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40)

Chapter 10 흐림 뒤 맑음

한국에서 개최된 월챔이기에 유독 관중에는 한국 팬이 많았다. 제라드가 첫 경기를 승리로 막을 내리자 관중들이 뜨겁게 환호했다. 우찬과 선우는 선수석을 빠져나와 무대 아래로 향하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오늘 기선제압 거하게 하던데? 너무 잘했다.”

진형은 자랑스러울 만큼 완벽한 승리를 보여준 선수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만족감이 아주 철철 흐르는 윤택한 미소에 선우가 짓궂게 웃었다.

“감독님, 좋아하는 거 너무 티 내시는 거 아니에요?”

“이야, 어떻게 안 좋을 수가 있냐. 오늘 정말 너무 멋있었다. 남은 중국, 북미 팀도 오늘처럼 깔끔하게 끝내보자.”

“그래요,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기뻐하는 진형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선우였다. 그들의 뒤에서 조용히 걷고 있던 수호는 옆으로 찰싹 달라붙어 오는 사람의 온기에 고개를 들었다.

“왜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싶어 묻자 주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붙어 있고 싶어서. 혹시 불편해?”

“아니요.”

“그러면 이 정도는?”

그러면서 더욱 몸을 붙여오는 주오였다. 정말이지 불편하다고 느낄 정도로 가깝게 다가오는 주오를 퉁명스러운 시선으로 보자 주오가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과했…….”

“이진형!”

말을 잇던 주오는 갑자기 경기장 복도에 크게 울리는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제라드의 전원이 소리의 발원지인 앞을 보자 주이의 감독인 윤채현이 반갑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채현을 발견한 진형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서머 결승전 이후로 처음 보는 두 사람이었다. 경쟁 상대라고는 해도 선수 시절부터 코치까지 오랜 시간을 함께해 왔기에 사이가 무척이나 돈독했다.

오늘은 서로의 경기를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는 날이었다. 서로가 상대이지 않은 오늘 제라드의 승리를 채현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오늘 경기력 너무 좋던데? 1위로 올라가겠더라.”

“하하하, 그렇지? 요즘 애들이 물 만난 물고기 같지 뭐야. 너네 애들은 어때?”

“우리 애들? 뭐, 평소랑 똑같지.”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진형에게 건넨 채현이 수호와 선우를 바라봤다.

“수호도 슬럼프 극복한 것 같더라. 선우도 서포터에 익숙해진 것 같고.”

“익숙해질 만하죠. 그런데 여긴 왜 혼자 있으세요?”

경기장과 이어지는 복도였다. 다음 경기가 주이인 걸 감안하면 채현 혼자 있는 건 의아한 상황이었다. 선우의 물음에 채현이 웃었다.

“아직 대기실에 있어. 아마 이제 곧 올걸?”

“감독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복도 끝에서 신태민을 주축으로 주이의 선수들이 나타났다. 태민은 손을 붕붕 흔들면서 달려왔다. 그리고 그 뒤쪽에서 걷던 선수들도 선우와 수호를 발견했는지 방긋 웃었다.

“선우 형! 수호 형! 오늘 경기 미쳤던데?”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는 주이의 탑 라이너 기연이 반갑다는 듯 말을 건네왔다. 낯가림이 심한 수호도 제법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기연이었다. 수호도 반갑게, 하지만 반가워 보이지 않는 뚱한 얼굴로 기연을 맞이했다.

“응.”

“진짜 이 형은 한결같네. 말이 그게 다예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수호의 반응에 기연이 야속하다는 듯 수호의 팔뚝을 꾹 눌렀다. 수호는 투정부리는 기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뭐라고 해.”

“아니, 그런 거 있잖아요. 오늘은 운이 좋았다든가. 컨디션이 좋았다든가.”

“둘 다 그냥 그랬는데.”

딱히 운이랑 컨디션에 신경 쓰지 않는 수호였다. 무미건조한 수호의 음성에 기연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수호랑 수비 많이 친한가 봐.”

갑자기 위에서 들려오는 놀란 음성에 수호와 기연이 고개를 들었다. 주오가 신기하다는 눈을 깜빡이며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수호가 누군가와 이렇게 친근하게 말을 하는 것은 희귀한 광경이었다.

“평범해요.”

“아, 레인 형 오랜만이에요. 전에 저희 숙소 앞에서 마주쳤었죠?”

