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40)

* * *

[Chase의 오랜 토템, RAIN 은퇴]

20XX년에 데뷔해 피지컬 게임이라는 Chase를 전략게임이라고 불리도록 한 RAIN이 7년의 길었던 프로 생활을 끝낸다. 데뷔부터 단숨에 우승을 거둔, 통칭 로열로더의 길을 처음으로 걸었던 RAIN의 은퇴 소식에 업계가 들썩였다.

현 프로 중 최장 기간 활동했던 RAIN은 SUHO와 양대산맥으로 Chase의 상징적인 선수로 꼽혔다. 은퇴 전 마지막 경기인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거두며 RAIN의 주가가 더욱 뛴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런 그가 돌연 은퇴를 밝혀 세계 각국의 팀에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오랜 시간 Chase의 살아 있는 토템이라고 불린 RAIN에게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며, 앞으로도 그가 가는 길이 순탄하기를 바랄 뿐이다.

e-sport 매거진 김승태 기자

[게임/11103000] 김레인 은퇴 실화?

[Chase의 오랜 토템, RIAN 은퇴]

이거 기사 실화냐. 진짜 은퇴함? 진심으로??

└ ㅇㅇ. 진심 월드 우승 소감으로도 은퇴라고 했음. 그리고 제라드 공식 SNS에도 레인한테 그동안 고맙다고 그런 글도 올라왔음.

└ 와... 아니 왜 갑자기? 이번에 월챔 우승까지 했다면서 왜?

└ 원래부터 레인 형 박수칠 때 떠나고 싶다고 했었음. 이번에 우승했으니까 이제 때 됐다는 거지...

└ 진짜 스프링 우승 소감 때도 러쉬 얘기 꺼내길래 살짝 은퇴각 보였는데 진짜였네...

└ 나 이대로 못 보내ㅠㅠㅠㅠㅠㅠ

└ 진짜 혀엉.... 돌아와...

└ 아 진짜 너무 좋아했던 선수인데 아쉽다.

└ 22222

└ 앞으로 무슨 일을 해도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

└ 레인 씨 가는 길 꽃길만 있기를.

└ 수호랑 같은 팀 해서 1, 2년은 더할 줄 알았는데... 진짜 충격.

└ 나도 그렇게 생각했엇는데 아니었나 봄...

에필로그 챔피언십 이후 그들은?

월드 챔피언십이 끝난 바로 뒷날 제라드는 서울로 돌아왔다. 보통 월드 챔피언십 후에는 관광이나 할 겸 일주일 정도 머무르곤 했지만, 주오의 은퇴식이다 뭐다 진형이 서둘러 관광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주오가 빠지면서 새로운 정글 선수도 찾아봐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진형은 정말 빠르게 일주일 뒤에 방긋 웃으며 소식을 전해왔다.

‘조만간 새로운 정글러가 올 거니까 그 전에 주오는 숙소 정리해 놔라.’

‘엥? 누군데요?’

아무런 언질도 없이 덜컥 확정된 새로운 팀원 소식에 젤리를 먹고 있던 우찬이 손을 멈추고 물었다.

‘Yan. 너네도 알지? 지금 중국에서 뛰고 있는 선수.’

OZ와 마찬가지로 애초에 데뷔를 중국에서 한 선수였다. 그리고 주오와 비슷하게 설계자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정글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선수들이 새로운 팀원을 떠올리는 사이 진형이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코치도 새로 올 거야.’

‘엥? 그러면 루퍼 코치님은요?’

이번에도 우찬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정글러 자리는 빠지니까 채워 넣는 게 맞았지만, 코치는 이미 있었다. 코치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분야로 나뉘어 있는 팀들도 있지만 제라드는 그런 팀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연히 새로운 코치가 오면 루퍼가 나가는 게 맞았다.

그게 마땅치 않은지 우찬과 은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래 함께했던 코치이기에 우찬과 은기의 애정이 남다른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진형이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

‘루퍼가 이것저것 다 관리하기 힘들어해서 한 명 더 들이기로 했어. 분석도 혼자서는 힘드니까.’

‘아아, 그런 거면 뭐. 알겠습니다.’

루퍼가 그대로 있다는 거에 만족했는지 우찬은 다시 젤리를 먹기 시작했다. 진형의 옆에 서 있던 루퍼는 그런 우찬을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그렇게 아주 순식간에 새로운 정글러와 코치가 들어왔다.

당시 주오는 집을 보러 다닌다고 자리를 비워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수호도 함께 주오와 집을 알아보고 싶었지만, 진형이 연습을 빼주지 않아 수포로 돌아갔다. 여행으로 빼준 한 달을 보강하기 위해 여행 전까지는 무조건 연습만 해야 하는 수호였다.

수호는 차곡차곡 사용했던 물건들을 정리하는 주오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형, 숙소 언제 나가요?”

계절이 지나 안 입던 옷부터 정리하던 주오가 고개를 돌렸다.

“일주일 뒤에 나가기로 했어.”

“그렇게 빨리요?”

이건 예상보다 빨랐다. 내쫓는 것도 아니고 월드 챔피언십이 끝나자마자 2주 뒤에 숙소를 나간다니.

