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오늘의 마지막 경기의 선수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블루팀 제- 라드!!]
사람들의 호응을 유도하는 이영중 캐스터의 우렁찬 음성이 거대한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캐스터에게 화답하듯 관객들이 경기장 지붕이 무너질 듯이 거대한 환호를 터뜨렸다.
결승전 마지막 티켓이 걸린 4강전의 시작이었다.
세팅된 자리에 앉자 빠르게 밴픽이 시작됐다.
체스는 돌발적인 전략을 써먹는 팀은 아니었다. 그저 늘 하던 플레이의 실수를 줄이고, 더욱 단단할 수 있도록 반복하고 연습하는 팀이었다.
예상대로 체스 선수들이 선택한 캐릭터들은 현재 메타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보편적으로 쓰이는 챔피언이었다. 그건 제라드도 마찬가지였다.
챔피언적으로는 비슷하나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체스는 탑인 지한을 필두로 세우는 플레이 위주였고, 제라드는 전 라인이 캐리를 돌아가면서 하는 전제적으로 완벽한 오각형을 이루는 플레이 위주였다.
탑 기량으로만 따지면 우찬보다는 지한이 더 뛰어났다. 하지만 언제나 말했든 체이스는 팀 게임이었기에 한 선수만 잘한다고 이길 수 없었다. 다섯이 균형적으로 안정감 있는 제라드에게 체스가 밀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연습한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체스는 그것을 알면서도 변칙 플레이가 아닌 평소의 플레이를 선택했다.
[오오오! PEOPLE!! 초반부터 강하게 나가는데요?!]
게임 시작부터 치고 나가는 지한의 플레이에 박동진 해설이 감탄한 듯 환호성을 질러댔다.
“아, 진짜 얘 너무 싫어어어.”
먼저 캐릭터를 골랐던 우찬은 자신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챔피언을 선택한 지한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미친놈처럼 들이박는 걸 좋아하는 우찬이 아무것도 못 하고 오히려 주도권을 내주면서 병사를 받아먹고 있는 상황이 너무나 지옥 같은지 우는소리를 냈다.
“바텀 쪽에서 먼저 승기 잡으면 너도 발 풀리니까 조금만 참아.”
“진짜 너무 힘든데 형이 한 번 찔러주면 안 돼?”
주오가 탑에 한 번 들러주면 우찬이 한결 편해지긴 하겠지만, 효율이 좋지 않았다. 차라리 바텀을 빨리 밀어내고 우찬을 그쪽으로 돌려서 안정적으로 키우는 편이 더욱 이점이 많았다.
우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넨 주오는 그대로 바텀으로 향했다. 탑과는 반대로 바텀은 팽팽하면서 조금 우위를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RAIN 선수!!! 바텀 갱을 통해서 이득을 보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힘들어하는 BONG 선수를 도와주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왜 바텀으로 가는 거죠?!]
이영중 캐스터의 물음에 유기현 해설이 입을 열었다.
[탑은 지금 밀리고 있는 상황이라서 RAIN 선수가 갱을 가서 킬을 낸다고 해도 한순간만 편해질 뿐입니다. 그에 비해 바텀은 일단 두 명의 선수가 있는 라인이기에 킬을 내면 더욱 많은 골드를 얻을 수 있죠. 그러면서 우위를 잡고 있는 라인을 밀어주는 편이 한 번에 라인을 박살 낼 수 있습니다!!!]
[오오!!! 역시 노장은 판단력이 다른가 봅니다!!]
한순간 은신이 가능한 주오의 캐릭터가 은신을 통해 상대에게 접근했다. 그때 선우가 도주기를 쓰면서 단숨에 상대에게 진입했다.
[DOYOU!!! 방금 전광석화로 들어갔어요!!!]
[제라드!!! 합이 좋은데요. MOO선수도 DOYOU가 들어가는 순간 바로 진입기로 들어갑니다!]
선우가 공중으로 띄워 올린 체스 바텀을 향해 주오와 은기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둘 다 잡는 것에는 실패했다.
[아아! 서포터는 잡는 데 실패했지만, 원딜을 잡아냅니다!!]
[서포터인 HOOKI 선수 많이 당황한 듯합니다! 부서져 가는 포탑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데요?!]
