈을 바라봤다.
“형, 생일 축하해요.”
주오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올해가 자신이 맞이한 생일 중 가장 값진 생일이라고.
주오는 수호를 끌어안았다. 수호는 자연스럽게 주오의 어깨에 턱을 올리며 그의 허리를 팔로 감쌌다. 참 아늑했다.
“수호야, 수호야.”
“왜요?”
“수호야, 네가 너무 좋아.”
행복이 주오의 낮은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행복이라는 게 소리라면 분명 주오의 목소리와 똑같을 것이다. 수호는 듣기 좋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저도 형이 너무 좋아요.”
대답하자마자 귓가에서 웃음소리가 낮게 울렸다. 주오는 수호를 더욱더 품으로 끌어당기며 수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수호의 체취를 한가득 들이마신 주오가 입을 열었다.
“사랑해, 수호야.”
수호는 또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 격렬한 고동이 좋다. 겹쳐진 가슴에서 누구의 심장 소리인지 모를 쿵쿵거리는 진동이 크게 느껴졌다. 수호는 그 울림에 몸을 맡기며 대답했다.
“사랑해요, 주오 형.”
“앞으로도 계속 사랑해 줘.”
“형도요.”
자신만 그럴 수 없다는 수호의 답변에 주오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수호의 목덜미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 주오가 수호와 눈을 맞췄다. 눈가를 둥글게 휘며 환하게 웃은 주오가 작게 속삭였다.
“약속할게. 그러니까 수호도 약속하는 거야.”
수호도 주오를 보며 마주 웃었다.
“네. 계속 형만 사랑해 드릴게요.”
앞으로 몇 번이고 더 약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약속을 지킬 것이다.
<외전 완결>
김레인×이수호 파는 사람 있어??
4권
@정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