따지고 보면 정확히 주오의 계약이 끝나기까지 한 달여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급한 스케줄이 이해가 가지 않아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 선수도 들어와서 적응해야 하니까. 그리고 여기서 나갈 집도 알아놨으니까 굳이 오래 있을 필요는 없지.”

방긋 웃으며 말하는 주오를 수호는 뚱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속전속결이었다. 함께 있을 시간도 이제 그렇게 길지 않은데 주오는 미련 없다는 듯, 아니, 오히려 빨리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주오가 숙소 바로 옆집을 덜컥 계약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그래도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아니야, 빨리 정리해야 수호랑 여행도 가지. 감독님한테는 허락받았으니까 수호는 짐만 챙겨서 나랑 떠나면 돼.”

대체 어떻게 진형을 설득한 건지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이진형은 연습 귀신이었다. 그런 그가 대체 무슨 부탁을 했길래 대가로 한 달간의 여행을 허락한 걸까.

“그때 감독님이 부탁하신 건 해결됐어요?”

“응? 아…… 해결은 됐는데 그게 조금 말하기가 곤란해.”

주오는 미안하다며 눈꼬리를 시무룩하게 내렸다. 그러고는 시선을 들어 침대에 앉아 있는 수호를 힐끔거렸다.

슬슬 눈치를 살피는 주오가 이상해 수호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자 주오가 힐끗거리던 눈을 거두곤 수호의 시선을 살며시 피하며 남은 옷들을 정리했다.

“곧 말해줄게. 미안해, 수호야.”

옷 정리를 마친 주오가 수호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허벅지에 살포시 얼굴을 기대고 시무룩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주오의 머리를 수호가 조심스럽게 만졌다.

사랑스러운 다갈색 눈에 거짓은 없었다. 아직은 조심스럽다고, 그래서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그러면 꼭 얘기해 주겠다고 말하는 주오를 보며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해준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주오는 정말 일주일 뒤에 숙소에서 짐을 뺐다. 수호는 텅 비어버린 방이 허전했다. 함께 자던 주오가 없어지니 침대도 유독 넓게 느껴졌다.

수호는 혼자 자기에는 이미 허전해 버린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두드렸다.

[뭐 해요?]

주오에게 연락을 보내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주오 형: 씻고 나왔어. 수호는 뭐 해? :0]

수호는 핸드폰을 꾸물꾸물 부여잡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누워 있어요.]

[주오 형: 빨리 새로운 집 들어가고 싶다.]

[주오 형: 수호 보고 싶다.]

[저도요. 언제 와요?]

[주오 형: 다음 주에 들어가기로 했어.]

수호는 빨리 다음 주가 오기를 바랐다. 일주일 떨어져 있을 뿐이었는데 벌써부터 주오가 보고 싶었다. 수호가 핸드폰을 붙잡고 함께 찍은 바탕화면을 보고 있자 핸드폰이 부르르 떨려왔다.

[주오 형]

화면에 반짝이는 이름에 수호는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형.”

-와아, 수호 목소리 좋다.

감탄인지 감격인지. 어쨌거나 기분 좋게 울리는 주오의 음성에 수호는 옅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주오의 음성이 훨씬 좋았다.

“형이 더 좋아요.”

-어떡하지. 수호야, 벌써 너무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질 만큼 주오의 음성이 시무룩했다. 분명 자신도 그러지 않을까. 수호는 더욱 핸드폰을 귀에 가까이 댔다.

“저도요. 형, 침대가 너무 넓어요.”

-그 말 야한 것 같아.

민망한 듯 주오의 음성이 조금 작아졌다. 수호는 가시지 않는 미소를 입에 머금고 입을 열었다.

“형이랑 자고 싶어요.”

-……그 말은 정말 야해.

“빨리 와요.”

-응, 빨리 갈게. 근데 수호 이제 자야 하지 않아? 시간 많이 늦었다.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잠이 많은 수호가 언제 자는지 알고 있는 주오였다. 내일 피곤하면 안 되니까 어서 자라는 주오에게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형도 잘 자요.”

-그래, 꿈에서 보자.

수화기 너머로 쪽 하고 입술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수호는 그런 주오에게 화답하듯 입을 맞췄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꼭 자장가같이 마음이 편안해지는 울림이었다.

수호는 다시 시간이 빨리 흘러가길 바랐다. 어서 그가 보고 싶었다. 앞으로 연습실에서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숙소로 돌아오면 잠깐이라도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 *

수호가 매일을 그렇게 기도하는 사이 주오의 이삿날이 다가왔다.

주오는 제라드 숙소 옆집으로 들어왔다. 아침부터 떡까지 사 들고 숙소를 방문해서 앞으로 이웃 주민으로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주오를 은기가 찡그린 얼굴로 반겼다.

“누가 아침부터 떡을 먹어요.”

은기는 주오가 사 온 떡을 식탁에 올려놓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수호는 멍하니 식탁 의자에 앉아 주오를 바라봤다. 꿈과 혼동하는 수호를 보며 주오가 환하게 웃었다.