기연은 수호가 제라드로 이적 전에 주오가 주이 숙소로 데려다줬던 날이 떠올랐다. 수호가 주말에 외출을 한 것도 놀랄 일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불편해했던 주오가 데려다줬었다. 기연은 여전히 신기한 마음에 주오와 수호를 번갈아 봤다.

“나는 형이 제라드로 갈 줄은 몰랐어. 다른 곳은 몰라도 진짜 제라드는 절대 안 갈 줄 알았는데…….”

주오의 수호에 대한 짝사랑이 유명한 만큼, 수호의 주오 기피증도 유명했다. 그렇기에 수호가 제라드로 이적을 한다고 결정했을 때 다들 놀랐었다. 그건 같은 팀이었던 기연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갑자기 사이가 좋아진 주오와 수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연의 어깨를 선우가 감쌌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인생 아니겠냐. 너 우리 없어져서 심심했지?”

선우가 기연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대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기연은 단박에 눈살을 찡그렸다.

“됐거든요! 형이 구박 안 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오, 김기연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내가 없어서 좋았다고? 나쁜 자식이네.”

선우가 기연의 머리를 마구 헝클면서 괴롭히자 채현이 질린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우리 이제 가봐야 하니까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서로 그룹 1위로 올라가자고. 그래야 8강에서 안 마주칠 거 아니야.”

서로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보기를 바라는 건 같은 리그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나 작년 결승전의 주인공들인 주이와 제라드는 더더욱 그랬다.

진형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왕이면 결승에서 만나자고. 4강에서 바로 만나면 김새잖아.”

“하긴 그때 떨어지면 억울하긴 하겠다.”

“너네 얘기지?”

묘하게 주어를 빼고 말하는 채현을 보며 진형이 웃었다. 장난스러운 음성 속에서도 절대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채현은 그런 진형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때 가서 보자고. 그러면 다음에 또 보자.”

채현을 따라 이동하며 기연이 손을 흔들었다. 수호도 기연에게 마주 살랑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옆에서 거대한 덩치가 찰싹 붙어왔다.

“수호는 인기가 너무 많아. 반지는 나보다 수호가 껴야 하는 거 아닐까?”

시무룩해진 주오가 중얼거리자 수호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바라봤다.

“수호는 인기가 많잖아. 프로 중에서 수호 싫어하는 사람 없잖아.”

“그건 형도 마찬가지잖아요.”

오히려 1세대까지 포함하면 팬은 주오가 더 많았다. 수호는 주오의 투정이 귀여웠다. 살며시 웃자 주오가 여전히 침울한 얼굴로 찰싹 붙어왔다.

“그치만 수호는 너무 멋있는걸. 남들이 막 수호를 뺏어 가면 어떡하지.”

수호는 발끝을 들어 여전히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주오의 귀에 속삭였다.

“전 형이 좋아요.”

간결하지만 흔들림 없는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주오는 수줍게 웃었다.

“나도, 수호가 좋아.”

수호는 주오를 보며 웃었다. 서로를 보며 은밀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을 은기가 불렀다.

“그만하고 빨리 돌아가요. 연습해야죠.”

B그룹에 강한 경쟁자가 없다고는 하나 그래도 연습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은기의 부름에 둘만의 세계에서 헤엄치던 수호와 주오가 정신을 차리고는 은기를 따라나섰다.

이어진 주이의 경기는 당연하게도 주이의 퍼펙트한 승리였다. 주이가 있는 A그룹은 유난히도 치열했다. 작년 4강까지 올랐던 팀들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오래전부터 월드 챔피언십 단골 팀들로 구성된 그룹에서 주이는 파죽지세로 승을 쌓아갔다.

물론 연승을 이어간 건 제라드도 마찬가지였다.

열흘이 지난 시점, 그룹 스테이지 결과는 예상대로 A그룹 1위는 주이, B그룹 1위는 제라드. 그리고 D그룹 2위로 체스가 월드 챔피언십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 * *

[게임/11023300] 월챔 8강 진출팀 확정

한국 팀 전부 본선 진출. 주이랑 제라드는 조 1위로 올라갔고 체스는 2위로 올라감.

한국: 제라드, 주이, 체스

중국: Bullet Gaming, PXD

유럽: Red Cow, DW

북미: T.T

이렇게 8팀이 진출함. 낼 모레 조 추첨한다는데 우리나라 애들끼리 안 붙었으면 좋겠다...

일단 저 중에서도 1위로 진출한 팀은 제라드, 주이, T.T, PXD 이렇게 네 팀임.

