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20XX 월드 챔피언십
첫날 대진은 주이 vs Bullet Gaming 중 주이의 승. 그리고 T.T vs Red Cow의 결과는 T.T의 승이었다.
주이의 경기만을 보고 연습실로 돌아온 제라드는 뒤늦게 T.T의 승리 소식을 듣고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중요한 건 우리 경기다! 내일 DW랑 잘해보자고!”
월드 챔피언십의 본선 첫 경기이니만큼 진형은 벌써부터 의지를 활활 태우고 있었다. 그 탓에 선수들은 감독의 주의 사항을 연습이 끝난 뒤로 1시간이나 더 듣고 나서야 연습실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내일이 경기가 있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새벽에 끝난 연습에 수호는 뻑뻑해진 눈을 문질렀다.
“수호야, 많이 피곤한가 보다. 빨리 돌아가서 쉬자.”
주오는 자신의 두 손을 맞대어 비비고는 뜨끈해진 손가락으로 수호의 눈두덩이를 살며시 눌렀다. 따뜻한 온기에 뭉친 근육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눈이 조금 뻑뻑해서 그래요. 형은 괜찮아요?”
하루 종일 컴퓨터 모니터만 보고 있는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주오도 피곤할 법한데 그는 여전히 아침과 같이 상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것보다 어서 돌아가자. 빨리 자야지.”
주오는 수호의 양어깨를 뒤에서 슬슬 밀며 숙소로 향했다. 다들 늦은 시간까지 연습을 했음에도 내일 있을 경기 때문인지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유난히 시끄러웠다.
숙소에 도착해 샤워를 마친 수호는 침대의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새로 바뀐 시트가 뽀송했다. 이불 안에서 얼굴을 비비적거리고 있는 수호를 보며 주오가 방긋 웃었다.
본인의 머리를 다 말린 주오가 수호를 불렀다.
“수호야, 머리 말리자.”
“……귀찮아요.”
수호의 음성에서 잠기운이 솔솔 느껴졌다. 주오는 침대에만 누우면 말똥하게 눈을 빛내다가도 금세 조는 수호가 귀엽다는 듯 애정을 담은 눈으로 바라봤다.
수호가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주오는 마른 수건을 들고 침대로 향했다.
역시나 수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주오는 침대 옆에 앉으며 시트 위에 턱을 올렸다.
“수호야, 수호야.”
“……왜요.”
조심스러운 음성에 수호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렸다. 주오는 수호의 젖은 머리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대충 물기를 털고 나온 머리는 여전히 축축했다.
엎드려 쭉 뻗어 누워 있는 수호의 허리춤에 무릎을 세워 앉은 주오가 마른 수건으로 수호의 머리를 슥슥 닦았다. 수호는 부드러운 손길에 몸을 맡겼다.
“나는 하루 마무리로 이렇게 수호 머리 말려주는 게 정말 좋더라.”
수호가 제라드에 들어오고 늘 수호의 머리를 말려주는 일은 주오의 몫이었다. 딱히 수호가 부탁한 것도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주오는 굉장히 중요한 임무를 맡은 책임자라도 된 것처럼 책임감 가득한 얼굴과 함께 자부심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
“응, 왜?”
물기를 수건으로 꾹꾹 눌러 닦던 주오는 웅얼거리는 수호의 부름에 답했다. 그러자 수호가 아래에서 몸을 빙글 돌리며 눈을 맞췄다. 아까보다는 잠이 조금 깬 듯했지만 여전히 반쪽은 잠결에 빠져 멍한 시선이었다.
“이번 대회 끝나고 은퇴하면 숙소에서는 언제 나가요?”
주오의 눈이 깜빡였다. 이윽고 주오가 입을 열었다.
“글쎄. 아직 정확하게 정해지진 않았어. 대회 끝나고 사무국이랑 얘기해 봐야 할걸?”
“형이 전에 숙소 옆에 자취한다고 했던 거 좋은 생각인 거 같아요.”
수호는 본인이 말하고는 역시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오의 본가가 숙소와 멀지는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연습으로 시간을 빼기 힘든 수호가 그 거리를 이동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조심스러운 수호의 말에 주오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숙여 수호를 끌어안았다.