바텀에 모든 사람의 신경이 쏠려 있는 사이 탑 쪽에서 사고가 터졌다. 어느새 우찬이 지한에게 솔킬을 당하고 있었다. 바텀 상황에 침울해하고 있던 체스의 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피플 스펠 다 빠졌어.”
“알겠어.”
우찬은 지한의 스킬 상황을 말해주며 침착하게 주오를 콜했다. 이제 바텀에 상대 팀이 갱을 온다 해도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기에 주오는 탑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제라드의 응원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서로 치고받는 난타전이었다.
“얘네 진짜 이 갈고 나왔나 본데요?”
체스와의 경기에서 이렇게 킬이 많이 터져 나온 건 처음이었다. 쉴 새 없이 모든 라인에서 킬과 데스가 터져 나왔다. 정신없는 상황에 은기가 눈가를 찌푸렸다.
“그만큼 간절한 거겠지.”
늘 상위 주이와 제라드에게 밀려 결승전 한 번을 밟아보지 못한 체스였다. 어떻게 보면 결승에 대한 열망은 어느 팀보다 강할지 몰랐다.
거칠게 저항하는 체스로 인해 게임이 점점 길어졌다. 계속해서 치고받는 전투로 인해 킬 스코어는 어느새 월드 챔피언십 경기 중 최다수를 찍고 있었다.
[오늘 두 팀 경기력이 화끈한데요! 서로 스무 킬씩은 주고받고 있습니다!]
[보통 프로 경기에서 저런 스코어는 보기 힘든데, 그만큼 팽팽하다는 거겠죠?]
[아아! 그러는 중에 오브젝트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데요?!]
게임 극 후반. 40분을 넘긴 게임이 점점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양쪽 다 외각 포탑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 다만 서로 내각 방어가 팽팽해 승패가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번 배론 싸움이 마지막 한타가 될 것 같습니다. 오브젝트 버프로 인해 공성력이 강해지니 상대의 방어도 무너뜨릴 수 있겠네요.]
[먼저 배론 둥지에 자리를 잡은 건 체스입니다!]
오브젝트 싸움은 자리 선점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제라드는 우위를 빼앗겼음에도 침착하게 상대 선수들을 둥지 안쪽으로 몰아갔다.
[누가 먼저 배론을 칠지가 관건입니다. 이거 잘못하면 양 팀 다 쓸리는 수가 있어요!]
둥지 안과 밖으로 팽팽하게 긴장감을 유지하던 걸 먼저 깬 쪽은 제라드였다.
“저 돌아 들어갈게요. 둥지 안쪽이면 한 명은 무조건 따고 나올 수 있어요.”
“원딜 물어라. 무조건 원딜이야!”
수호의 표적이 원딜인 걸 알면서도 우찬이 잊지 말라며 소리를 지르자 은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조용히 좀 말해. 귀 아프다.”
“수호야, 무조건 살아서 돌아와야 해. 네가 원딜만 따고 나오면 나머진 우리가 해결할게. 은기는 무리해도 좋으니까 딜 넣어주고 우찬이는 밀고 들어가. 은기는 나랑 선우가 커버할게.”
“조은기 죽으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부탁드려요.”
말이 끝나자마자 수호는 열려 있는 둥지의 반대편으로 돌았다. 시야가 없는 틈 사이로 요리조리 몸을 피하며 수호가 잠복에 성공하자 주오가 입을 열었다.
“수호야, 지금 들어가.”
[아아아아악!!! PHONE!!! 터졌어요!!]
[아니, 여기서 저렇게 터지면 안 되는데요!! 체스 진형이 무너집니다!]
주오의 말이 끝나자마자 체스 선수들이 뭉쳐 있는 둥지 안으로 들어간 수호가 벽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체스의 원딜, PHONE를 처치하자 제라드의 선수들이 둥지 안으로 단숨에 밀고 들어왔다.
게임 후반에서 가장 중요한 딜러인 원딜이 한순간에 폭사당하자 체스는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밀려온 제라드에게 쓸려 나갔다.
[아니, 아니!! 제일 안전한 포지션을 잡고 있던 PHONE 입장에서는 진짜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겠는데요?!]
팽팽하던 경기가 한순간에 제라드 쪽으로 기울었다. 기울어지다 못해 승리가 제라드를 향해 쓰러진 거나 다름없었다. 마이크가 터져 나갈 정도로 소리를 질러대는 해설진들과 함께 관객들도 함성을 내질렀다.