경기 보니까 주이는 똑같이 잘하고, 제라드는 서머랑은 확연히 다르더라. 그리고 T.T는 북미이긴 해도 선수진에 한국 선수가 3명이나 있어섴ㅋㅋㅋㅋㅋ 플레이도 약간 한국 느낌 남.

유럽은 작년에 비해서 좀 애매한 것 같고... 중국은 작년이랑 비슷한 듯.

└ 이번에 약간 1위 팀이랑 2위팀 경기력 차이가 좀 심하더라. 결국 그룹 1위 한 제라드, 주이, T.T, PXD 이 중에서 우승팀 나오는 건 확실하고 잘하면 8강에서도 쟤네가 다 이겨서 4강 가는 건 어쩌나 싶을 정도더라.

└ 그런가. 근데 그룹 스테이지에서 전략 다 안 보여주는 팀들도 있으니까 그거 생각하면 섣부른 판단일 듯?

└ ㅇㅈ. 체스는 힘 빼고 한 거 같던데 8강에선 잘할 거 같음.

└ 근데 예상치도 못하게 북미가 개잘하더라... T.T 뭐임?? 작년에도 이랬어?

└ ㄴㄴ 스타일도 진짜 북미식으로 존나 망나니처럼 액셀 밟는 팀이었음. 그런데 올해 한국 선수 2명 영입하더니 스타일도 바뀐 것 같더라.

└ 감독도 한국인임.

└ 그래서 한국 스타일 됐나 보넼ㅋㅋㅋㅋㅋ

└ 그래도 북미 갬성 남아 있어서 미친놈 같은 때는 진짜 개미친놈처럼 들이박더라. 그래도 그거 조율이 잘되어 있는 것 같아서 이번에 좀 높게 올라갈 듯?

[게임/11023350] 이번 우승팀 누구 같냐? 궁예들아 나와봐.

나는 제라드

└ 난 주이.

└ 2222

└ 수호 퇴물이라 이제 제라드는 가망 없지 않냐?

└ 너 오늘 경기 안 봤냐?;;; 1대3 드리블 보고도 퇴물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 수호는 근데...너무 기대치가 높아서 그 정도 해줘야 평균인 거임.

└ ㅇㅈ

└ 서머에서 주이한테 떡발린 제라드요?

└ 너는 떡발렸다는 의미를 모르냐? 3:2 스코어였는데 무슨 떡발려;;

└ 정확하게는 수호가 OZ한테 떡발린 거겠짘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말 정확하게 하네. 수호랑 무 빼고는 다 괜찮게 했음;; 특히나 레인이가 멱살 잡았던 모르냐?

└ 주이든 제라드든 그냥 결승전에 한국 팀만 올라가면 좋겠음.

└ ㅇㅈ. 국제전인데 한국 팀 팬끼리 그만 좀 싸워라;;

└ 체스도 준결승까지 갔으면 하는 게 바람이다... 국뽕 좀 느껴보자!

└ 오늘 제라드 상태 보니까 우승각도 보이긴 하더라. 이수호 서머 때 겁나 절더니 오늘은 또 다른 사람이던뎈ㅋㅋㅋㅋㅋ

└ 폼 회복한 듯.

└ 무도 포지션 잘 잡더라. 막 짤리고 그런 거 없어서 기대 중.

* * *

“아우 떨려!”

“뽑기 뽑는 게 뭐가 그렇게 떨리냐?”

8강 조 추첨 당일. 감독인 진형과 주장인 주오를 제외한 제라드의 선수들은 모두 연습실에 모여 조 추첨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 추첨은 8팀의 주장들이 한 번씩 상자에 담긴 볼을 꺼내 대진표를 완성하는 방식이었다.

그 때문에 불려 나간 주오는 지금 거대한 TV 화면 안에서 진형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화면에서 유독 주오가 돋보였다. 해외 선수들 사이에서도 큰 신장과 화려하면서 반듯한 외모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수호는 화면 속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역시 반지는 주오가 끼는 게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런 뜬금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조 추첨이 시작됐다.

각 그룹 1위 팀 주장이 차례로 나왔다. A그룹의 1위 주이의 주장인 김기연이 안내에 따라 상자에 손을 넣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큼직한 빨간 공들을 뒤적거린 기연이 구석에서 공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캐스터에게 건네자 캐스터는 공을 양쪽으로 분해하곤 둘둘 말린 종이 한 장을 카메라를 향해 펼쳤다.

