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40)

* * *

[게임/11023350] 월챔 4강 대진표 상황;;

4강에 한국 팀이 3팀이나 있는 거 실화???????

└ 진짜 이번 월챔 한국에서 한다고 다들 버프 받은 거냨ㅋㅋㅋㅋㅋ

└ 제라드는 4강까지는 갈 것 같았는데 체스는 좀 의외였음

└ 오늘 체스 PXD 존나 재밌더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탑에서 대체 몇 킬이나 나온 거얔ㅋㅋㅋㅋㅋㅋㅋㅋ

└ 이것이 망나니 라인이죠...

└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국뽕 미쳤다.

└ 2222

└ 오늘 진짜 제라드 경기 미쳐 버렸던데;;; 얘네 왜 서머 우승 못 한 거임??????????

└ 나도 경기 보는데 왜 우승 못 한 건지 의아하더랔ㅋㅋㅋㅋㅋㅋㅋ

└ 시발 제라드!!!! 주이 팬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오늘 경기 보고 닥치고 제라드 팬으로 남기로 함...

[게임/111023710] 제라드 뭐냐?

진짴ㅋㅋㅋㅋㅋㅋㅋㅋ오늘 올해 경기 중에 가장 돌아버린듯;;;

└ 보는데 소름이었다.

└ 수호 솔킬 몇 번이나 나온 거임? 진짜... 다이브 미쳤던데.

└ 수호 폼 회복 다 한 듯?

└ 진짜 지렸다.

└ 오늘 그냥 모든 선수가 리즈 찍었던뎈ㅋㅋㅋㅋㅋㅋ 김레인도 그렇게 적극적인 거 오랜만이었음;;

└ 이 형은 진짜 피지컬도 개지리면서 왜 자주 안 보여주냐고ㅠㅠㅠㅠㅠ

└ 이 경기력이면 제라드 우승 각

└ 주이 경기 봤냐. 거기도 미쳤음. OZ가 ㄹㅇ 날아다님;;

└ 8강 경기만 보면 OZ보단 SUHO인 것 같음.

└ 괜히 세체를 몇 년 동안 한 게 아닌 듯.

└ 아 서머에서 털렸던 SUHO요?

└ ;;; 버러지는 꺼져라. 서머에서 한 번 우승했다고 콧대 존나 높네.

[게임/111014000] 김레인 또 애교 부린다.

[PNG]

경기 끝나고 수호한테 가서 팔 벌리고 안아달라고 저러는 거 개귀엽넼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와중에 키보드 정리하다가 안겨주는 이수호도 커엽ㅋㅋㅋㅋㅋㅋㅋㅋ

└ 세상 귀여워서 미쳐 버려....

└ 둘만의 세계냐? 다른 선수들은 왜 거들떠도 안 보는뎈ㅋㅋㅋㅋㅋ

└ 더 웃긴 건 다른 선수들도 둘이 저러고 있는 거 신경도 안 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라드 내부 분열이냐. 왜 부둥켜안고 있는 조합이 나눠져 있냨ㅋㅋㅋㅋ

└ 레인&수호 / 무&두유&봉 이렇게 서로 끌어안고 있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사이좋은 건 맞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우리 형 또 저러네. 내 심장 박살 나게.

└ 진짜 김레인이 나한테 저러면 나도 모르게 안기긴 할 듯....

└ 22.... 존나 멋있어.

└ 난 올 한해는 김레인의 해 같음.... 오랜만에 우승도 했고, 그렇게 좋아하던 수호랑 팀도 하고, 수호가 또 저렇게 안겨주기까지 했음...

└ ㅇㅈ이닼ㅋㅋㅋㅋㅋㅋ 김레인 다 해....

└ 월챔 우승까지 하면 진짜 레인의 해....

└ 보니까 손에 반지도 있던데 여자친구까지 생겼나 봄...

└ ??????? 시발 진짜네???????

└ 아니 김레인 손에 반지 뭔데;;;;;;;;;;;;;;;;;;;;;;;;;;;;;

└ 누구야, 누군데.

└ 수호냐 아니면 다른 여자냐;;;

└ ㅅㅂㅋㅋㅋㅋㅋㅋ보기가 왜 그러는뎈ㅋㅋㅋㅋㅋㅋㅋ 같은 남자도 아니고, 같은 여자도 아니고 왜 둘을 섞어놧는뎈ㅋㅋㅋ

└ 김레인 씨, 해명 부탁드립니다.