“반가워, 수호야.”

“응, 반가워요.”

수호가 손을 내밀자 주오가 마주 손을 잡아왔다. 주오외 왼손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보자 수호는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주오가 수호의 입에 짧게 입을 맞췄다.

“보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주오의 목에 수호가 팔을 감았다. 뜨끈한 온기가 수호를 부드럽게 감쌌다. 수호는 주오의 목에 얼굴을 박고 주오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맡고 있으면 저절로 가슴이 떨리는 체취였다.

“와, 아침부터 이게 무슨 광경이야.”

안쪽 방에서 먼저 씻고 나온 선우가 아침부터 못 볼 꼴을 봤다며 눈가를 찡그리고 있었다. 주오는 그제야 수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멀어진 주오의 체온이 아쉬웠지만, 주오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는 걸로 만족했다.

“수호야, 씻고 와.”

“이제 가려고요?”

“응? 아니, 나도 감독님 만나러 가야 해서 같이 갈 거야.”

감독님은 왜. 그렇게 생각한 건 수호만이 아니었는지 선우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아침부터 감독님은 왜?”

“인사드리러.”

“그걸 이렇게 아침부터 간다고……?”

황당하다는 선우의 시선에 주오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의자에 앉은 수호를 일으키며 말했다.

“너희랑 같이 가면 좋잖아. 그러니까 얼른 준비하고 오자.”

방긋 웃는 주오를 보며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씻고 나오는 동안 주오가 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수호의 걸음이 빨라졌다.

모든 선수가 준비를 마치고 연습실로 향했다. 수호는 오랜만에 함께 연습실로 향하는 주오와의 시간이 좋았다. 연습실까지 가는 10여 분이 짧게 느껴져서 더 길었으면 바랄 정도였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정해진 거리가 늘어나는 일은 없었다.

연습실에 도착해 문을 열자 먼저 와 있던 진형이 웃음으로 반겼다.

“어, 주오 왔냐?”

“뭐야, 이미 찾아뵌다고 말씀드린 거였어?”

그래서 아침부터 온 거구나. 선우가 중얼거리자 진형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애들한테 말 안 했어?”

의미심장한 진형의 말에 선수들의 시선이 주오에게 향했다. 주오는 자신을 보는 수호를 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미안한 것도 같고, 기뻐하는 것도 같았다. 수호는 주오가 왜 저렇게 웃을까 싶어 계속 그를 바라봤다.

“감독님도 말씀 안 하셨잖아요.”

“네가 하지 말래서 그랬지.”

“무슨 소리예요?”

주오와 진형이 의미 모를 대화를 이어가자 은기가 불만스럽게 눈가를 찡그렸다.

“나만 이해 안 가는 거 아니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주오와 진형을 힐끔거리는 우찬을 보며 진형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부터 새로 온 코치 RAIN이다. 다들 잘 알지?”

“……뭐요?”

“코치요?”

진형의 말에 다시금 연습실에 있는 모든 시선이 주오에게 꽂혔다. 주오는 놀람과 의아함, 그리고 당장 설명해 보라는 압박감이 느껴지는 시선에 어색하게 귓가를 만졌다.

잠시 허공을 배회하던 주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많은 눈 중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는 검은 눈에 고정됐다.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지 수호의 말간 눈이 의아함으로 가득했다.

주오는 자신에게 곧은 시선을 주는 수호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감독님이 제의해 주셔서 코치 해보기로 했어. 말 안 해서 미안해. 나름 서프라이즈로 놀래주고 싶었는데…… 기분 나빴어?”

의도는 그랬지만 어쨌거나 수호를 속인 꼴이 된 주오가 슬쩍 눈치를 살폈다.

수호는 혹시나 자신이 기분 나빠하면 어쩔까 싶어 불안한 눈으로 힐끔거리는 주오를 빤히 바라봤다.

코치. 제라드의 코치.

같은 선수석에는 앉지 못하지만 연습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월드 챔피언십 우승을 향해 함께 도전하는 사람.

함께할 수 있으면 뭐든 좋았다. 같이 꿈을 키워 나가는 거라면 뭐든지.

수호는 이제는 코치로 돌아온 주오를 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담백하지만 설렘을 품은 음성이었다. 주오는 앞으로 함께할 자신의 연인을 보며 마주 웃었다.

“나도, 잘 부탁해.”

“아니, 잠깐 뭔데? 저 형 쉬고 싶다며?”

“감독님이나 주오 형이나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 이게 뭐예요?”

여전히 납득이 안 가는지 되묻는 음성들 속에서 수호는 주오를 향해 물었다.

“안 쉬어도 되겠어요?”

치열한 경쟁 속에 다시 발을 들인다는 게 정말 괜찮은지 묻는 수호를 보며 주오는 입을 열었다.

“내가 쉬고 싶은 건 선수로서였어. 코치는 다른 얘기지. 사실 코치도 생각에 없었는데 그래도, 수호 네가 여전히 프로에 몸담고 있잖아.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곁에 있을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어. 이제는 내가 네 손에 우승컵을 쥐여 줄게. 널 언제까지고 최고의 선수로 남게 할 거야. 그게 이제 내 꿈이야.”