Bullet Gaming

[A조 첫 번째 팀은 중국의 Bullet Gaming입니다!]

A부터 D까지 적힌 대진표에 처음으로 Bullet Gaming이 이름을 올렸다.

“아, A조로 갔으면 좋겠다.”

선우가 중얼거리자 은기가 선우를 돌아봤다.

“왜요? 저 팀이랑 하고 싶어요?”

“아아, 나는 북미랑 유럽 애들은 잘 안 맞더라고.”

오래 선우와 팀을 이뤄봤던 수호는 선우의 서양 기피증을 알고 있었다.

인접한 중국은 플레이 스타일이 한국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다만 중국은 운영보다는 전투에 포커싱을 더욱 집중한다는 차이였다.

하지만 유럽과 북미는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기묘하고 뜬금없는 플레이가 자주 나오는 곳이다 보니 연습을 어느 기준으로 할지도 모호했다. 경기 초반에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사전 준비보다는 사후 판단력이 더 필요로 하는 경기들이었다. 선우는 그런 것엔 취약했다.

선우가 제발 A그룹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동안 두 번째 공이 뽑혔다. 다음에 뽑힌 팀은 Red Cow. 하지만 블렛 게이밍이랑 같은 2위 팀이기 때문에 Red Cow는 자연스럽게 B그룹으로 넘어갔다. 1위와 1위, 2위와 2위가 겨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세 번째로 공을 뽑게 된 주오가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반듯한 걸음으로 향하는 주오는 정말 멋있었다. 수호는 어느새 입을 벌리고 주오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건 수호뿐만이 아니었다. 늘 같이 있어서 몰랐지만 조금 멀리 떨어져서 보니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다른 세계에 살 것 같은 남자.

“레인 씨 진짜 잘생기긴 했다. 프로게이머 얼굴이 저래도 되는 거야?”

감탄을 내뱉던 우찬이 갑자기 억울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선우가 우찬의 볼을 당겼다.

“그러면 프로게이머 얼굴은 어떻게 생겨야 하는 거냐?”

“아니, 그냥 반칙이지! 저 형은 어릴 때도 길거리 캐스팅도 많이 당해봤다던데 왜 그거 안 하고 이거 하고 있대? 그거 알아? 아직도 사무국에 무슨 방송이 자꾸 섭외하려고 연락 온다더라.”

“요즘 프로게이머들도 TV 방송 많이 나가는 추세니까.”

예전에는 서로 완전히 분리된 방송의 느낌이 강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주오에게 방송 제의가 온다는 건 수호도 알고 있었다. 아마 은퇴를 한다고 하면 그 섭외 전화가 늘어나지 않을까 싶었다. 마크스가 좋으니 방송인이 된다고 해도 잘나갈 거다.

갑자기 주오가 게임이 아닌 다른 방향의 직군으로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수호는 아쉬워졌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슬럼프가 올 만큼 악독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수호는 옷 위로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화면 속에서 주오가 상자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공을 뒤적거리는 손이 확대되고 그 속에서 반짝이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적나라하게 애인이 있다고 말해주는 그 표시에 수호는 아쉽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수호는 화면으로 보이는 주오의 손을 보며 역시나 반지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주오가 꺼낸 공에서 나온 팀은 주이였다.

A그룹은 주이 vs Bullet Gaming으로 확정되었다.

선우는 탐내던 자리를 주이에게 뺏기자 눈가를 찡그렸다.

“아, 이러면 유럽이랑 붙겠네.”

북미는 1위 팀밖에 존재하지 않아 8강부터 붙을 확률은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제라드의 상대는 유럽의 DW로 정해졌다. DW는 처음으로 월드 챔피언십에 발을 들인 팀이었다. 아직 많은 데이터가 없는 팀이기도 했다.

선우는 점입가경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룹 스테이지에서 모든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고 해도 전반적인 느낌은 파악할 수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느낌이긴 했지만, 까다롭고 힘든 상대는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체스랑 8강에서부터 붙으면 어쩌나 했는데.”

차분하게 흐르는 은기의 말에 수호와 루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팀이 경쟁 상대이기는 하나 그래도 한국 팀은 최대한 늦게 만나고 싶었다. 모두가 다행이라고 여기는 동안 8개의 팀의 대진표가 완성됐다.