└ 2222

└ 33333

└ 진짜 여자친구임????? 커플링 맞음???

└ 디자인 찾아봤는데 맞음;;

└ 와, 김레인.......................... 수호는....?

* * *

4강에 이름을 올린 제라드의 다음 날은 화기애애했다. 조식 시간에 맞춰 내려온 선수들은 각기 접시에 음식을 담고 자리에 앉았다.

단, 유독 아침에 약한 수호만은 자신이 음식을 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애초에 음식은 주오가 담았기에 수호는 기억이 나지 않을 만했다.

“수호야, 여기 앉자.”

부산 시내가 훤히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은 주오가 의자를 빼고는 수호를 자리에 앉혔다.

옆에 앉아 식기와 음식을 수호 앞에 늘어놓는 주오를 보며 맞은편에 앉은 은기가 가지 가지 한다는 눈빛을 했다. 그에 비해 선우는 그 상황이 재밌는지 아침부터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배가 아프다며 아침을 거르겠다는 우찬을 제외한 인원이 모두 자리에 앉자 식사가 시작됐다.

“야, 이수호, 정신 차려라.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샐러드를 포크로 찍은 선우가 반밖에 뜨지 않은 눈으로 멍하니 테이블을 보고 있는 수호를 타박했다.

“응, 먹어.”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수호의 손은 테이블 밑에서 미동도 없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선우는 그러면 그렇지, 하며 샐러드를 입에 밀어 넣었다.

“수호야, 이거 먹자. 아-”

주오는 보슬보슬한 계란 볶음밥을 한 수저 푸고는 수호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수호는 음식을 확인하지도 않고 입을 벌려 음식을 받아먹었다. 아기 새처럼 주는 족족 음식을 받아먹는 수호가 귀여운지 주오의 입가에 미소가 한가득 피어올랐다.

“수호 쟤는 예전부터 저랬어요?”

숙소에서도 아침은 거르고 잠을 선택하는 수호였다. 그래서 아침을 먹는 수호를 보는 건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은기는 올스타전에서도 그렇고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밥을 먹는 수호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방울토마토를 입 한쪽으로 몰아넣은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저랬어. 아침에는 정신 못 차리거든. 아니, 정확하게는 아침이 아니라, 일어나고 얼마 동안은 저래. 나름 귀엽지 않냐?”

선우의 말에 은기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은기의 시선이 수호에게 향했다. 여전히 주오가 주는 밥을 얌전히 받아먹고 있었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꾸벅거리는 게 귀엽다는 걸까. 은기는 기묘한 선우의 취향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어디가요?”

“은기야, 눈을 크게 뜨고 봐. 수호가 얼마나 귀여운데.”

은기의 질문에 대답한 건 선우가 아닌 주오였다. 주오는 수호가 귀엽지 않다는 은기의 의견에 도끼눈을 떴다. 꼭 네가 미치지 않고서는 이런 수호가 어떻게 귀엽지 않을 수 있냐고 말하는 눈이었다. 은기의 인상이 더욱 일그러졌다.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은 은기가 냉수를 벌컥 마셨다.

“하아, 그래요. 귀여워요, 귀여워. 됐어요?”

아니라고 하면 더 말이 길어질 걸 알았기에 은기가 영혼 없이 대답했지만, 갑자기 주오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아니지. 귀여워하지 마. 절대 안 돼. 수호한테 그런 말 하지 마.”

혹시나 수호가 흔들릴지 모른다고 생각한 주오가 은기를 노려봤다. 은기는 이 환장하는 상황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폭소를 터뜨린 선우가 주오에게 물었다.

“그런데 형 커뮤니티 봤어요? 형 반지 가지고 말들 많던데.”

“그래? 안 봐서 몰라.”

애초에 그런 쪽에 관심을 두지 않는 주오였기에 선우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수호에게 밥을 먹이느라 바빴다. 선우는 대단하다는 눈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수호는 어떻게 하고 여자친구 사귀냐던데요.”

“아하하, 그런 내용이었어?”

“그거 내가 해준 건데.”

주오가 웃음을 터뜨린 동시에 꾸벅 졸던 수호가 입을 열었다. 주오는 여전히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수호를 귀엽다는 듯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수호가 해줬지. 봐, 지금도 하고 있어.”

