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연습을 하고, 분석을 하고, 그리고 주오와 밤마다 일을 치르다 보니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어느덧 대망의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 찾아왔다. 어느 시즌보다, 어느 경기보다 뜨거운 열기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오오, 저건 바르다인가요?]
[아하하하하, 코스프레하시는 분들이 정말 준비를 많이 하셨네요.]
챔피언십 결승전의 오랜 전통이었다. 각국의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이 체이스의 수많은 챔피언의 복장을 입고 퍼레이드를 벌였다.
어떻게 저렇게 똑같을까 싶을 정도로 기괴한 괴물의 모양을 그대로 본떠서 만든 복장과 화장에 사람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무대 뒤에서 퍼레이드를 지켜보고 있는 선수들도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코스프레 팀을 지켜봤다.
“진짜 저건 어떻게 하는 거야?”
막대기처럼 얇은 다리 모형에 안정적으로 올라타 퍼레이드를 하는 사람을 보며 선우가 놀라 입을 벌렸다. 그 옆에서 더 놀란 듯 입을 활짝 벌린 우찬이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진짜 이럴 때마다 체이스 팬들 정말 많다는 게 느껴지지 않아?”
체이스는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게임이었다. 그렇기에 몇 년 동안 체이스의 프로 경기도 이렇게 월드급으로 큰 대회가 유지되고 있었다.
감탄하면서 퍼레이드를 보고 있는 선수들 뒤로 수호와 주오는 또 어김없이 손가락 씨름을 핑계로 애정 행각에 빠져 있었다.
수호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꾹 누르는 주오에게서 빠져나가려 손을 꼼지락거렸다. 바둥거리며 빠져나가는 손가락이 귀엽다는 듯 주오가 실실 웃었다. 수호는 그런 주오를 뚱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왜 이렇게 힘이 세요.”
“이런 몸으로 약해도 안 어울리잖아.”
백구십이 넘는 거대한 신장에 힘이 약하면 안 어울리긴 했다. 하지만 이미 주오는 그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귀여움. 수호는 자신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때마다 사랑스럽다는 듯 방실 웃는 주오를 꼼꼼히 눈에 담았다.
“귀여워요.”
“응? 뭐가?”
“형, 귀엽다고요.”
“앗, 수호가 더 귀여운데……. 수호는 사랑스럽고, 멋있고, 완벽해. 최고야, 정말.”
주오는 온갖 좋은 칭찬을 가져다 붙였다. 환하게 웃는 주오를 보며 자연스럽게 수호의 입가에도 미소 그려졌다.
“저기, 수호 형.”
“……?”
우찬이 보면 쌍욕을 할 만큼 주오와 꽁냥거리고 있던 수호는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뻘쭘한 얼굴을 한 OZ, 신태민이 있었다. 수호는 예상치 못한 손님에 눈을 깜빡였다.
수호가 말없이 보고 있으려니 태민이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전에 죄송했습니다.”
뜬금없는 사과에 수호는 다시 한번 눈을 깜빡였다. 도통 그 사과의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태민은 감도 못 잡고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수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때 제가 형한테 기분 나쁘게 말을 했잖아요. 그거 사과드리려고 왔어요.”
전과는 다르게 태민의 음성이 조심스러웠다. 수호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주오를 힐끔 바라봤다. 주오는 맞잡고 있던 수호의 손을 놓고는 생긋 웃었다. 마음 가는 대로 하라는 듯한 미소였다.
“괜찮아요. 신경 안 써요.”
“제가 형 팬인 건 아시죠? 그건 진짜예요. 저 수호 형 너무 좋아해서 프로 됐어요.”
“아, 감사합니다.”
수호가 태민에게 해줄 수 있는 반응은 이것뿐이었다. 태민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수호를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올해 처음으로 형이랑 같은 리그에서 뛸 수 있다고 해서 되게 기뻤어요. 애초에 제가 CPL에 있었을 때는 대진표도 운도 안 좋았고 해서 형이랑 게임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
태민의 말에 수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얘기를 굳이 왜 하는 걸까. 태민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하지 못한 수호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정말 어색했다.