제라드는 그 소란 속에서도 상대를 다 잡아내고 승리의 전리품으로 배론을 챙겼다. 공성에 좋은 버프를 몸에 두른 제라드는 상대가 모두 죽고 빈집이 되어버린 체스의 진형으로 달렸다.
후반이 될수록 살아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게임의 특성상 체스의 선수 모두가 전사한 순간 게임은 끝이 난 거나 다름없었다.
제라드는 단숨에 체스의 보석을 깨뜨리며 4강전 첫 세트 승리를 알렸다.
[제라드!! GG!!!]
제라드 응원석이 환호로 가득 찼다.
하지만 잠시간 휴식 후, 다시 시작된 두 번째 세트에서는 체스의 응원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PEOPLE!!! 이건 뭔가요?!]
[아아아!! 정말이지 한 마리의 야생마 그 자체가 된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세트에서 지한은 캐리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들판을 달리는 야생마처럼 전 맵을 지배했다. 손해를 만회하기 시간이 부족할 만큼 지한은 탑을 쭉쭉 밀어댔다. 균형이 무너져 발이 풀린 지한이 정글처럼 모든 라인을 헤집고 다니는 통에 제라드 선수들의 성장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 한두 번 수호가 지한을 자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복구될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40분이 넘게 진행됐던 첫 세트와 다르게 두 번째 세트는 30분이 되기도 전에 체스의 승리로 끝이 났다.
두 번째 세트가 끝나고 진형이 심각한 얼굴로 선수석으로 들어왔다. 객관적으로 우찬이 지한을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 진중한 얼굴로 곰곰이 노트를 보고 있던 진형이 고개를 들었다.
진형의 시선이 향한 곳은 선우였다.
“다음 세트 탑 라인 선우가 가라.”
“……저 서포터로 포변했는데요?”
“알아. 그런데 네가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우찬이가 서포터로 내려가고. 알겠지?”
지한에게 격하게 깨진 우찬은 패배한 채 라인을 변경해야 한다는 사실이 분한 듯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우찬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서포터로 뛰지만, 그 전까지 선우가 탑 라인을 지배했던 선수라는 것을.
말없이 입을 삐죽이지만, 그게 수락의 의미라는 것을 안 선우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진형과 우찬을 번갈아 봤다.
“진짜 제가 가요? 탑 연습 안 한 지도 오래됐는데.”
“솔랭에서 많이 가잖아. 그때처럼만 해.”
“아니, 그래도 솔랭이랑 대회는 다르잖아요. 그리고 저는 탑 경력이라도 있지 우찬이는 서폿 솔랭에서만 잠깐 해봤지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우찬이가 서폿을 해요.”
말이 안 된다며 고개를 젓는 선우에게 진형의 단호한 시선이 박혔다.
“지금 서폿보다 탑을 막는 게 우선이야. 솔랭이라고는 해도 우찬이도 서포터 해봤고, 그리고 바텀은 수비적으로 플레이할 거니까 우찬이한테 가는 부담도 적어. 그러니까 선우, 네가 탑 가라.”
물러날 기색이 없는 진형의 굳건한 시선에 선우가 루퍼 코치를 바라봤다. 빨리 감독님 좀 말려보라는 선우의 시선에 루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우찬이나 선우 너네가 당황할 만한 거 아는데, 내가 생각해도 그게 베스트야.”
“하아, 진짜 져도 저는 몰라요.”
지도자들의 단호하고 강력한 시선에 선우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 탑 뜨기 전까지 피플 썰고 다녔잖아요. 잘할 거예요.”
그런 모습을 수도 없이 봤던 수호가 담백하게 말을 내뱉자 선우의 날 선 시선이 수호에게 향했다. 수호는 불퉁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선우를 멀뚱히 바라봤다.
“부탁한다. 지한이를 막긴 해야 해. 그래야 다른 라인을 키우니까. 네가 지한이만 막아주면 내가 바텀 개입해서 애들 빨리 키워둘게.”
부탁한다는 듯 선우를 향해 살며시 웃는 주오를 보자 선우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의 긍정에 굳어 있던 진형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면 다음 세트도 힘내라. 우찬이랑 은기는 주오가 백업 올 때까지 사리면서 플레이하고. 성장 차이 심각하게만 안 나면 되니까 그 부분 신경 써줘.”
“그러면 저 챔피언은 어떻게 해요? 서포터 챔피언 숙련도도 딸려서 애매한데.”