“응, 빼지 마요.”

“손가락을 누가 잘라 가지 않는 이상 빼는 일 없을 거야.”

주오는 수호의 말에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은기와 선우였지만, 당당하게 애정 표현을 하니 눈이 찡그려졌다.

“어? 뭐야. 제라드도 지금 밥 먹어요?”

밥을 먹고 있던 네 사람은 갑자기 들려오는 밝은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밥을 먹으러 내려온 듯 주이 선수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기연이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너네도 이제 밥 먹냐?”

“뭐, 그렇죠. 응? 그런데 봉은 어디 갔어요?”

네 사람밖에 없는 제라드 인원을 보고 기연이 의아한 듯 묻자 선우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배 아프단다. 어젯밤에 닭발 시켜 먹더니 배탈 난듯?”

“아아, 그래도 오늘 시합 없어서 다행이겠네요.”

“그렇지. 그런데 자리는 있냐? 없으면 그냥 여기 앉아.”

“그래도 돼요? 돌아보니까 좀 애매하긴 하던데.”

기연과 선우는 이미 한 팀에서 시간을 보냈던 터라 사이가 가까웠지만, 다른 선수들끼리는 인사만 주고받는 경우가 많았던 터라 기연이 망설이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주오가 빈자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자리 없으면 같이 먹어요. 여기 비었어요.”

“아, 감사합니다. 애들아, 여기 앉자.”

기연의 말에 주이의 어린 선수들이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수호의 옆에 앉은 기연은 인사도 없이 졸고 있는 수호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 형은 여전하네. 형, 아직도 졸려요?”

“응, 졸려. 안녕.”

순서가 잘못된 것 같지만 기연은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식기를 들었다.

“박선우, 너 없으니까 아주 편하더라.”

“뭐? 정민영 미쳤냐?”

기연과 마찬가지로 수호와 선우와 함께했었던 주이의 원딜 MAIL, 정민영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자 선우가 맞받아쳤다. 어느새 소란스러워진 분위기에 어색하게 있던 주이의 신예 선수들도 한결 편해진 자세로 식사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 OZ, 신태민은 조용히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의 입에 만두를 먹이고 있던 주오는 뜨거운 태민의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수호한테 할 말 있어? 수호 지금 졸려서 대답 잘 못 할 텐데.”

“아, 아뇨. 그냥 신기해서 봤어요. 이런 모습은 처음 봐서…….”

고개를 붕붕 저은 태민이 여전히 뜨거운 시선으로 수호를 바라봤다. 주오와는 다른 의미였지만, 수호의 팬이라고 밝혔던 태민은 수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주오는 그런 태민의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수호를 나긋이 부르며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수호는 자신을 부르며 음식을 들이미는 주오에게서 넙죽 음식을 받아먹었다. 그런 둘을 보며 기연이 기겁했다.

“레인 형, 수호 형한테 밥까지 먹여줘요……?”

“아, 졸려 하니까.”

“그래도 놔두면 혼자 먹을 텐데…….”

이렇게까지 주오가 지극정성으로 수호를 살피는지 몰랐던 기연은 정말 대단하고 이상하다는 눈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냅둬. 이수호 혼자 먹으면 또 언제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냐.”

“……그건 그렇네요.”

졸려 하는 수호가 얼마나 행동이 느린지 빤히 알고 있던 기연이었기에 선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있잖아요, 수호 형.”

“……?”

조용히 수호를 보고 있던 태민이 입을 열었다. 수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들어 태민을 바라봤다. 처음 식사를 시작했을 때보다는 명확해진 시선이었지만, 여전히 졸음이 묻어났다. 태민은 몽롱한 수호의 눈을 말똥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제 경기에서 솔킬 각 그거 어떻게 판단하셨어요? 상대 상태도 풀피였고 애매하기도 했잖아요.”

“……아, 그거 정글이 백업 못 오는 상황이었으니까 들어간 건데.”

“잡을 확신은 있었던 거예요?”

무슨 의미로 묻는 건지 애매한 질문이었다. 그런 각이 보였다는 게 대단하다는 의미로 느껴지면서도 어느 한쪽으로는 얕잡아보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수선스럽게 식사를 하고 있던 테이블이 태민의 질문에 조용해졌다. 특히 태민에게 향한 제라드 선수들의 시선이 서늘했다. 그리고 주이 선수들의 시선은 당혹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기연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있으니까 들어갔지. 수호 형이 그런 생각도 없이 들어갔겠냐? 그런데 너 말 좀 조심히 해. 잘못 들으면 오해하겠다!”