“그래서 형 영상만 보면서 형이랑 언제 게임해 볼 수 있을까 진짜 설레면서 한국에 왔어요. 형한테 이기는 게 제 목표거든요. 그래서 스프링 때 처음으로 형이랑 경기했을 때 너무 좋았어요. 진짜 SUHO랑 같은 리그에서 뛰고 있다는 게 실감 나서.”
너무 좋았다고 말하는 태민의 말은 진심인 듯 수호를 보는 태민이 눈이 반짝거렸다. 하지만 이후에 이어질 말 때문인지 그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서머에서 갑자기 형이, 슬럼프가 온 건지 예전 같지 않아서…… 그래서 괜히 화가 났어요. 제가 좋아했던 SUHO라는 선수가 없어진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복잡했어요. 제 문제였는데 형한테 화풀이해서 죄송해요.”
좋아했고, 동경했고, 꿈꿔왔던 사람이 쉽게 자신에게 무너지는 걸 보는 게 싫었다고 태민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고 형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말하는 태민의 시선에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어 수호는 당황스러웠다.
팬이라서 당신을 이기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수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주오를 바라봤다.
하지만 주오는 수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웃음을 거둔 얼굴로 태민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기분이 상한 것 같은 주오로 인해 수호는 더욱 당황했다.
“……괜찮아요.”
“……제가 정말 좋아하니까 형한테 이겼다는 게 좋으면서도, 형이 그렇게 쉽게 이기니까 너무 허무했어요. 그래서…… 솔직한 말로 형이 우스워 보였어요. 그런 형을 동경했다는 저 자신도 웃겼고.”
오래 좋아했던 선수가 사실은 제 동경만큼 대단하지 않음을 느꼈을 때 오는 실망감을 떠올렸는지 태민이 눈가를 찡그렸다.
수호는 태민에게 무어라 말하는 대신 주오에게 시선을 던졌다.
주오는 여전히 웃음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호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지 주오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수호가 주오에게 말을 꺼내기도 전에 태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형이 지금까지 한 플레이들이 확신도 없이 무작정 했던 플레이들이지 않았나 싶었어요……. 운이 좋아서 잘 풀렸었던가 싶기도 했고. 정말 죄송해요. 제가 혼자 기분 상한 건데 형한테 화풀이해서.”
태민이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수호는 자신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이렇게 타인이 화가 날 정도로 그에게 자신이 깊은 의미가 될 수 있나 싶었다. 당황스럽긴 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한다는 게 느껴서 수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런데 정말 괜찮으니까, 사과 안 해도 돼요.”
“……기분은 풀리셨어요?”
“애초에 기분 안 나빴어요.”
“그래도 죄송합니다.”
또 고개를 숙이는 태민을 보며 수호는 곤란함을 느꼈다. 어쩌면 좋을지 몰라 입을 꾹 다물자 그동안 말없이 있던 주오가 입을 열었다.
“괜찮다고 하니까 이만 가봐요. 주이도 결승 준비해야 할 텐데.”
“아…… 네. 그러면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저번에도 그렇고 웃음기 없는 주오가 어려운 듯 태민이 더는 말을 꺼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 선 태민이 뒤를 돌아봤다.
“수호 형, 이번 대회에서는 형이 다시 폼 회복한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저 이번에는 정말로 SUHO한테 이길 거예요.”
영문 모를 말을 내뱉은 태민은 다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는 태민을 보며 수호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무엇보다 태민이 나타난 후부터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주오가 제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둘이 자신도 모르게 싸움이라도 한 건가.
“형, 갑자기 기분이 왜 나빠졌어요?”
수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주오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당장에라도 있는 얼굴이었지만, 말을 꾹 참는 모양새였다. 수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둘이 싸웠어요?”