[A그룹: 주이 vs Bullet Gaming]

[B그룹: T.T vs Red Cow]

[C그룹: 제라드 vs DW]

[D그룹: PXD vs 체스]

모든 대진표가 확정되자 선우가 먹고 있던 두유 팩을 내려놓고 수호를 돌아봤다.

“수호 너 결승에서 리벤지 가능하겠다.”

전승을 가정했을 때 제라드는 결승에서 주이와 만날 수 있었다. 서머 시즌에 빼앗겼던 우승팀이라는 영광을 도로 가져올 수 있는 기회였다.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까지도.

수호는 평소와 같이 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원래부터 제가 더 잘해요.”

“하하하, 그래. 그건 알지. 네가 더 잘하는데 남들이 너 저번에 발렸다고 퇴물이라고 하니까 신경 쓰고 있을 줄 알았지.”

애초에 그런 커뮤니티를 딱히 찾아보지 않는 수호였다.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거 알잖아요.”

담백한 말에 선우가 씩 웃었다. 수호가 신경 쓰는 건 하나였다. 그저 이기고 싶다는 강한 소망. 책임감과 부담감으로 짓눌려지는 소망이 아닌 그저 단순한 바람 그 자체. 그것 하나로 정상에 선 수호였다.

“알지. 난 네가 은퇴하기 전까지 계속 정상이었으면 좋겠다.”

“……?”

뜬금없는 선우의 말에 수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선우는 자신에게 향한 시선을 느끼며 빨대를 질겅질겅 씹었다.

“내가 데뷔하기 전부터 넌 정상이었잖아. 그런 선수랑 같은 팀으로 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뻤는지 아냐? 난 계속 그 기분으로 선수 생활 하고 싶다. 벌써부터 밀리면 되겠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제 신예로 나온 선수한테 지는 건 용납 못 한다는 듯 선우가 눈을 반짝였다. 자기만족이면서 걱정 어린 선우의 말에 수호가 뚱한 시선으로 대답했다.

“저는 은퇴할 때까지 밀려날 생각 없어요.”

명쾌하면서도 단호한 대답에 선우가 미소 짓더니 갑자기 수호의 목에 팔을 덥석 감아왔다.

“그러면 나는 수호랑 계속 함께해야지. 우승 맛 좀 보자.”

장난스러운 선우의 말에 은기가 대번에 눈가를 찡그렸다.

“수호가 같이해 주긴 한대요?”

“그럼! 수호는 나 좋아하는걸. 그치?”

장난스럽게 웃는 선우를 보며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편이긴 했다. 편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잘했다.

은기로서는 김새는 답변이었는지 은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선우가 이번에는 은기에게 붙었다.

“우리 은기, 서운해? 은기랑도 오래오래 할까?”

“저리 가요. 무서워요.”

팔을 뿌리치려는 은기에게 찰싹 붙어 장난을 치는 선우를 보던 수호는 다시 대진표를 바라봤다.

앞으로 3경기. 우승은 멀지 않았다. 수호가 마음을 다잡고 주오가 오길 기다리며 컴퓨터 앞에 앉자 잠잠하던 핸드폰이 지잉 울렸다.

[CHESS PEOPLE: 수호 형!!! 우리 4강에서 붙는 거 봤어요?]

체스, 지한의 문자였다. 수호는 토독토독 자판을 두드려 답장을 보냈다.

[어. 4강에서 보자.]

[CHESS PEOPLE: 이번에는 제라드 저주 꼭 깰 거니까 두고 봐요!]

스프링도 서머도 제라드라는 벽에서 무너졌던 체스였다. 바득바득 이를 갈던 지한을 떠올리며 수호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하지만 바로 다시 진동이 울렸다.

[주오 형: 수호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주오 형: 지금 돌아가는 길인데 있으면 말해. 사 갈게.]

조 추첨이 끝나고 돌아오려는지 주오가 연락을 해왔다. 수호는 망설임 없이 답장을 보냈다.

[괜찮아요. 빨리 와요. 보고 싶어요.]

[주오 형: 응! 빨리 갈게! :>]

보내자마자 오는 답변을 보며 수호는 웃었다. 수호는 주오가 오길 기다리면서 그가 보낸 문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깐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너무나 보고 싶었다.

* * *

본선 경기가 처음으로 열리는 날이었다. 오늘은 주이가 출전했다. A와 B그룹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지만, 제라드와 체스, 그리고 그밖에 다른 팀 선수들도 경기장에 모였다.