“응? 아, 죄송해요.”

태민은 제라드 쪽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여전히 제라드 선수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예민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기연의 말에 태민은 오해라고, 그런 의도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수호 팬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물어보는 게 신기하네. 쟤 그런 확신 없이 일 치르는 애는 아닌데. 혈기 왕성한 신예도 아니고.”

태민을 향해 선우가 방긋 웃자, 기연의 눈이 더욱 흔들렸다. 민영은 머리 아프다는 듯 태민을 바라봤다.

“아, 그런데 최근 수호 형 슬럼프였으니까 그냥 혹시 하고…….”

조심스럽지만 어딘가 당찬 태민의 대답에 은기가 눈살을 찡그렸다.

“웃기네. 슬럼프였으면 그렇게 플레이하면 안 되는 거야?”

결국 은기가 입을 열었다. 말속에서 불쾌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은기의 말에 태민은 입을 닫았다.

“그건 아닌데…… 죄송해요.”

죄송하다며 다시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태민을 보는 은기의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 조용히 그 상황을 지켜보던 주오가 마지막으로 수호에게 물컵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동경하던 선수를 솔킬 내고 우승했으니까 자신감에 찬 건 좋은데, 말은 조심해서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음성은 부드러웠지만 주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늘 웃음을 잃지 않던 주오였기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주오의 굳은 표정에 자신의 말이 얼마나 조심성 없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는지 태민이 사과를 건네왔다.

어린 선수의 패기는 이해하지만 선을 넘는 행위였다. 주오는 시선을 내린 태민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태민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자신감이랑 오만함은 다른 거예요. 그리고 수호한테 이겼다고, 본인이 더 잘하는 선수라고 제대로 인정받고 싶으면 월챔에서 우승부터 해요. 벌써부터 그러지 말고.”

싸늘하던 주오의 눈이 이내 둥글게 휘었다. 평소의 주오의 표정이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온기가 없었다.

좋다가 갑자기 가시밭길에 내던져진 것 같은 상황에 주이의 선수들이 눈치를 살폈다. 입술을 꾹 씹는 태민을 보던 주오가 이내 시선을 돌려 수호를 바라봤다.

어느덧 잠에서 깬 수호가 놀란 눈으로 주오를 보고 있었다. 주오는 그런 수호를 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이번 웃음은 평소의 김주오의 미소였다.

“수호야, 이제 올라갈까?”

“……네.”

“가자.”

주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호를 일으키자 은기와 선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호는 어색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며 미안하다고 입으로 속삭이는 기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식당을 빠져나온 제라드 선수들은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선우였다.

“내가 꼰대가 된 건가. 요즘 애들 패기가 대단하네.”

평소의 음성대로 맑은 음성으로 재밌다는 듯 입을 열자 은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패기가 아니라 그냥 싸가지가 없는 건데요.”

“아, 그렇지? 나만 그렇게 느낀 거 아니지?”

선우는 빠져나온 식당의 입구를 슬쩍 돌아봤다. 여전히 선우의 시선에는 못마땅한 빛이 역력했다.

“수호야, 괜찮아?”

“뭐가요?”

“아까…… 기분 나빴을 것 같아서.”

태민에게 화를 냈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오의 시선이 다정했다. 걱정이 한가득 묻어나는 다갈색 눈동자에 수호는 새삼 가슴이 떨리는 걸 느꼈다. 온전히 자신에게만 향하는 이 굳건한 애정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안 나빴어요. 한두 번 겪어본 일도 아니고, 신경 안 써요.”

선수들이나 게임업계 관련자들이 모두 입을 모아 칭찬하는 선수였다. 이수호라는 사람은. 그렇기에 수호가 우승을 놓치거나, 간혹 플레이가 좋지 않아 경기에서 패배하면 그때 상대 팀 선수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그러면서 하나같이 말하는 게 있었다.

‘수호도 생각보다 그렇게 잘하는 것 같진 않네. 그냥 팀빨이었던 거 아니야?’