“그건 아까 너네 경기할 동안 루퍼랑 얘기해서 정했으니까 걱정 마라. 너한테 정통 서포터 챔피언 시킬 생각 없어. 네가 했던 것 중에 속박기 있고, 원딜 지켜줄 수 있는 바르다로 갈 거니까. 늘 하던 대로만 해. 그렇다고 너무 들이박지 말고.”
“……바르다요?”
탑에서 나와도 놀라운 챔피언을 이제는 서포터로 쓰라는 진형의 말에 우찬과 은기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진형은 걱정 말라며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렸다.
“파트너 계약으로 은기 방어력 좀 올려주고, 몸으로 탱킹하면서 주오가 찔러줄 때 들이박아. 그거면 충분하니까. 그러면 부탁한다.”
진형의 말에 머릿속에서 시나리오를 굴리는 듯 우찬의 시선이 요리조리 돌았다. 이윽고 시나리오가 끝났는지 불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형이 말한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은 얼굴이었다.
“……해보겠는데 어쨌거나 정통 서포터보다 원딜 지키는 능력이 부족한 건 이해해 주셔야 돼요. 그리고 은기 너도 이번엔 자력으로 잘 살아남아야 할 듯.”
이미 바르다라는 챔피언에서 서포터에 대한 기대가 줄었는지 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형은 불퉁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우찬과 은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나머지 픽들도 조합 짜놨으니까 거기에 맞춰서 간다.”
“네.”
진형과 루퍼가 짜 온 조합은 선우가 탑 라인에 섰을 때 가장 많이 플레이하고, 그만큼 선우의 성향과 잘 맞는 챔피언을 선두로 한 것이었다. 생소한 조합이지만 나름대로 밸런스가 잘 잡혀 있었다.
그렇게 세 번째 게임이 시작됐다.
* * *
[오오오오!!! DOYOU 선수가 탑을 가는데요?! 제라드 이건 대체 무슨 전략이죠?!]
게임이 시작되고 은기와 함께 바텀이 아닌 탑으로 홀로 떠나는 선우를 보며 이영중 캐스터가 놀라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건 다른 해설자들도 똑같았다.
[BONG 선수가 PEOPLE 선수에게 밀려서 DOYOU 선수가 대신 올라가는 것 같은데요?! DOYOU 선수가 한동안 서포터로 섰다고는 하나 그 전에는 탑에서 정상을 찍었던 선수였기에 그를 믿어보겠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이야, 탑 솔러 DOYOU 선수! 이게 얼마 만에 보는 모습이죠?! 가슴이 설레는데요???]
[그리고 서포터로 나온 바르다!!! 이것 또 궁금하네요. BONG 선수 서포터 챔피언 숙련도 문제로 이런 픽이 나온 것 같은데, 과연 바르다가 바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됩니다!!]
평소보다 한 톤 높은 해설자들의 흥분 어린 소리와 함께 선우도 오랜만에 선 탑 라인에 도취된 듯 점점 텐션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게 맞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선우는 아주 날아다녔다.
“그쪽으로 가도 죽는 건 똑같은데.”
오랜만에 느끼는 탑 라인의 맛에 심각하게 취한 선우가 활짝 웃으며 도망가는 지한을 쫓아갔다. 게임 전과 심각하게 달라진 분위기에 옆에 앉아 있던 은기가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선우를 힐끔거리다 수호를 바라봤다. 설명을 바라는 눈이었다.
“원래 저래.”
“……진짜?”
평소에는 텐션이 높지만 게임할 때는 차분한 선우였다. 선우가 게임에서 이렇게 흥분해 텐션이 우찬만큼이나 올라가는 걸 처음 본 은기는 여전히 신기하다는 눈이었다.
“선우야, 탑 안 찔러줘도 되지?”
차분한 주오의 물음에 선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지 마, 오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탑은 둘만의 싸움이라고 주오의 갱을 단호하게 거절한 선우가 수풀 속에 숨어 있던 지한을 찾아냈다.
탑에서만 솔로킬이 두 번이나 터져 나왔다.
[DOYOU!!!! 오랜만에 탑 솔러로 서는 것 맞나요?! 왜 더 잘하는 것 같죠?!]