“그렇지? 월드 끝나고 방 알아봐야겠다.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찾아볼게.”
“그때 저도 같이 가도 돼요?”
“그럴까?”
신혼부부 같겠다. 주오는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는 듯 방긋 웃으며 수호의 뺨에 볼을 비볐다. 수호도 주오의 목에 팔을 감싸며 주오를 끌어당겼다.
“형이랑 같이 살면 좋겠다.”
수호가 몽롱한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속삭였다. 주오는 못 참겠다는 듯 수호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찍었다. 잠에 빠져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말하는 수호는 언제나 사랑스러웠다.
“수호가 같이 살아주면 나는 너무 좋지.”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숙소 생활이 암묵적인 프로판이었기에 수호의 바람이 이루어질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주오와 수호는 그 이룰 수 없는 상상을 하며 행복에 빠져들었다.
“나중에, 나중에 저도 프로 생활 그만두면…… 그때는 같이 살아요.”
수호의 고백에 주오는 눈을 깜빡거리며 수호를 내려다봤다. 이미 잠에 도롱도롱 빠지기 직전인 듯 눈을 감아버린 수호였지만, 주오는 수호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그래. 꼭 같이 살자. 약속이야? 잊으면 안 돼?”
“응…….”
“정말 약속했어. 나중에 싫다고 무르면 나 슬퍼할 거야.”
“……안 싫어요. 안 물러…….”
주오의 귀여운 투정에 수호는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내 깊은 잠에 빠진 듯 고른 숨을 내쉬었다.
주오는 잠든 수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환하게 웃었다. 정말 어서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김주오는 간절히 바랐다.
* * *
[자! 월드 챔피언십의 본선 이틀 차의 날이 밝았습니다! 어제 경기에서는 주이와 T.T가 4강 진출에 성공했는데 오늘은 어떤 팀이 4강에 진출하게 될지 기대가 큽니다!]
이틀 차, 첫 문을 연 건 제라드였다. 밴픽이 시작되자 진형은 빠르게 말을 꺼냈다.
“DW는 원딜 중심으로 가는 팀이니까 후반으로 끌고 가지 말고 초중반에 경기 끝내자.”
초반에는 딜이 약한 원딜은 후반이 되면 1대1 싸움에서 가장 강해진다. 물론 제라드에도 원딜인 은기가 있지만, DW의 원딜은 유난했다. 괜히 원딜 중심의 팀이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닐 정도로 DW의 원딜은 강했으며, 다른 라인의 선수들도 원딜을 지키고 성장시키는 데 모든 노력을 다했다.
선수들도 익히 듣고 전날까지 분석한 DW의 플레이 스타일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초반에 주오는 바텀 라인 위주로 봐줘. 그리고 수호도 여유 있을 때는 바텀 쪽 지원해 주고.”
“네.”
“알겠습니다.”
루퍼의 지령에 주오와 수호가 긍정 어린 대답을 하자 진형과 루퍼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러면 믿는다. 열심히 하고!”
진형이 힘을 북돋아주듯 선수들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리고 루퍼와 선수석을 나섰다.
[밴픽이 끝이 났습니다! 역시 DW는 초반에는 힘들지만 후반에 포텐이 좋은 조합으로 선택했네요. 그에 비해 제라드는 기동성이 좋고, 초반 주도권이 좋은 조합입니다.]
이영중 캐스터의 말이 끝나자 유기현 해설이 입을 열었다.
[경기의 주요 포인트는 초반이 될 것 같습니다. 제라드 입장에선 초반에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가 이 게임을 쉽게 갈 수 있는 중요한 요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예선전에서도 제라드가 서머 시즌과는 다른 경기력을 보여줬는데 과연 이번 경기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도 기대가 되네요.]
박동진 해설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팬심을 드러내는 박동진 해설을 보며 웃음을 터뜨린 이영중 캐스터가 마이크를 고쳐 잡고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월드 챔피언십 본선 이틀 차, 첫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캐스터의 힘찬 외침을 시작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본선 첫 경기라고는 하지만 제라드 선수들에게 긴장한 모습을 찾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연습을 할 때보다 더욱 편안해 보였다. 특히 은기와 수호의 폼이 좋았다. 부드러운 플레이와 막힘없는 그들의 행동에 해설들이 안심한 듯 입을 열었다.