수호도 그런 소리를 제법 들었다. 물론 지금 이 바닥에 수호를 그렇게 판단했던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 정도 프로판에서 굴렀다는 사람들은 절대 한 시즌, 순간의 경기력으로 상대를 평가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패기가 넘치는 선수나, 자존감이 유독 높은 사람들뿐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패기를 한순간에 꺾어버린 것도 수호 본인이었다.

“수호 너는 언제나 최고야.”

“알고 있어요.”

수호는 여전히 걱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는 주오를 보며 웃어 보였다. 이번에도 자신 있었다. 책임감과 부담감이 아닌 승리를 향한 열망이 수호의 깊은 곳에 타올랐다.

자신 있는 수호의 미소에 주오의 표정이 풀어졌다. 이윽고 주오가 눈을 둥글게 휘며 수호의 볼을 쿡 찔렀다. 찡그리고 있던 은기의 표정이 더욱 처참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

[주이!! 이번에도 파격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며 결승에 진출합니다!!]

[정말 이번 대회 다크호스라고 불리는 팀다운 경기력입니다!!]

결승전 한 자리를 한국 팀이 차지하자 해설진들이 흥분에 차 한결 격하게 소리를 질러댔다.

남은 티켓을 두고 싸울 팀은 제라드와 체스. 어떤 팀이 이긴다 해도 결승전은 한국 대 한국의 싸움이었다.

몇 년간 변하지 않은 불변의 대결이었다. 그리고 그 대결의 단골손님이었던 제라드가 이번에도 결승으로 향할지 지대한 관심이 쏟아졌다.

무대를 가까이서 보고 있던 우찬은 귀를 찌를 듯한 함성에 귀를 틀어막았다.

“어우, 귀 아파. 주이가 올라갈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근데 기분은 별로네. 어제 오즈가 도발 긁었다며?”

배탈로 인해서 그 자리에 없었던 우찬은 후에 그 상황에 대해 듣고는 길길이 날뛰었다. 서머 우승 한 번 했다고 기고만장해진 거냐며 씩씩거리는 우찬을 진정시키느라 제라드 선수들의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여전히 기분이 나쁜 듯 우찬이 한껏 인상을 찡그리며 수호를 바라봤다.

“진짜 결승 끝나고 나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지켜볼 거야!”

“알겠으니까 일단 4강 준비나 하지? 곧 시합인 거 모르냐?”

“알아!”

빽 소리 지르는 우찬을 보며 은기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이는 체스부터 잡고 생각하자.”

“으으! 진짜 두고 봐라. 수호 팬이라면서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하지? 생각할수록 어이없네.”

주오의 말에 한결 진정되긴 했지만 여전히 우찬은 무대에서 내려오는 주이의 OZ를 부들거리며 노려봤다. 누가 보면 당장 달려가서 멱살이라도 잡고 고백을 갈길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선우가 우찬의 어깨를 붙잡았다.

“뭐, 너무 좋아했으니까 실망도 컸나 보지. 그때 수호 경기력이 조금 그렇긴 했잖아?”

내용과 달리 상쾌하기만 선우의 음성에 수호가 힐끔 그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지만 선우는 사실이지 않냐며 눈을 반짝였다. 사실이긴 했다.

“이제 그럴 일 없어요.”

“그러면 다행이고. 그런 주오 형, 대회 끝나고 은퇴하면 뭐 할 거야?”

4강. 대회의 막바지였다. 선우가 은퇴를 확정한 주오에게 물었다.

당연히 수호의 시선도 주오에게 향했다. 아직까지 수호도 물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바로 앞에 있는 미래인 월드 챔피언십만 바라보느라 정작 생각도 못 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장비를 다 챙기고 유니폼 재킷을 입고 있던 주오가 입을 열었다.

“글쎄? 아직 생각 안 해봤어.”

“그걸 아직도 생각 안 해놨어? 대회 끝나는 것도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본인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 좀 하라는 선우의 말에 주오는 설핏 웃음으로 답했다.

수호는 말이 없는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수호의 시선이라면 귀신같이 알아채는 주오가 눈을 깜빡였다.

“수호야, 왜? 할 말 있어?”

“아니요. 그냥 정말 형은 은퇴하고 뭐 할까 싶어서요. 재인 형처럼 스트림 방송 해요?”