조심스럽게 묻자 갑자기 주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방금 전까지는 기분이 나쁜 것 같았는데 지금은 우울해하는 것 같았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오의 상태에 수호는 놀라 눈을 깜빡이며 주오의 팔을 붙잡았다.
“형?”
놀란 수호의 음성에는 많은 의문이 묻어났다. 왜 그러는 거냐고 묻는 말에 주오가 부끄러운 듯 두 손을 얼굴로 감싸 쥐고는 작게 웅얼거렸다.
“……질투 나.”
“……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묻는 수호의 말간 눈을 보며 주오가 다시 웅얼거렸다.
“쟤가 수호 진짜 좋아하나 봐. 수호가 막 오즈한테 흔들리면 어떡하지?”
오들오들 떨리는 주오의 눈이 지금 자신은 불안해하고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수호는 쌩뚱맞은 주오의 말에 잠시 멍해져 눈을 깜빡였다. 흔들린다는 게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맞을까.
“그럴 일 없어요.”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단호하게 말하는 수호를 시무룩한 주오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손을 잡았다.
“수호도, 원래 나 안 좋아했다가 내가 너무 들이대서 좋아지게 된 거니까……. 오즈가 그러면 흔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수호는 주오의 손을 마주 잡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질투로 제가 기분 나빠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웅얼거리는 주오가 정말 사랑스러웠다.
“전에도 말했잖아요. 전 한번 좋은 건 계속 좋다고. 그러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
“……정말이지?”
“정말이에요.”
“평생을 바쳐서 열심히 할게. 그러니까 계속 나만 좋아해 줘.”
간절한 주오의 고백에 수호는 가슴이 설렜다. 수호는 그런 자신의 마음이 주오에게 전해지길 바라면서 마주 잡은 주오의 손끝에 짧게 입을 맞췄다.
“네. 꼭 그럴게요.”
담백하면서 올곧은 진심이 담긴 수호의 대답에 불안해하던 주오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수호가 주오의 손에 걸린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약속의 증표로 우승컵 가져다 드릴게요. 그러니까 앞으로 불안해하지 마세요.”
수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제야 주오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주오가 대답을 건네왔다.
“그러면 나도 우승컵 선물로 줄게.”
수호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서로에게 선물할 우승컵이었지만, 지금 우승컵에 또 다른 의미가 생겨 버렸다. 절대로 포기 못 할 의미였다.
* * *
[자! 이제 본격적인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코스프레 팀이 빠져나가자 이영중 캐스터가 본격적인 월드 챔피언십의 결승전 시작을 알렸다.
[오늘 많은 분이 기대하셨을 것 같은데요. 작년, 재작년! 계속해서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맞붙는 팀이죠? 블루팀 주- 이!!!]
주이의 선수 입장과 함께 주이 응원석에서 함성이 쏟아졌다.
[그리고 우승컵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팀! 레드팀, 제- 라드!!!]
맞받아치듯 제라드의 응원석에서 찢어질 듯 거대한 함성이 울렸다. 열렬한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이영중 캐스터가 더욱 힘차게 소리쳤다.
[올해도 주이가 제라드를 이기고 우승컵을 차지할지?! 아니면 수호와 선우를 영입한 제라드가 주이를 밀어내고 왕좌를 차지할지, 함께 지켜보시죠! 그러면 월드 챔피언십 결승을 시--- 작하겠습니다!!]
양측 응원석에서 응원봉의 빛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제라드 선수들은 마지막 장비 세팅을 마치고 심호흡을 했다. 선우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긴장한 은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오늘 형이 바텀 캐리 각 제대로 잡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상대적으로 주이와 제라드의 전력은 비슷했다. 하지만 원딜의 실력을 따지면 은기가 주이의 원딜인 MAIL 정민영보다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실수하지 않도록 긴장하는 은기를 선우가 달랬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심호흡을 하는 은기를 보며 선우가 방긋 웃었다.