[서머 후반에 폼이 좋지 않았던 MOO와 SUHO 선수의 움직임이 가볍네요. 컨디션 회복을 제대로 한 것 같습니다!]
신난 박동진 해설과 함께 유기현 해설도 흥분에 찬 하이톤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RAIN 선수! 바텀으로 2렙 갱킹을 시도하는 것 같은데요?! 대담한 선택입니다!]
초반 2렙 갱은 실패하면 그만큼 정글의 성장이 더뎌진다. 슬로우 스타터인 주오가 자주 선택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오래도록 경기를 봐온 이영중 캐스터가 소리쳤다.
[오오! 초반을 공략하겠다는 생각인가요! 과연 여기서 갱킹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이영중 캐스터의 걱정 어린 음성에도 불구하고 주오는 바텀 2렙 갱을 깔끔하게 성공시켰다.
[오오오오! RAIN 선수!! 서머 시즌 후반부터 폭발적인 갱킹 실력을 보여줍니다!]
[이야, RAIN 선수! 폼이 장난 아닌데요?! 플레이오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요즘 RAIN 선수의 폼이 꼭 예전 데뷔 때 리즈 시절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박동진 해설과 유기현 해설의 탄성에 지켜보던 제라드 팬들의 입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경기장에 울리는 거대한 함성이 경기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적 정글 탑이랑 미드 사이에 있을 거야. 수호야, 조심해.”
“형, 그쪽에 시야 한 번만 잡아줄 수 있어요?”
“응. 잠깐만.”
바텀에서 한 건 일을 터뜨린 주오가 수호가 있는 미드를 지나쳐 탑으로 향하면서 중앙에 시야를 밝혔다.
상대 정글이 올 것을 대비해서 시야를 밝혀두자 수호는 편하게 라인을 푸시하며 상대 미드를 압박했다. 공격적인 수호의 플레이에 상대 미드라이너는 정처 없이 흔들렸다.
[SUHO 선수 미드 주도권을 꽉 잡고 있는데요?! RAIN 선수가 미드 위아래로 시야를 장악해 놔서 상대 정글러는 갱킹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과연 여기서 DW는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합니다.]
[바텀 쪽은 이미 타격을 입어서 반격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남은 곳은 탑밖에 없습니다.]
주오와 상대 정글러도 유기현 해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주오는 팽팽하게 라인을 주고받으며 안정적인 플레이를 하고 있는 우찬에게 말했다.
“우찬아, 상대 정글 올 곳 여기밖에 없으니까 조금 뒤로 빠져서 타이밍 보자.”
“응. 근데 쟤네도 뒤로 빼는 것 보니까 그냥 드러누우려고 하는 것 같은데.”
DW의 플레이 방식이었다. 원딜 중심이다 보니 후반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초반에 바텀 쪽에서 타격이 있으면 전체적으로 뒤로 물러나 상황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에는 힘으로 밀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누울 수도 없는 상황을 만들어줘야 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주오가 지켜보고 있는 탑이 아닌 미드에서 터져 나왔다.
[와아아악!! SUHO 선수 뭐죠?!]
갑자기 게임 화면 상단에 떠오른 수호의 솔킬에 유기현 해설이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탑 쪽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영상 관리자는 미드가 아닌 탑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다들 미드에서 벌어진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리플레이! 옵저버!! 리플레이를 원합니다! 대체 미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갑자기 솔킬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영중 캐스터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실시간으로 보지 못했던 미드의 영상이 리플레이로 화면을 채웠다. 공격적으로 라인을 밀던 수호를 참지 못하고 상대의 미드라이너가 반격하기 위해 앞으로 나온 순간 수호가 돌진했다.
포탑을 옆에 끼고 있던 상대편이었지만, 수호는 과감하게 안으로 치고 들어가 상대를 순식간에 처치한 뒤 유유히 살아 돌아왔다. 정말 빠른 플레이였다. 리플레이를 보는 해설자들이 흥분해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아니! 포탑은 장식인가요?! 저길 저렇게 들어가서 상대를 따냅니다!]