개인 방송이 워낙 발달했기에 프로게이머를 은퇴하고 그쪽으로 빠지는 사람이 과반수가 넘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길이기도 했다. 주오라면 방송을 시작하자마자 많은 팬이 생길 게 분명했다.

주오는 잠시 생각을 해보는 듯 눈을 굴렸다. 이윽고 주오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수호와 눈을 맞췄다.

“잘 모르겠어. 그쪽으로 가면 재인이가 이것저것 알려주겠다고는 했는데 아직은 그렇게 끌리지가 않아서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

“그렇구나…….”

“일단은 집부터 알아보려고. 그리고 여행도 가야지.”

“아…….”

주오가 은퇴 후에 할 일로 가장 먼저 생각하고 있는 건 수호와의 약속들이었다. 수호는 자신을 보며 기대된다는 듯 눈을 빛내며 환하게 웃는 주오를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게 우선이죠.”

“그렇지? 그런데 수호는 올스타전 단골이니까 이번에도 뽑히지 않을까? 그러면 여행 일정을 짧게 잡아야 하나?”

월드 챔피언십이 끝나고 다른 때보다 긴 휴식 시간이 있다고는 하지만, 올스타전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얘기가 달랐다. 준비 기간, 대회 기간 등 내년 스프링 시즌 시작 전까지 휴식 시간을 그곳에 할애해야만 했다.

일정을 어떻게 할지 곰곰이 생각하는 주오를 보며 우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레인 씨 여행 가? 수호랑?”

“어.”

“또 둘이서만 놀지. 그리고 올스타전은 형도 뽑힐 거잖아. 은퇴한다고 해도 투표 엔트리에서 빠지는 것도 아니니까.”

둘만 놀러 간다는 게 불만인 건지 우찬이 뽀로통하게 눈을 뜨며 주오와 수호를 노려봤다. 그러자 선우가 우찬의 어깨를 감싸 안고 위로하듯 토닥였다.

“우찬이는 그러면 나랑 갈까? 은기까지 셋이 다녀오면 딱 좋겠네.”

“그것도 좋은데……. 그래도 레인 씨랑도 가고 싶은데. 은퇴 기념으로 같이 놀아야지.”

“그건 둘이 여행 다녀와서 가도 되는 거니까. 너는 그동안 우리랑 따로 가면 되지.”

선우가 우찬을 달래는 동안 수호가 주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짧게 잡을 필요 없어요.”

“응?”

무엇을 짧게 잡을 필요 없다는 건지 잠시 이해를 못 하고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주오가 이내 그게 여행을 뜻한다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올스타전은 어떻게 하려고?”

“뽑힌다고 꼭 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개인 사정으로 빼면 돼요. 그러니까 형도 빼요.”

한 해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준 선수들을 투표를 통해서 선발하는 게 올스타전이다.

커리어에 남는 대회도 아니고, 한 해의 뒤풀이 겸 축제의 의미로 진행되는 대회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 한 해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준 선수에게 기회가 주어지기에 선발된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할 수 있는 대회였다. 그렇기에 선발되고도 대회에 참가하지 않아도 됐지만, 보통은 참가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대회를 과감하게 포기하겠다는 수호를 보며 선수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들 뽑혀보고 싶어서 안달 내는 대회였다. 특히나 수호의 포지션인 미드라이너들은 더욱 원하는 자리였다.

“야, 네가 포기하면 다른 선수들은 좋으면서도 기분 나쁘기도 하겠네.”

“그러게요. 올스타전 간다고 좋아하면서도 네 대신이라고 하면 애매하지.”

선우의 말에 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수호는 여전히 주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올스타전 참가보다 주오와의 여행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최고의 선수라는 건, 이번 결승에서 증명하면 되는 일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수호를 보던 주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개화하는 미소는 그 어느 것보다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래. 우리 길게 다녀오자. 한 달 정도 다녀올까?”

“좋아요.”

주오의 긍정에 수호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둘을 보고 있던 은기가 툭 말을 던졌다.

“한 달은 죽어도 무리일걸?”

“하긴, 감독님이 절대 안 된다고 할 것 같은데. 그리고 그렇게 길게 가면 우리랑은 언제 여행 가?!”

그렇게는 안 된다며 우찬이 격하게 소리를 질렀다.