“자자, 일 년 동안 고생한 거 오늘 꼭 보답받자! 우찬이는 상대 탑이랑 성장 맞춰주고, 주오는 늘 하던 대로, 수호는 알지? 신예한테 맛 좀 보여줘야지.”
태민과의 일화를 들었던 진형이 제대로 혼내주라며 수호의 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기에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 찬 수호의 눈을 본 진형이 마음에 든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은기는 선우한테 많이 의지하고, 선우는 작년에도 MAIL이랑 호흡 맞춰봤으니까 성향 알지?”
“당연하죠. 은기는 제가 잘 케어하면서 열심히 키우겠습니다.”
장난스럽게 웃는 선우였지만, 선우가 얼마나 믿음직스러운지 알고 있는 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힘내자! 난 우리 팀이 더 강하다고 확신하니까 자신감 있게 하고!”
진형의 파이팅 넘치는 외침에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머와는 확연히 달랐다. 확실히 자신감에 찬 선수들의 눈이 반짝였다.
[두 해설분은 밴픽의 구도를 어떻게 보십니까?]
확정된 선수들의 챔피언을 보며 이영중 캐스터가 묻자 먼저 박동진 해설이 마이크를 잡았다.
[양 팀 다 자신에 찬 픽입니다. 칼과 칼의 대결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방어력보다는 공격력 좋은 픽들 위주라 그만큼 도전적인 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이런 구도면 한쪽이 밀리는 순간 쓸려 갈 수 있습니다. 다시 복구하기 힘들 만큼 데스를 하면 안 되는 픽이 많습니다. 특히나 양 미드 선수의 픽들이 그렇고요.]
공격력이 높을수록 그만큼 전투에서 강하지만, 단점이 있다면 어떠한 이득도 보지 못하면 그만큼 성장이 떨어져 장점인 공격적인 플레이가 제한된다. 그렇기에 성장이 멈추면 안 되고, 무조건 킬을 따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결승 첫 경기부터 이런 공격적인 픽이 나올지 몰랐는지 해설진들과 관객들의 눈이 기대감으로 초롱초롱 빛났다.
[정말이지 결승전답게 뜨겁게 시작하는 첫 세트입니다!!]
그리고 왜 그런 픽을 선택했는지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 선수들의 플레이는 정말로 공격적이었다. 하지만 양쪽 다 실수 없이 잘 회피했기에 팽팽한 상황만 나올 뿐 킬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런 정체된 상황 속에서 먼저 승전보를 울린 라인은 바텀 지역이었다.
“은기야, 쟤 6분대에 무조건 집으로 귀환 타거든? 이쪽으로 와봐.”
선우는 MAIL과 같은 라인에서 뛰어본 건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팀 자체로는 2년을 뛰었다. MAIL의 자잘한 습관 같은 건 파악한 지 오래였다. 본인이 인식하지 못했던 습관까지도 말이다.
귀환 전에 먼저 서포터를 보내고 병사를 한 라인 더 먹어 경험치를 더욱 뽑아내는 MAIL의 특성을 알고 있던 선우는 은기를 불렀다. 미리 시야를 체크해 놓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 포탑 옆에서 귀환하는 MAIL을 발견한 선우가 냅다 그쪽으로 몸을 들이박았다.
“은기야!”
선우의 외침에 은기도 생존기를 쓰면서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포탑의 딜은 강력했지만, 애초에 이런 플레이를 노려 유독 단단한 서포터를 선택한 선우는 포탑을 맞아가며 은기가 MAIL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
[DUYOU!! 4강전에서도 탑에서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주더니 오늘은 바텀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금 MAIL 선수는 정말 놀랐을 것 같은데요?! 분명 집으로 귀하는 듯 뒤로 빠졌던 DOYOU와 MOO가 수풀 속에서 튀어나올 거라고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아슬아슬하게 죽기 직전까지 포탑을 맞아준 선우가 뒤로 몸을 뺐다.