자신의 선수를 영원히 최고 자리에서 내려주지 않겠다고 말한 주오가 수호의 손끝을 살며시 잡았다.

부드럽게 잡히는 따뜻한 체온에 마음이 몽글거렸다. 수호는 자신을 위한 꿈을 꾼다는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주오가 수호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년에도 잘 부탁해, 수호야.”

내년에도, 그 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수호는 조심스럽게 손끝을 잡는 주오의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잘 부탁해요. 주오 형.”

수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완결>

외전

“아우! 이번 패치 너무 그지 같은데?”

모니터 화면 가득 승리라는 문구가 떠올랐지만 우찬은 불만스럽게 헤드셋을 벗어 던졌다. 우찬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이번 연습이 고됐는지 다들 진이 빠져 있었다.

체이스는 이번 프리시즌에 대격변 패치를 진행했다. 아이템부터 챔피언들의 스킬까지 바뀌지 않은 게 없을 정도였다. 베테랑이라고 불리는 수호마저도 이번 패치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안 그래도 사거리 긴 원딜들한테 무슨 박격포를 쓸 수 있는 아이템 같은 걸 만들어준 거야.”

특히나 원딜들이 사용하는 아이템이 크게 변했다. 초반의 약한 딜을 보충해 주는 아이템이 특히나 많아졌다.

게임의 전반적인 메타도 변화했다.

바텀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 이번 메타로 인해 수호도 바텀으로 로밍을 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방금 전 연습에서도 바텀에서 대규모 한타가 벌어졌다. 텔레포트로 바텀에 합류한 상대 탑으로 인해 4:5로 제라드에게 불리한 전투였다.

우찬이 탑을 밀고 있었기에 제라드의 남은 4명은 죽지 않고 살기만 해도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수호가 공격적으로 상대를 물다 사고가 벌어졌다.

수호를 살리기 위한 선우의 희생. 승패에는 연관이 없을 실수이긴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초반 바텀 라인전이 힘들어졌다. 바뀐 아이템 빌드 때문에 딜 예측이 안 되면서 벌어진 실수였다.

수호는 불만스럽게 모니터 화면을 노려봤다. 승리는 했지만, 플레이 자체에는 불만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런 수호 뒤에서 제라드의 새로운 코치, RAIN이 수호의 작은 머리통을 바라봤다. 평소의 수호를 보는 다정하고 온화한 눈빛이 아닌 냉담한 시선이었다.

“오늘 스크림 연습은 이걸로 끝이야. 다들 이제 개인 연습하다가 시간 되면 돌아가라. 그리고 수호는 잠깐 나 좀 보자.”

수호는 단호한 주오의 음성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불리게 될 거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움직임이었다.

주오가 제라드의 코치가 되고 2주. 이미 제라드의 선수들은 RAIN 코치에게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였다. 그건 수호도 마찬가지였다. RAIN 코치가 생각보다 무서운 코치라는 것도 깨달은 후였다.

선수였을 때 주오는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선수였다. 하지만 코치가 된 주오는 모든 선수가 한입으로 무서운 코치라고 말할 정도였다. 주오는 그만큼 무서웠다. 플레이적 실수뿐만 아니라 아이템 빌드, 동선,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 수호가 한 실수는 그런 주오의 호출을 받을 만한 플레이였다.

수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오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연습실을 빠져나와 반성의 장소라고 불리는 회의실로 들어온 수호는 주오의 맞은편에 앉았다.

주오는 여전히 웃음기 없는 얼굴로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는 그런 주오가 무서우면서도 그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만약 입 밖에 냈다가는 주오가 더욱 얼굴을 굳힐 게 분명한 생각이었다.

말없이 자신과 눈을 맞추는 수호를 보며 주오가 입을 열었다.

“바텀에서 그 플레이는 왜 한 거야? 거기선 빼는 게 나은 상황이었잖아.”

역시나 수호가 생각한 부분을 주오가 물었다. 수호는 주오를 보며 대답했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들어갔어요. 상대가 다섯이긴 했지만, 그래도 스킬이나 성장 차이로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수호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초반부터 우위를 잡고 있던 제라드였다. 특히나 미드의 차가 컸다. 애초에 라인전에서 상대 미드의 스펠을 전부 빼놨기에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지 못한 건 우찬이 불만스럽게 말했던 원딜의 아이템 변경이 컸다.

전보다 초반 원딜들의 딜이 강하게 들어오는 걸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변명을 해본 수호였지만, 주오의 표정은 역시 좋지 않았다. 주오는 연습 경기 동안 열심히 포인트들을 적어둔 노트를 펼쳤다. 자연스럽게 수호의 시선도 테이블 위에 놓인 주오의 노트로 향했다.

“이게 원딜의 아이템 상황이고, 이쪽이 네 상황이었어. 네가 아무리 잘 컸다고 해도 원딜이 이 템을 선템으로 올리면 폭딜 나오는 거 알잖아.”