경기장은 CKR 리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북적였다. 부산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었음에도 사람이 미어터질 정도였다. 예선에서는 빈 좌석도 존재했지만 본선은 매진이었다.

주최 측에서 선수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았다면 직관을 오는 것도 무리일 정도였다.

곧 시작될 주이와 Bullet Gaming의 경기를 보러 자리에 앉은 수호는 주오를 바라봤다.

“연습 안 하고 구경 와도 되는 거예요? 우리 내일 시합이잖아요.”

“그래서 주이 경기만 보고 돌아갈 거래. 아, 핫도그 사 왔는데 먹을래?”

주오는 한가득 사 온 주전부리 중에 핫도그를 내밀었다. 감자가 콕콕 박힌 핫도그에는 설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의외로 단걸 좋아하는 주오는 이런 달달한 것을 자주 사 왔다.

“괜찮아요.”

“아, 이거 안에는 매운 소스 들어 있어. 수호 매운 거 좋아하잖아.”

주오와는 반대로 수호는 단 음식을 즐기지 않았다. 느끼한 음식은 더더욱. 그런 수호의 취향을 반영해 매운 핫도그를 사 왔다며 웃는 주오를 보자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호는 받아 든 핫도그를 베어 물었다. 달고 고소한 맛이 순식간에 입안에 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화끈한 매운 소스가 입안을 덮쳤다. 딱 수호가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느끼함이었다.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맛에 핫도그를 한 입 더 베어물자 주오가 활짝 웃어 보였다.

“입에 맞나 보네. 다행이다. 콜라도 사 왔으니까 이것도 마시면서 먹어.”

수호의 빈손에 콜라를 쥐여 준 주오는 자신 몫으로 사 온 핫도그를 입에 물곤 남은 봉투를 옆자리에 앉은 은기에게 넘겼다.

“저녁 안 먹고 와서 배고플 것 같아서 사 왔어.”

“아,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은기도 자신의 몫을 꺼내고는 봉투를 다시 선우에게 넘겼다. 마지막인 진형에게까지 봉투가 넘어갔고, 제라드는 다 같이 핫도그를 하나씩 입에 물고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어? 형들! 오랜만이에요.”

빈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걸어온 건 체스의 지한이었다. 지한은 반갑다며 수호와 주오, 은기와 눈을 맞췄다. 체스도 주이의 경기를 보러온 듯했다.

“첫 경기라 그런지 유독 사람 많은 것 같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온 지한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꽉 찬 관객석이 신기한지 감탄을 내뱉기도 했다.

“아 참, 재인 형 이번에 객원 해설로 온다던데 주오 형 들었어요?”

“어. 내일 온다고 하더라.”

“거의 1년 만에 보는 거라 진짜 반가울 거 같아요. 경기 끝나고 잠깐 만나기로 했는데 형들도 같이 갈래요?”

올스타전을 함께한 멤버였다. 올스타전에 큰 애정은 없었지만, 작년 올스타전은 수호에게도 색다른 대회였다. 주오와 인연을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수호는 주오를 바라봤다. 생각을 하는 듯 잠시 말이 없던 주오가 입을 열었다.

“아냐, 경기 전에 잠깐 볼 수 있으니까 그때 볼게. 제대로 만나는 건 월챔 끝나고 봐도 되니까.”

“그래요? 알겠어요. 수호 형이랑 은기 형도 안 오실 거죠?”

우찬의 물음에 은기와 수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라드의 누구보다 재인과 사이가 돈독한 사람이 주오였다. 그런 주오조차 경기에 집중하려 가지 않는 약속에 두 사람이 갈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서머에서 크게 흔들렸던 두 사람이었기에, 이번 월챔에서 바라는 목표는 더없이 높았다.

모두에게 거절당한 지한이 아쉽다는 표정을 잠시 지어 보이고는 이내 평소처럼 활짝 웃었다.

“뭐, 월챔 끝나고 다 같이 한번 봐요. 시간은 많으니까.”

월드 챔피언십을 위해 1년을 연습실에만 박혀 있는 선수들이었다. 그만큼 중요하고 큰 대회였다. 하지만 그 대회가 끝나면 팀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다른 시즌들보다 휴가 기간이 길었다.

그리고 수호는 그때 주오와 함께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 제주도에서 바다도 보고 밥도 먹고, 무드등도 만들어보자며 설렘 가득한 얼굴로 웃던 주오가 떠올라 수호는 물끄러미 옆에 앉은 그를 바라봤다.