[아아아!! DOYOU 선수 살아 돌아가요!!]
[MAIL 선수의 마지막 평타가 거리 때문에 안 나간 것 같죠?! 진짜 어그로 핑퐁이 엄청납니다!]
챔피언마다 평타와 스킬 사거리가 정해져 있었다. 그러면 그 거리를 벗어나면 맞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선우는 포탑으로 인해 피가 깎일 자신을 노릴 걸 알고 초반에 MAIL에게 사거리를 내주다가 이내 자리를 떴다.
선우를 쫓아가려던 MAIL을 막아낸 은기가 빠르게 킬을 따내자 선우는 방실 웃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형, 너무 좋았어요.”
“그치? 너무 짜릿했지?”
하이파이브를 하려 손을 내민 은기에게 선우가 손을 맞췄다. 경쾌한 타격음이 기분 좋게 울렸다.
“굿, 둘이 호흡 좋았다.”
우찬이 굿굿, 을 외치며 자신에게 들어오는 기연의 스킬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우찬아, 개구리 먹고 올라갈 테니까 조금만 버텨. 쟤네 바텀 싸움에서 정글이 반응 없는 거 보면 탑 쪽에 있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응! 빨리 와, 레인 씨.”
고개를 끄덕인 우찬이 뒤로 물러나며 포탑을 부수려는 상대의 병사들을 정리했다. 가끔씩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앞 무빙을 하자 기연이 움찔거렸다.
“우찬아, 지금 들어가.”
주오가 탑을 향해 땅굴을 파고 들어가 기연의 뒤를 덮침과 동시에 앞에서는 우찬이 달려들었다. 도망가려는 기연에게 이동속도 제한을 걸며 마구 공격을 퍼붓는 순간 상대의 정글이 전투에 난입했다.
2:2 상황. 하지만 이미 기연의 피는 어느 정도 빠진 상태였다. 주오가 상대 기연을 마크했다.
“우찬아, 정글 마크해 줄래? 이쪽은 내가 맡을게!”
“오키!”
원거리 캐릭터인 주오가 근거리인 우찬보다 상대적으로 딜을 넣기 편했다. 그리고 상대 정글과 캐릭터 상성이 좋지 않았기에 주오와 우찬이 포커싱을 바꿨다.
우찬이 듬직한 몸으로 상대 정글을 막는 동안 주오가 승전보를 울렸다.
[제라드!! 이번에는 탑 쪽에서 승전보를 울립니다! 월드 챔피언십 들어오고 나서부터 경기력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주이를 상대로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연속적으로 제라드 쪽에서 좋은 소식이 터지자 이영중 캐스터가 외쳤다. 그리고 그 큰 음성이 묻힐 만큼 응원석에서 거대한 환호가 터졌다. 제라드의 오랜 팬들의 바람이 절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월드 챔피언십 우승을 바라는 팬들의 마음이 환호로 터져 나왔다.
칼과 칼의 싸움은 한쪽이 한번 승리를 하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 지는 순간 패배였다. 방패를 들지 않고 싸웠기에 그만큼 리스크가 컸다.
탑과 바텀에서 터진 제라드의 승리에 주이는 곤란해졌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더 이상 손해를 보지 않고 후반까지 끌고 가면서 성장을 하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것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어딘가에서 잘 큰 제라드의 선수를 잘라먹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선봉장에 선 건 OZ였다. OZ는 기동성이 좋은 캐릭터답게 빠르게 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성장세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어 살짝 방심한 우찬을 그대로 찔렀다.
[OZ!!! OZ가 주이에게 버틸 시간을 벌어주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데 언제 탑까지 올라갔죠?!]
수호도 한 번 귀환 타이밍을 잡았을 때였기에 미드가 비어 있었다. OZ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집에 귀환했다가 돌아오자마자 죽게 된 우찬이 울상을 지었다.
“아, 방심했네. 미안.”