그렇다. 스킬과 평타만 가능했던 원딜들이 이제는 사용 아이템으로 순간적으로 추가 딜을 넣을 수가 있게 됐다. 그러니 무모하게 들어가는 건 명백한 오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이브를 해?”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주오의 음성에 수호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나 자비 없는 피드백이었다. 하지만 주오는 멈추지 않았다.

“거기서 무사히 다들 뺐으면 우찬이가 탑 포탑 깨고 쉽게 갈 수 있었어. 근데 네 플레이로 선우를 내주고 그것 때문에 상대 원딜이 킬 먹어서 바텀은 불리해졌지. 이러면서 바텀은 상황 안 좋아지고, 탑에서 챙겼던 이득도 무용지물.”

거침없는 주오의 피드백에 수호는 더욱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수호가 말없이 노트만 뚫어져라 바라보자 주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격변 이후로 딜 계산 잘 안 되는 거 이해해. 이러면서 감 잡는 것도 알아. 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무리한 플레이였다는 거 알지? 다음부턴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빼. 네가 제대로 감 잡을 때까지 이런 플레이 금지야.”

너무나 맞는 말이었기에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모르게 시무룩해 보이는 수호를 물끄러미 보던 주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테이블을 돌아 수호 앞에선 주오가 몸을 접어 앉았다.

의자에 앉은 수호보다 시선이 낮아진 주오는 어느새 무서운 코치의 탈을 벗어던지고 다정한 연인의 눈을 하고 있었다.

수호가 주오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자 주오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수호의 등을 마주 안았다.

“내가 이렇게 말해서 서운해?”

수호는 주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꼭 비비적거리는 것 같아 주오는 활짝 웃었다.

“귀여워.”

수호는 주오를 더욱 끌어안았다.

“형은 일할 때 멋있어요.”

“응? 수호가 더 멋있는데.”

웃음기 담긴 주오의 다정한 음성에 수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주오와 시선이 마주쳤다. 화사하게 웃는 주오를 보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이렇게 멋있을까.

수호는 주오에게 불려 혼나는 게 좋았다.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코치로서 무서운 사람이 이렇게 혼을 내고 나면 다시 다정하게 풀어지는데, 그 차이가 너무나 좋았다.

사실 그냥 모든 게 좋았다.

수호는 고개를 숙여 주오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주오가 입을 벌렸다. 어느새 겹쳐진 혀가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하, 나는 수호한테 뭐라고 할 때 너무 힘들어.”

“뭐가요?”

방금까지 무뚝뚝한 얼굴로 무자비하게 말하던 사람이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수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주오가 다시 짧게 입을 맞췄다.

“나는 수호가 너무 좋아서 다 좋게만 보이고, 편 들어주고 싶단 말이야.”

하지만 코치라는 입장에서 그럴 수가 없으니 주오는 죽을 맛이었다. 혼을 내다가 수호가 자신을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불안한 듯 주오의 눈꼬리가 축 내려앉았다. 수호는 시무룩한 주오를 다시 끌어안았다.

“형한테는 혼나는 것도 좋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사실 처음에는 수호도 코치 김주오에게 적응할 수 없었다. 늘 좋은 소리만 하던 주오였기에 당황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코치로서 언제나 선수에게 좋은 말만 해줄 수 없는 것도 안다.

서머 시즌까지만 해도 수호도 공과 사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주오의 은퇴 소식에 흔들렸고, 그래서 우승도 눈앞에서 놓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다행이다. 수호한테 미움받으면 너무 슬플 거야.”

“그럴 일 없어요.”

단호한 수호의 말에 주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제 돌아가 볼까? 수호도 연습해야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주오를 수호가 붙잡았다. 손목이 붙잡힌 주오는 수호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냐는 듯 묻는 주오의 눈을 보며 수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이랑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요. 연습실 가면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까…….”

이렇게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귀중했다. 하루 온종일 얼굴을 맞대는 사이긴 했지만, 그래도 연습실에 있는 동안에는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수호는 오랜만에 불려와 주오와 단둘이 있게 된 이 시간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아쉬움이 가득한 수호의 음성에 주오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윽고 주오가 살며시 웃고는 수호의 얼굴 곳곳에 입술로 도장을 꾹꾹 찍었다.

“나도 아쉬워. 그런데 지금은 연습 시간이니까.”

단호한 코치와 다정한 연인의 경계선에서 흔들리는 주오를 보며 수호가 아쉬운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이윽고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오는 수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집에 돌아가서 얘기 더 많이 하자.”

“……네.”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수호를 보며 주오가 미소 지었다.

수호는 다시 걸음을 옮기는 주오의 뒷모습을 보며 빨리 시간이 갔으면, 하고 바랐다. 매일매일 퇴근 시간이 기다려졌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시간은 평소와 똑같이 흘러갔다.

수호는 그 뒤로도 한참을 더 연습실에 남아 연습했고, 주오는 수호에게 피드백을 건넸다. 그들이 연습실을 떠날 수 있게 된 건 시계가 자정을 가리킨 다음이었다.

“아아, 오늘도 피곤하다.”