그때와는 주오는 달리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막 시작된 경기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딱딱한 표정의 주오는 희귀해 수호는 그 모습을 기억에 담고 싶어서 그를 빤히 바라봤다.

열렬한 시선 때문인지 전광판을 보고 있던 주오가 왜 그러냐는 눈으로 수호와 눈을 맞췄다.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 봤어요.”

“……수호가 그러면 경기에 집중 못 하는데.”

주오는 곤란하면서도 기쁜 듯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필 그 손이 또 왼손이어서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수호는 옆에 앉은 남자가 자신의 사람이라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응? 레인 형 여자친구 생기셨어요?! 그 반지 뭐예요? 전에는 없었잖아요.”

반지를 발견한 건 수호뿐이 아니었는지 옆에 앉은 지한이 눈을 땡그랗게 뜨며 물었다.

주오는 활짝 웃었다. 반지를 발견해 줘서 기쁘다는 감정이 아주 절절하게 느껴질 정도의 환한 미소였다.

그 얼굴을 수호와 지한이 멍하니 바라봤다. 언제 봐도 순간적으로 사람을 멍해지게 만드는 외모였다.

“커플링이야. 예쁘지?”

“와, 진짜 예뻐요. 근데 언제부터요?”

“서머 시작 직전부터.”

주오의 말에 지한은 더욱 놀란 듯 눈이 더 커졌다. 원래도 둥글게 크던 눈이 지금은 아주 굉장히 둥글게 컸다.

“생각보다 오래되셨네요. 그런데 형이 연애한다니 의외예요.”

“왜?”

“아니, 제가 보던 형은 매일 수호 형만 따라다녔으니까……. 다른 사람한테 관심 가질 시간은 있었나 싶어서요. 그런데 연애를 하고 있다니, 되게 신기하다…….”

그렇다. 지한의 말이 아주 정확하게 맞았다. 주오는 수호만을 따라다녔고, 다른 사람한테 관심 가질 시간 따위는 단 1초도 없었다. 어느 누가 봐도 주오의 연애는 굉장히 뜬금없는 소식이었다.

수호는 괜히 남은 핫도그를 베어 물었다. 그 옆에서 지한의 말을 듣고 눈을 깜빡이던 주오가 이내 그렇긴 하지, 하며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축하해요. 그런데 형 여자친구는 되게 불안하시겠어요. 형이 인기가 오죽 많아야지.”

핫도그를 삼킨 수호가 지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나 김주오와 만나는 사람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거였구나.

지금까지 주오로 인해 불안했던 날들을 혼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수호를 주오가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이윽고 주오는 수호의 입가에 묻은 케찹을 티슈로 닦아주며 말했다.

“그래서 반지도 애인이 해줬어. 어디 가서 애인 있다고 말하고 다니라고. 귀엽지?”

지한은 환하게 웃으며 수호의 입가를 꼼꼼히 닦는 주오를 기묘한 눈으로 보고는 이내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형 지금 수호 형한테 그러고 있는 거 보면 화내실 것 같은데요. 그게 애인 있다고 말하고 다니는 거냐면서.”

“아, 수호는 괜찮아. 수호한테만 잘해주기로 했거든.”

“……그래요? 하긴, 형이 수호 형 팬인 건 게임 쪽에 관심 있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니까.”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건 참 좋은 거였다. 지한은 의심 한 번 하지 않고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는 주오를 힐끔 바라봤다. 그러자 주오가 눈을 둥글게 휘며 화답했다. 그게 꼭 ‘당당할수록 의심 안 하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수호는 주오를 보며 마주 웃었다. 당당한 사내연애는 참 좋은 거였다.

소소하게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 전광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서머 이후로 OZ는 날개라도 단 듯 더욱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였다. 수호가 보기에도 참신한 스킬 구성과 진입 방법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축될 만한 플레이는 아니었다.

묵묵히 경기를 지켜보고 있자 주오가 작게 속삭였다.

“좋게 말하면 거침없고, 나쁘게 말하면 독선적이네.”

“그렇게 생각해요?”

“굳이 저기서 저렇게 무모하게 파고들 필요는 없었어. 뒤에 팀원들이 백업을 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오히려 상대 백업이 더 빠를 수밖에 없는 위치야.”

“상황도 유리하고 어그로를 꼭 끌어야 할 만큼 급한 상황도 아니죠.”

주오는 수호를 돌아봤다.