같은 팀이 자리를 비웠으면 그만큼 상대의 발이 풀린 격이라 더 조심했어야 했다. 미드 라인이었는데 상대편에게 킬까지 내주게 되어 우찬이 미안한 듯 수호를 힐끔 바라봤다.
“레인 씨가 미드 좀 봐줘야 할 것 같은데. OZ, 쟤 템 사 올 것 같은데.”
혹시나 미드에서 사고가 터질까 봐 우찬이 주오에게 말하자 말이 없던 수호가 입을 열었다.
“오실 필요 없어요. 차라리 탑이나 바텀 쪽 다시 찔러주세요. 여긴 제가 커버할게요.”
“괜찮겠어?”
걱정스러운 우찬의 물음에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짧은 대답 한 음절 속에서 수호의 자신감이 드러났다. 주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 한 점 묻어나지 않는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수호, 멋있다. 그러면 나는 다른 쪽으로 갈게.”
“네.”
수호는 자신보다 하나 더 많은 아이템을 사 온 OZ와 대치했다. 아이템 때문인지 OZ는 전보다 공격적으로 수호를 밀어붙였다. 하지만 수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차분히 OZ의 공격을 흘리면서 받아쳤다.
[SUHO 선수! OZ 선수의 집요한 공격을 잘 받아내고 있습니다!]
받아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수호는 차분히 OZ가 선을 넘기를, 방심을 하기를 기다렸다.
체력의 반만 남은 채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드는 폭딜이 나오는 라인이었다. 반 정도 남은 체력의 상대는 잘만 노리면 처리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아이템의 효과로 수호보다 딜이 더 잘 나오는 OZ가 먼저 그 각을 노렸다.
[OZ 선수, 안쪽으로 파고듭니다!]
“수호야! 레인 형, 미드 백업 가줘야 할 거 같은데?!”
그와 동시에 우찬이 핑을 찍으며 소리쳤다. 그리고 수호는 날카롭게 들어온 OZ의 스킬을 피하며 공격했다.
체이스의 스킬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건 하나, 하나의 스킬이 전투에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이미 하나를 날린 OZ와 모든 스킬을 가진 수호는 엇비슷하다는 거였다.
수호는 차분히 또 다른 OZ의 공격을 피했다. OZ는 가까운 거리에서 요리조리 공격을 피하는 수호 때문에 당황했는지 뒤로 빠지려는 모션을 취했다.
하지만 이제 완벽하게 우위에 선 수호는 그를 그대로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속박 스킬로 OZ를 묶어내고 남은 공격을 퍼부었다.
[꺄아아아악! SUHO!!! 솔킬!!! OZ 선수의 솔킬을 따냅니다!]
수호의 솔킬이 터지자 관객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선수석에서도 휘파람 소리가 터졌다. 수호는 옆에서 불쑥 나타난 손에 고개를 돌렸다. 주오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수호는 정말 멋있다.”
“알아요.”
수호는 옅게 웃으며 주오와 가벼운 하이파이브를 했다. 긴장감과 부담감, 그런 것들이 없는 평소의 수호는 언제나 정상에 올랐다. 아무리 실력이 대단한 신예라고 하지만 OZ는 제 컨디션을 찾은 수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전 라인에서 솔킬이 터져 나오면서 게임의 흐름이 급격하게 제라드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주이도 고군분투하며 OZ와 MAIL이 중간마다 제라드의 선수를 처리했다. 그럼에도 그보다 수호가 상대 선수를 잡아내는 수가 많았다는 게 문제였다.
1세트는 주이가 이길 거라는, 혹은 접전이 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제라드의 깔끔한 승리였다.
2세트도 마찬가지였다. 수호는 정말 날개를 단 사람처럼, 슬럼프를 겪었던 시간 모두가 동시에 꾼 꿈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날아다녔다.
2세트는 게임을 장악한 수호의 플레이로 인해 끝이 났다.