우찬이 뻐근하진 몸을 늘어뜨렸다. 그 옆에서 새로운 정글러 Yan, 장민현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체력 좀 키워라.”

혀를 끌끌 차는 민현을 우찬이 표독스러운 눈으로 노려봤다.

“흥, 손목에 파스 붙이고 있는 형보단 낫지.”

그러자 민현이 눈가를 찡그렸다.

“야, 이건 아픈 거지, 힘든 게 아니야.”

“그게 그거지!”

어느새 민현과 우찬이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하자 은기가 한심하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봤다.

“됐고 집이나 가요.”

“그러게 말이야. 둘 다 힘도 좋네.”

새롭게 주장을 맡게 된 선우가 은기의 말에 공감하며 우찬과 민현을 말렸다. 수호는 그 소란 속에서도 유유히 자리를 정리했다.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호를 선우가 돌아봤다.

“먼저 가려고?”

“네. 저 먼저 가볼게요.”

수호의 말에 남은 세 사람의 시선이 수호에게 향했다. 보통 같은 곳에 살기에 함께 가는 편이지만, 이렇게 먼저 가겠다는 경우는 하나뿐이었다. 우찬이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오늘도 레인 씨네 집에서 자려고?”

불퉁한 우찬의 물음에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우찬이 더욱 입을 비죽거렸다.

“수호만 거기서 자고 너무해!”

“둘이 사이가 너무 좋다는데 어쩌겠냐. 빨리 가봐. 주오 형 기다리겠다.”

여전히 주오와 수호의 사이를 모르는 우찬의 불만을 선우가 잘라내며 손을 흔들었다. 수호는 선수들에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저 둘 사이 진짜 좋나 보다. 예전에는 수호가 코치님한테 철벽 친다고 유명했었는데.”

우찬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르는 민현의 물음이 뒤에서 들려왔지만 수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빠르게 연습실을 빠져나오자 그 앞에 주오가 서 있었다. 수호는 주오를 향해 한걸음에 달려갔다.

“빨리 나왔네.”

살며시 웃는 주오의 옆에 붙은 수호가 그와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요.”

“많이 피곤해?”

수호가 집에 가고 싶은 이유를 잘못 이해한 주오였다. 사실 자정이 넘어서 잠이 많은 수호가 힘들어할 시간이기도 했다. 걱정 어린 주오의 시선에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형이랑 빨리 같이 있고 싶어서요.”

수호의 담백한 대답에 주오의 귓가가 붉어졌다. 환하게 웃는 주오를 보며 수호도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집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걸음은 누구보다 빨랐다. 제라드의 숙소 바로 옆집에 자리한 주오의 집은 어느새 수호와 주오 두 사람의 집과 다름없게 되었다.

수호는 일주일에 두세 번 숙소를 떠나 주오의 집으로 향했다. 어느새 주오의 자취방에는 수호의 물건이 한가득이었다.

현관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커튼을 대신해 달려 있는 플래카드가 수호와 주오를 반겼다. 매번 보는 광경이지만 저건 언제나 적응이 되지 않았다.

수호는 플래카드를 가리키며 주오를 돌아봤다.

“저건 언제까지 달아두려고요?”

“응? 왜?”

신발을 벗고 들어선 주오가 그건 왜 묻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주호의 행동을 보아 뗄 마음이 전혀 없는 듯했다.

수호는 결국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에요.”

사실 수호도 자신만 나온 단독 플래카드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음에 드는 것도 있었다.

성황리에 끝난 올해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 우승컵을 들고 있는 주오와 수호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박힌 플래카드는 수호도 마음에 들었다.

서로를 보며 웃고 있는 사진이 괜히 커플 사진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수호는 그 사진을 보며 살며시 웃었다.

“수호야, 배는 안 고파?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해줄게.”

주오가 들어오자마자 주방으로 향하며 물었다.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배 안 고파요. 형은요?”

“나도 별로.”

“그러면 그냥 씻고 자요.”

사실 밥보단 주오랑 침대로 향하고 싶은 게 수호의 본심이었다.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가려는 수호의 빠른 행동에 주오가 눈을 깜빡이다 이내 조심스럽게 웃었다.

“수호야, 같이 씻을래?”

주오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질문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미 주오랑 함께 이 집에 머물면서 여러 번 같이 씻은 적이 있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행위였음에도 주오는 늘 거절당하면 어쩌나 불안한 듯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수호는 대답 대신 주오의 옷도 챙겼다. 주오가 수호의 뒤를 따랐다.

몸을 녹여줄 따뜻한 물을 틀고 수호는 옷을 하나둘 벗기 시작했다. 나신이 되어가는 수호를 주오가 힐끔힐끔 바라봤다.

“수호는 목부터 어깨까지 이어지는 선이 정말 예쁜 거 알아?”

“네?”

갑작스러운 주오의 물음에 수호는 괜히 목덜미를 문질렀다. 무심코 거울로 확인해 봤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수호의 뒤로 어느새 옷을 다 벗은 주오가 다가왔다.

주오가 수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뒷목에 얼굴을 묻고 입을 맞췄다. 욕실에 앙증맞은 입맞춤 소리가 울렸다.