“OZ가 수호 너한테 영향 많이 받은 게 보여?”

“제가 저렇게 무모해요?”

수호는 당황스러웠다. 저렇게 자신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돌진하는 타입이었나. 문득 지난날의 경기들을 떠올렸다.

주오는 당혹감에 찬 검은 눈이 데구르르 구르는 걸 보며 웃었다.

“아니. 수호랑은 결이 달라. 수호, 너도 얼핏 보면 무모한 타입인데 자세히 보면 네가 그러는 이유는 항상 존재해. 단순히 네가 잘한다는 걸 뽐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네 역량으로 최선의 방법을 택하지.”

수호도 큰 틀은 OZ와 같았다. 과감하고 화려했다. 하지만 판단의 차이는 있었다.

물론 OZ가 판단도 하지 않고 그저 들이민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OZ는 의아한 판단을 할 때가 많았다.

지금처럼 굳이 다수를 혼자 감당하는 플레이를 할 필요는 없었다. 벌어둔 이득이 많아서 한 번 실수한다고 커버가 되는 상황도 아니었고, 저렇게까지 해서 챙길 만한 오브젝트도 없었다.

저건 단순한 자만이었다.

자신은 이런 것도 보여줄 수 있다는 어린 치기가 가득한 자만.

“주목받는 신예 중에 한 시즌만 반짝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왜 많은지 알아?”

“글쎄요. 그 시즌 메타에 적응을 못 하는 거 아니에요?”

“음, 그것도 중요하지. 아무리 잘하는 선수라고 해도 모든 방식의 플레이를 잘하는 건 아니니까.”

선수가 자신 있어 하는 플레이 방식과 컨디션, 함께하는 팀원, 모든 박자가 맞으면 누구나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성적을 낼 순 있어도 좋은 성적을 계속 유지하는 건 힘들었다. 그리고 주목받는 신예 중에 초반의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선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형은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여러 이유도 있겠지만, 나는 승리로 인한 자만심이라고 생각해. 우승한 팀이 분명 그 시즌에서 열 개의 팀 중에 가장 잘한 팀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야. 그런데 그게 각 팀원이 그 포지션의 모든 선수보다 잘한다는 건 아니야.”

체이스는 팀 게임이었다. 개개인보다는 팀의 조화가 잘 이뤄지는 게 우선이었다. 물론 그러면서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면 더 좋겠지만, 능력이 뛰어나면 그만큼 자신의 플레이에 대한 확신이 컸다. 그래서 오더가 갈리는 경우도 많았고, 자신만 믿고 무모한 플레이를 선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팀은 결국 불협화음이 될 뿐이다. 한 명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 한 명으로 인해 팀이 우승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다구리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신예들은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 우승 한 번 하면 자신이 가장 잘하는 선수가 됐다고 생각하게 되지. 그게 신예들이 한 시즌만 반짝하고 사라지게 되는 이유라고 생각해.”

자만심은 선수 본인과 팀 전체를 갉아먹는다. 본인이 최고라고 생각하기에 판단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게 되고, 실수를 하게 된다. 거기서 팀이 흔들린다. 그런 게임의 결과는 경기를 끝까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무리 한 선수가 잘한다고 해도 팀 게임에서 협동이 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유망주인 신예들은 그런 생각을 잘 하지 못했다. 본인이 캐리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대다수였다.

자신의 실력을 너무 자신해서 팀원과의 협업을 등한시하는 것. 지금 OZ의 플레이가 딱 그런 형상이었다.

“그래도 잘하네.”

진지하게 경기를 지켜보던 체스의 지한이 주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쵸? 보통 저러면 실수가 나오게 마련인데 예선부터 그런 일은 없었으니까. 보통 강심장이 아닌 것 같아요.”

수호는 얌전히 앉아 평온한 눈으로 OZ의 경기를 지켜봤다. 주오의 말처럼 본인이 캐리를 하겠다는 마음인지 OZ의 플레이는 독선적인 면이 돋보였다. 그만큼 자칫하면 큰 실수가 터질 가능성도 컸다.

물론 모두가 주목하는 신예인 OZ, 신태민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수호는 태민의 플레이를 보고도 마음이 평온했다. 불안하지도 초조하지도 않았다. 수호는 자신 있었다. 그 어느 대회보다 손이 가벼웠다.

일방적인 주이의 승리로 경기가 끝났다. 그때까지도 수호는 여전히 담담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런 수호를 보는 주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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