[전 세트에서 야생마 같던 PEOPLE 선수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2세트가 지한의 판이었다면, 3세트는 선우의 판이었다. 체스가 했던 방식 그대로 탑의 균형을 무너뜨린 선우가 마구 탑으로 달려 나갔다. 우직하게 탑을 파고 들어가며 백업을 오는 상대 선수들마저 묵직한 도끼로 무참히 찍어버렸다.
“저 형은 포변을 왜 한 거야?”
탑 솔러로서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여전히 잘하는 선우가 대단한지 우찬의 음성에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선우는 어깨를 으쓱하곤 본인이 맡은 일을 수행했다. 원딜을 보호하면서 들어오는 상태를 암살하는 일이었다.
애초에 선우에게 시선이 쏠려 바텀을 밀고 들어가는 수호와 은기, 우찬은 수월히 적진에 진입했다. 처음에는 우찬도 서포터 플레이에 버벅댔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주오가 갱을 찌르며 우찬을 이끌었다.
“우찬아, 지금 궁 써.”
“김우찬, 그냥 중앙에 들이박아!”
조심스럽던 우찬의 플레이도 점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래그래! 정중앙에 들이박는다?!”
우찬은 탑에서 하던 것처럼 대범하게 상대 적진으로 돌진했다. 정통 서포터 챔피언으로는 볼 수 없는 무모함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 상대를 흔드는 데 도움이 됐다. 라인전에서 처음 상대해 보는 캐릭터에 체스 바텀 듀오가 손도 쓰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그렇게 탑과 바텀 양쪽을 동시에 밀고 들어가며 흔들기 시작하자 체스는 우왕좌왕하며 흔들렸다.
종래엔 성장차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벌어진 상태가 되어 체스는 보석 앞에서도 제대로 된 전투 한 번을 해보지도 못하고 패배했다.
[제라드!! 체스를 완전히 제압하며 게임을 끝냅니다!!]
그 뒤에 이어진 마지막 세트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번 선우는 탑으로, 우찬은 바텀으로 향했다. 서폿이라고는 하나 탑 유저였기 때문에 무대포에 저돌적인 우찬의 플레이가 여전히 당황스러운지 체스의 선수들은 제라드의 두 탑 라이너에 대한 대책을 찾지 못했다.
체스가 정처 없이 휘둘리는 와중에 수호가 이리저리 백업을 다니면서 상대를 처치했다. 체스도 반격을 해왔지만 제라드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라드가 마지막으로 보석을 깨뜨리며 경기의 끝을 알렸다.
[GG!!!! 제라드가 체스에게 승리하며 마지막 결승 티켓을 거머쥡니다!!!]
이영중 캐스터의 힘찬 외침과 함께 하늘을 뚫을 듯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어두운 경기장에서 제라드를 향한 응원봉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오후 5시부터 밤 9시가 넘어서 끝난 경기에 다들 진이 빠지는지 헤드셋을 빼내고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하아, 진짜 힘들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체력은 진짜 키워야겠다.”
우찬이 책상에 엎어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호도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여전히 반짝이는 응원봉의 하얀빛을 보았다. 피곤함에 눈을 감자 눈 위로 그림자가 졌다.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리는 익숙한 손길에 수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형도요.”
수호는 주오의 손길에 얼굴을 내맡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주오가 수호의 헤집어진 앞머리를 정리하는 동안 선수석 문이 격하게 열렸다.
“애들아, 잘했다! 아이고, 예쁜 것들!”
진형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지친 선수들의 어깨를 한 번씩 주물렀다. 출입구와 가장 먼 선우 앞에 도착한 진형이 대견하다는 듯 선우와 우찬의 등짝을 한 대 쳤다. 다만 맞는 두 사람은 진형의 기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악!! 아파요, 아파!”
“……감독님, 진짜 아파요.”
“하하하, 오늘 승리의 일등공신들! 이런 걸로 아파하면 쓰나.”
“아픈 걸 어떡해요.”
“오늘 너무 잘했다. 여전히 잘하더라.”
진형이 선우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머리가 산발이 되었지만, 선우는 기분 좋게 웃었다.
“아직까지 탑으로도 쓸 만한가 봐요.”
“쓸 만하다 뿐이겠냐. 진짜 잘했어. 우찬이, 너도 제법이던데? 근데 원딜 지켜야 할 때도 앞으로 들이박으면 어떡해?”
선우와는 달리 타박을 들은 우찬이 입을 내밀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탑 라이너한테 서포터를 시키는 거부터가 문제죠! 그래도 나름 지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요?”