[후반을 지향하는 DW가 수비적으로 플레이하는 것을 무너뜨리려면 힘으로 밀고 들어가서 부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걸 SUHO 선수가 혼자 해버리고 나옵니다!]
상대 미드가 죽고 수호는 포탑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휑하니 뚫린 중심 지역은 수호의 무대였다. 정글러는 이미 탑 쪽을 주시하는 상황이었기에 수호를 막아내는 건 무리였다.
급해진 상대 정글과 탑은 탑 라인에서 이득을 보려는 듯 우찬을 공격해 왔다. 하지만 그럴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었던 주오의 백업으로 무산됐다.
결국 제라드의 일방적인 이득이었다. 그 이득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바텀으로도 이어졌다. 상대가 부활하는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던 수호는 어느 정도 포탑을 철거하고는 바텀으로 향했다.
“형, 저 뒤로 돌아서 들어가요. 살짝 꼬리 좀 흔들어주세요.”
“쟤네 지금 이미 한 번 죽어서 절대 안 나올 것 같은데.”
고개를 젓는 은기의 말에 멀리 있던 주오가 대답했다.
“선우는 뒤로 빠지고 은기 혼자 있으면 들어올 수밖에 없어.”
“포탑 끼고 있으면 쟤네 더 안 들어올 것 같은데.”
선우가 없다고 해도 적을 인지해 공격을 하는 포탑이 옆에 있다면 상대가 무리할 이유가 없었다. 쓸데없는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은기의 말에 주오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무조건 들어와. 지금 탑, 미드, 바텀에서 다 손해 봤는데 아무리 후반 보고 누우려고 해도 이런 상태면 쟤네도 시간 못 끌어. 네가 현상금도 들고 있으니까 너 잡으러 각 보려고 할 거야.”
“진짜 그렇다고 해도 나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이런 상태의 주오가 말하는 것은 대부분 그대로 흘러갔었다. 주오와 오래 함께했던 은기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대가 들어오는데 2:1로 어떻게 버티라는 건지, 은기는 자신을 너무 믿는 주오를 힐끔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들어올 때 도주기로 피해. 믿는다, 은기야.”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주오가 말하자 은기는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기에 은기는 자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혹시라도 못 피하면 저는 몰라요.”
“설마.”
주오가 걱정 없다는 듯 웃는 동안 선우는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모습을 숨겼고, 은기는 연기를 시작했다. 혼자 있어서 뒤로 빼는 것처럼 사리자 상대가 주오의 예상대로 앞으로 밀고 들어왔다.
쿨타임이 긴 대쉬기이자 도주기인 스킬을 쓰며 순식간에 들어와 이니시를 여는 상대 서포터를 마찬가지로 스킬로 피한 은기가 빠르게 딜을 넣기 시작했다.
그 틈에 몸을 숨겼던 선우가 번개같이 튀어나와 상대에게 이니시를 걸었다. 몸이 붕 뜬 적을 인지한 포탑이 공격을 시작했고, 은기 역시 상대 원딜을 타깃팅했다.
포탑의 딜은 무시할 게 못 됐다. 몸이 약한 상대의 피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이내 전사했다.
[아아아아악!!! 이거 좀 낚시의 느낌이 있었는데 DW 왜 들어간 거죠?!]
처참한 사고에 유기현 해설이 비명을 질렀다. 하이톤으로 찢어지는 음성에 귀 한쪽을 막은 이영중 캐스터가 입을 열었다.
[이러면 후반 지향이라고 해도 타격이 너무 큰 거 아닙니까?!]
[아아, 이러면 진짜 버티기 힘들어지는데요, DW!!!]
후반으로 버티고 가는 것도 버팀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라인도 상처 입지 않은 곳이 없는 DW가 후반을 가는 것은 무리였다. DW는 포기하지 않고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몰아치는 제라드의 공격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아니?! 여기서 SUHO 선수의 솔킬이 또다시 터져 나옵니다!]
거침없는 수호의 플레이에 경기장이 함성으로 가득 찼다.
[와, 이거 DW. 희망이 없습니다. 제 눈에는 보이지가 않아요. 오브젝트 주도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느 라인 하나라도 상대보다 더 성장한 곳이 없는데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유기현 해설의 음성에서 DW를 향한 안타까움이 짙게 묻어 나왔다. 박동진 해설도 그에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이거 답이 없는데요? 후반을 볼 거면 최소 40분까지 가야 하는데 갈 여력이 없습니다.]