이것도 늘 있는 일이지만 수호는 이 일에 적응하지 못했다. 주오가 몸에 입술을 찍을 때마다 흠칫 놀랐다. 이번에도 움찔 몸을 떤 수호가 목을 감싸며 주오를 돌아봤다. 그러자 주오가 입술을 겹쳐왔다.

“너무 예뻐. 수호가 너무 좋아.”

수호는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자신이 좋다고 속삭이는 주오가 너무나 좋았다. 수호는 주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저도 형이 너무 좋아요.”

짧은 입맞춤이 몇 번 오가자 자연스럽게 아랫배에 열기가 모였다. 반쯤 힘을 받은 성기가 적나라하게 서로에게 비벼졌다. 수호는 묵직한 주오의 아래에 더욱 몸을 붙이며 주오의 목에 팔을 감았다.

주오가 당황한 듯 고개를 뒤로 내뺐다.

“수호야, 이건 나가서 하자. 우선 씻어야지.”

수호는 주오를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키스를 하지 말았어야 했던 거 아닌가.

수호의 시선을 눈치챈 주오가 미안하다는 듯 눈꼬리를 시무룩하게 내렸다.

“여기서 하면 수호 불편할 것 같은데…….”

수호가 망설이는 주오의 뺨을 잡고 눈을 맞췄다. 흔들리는 다정한 다갈색 눈동자를 보며 수호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나 침대에서나 힘든 건 똑같아요. 그러니까 해요. 씻기도 더 편하잖아요.”

사실 그랬다. 섹스를 하기 전에는 조심스러운 주오였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면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집요했다. 중간중간 미안하다고 말을 하지만 그래도 쉽게 놔주지 않는 게 주오였다.

욕실이나 침대나 결국 결말은 똑같이 기진맥진이 될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기에 수호는 본능에 따르기로 했다. 수호는 지금 당장 하고 싶었다.

수호의 단호한 음성에 주오가 살짝 시선을 내렸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맞춰왔다. 망설임은 없어졌지만, 어딘가 원망이 어려 있었다.

“나중에 여기서 했다고 뭐라고 하면 안 돼.”

원망받게 되면 자신은 정말 슬플 거라고 말하는 주오를 보며 수호가 옅게 웃었다. 너무나 귀여운 사람이었다.

“안 할 테니까 빨리해요.”

수호는 주오의 목에 팔을 감으며 입술을 겹쳤다. 망설임이 없어진 주오도 한껏 수호에게 몸을 밀착해 왔다. 주오에게 밀린 수호는 허리에 닿는 세면대를 한 손으로 디디며 입술을 벌렸다.

두텁고 미지근한 온기를 품은 주오의 혀가 입안에 가득 들어찼다. 수호는 이렇게 숨이 막힐 만큼 가득 들어차 혀뿌리를 문지르는 주오의 키스가 좋았다.

달뜬 숨결이 바닥에 떨어지는 물소리와 어우러져 욕실에 울렸다. 작은 숨소리였지만 소리가 울리는 욕실이다 보니 더욱 크게 들렸다. 괜히 민망해져 수호가 숨을 꾹 참자 주오가 더욱 혀를 깊게 밀어 넣었다.

“흐…… 으응.”

혀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깊은 안쪽을 찔러올 때면 털이 삐죽 서는 느낌이었다. 소름이 돋는, 하지만 중독성 있는 그 감각이 좋아 수호는 더욱 입을 벌렸다.

수호가 착실하게 반응을 하는 만큼 아랫배에 문질러지는 주오의 성기도 점점 크기를 키워 나갔다. 욕실에 가득한 수증기 때문인지 주오의 성기가 닿는 곳이 축축하게 느껴졌다.

수호는 단단하게 발기한 주오의 성기를 쥐며 천천히 어루만졌다. 앞뒤로 움직이는 수호의 손길에 흥분한 듯 주오가 낮게 숨을 뱉어냈다.

“하아, 수호야, 잠깐 불편해도 참아줘.”

주오는 그대로 수호의 왼쪽 다리를 자신의 팔뚝 위로 올리고는 꽉 닫혀 있던 입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입구를 꾹 누르자 수호가 움찔 몸을 떨었다. 입구를 벌리고 들어오는 손이 내벽을 문지르자 아랫배의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오른쪽 다리로만 균형을 잡기 힘들어진 수호는 주오의 목을 더욱 단단히 감싸 안았다. 주오는 수호가 무겁지도 않은지 단단하게 감싸 안고는 더욱 손가락을 깊게 밀어 넣었다.

“아, 아…… 흣.”

수호가 느끼는 가장 안쪽에 손끝이 닿자 떨어진 입술 사이로 자연스럽게 신음이 새어 나갔다. 주오는 그 신음에 반응하듯 수호의 아래를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손가락이 하나둘 늘어나며 아래가 더욱 벌어졌다.

욕실에 뜨거운 김이 가득 차서인지 수호는 더욱 달뜬 숨을 내쉬며 주오의 성기를 빠르게 흔들었다.