우찬이 서럽다는 듯 하소연을 늘어놓자 진형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생한 우찬의 머리를 헝클었다.
“장난이고, 오늘 진짜 잘했다. 고생 많았어. 오늘은 돌아가서 바로 쉬어라.”
“오늘도 연습하자고 했으면 진짜 도망쳤어요.”
선우가 너무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형은 남은 선수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쉬지 말고 빨리 돌아가자!”
“네에.”
“수호야, 가자.”
지치지도 않는지 벌써부터 일어나 짐을 챙기고 있던 주오가 수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호는 그 손을 자연스럽게 마주 잡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당장 침대로 쓰러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재빨리 짐을 챙긴 수호는 주오와 함께 선수석을 나섰다.
다들 어서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인지 속전속결로 주차장에 도착했다. 꾸역꾸역 차 안으로 선수들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진형이 수고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진형의 인사를 받으며 차에 올라탄 수호는 주오를 바라봤다. 주오는 생긋 웃으며 차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지만, 이내 무언가 생각난 듯 진형을 돌아봤다.
주오가 차에 타다 말고 멈춰서 돌아보자 진형의 눈에 의아함이 올라왔다.
“왜? 뭐 할 말 있어?”
“전에 저한테 부탁하신 거 생각해 볼게요.”
뭔지 모를 주오의 말에 진형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미 결승 진출로 환하기 그지없던 얼굴이 정말 화- 알짝 폈다.
“오? 전에는 생각 없는 것 같더니 무슨 일이냐? 생각은 언제까지 해보려고?”
“결승 끝나기 전에는 말씀드릴게요.”
“그래, 결승까지 일주일이니까 얼마 안 남았네. 좋은 쪽으로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네. 그러면 들어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그래, 내일 보자.”
진형은 벌써부터 좋은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내려오지 않는 입꼬리를 자랑하며 차에 올라타는 주오에게 손을 흔들었다.
입구 쪽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수호는 의아한 마음에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준결승 시작 전에 했던 말과 비슷했다. 진형이 주오에게 부탁한 것. 아까는 중간에 채현이 말을 걸어 끝내 물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주오를 멀뚱히 바라보던 수호가 입을 열었다.
“감독님이 형한테 무슨 부탁 했어요?”
“응? 아, 별거 아니야.”
“뭔데요?”
사소한 것도 다 말해주는 주오가 별거 아니라며 말을 흐리자 수호는 더욱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부탁인 걸까. 궁금하기도 하고, 대답해 주지 않는 주오에게 문득 서운해졌다. 연애라는 건 정말 사소한 거 하나로도 감정이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것 같았다.
주오는 열렬하게 어서 대답해 달라고 말하는 수호의 눈을 보며 곤란한 듯 웃어 보였다.
“아직 확실한 게 아니라서 정해지면 말해줄게.”
“……알겠어요.”
궁금했지만, 선뜻 대답하기 힘든 일이라면 묻지 않는 게 맞았다. 하지만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들어 수호의 눈가가 살짝 내려앉았다.
누가 봐도 평소와 똑같은 표정이었지만 귀신같이 수호의 분위기를 눈치챈 주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말 못 해줘서 미안해. 그런데 당장은 말해줄 수가 없어.”
정말 미안하다는 듯 주오의 눈가도 수호와 같이 축 내려앉았다.
사람에게는 말 못 할 비밀이 있는 거였다. 서운하긴 했지만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해주겠다고 했으니 무언가 정해지면 말을 해줄 것이다. 잠자코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김주오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네. 정해지면 말해주세요.”
“고마워. 이해해 줘서.”
축 늘어져 있던 주오의 눈가가 다시 둥글게 휘었다. 동글동글하니 부드러운 눈매에 수호의 마음에 포근한 온기가 찾아왔다. 아, 정말 좋다.
당장에라도 입술을 들이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은 수호가 조심스럽게 주오의 손가락을 잡았다.
문가와 가장 가까운 곳, 옆에서 볼 사람도 없고 뒤에 앉은 우찬과 선우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시트가 막아주고 있었다. 조금 더 손가락을 얽자 주오가 수호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수호는 어서 부산 시내를 달리는 차가 숙소에 도착하기를 바랐다. 빨리 승리의 기쁨을, 그리고 따스한 주오의 온기를 제대로 느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