안타깝다는 듯 눈가를 찡그린 박동진 해설이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듯 더욱 거칠게 몰아쳤다. 이미 성장세는 막을 수 없을 정도였다.
탑, 미드, 바텀. 모든 라인이 밀리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정글이 적재적소로 필요한 곳을 찔러주는 탓에 DW는 희망이 없었다.
그렇게 게임은 20분이 조금 넘는 시간에 빠르게 끝이 났다.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제라드의 완승이었다. 그리고 다음 세트, 그다음 세트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3:0으로 깔끔한 제라드의 승리였다.
[제라드!!! 서머 시즌 후반의 부진을 극복하고 월드 챔피언십에서 아주 극강의 폼을 보여주면서 GG!!! 4강으로 올라갑니다!]
상대 팀의 보석이 깨지며 화면 가득 투명한 빛줄기가 번졌다.
[이야, 어제는 주이가 4강 티켓을 거머쥐었는데 오늘은 제라드가 그 티켓을 가져가는군요.]
한국 팀이 4강에 올라가니 같은 한국 리그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자랑스러운지 이영중 캐스터의 얼굴에 뿌듯함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건 제라드의 감독인 진형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게임 시간과 내용 면에서도 완승이라고 할 수 있는 완벽한 경기력에 진형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너무 잘했다! 베스트야, 베스트!”
“진짜 생각보다 더 좋던데. 후반만 가지 말라니까 초반부터 박살을 내놓더라.”
루퍼도 결과가 만족스러운지 활짝 웃으며 주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승리에 들떠 있는 선수석에서 유일하게 차분히 키보드를 정리하고 있는 수호를 돌아보며 주오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키보드의 줄을 감고 있던 수호는 자신의 앞에서 팔을 벌리고 방긋 웃는 주오를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오의 품에 자신의 몸을 끼워 넣은 수호가 그의 등 뒤로 팔을 감았다.
“수호야, 솔킬 진짜 멋있었어.”
“형도 갱킹 멋있었어요.”
수호의 말에 주오의 귓가가 슬쩍 붉어졌다. 수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주오의 손길을 느끼며 그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승리도 좋지만, 이런 주오의 행동도 너무나 좋았다. 다음 경기를 위해 어서 짐을 챙겨 나가야 하는데도 수호는 계속 주오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수호야,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조금만 더요.”
“음…….”
“뭘 조금만 더야. 빨리 짐이나 챙겨.”
결국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떼어낸 건 우찬이었다. 수호는 주오의 등 뒤에서 장비가 든 백팩을 메고 뽀로통한 시선을 하고 있는 우찬과 눈을 맞췄다. 그러자 우찬이 눈을 세모꼴로 뜨며 입을 열었다.
“빨리 나와.”
“……알았어.”
수호는 천천히 주오의 허리를 감쌌던 팔의 힘을 풀었다. 맞닿았던 주오의 온기가 점점 멀어지는 게 더없이 아쉬웠다. 그래서 힘을 풀던 수호의 팔이 잠시 멈칫했지만, 여전히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우찬의 시선에 주오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주아주, 어?! 누가 보면 둘만 팀인 줄 알겠어.”
우찬이 흥, 분노의 콧방귀를 뀌며 선수석을 나서자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선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찬이가 자기 안 끼워줬다고 삐졌나 본데?”
“그러게요.”
은기가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그러고 있냐고, 정신 차리라는 듯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주오와 수호를 바라봤다. 주오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하하, 우찬이는 내가 달랠게.”
“그러면 형이 달래야지 누가 달래요.”
은기의 타박은 한 번 더 이어졌다. 주오가 은기에게 사과를 하고 있을 때 선우가 수호에게 다가왔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아무리 사이 안다고 해도 카메라 앞에서 너무 대놓고 그러면 우리도 당황스럽다.”
“죄송해요.”
“죄송하라고 한 말은 아니고. 일단 가자. 여기 다음에는 체스가 쓴다더라. 빨리 비워줘야 애들도 준비하지.”
“네.”