[아아악!! SUHO, SUHO!!! 영광의 챔피언! 세계 월드 챔피언십 우승 타이틀 최다 보유자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격에 찬 유기현 해설이 울부짖자 박동진 해설이 마이크를 이어받았다.
[아니, 아니이!!! 분명 결승 시작 전까지만 해도 OZ와 SUHO 선수의 우위를 정하기 힘들 거라는 분석이 대다수였는데, SUHO 선수가 제대로 그 판을 엎어버립니다!!]
[역시 SUHO!! 본인이 세체미라는 걸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왕의 귀환이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수호를 OZ는 따라잡지 못했다. 수호가 가는 곳마다 킬이 터져 나왔다. 미드의 주도권이 완전히 수호에게 있었다. 발이 느린 것도 문제였지만, 같이 미드에 서 있을 때도 OZ는 수호에게 어김없이 솔로킬을 내줬다. OZ는 수호에게 존재하지 않는 선수나 다름없었다.
“이야, 2:0이라니. 주이에 있을 때는 정말 곤란한 상대였는데 같은 팀에 있으니까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마지막 1승을 남겨둔 상황. 진형은 조금만 더 힘내보자고 말하며 수호의 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1승만 더한다면 제라드 입장에서는 그간 4년 동안 되찾지 못했던 우승컵을 되찾게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3세트는 주이의 승리로 돌아갔다.
수호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주이는 미드를 버렸다. 그리고 다른 라인을 초반부터 박살 냈다. 아무리 수호가 성장을 잘했다고 해도 5명을 이기는 건 쉽지 않았다.
“애들아, 괜찮아. 4세트에서 승리해서 우승하자! 이번 한 게임에 다 털어버려.”
진형이 마지막에 짤려 의기소침해진 우찬의 머리를 격하게 헝클었다. 우찬은 난장판이 된 머리를 정리하며 입을 삐죽였다. 우찬에게 기운을 주겠다면 난리를 부리는 진형을 보던 수호의 시선이 주오에게 옮겨 갔다.
마지막 한 경기를 남겨두고도 주오는 여느 때와 같이 차분했다. 1승만 더 거두면. 그런 생각이 들면서 초조해질 만한데 주오는 그러지 않았다.
노련미가 엿보이는 그의 침착한 눈을 보고 있자 어느새 주오와 시선이 마주쳤다.
“수호, 긴장돼?”
오히려 수호가 주오를 보며 그러지 않을까 했던 생각이었다. 수호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아니요. 형은 긴장돼요?”
주오도 수호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긴장보다는 아쉬운 느낌이랄까.”
자리에 앉아 선수석에서 보이는 경기장을 주오의 다갈색 눈이 천천히 훑었다. 꼭 후에도 기억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담아 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기든 지든 주오는 이번이 마지막 경기였다. 은퇴하면 다시는 앉을 수 없는 자리이기도 했다.
“쉬려고 은퇴하는 건데 막상 떠나려니까 아쉽네.”
슬쩍 웃는 주오의 얼굴이 조금 침울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주오의 모습을 못 봤을 리 없는 제라드의 선수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윽고 우찬이 파이팅을 외쳤다.
“레인 씨 은퇴 길에 꼭 꽃가루를 뿌려주겠어!”
“하하, 그래. 마지막 세트 열심히 하자.”
“그런데 그렇게 아쉬우면 그냥 1년만 더 하면 안 돼요?”
이미 수호가 수십 번은 물었던 질문을 은기가 다시 물었다. 그리고 주오는 그때와 같은 답을 내려놓았다.
“아니, 이번이 끝이야. 아쉽고, 박수 쳐줄 때 떠나야지. 그러니까 꼭 우승하자. 그래야 박수받지.”
가볍게 떨어지는 주오의 말에 은기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지만 주오를 이길 자신이 없었는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우리 꼭 우승해요.”
주오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의 다갈색 눈에는 우승을 향한 열망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건 수호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