쿠퍼액이 귀두 끝에서 몽글 맺히는 것을 손가락으로 펴 바르며 수호가 속삭였다.

“형, 흣, 균형 잡기 힘들…… 아!”

당장에라도 미끄러질 것 같아 세면대에 몸을 기대고 있던 수호는 그대로 몸이 뒤집혔다. 세면대를 붙잡고 허리를 숙인 자세가 된 수호의 등허리에 입을 맞춘 주오가 성기를 한껏 풀어진 수호의 입구에 문질렀다.

“수호야, 하, 콘돔 없는데 가져올까?”

하지만 말과 다르게 주오의 성기는 여전히 입구를 지분거리고 있었다. 참기 어려운 상황인 건 수호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떨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수호는 야속한 주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냥, 흐…… 으읏. 넣어요.”

“그치만…….”

수호가 싫어할 거라고 여기며 망설이는 주오가 야속했다. 이 상황에서 애태우는 것도 아니고 무슨 짓이란 말인가.

수호는 대답 대신 손을 뒤로 뻗어 주오의 성기를 쥐고 입구에 가져다 댔다. 그러곤 그대로 허리를 뒤로 빼 성기를 천천히 머금기 시작했다.

“아, 으…… 형, 아!”

“하, 수호야, 수호야…….”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크기는 넣을 때마다 버거웠다. 어느새 세면대를 붙잡은 수호의 손가락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주오는 버거워하는 수호를 달래듯 목부터 어깨, 등까지 입술을 찍어나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래를 벌리고 들어오는 성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주오의 진입은 엉덩이 사이로 묵직한 고환이 닿고서야 멈췄다. 수호는 가득 찬 아랫배를 부여잡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빠듯한 감각이 이제는 쾌감으로 느껴졌다.

수호의 숨이 진정돼 가자 주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두 끝만 남겨두고 성기를 빼낸 주오가 단번에 도로 박아 넣자 수호가 숨을 헐떡였다.

“흐, 아! 형, 읏!”

“하아, 수호야. 허리 들어봐.”

주오가 보챘지만 수호는 내벽을 긁으며 단번에 들어찬 성기에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등허리가 둥글게 휘자 주오가 수호의 허리를 손으로 눌렀다. 안에 가득한 주오의 성기가 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아흐, 아아! 흣!”

주오의 성기가 빠르게 박혀올 때마다 수호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점점 자세가 낮아지는 수호의 배를 주오가 감싸 쥐었다.

힘으로 수호를 들어 올린 주오는 수호의 발을 자신의 발등 위로 올렸다. 유독 키가 큰 주오이기에 수호와의 높이가 맞지 않았다.

발끝으로 주오의 발등에 올라선 수호는 주오가 들어 올린 그 상태 그대로 퍽퍽 박혀오는 성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 아! 형, 흣…… 잠, 응!”

내벽과 전립선 안쪽까지 귀두가 강하게 찔러올 때마다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어느새 수호의 성기도 단단하게 발기해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주오는 더욱 수호와 몸을 겹치고 빠르게 성기를 처넣었다. 그럴 때마다 성기를 문 입구 사이로 새는 음란한 소리가 욕실을 가득 채웠다. 청각적으로 너무 큰 자극이었다. 울리는 신음과 숨소리, 그리고 성기와 내벽의 마찰음.

수호는 고양되는 쾌감에 몸을 바르르 떨다가 단박에 안쪽에 박히는 성기를 견디지 못하고 사정했다.

“흐, 으으, 아!”

“하아, 하…….”

사정의 쾌감과 함께 안쪽에 울컥 들어차는 액체에 수호가 움찔 몸을 떨었다. 주오는 남은 정액마저 다 뽑아내겠다는 듯 두어 번 성기를 쳐올렸다.

남은 정액마저 수호의 안쪽에 뱉어낸 주오가 천천히 성기를 빼냈다. 안쪽을 흥건하게 적신 정액이 성기와 함께 빠져나와 수호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수호는 그 간지러운 감각에도 그저 얼굴을 푹 숙이고 숨을 할딱였다.

주오는 주저앉는 수호를 감싸 안으며 미안하다는 듯 수호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많이 불편했지. 미안해, 수호야.”

따뜻한 물이 쏟아지고 있는 샤워기로 수호의 허벅지에 흐르는 정액을 닦으며 주오가 중얼거렸다.

“불편은 했는데, 그래도 좋았어요.”

“나도, 너무 좋았어. 수호가 너무 좋아.”

주오는 말처럼 수호가 너무 좋다는 듯 수호를 꽉 끌어안았다. 수호는 얼굴만 빼꼼 내밀어 주오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그리고 괜히 주오의 어깨를 깨물었다.

얕은 통증에 주오가 움찔하고는 수호를 바라봤다. 눈이 동그랗게 변한 주오를 보며 수호가 웃었다.

“사랑해요.”

주오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부끄럽다는 듯 수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주오를 수호가 끌어안았다.

하라는 샤워는 안 하고 둘은 그렇게 욕실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한참을 있었다. 그 뒤로도 한바탕 일을 더 치른 뒤에야 목적이었던 샤워를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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