4강으로 향하는 티켓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까지 예선 조별 그룹에서 1위를 했던 팀들이 모두 승리를 거뒀다. 남은 시합은 1등으로 올라온 PXD와 2등으로 올라온 체스였다.
수호는 꼭 제라드의 저주를 깰 거라고 4강에서 보자던 지한을 떠올렸다.
“이겼으면 좋겠는데.”
걸음을 옮기던 수호가 작게 중얼거리자 그 소리를 귀신같이 알아들은 주오가 생긋 웃었다.
“그럴 거야.”
“뭐가요?”
수호는 갑작스런 주오의 대답에 고개를 들어 주오를 바라봤다. 뭐가 그럴 거야라는 걸까. 수호의 시선의 의아함으로 물들자 주오가 말을 이었다.
“체스가 이길 거라고.”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요?”
“잘하니까. 그러니까 체스가 이길 거야.”
“PXD도 잘하잖아요.”
그렇기에 조별 예선 1위로 올라왔을 거다. 하지만 주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걱정 없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체스가 더 잘해. PXD랑 체스랑 성향이 비슷한 면이 있어. 둘 다 탑 중심으로 이득을 굴려가는 팀이라는 거지. 똑같은 플레이 스타일이면 당연히 그 중심 선수의 실력이 가장 중요한데, 지한이가 PXD 탑보다 잘하니까 체스가 이길 거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랬다. PXD가 예선에서 체스에 비해서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줬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체스가 밀리는 양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개인의 능력치만 두고 본다면 지한이 쪽이 조금 더 밸런스가 잡혀 있는 편이기도 했다.
주오가 자신 있게 체스가 이길 거라고 단언한 이유를 이해한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형은 다른 팀에 대한 것도 분석 많이 하나 봐요.”
보통 타 팀의 선수나 전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자세히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주오는 늘 팀과 선수에 대한 지식을 방대하게 갖추고 있었다. 수호가 신기하고 대단하다는 듯 말간 눈으로 주오를 바라보자 그가 민망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경기에서 피지컬로 승부를 보기보단 설계를 하는 편이니까 선수나 팀 플레이 성향을 알아두는 게 도움이 많이 되거든. 그래서 타 팀 경기도 많이 찾아보는 편이고.”
간혹 연습이 끝난 밤에도 주오는 다른 한국 팀들의 시합 영상이나 개인 방송 영상, 그리고 해외 팀들의 경기 영상까지 찾아보곤 했다. 수호는 그럴 때마다 리그를 보는 걸 정말 좋아하는 형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게 분석을 하기 위해서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 것까지 연습으로 봤다면 대체 김주오는 하루에 몇 시간을 연습에 할애하는 걸까. 현재 활동 중인 프로게이머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연차를 자랑하는 선수였지만, 그는 지금까지 연습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잘한다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선수가 아닐까?
수호는 주오가 왜 지금까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수호는 평소와 같이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를 짓는 주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볍게 주오를 끌어안은 수호는 온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형, 형은 진짜 프로 선수 중에서 가장 멋있어요.”
김주오는 알면 알수록 동경을 넘어 존경하게 되는 선수였다.
갑작스러운 수호의 고백에 주오는 엉성하게 수호의 등에 손을 얹은 채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부끄러움과 기쁨에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수호를 마주 안았다.
“수호야, 그 말 내가 프로 생활 하면서 들은 최고의 칭찬이야.”
사람 대 사람으로서도 맞지만, 선수 대 선수로 수호를 동경해 왔던 주오였다. 그런 상대에게 인정받는다는 건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감동이었다.
정말 행복한 듯 주오의 미소는 끊이질 않았고, 그 낮은 울림소리는 수호의 귓가에 한동안 맴돌았다.
하지만 포근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복도에 서서 부둥켜안은 채 따라오지 않는 두 사람을 발견한 은기가 다시 도끼눈을 떴다. 서머 때보다는 안정적이긴 하지만 대회를 하는 은기는 언제나 예민한 편이었기에 유난히 시선이 매서웠다. 주오와 수호는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며 이번에는 조용히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주오의 예상대로 다음 경기인 PXD와 체스의 경기는 접전을 벌이며 3:2로 체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월드 챔피언십 4강에 한국 팀 세 곳의 이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