휴가가 길다고는 하지만, 팀별로 그 기간이 다르기도 했다. 감독의 재량이었다. 그리고 제라드는 10개의 팀 중에서도 연습량이 많기도 유명한 팀이기도 해서 한 달이라는 시간을 빼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오랜 시간 진형과 함께 팀을 이뤘던 주오도 그걸 알기에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말이 없었다. 이윽고 주오가 싱긋 웃었다.

“내가 잘 말해볼게. 그리고 너희랑도 여행 갈 거니까 우찬이 너도 그만 삐져.”

“레인 씨, 약속한 거야. 은퇴했다고 갑자기 연락 두절되고 그러면 진짜 너무한 거야.”

“안 그럴게.”

주오는 자신에게 있어 유독 작은 우찬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얘들아! 이제 올라가자!”

그때 주이의 감독인 윤채현과 대화를 하고 있던 진형이 선수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손을 크게 흔들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진형에게 다섯 명의 선수가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감독님한테 뭐라고 말씀드리게요?”

“음, 감독님이 전에 부탁한 게 있는데 그걸로 딜하면 될 것 같아.”

“부탁이요? 무슨 부탁…….”

진형이 따로 주오를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연습 시간을 쪼개면서 가는 여행을 딜로 걸 만큼 중요한 부탁이 뭘까 싶었다.

“아, 수호야.”

의아함에 주오에게 그게 뭐냐고 묻던 수호는 순간적으로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진형과 대화를 하고 있던 주이의 감독, 채현이었다. 수호는 평소와는 다르게 어색하게 웃는 채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 오늘 경기 잘하고 결승에서 보자. 그리고 기연이한테 들었는데 태민이가 너한테 실수했다며. 미안하다.”

“아…….”

어제 조식을 먹다 일어난 상황이 생각난 수호의 입술 사이로 낮은 탄성 흘러나왔다. 채현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평소답지 않게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독님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애초에 수호는 태민의 말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정말 미안하다. 음, 웃긴 소리긴 한데 태민이가 한국 올 때부터 너한테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생각보다 너한테 빨리 이기기도 하고, 우승도 해서…… 걔 딴에는 실망한 눈치더라. 그래서 그런 식으로 말한 것 같은데 정말 미안해.”

“와, 그게 이유예요?”

어처구니가 없는 이유로 순식간에 멍해진 우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찬이 그렇게 반응하는 게 이해된다는 듯 채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미안하다. 다음에 만나도 그런 소리 못 하게 해놨으니까 기분 풀어.”

“정말 기분 안 나빠요.”

자신에게 실망한 사람들에게 운빨, 팀빨 온갖 소리를 다 들어봤기에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말했던 사람들이 다시는 그런 소리를 못 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수호는 채현은 곧은 시선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그렇게 말 못 하게 될 거예요.”

실망 따위 절대 할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하는 수호의 시선은 단호했다. 채현은 흔들림 없이 고요하면서도 단단한 눈을 보며 굳혔던 얼굴을 풀었다. 천천히 미소를 짓는 채현의 표정이 여느 때와 같이 편안하면서도 장난스러웠다.

“그래, 많이 혼내줘라. 그래도 우승은 올해도 주이가 할 거다.”

“뭐라는 거야? 올해도 주이가 아니라, 올해도 SUHO가 우승이지.”

채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진형이 인상을 확 찡그렸다. 늘 우승을 눈앞에서 빼앗겼던 진형은 이번만큼은 양보할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진형뿐만이 아니라 제라드의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수호는 진형의 표정이 웃기다며 웃고 있는 채현에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결승전에서 봬요. 결승 진출 축하드려요.”

나지막한 수호의 음성에 진형에게 향하던 채현의 시선이 수호에게 돌아왔다. 채현이 수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결승 티켓이나 따고 와서 말해라. 그러면 열심히 해라.”

“네.”

언제나 주이에서 받던 채현의 응원이었다. 수호는 지난 4년간 함께했던 시간이 문득 생각나 채현을 따라 미소 지었다. 그리고 채현도 작년까지 익숙했던 이 응원이 낯설어진 지금이 어색하면서도 즐거운지 더욱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호는 채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묵묵히 자신의 곁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오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익숙해진 자리였다. 그리고 놓치고 싶지 않은 자리기도 했다.

수호는 주오의 곁에서 무대를 올라가며 앞서 걷는 팀원들을 바라봤다. 일 년여밖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유독 편안한 사람들이었다. 수호는 꼭 이 팀원들과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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