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40)

Chapter 9 Play_off (2)

결승전이 끝나고 약속된 회식 자리는 더없이 시끄러웠다. 한 시즌이 끝났다는 해방감과 그 끝을 준우승으로 끝냈다는 아쉬움으로 선수들은 빠르게 취했다. 특히나 은기와 우찬이 거하게 취했다.

“형, 미아네요. 제가 마지막에 짤려서…….”

은기는 어느새 주오의 옆을 차지하고 앉아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주오는 자신의 어깨를 붙잡아 흔드는 은기를 붙들었다.

“괜찮다니까. 그것보다 너 그만 마셔야겠다.”

주오는 은기의 손에 들린 잔을 뺏어 들었다. 이미 반쯤 흘린 덕에 술은 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손이 자유로워진 은기는 남은 한 손으로 마저 주오의 팔을 붙잡았다.

“올해는 꼬옥 우승시켜 주고 싶었다고오.”

“월챔을 준우승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아쉬워해.”

“그걸 말이라고! 레인 씨! 당연히 마지막 해면 스프링이랑 어? 서머랑! 월챔까지! 3관왕 해야지! 근데 망했어어어.”

이번엔 앞쪽의 우찬이 취해서 괄괄 소리를 질러댔다. 귀가 아플 만큼 큰 목소리 때문에 괜히 수호가 움찔거렸다.

“이놈아, 시끄럽다!”

우찬의 옆에 앉아 있던 진형이 우찬의 등짝을 후려쳤다. 우찬은 아프다고 징징거리다 이내 진형을 붙잡고 투정을 부렸다.

한 시간도 안 돼서 엉망이 되어버린 회식이었지만, 다들 우찬과 은기가 얼마나 서러워하는지 알았기에 그들의 서러움을 다 들어주고 있었다.

묵묵히 술잔을 비우던 수호는 고기쌈을 조심조심 싸고는 주오에게 내밀었다.

“형, 먹어요.”

“응? 나 주는 거야?”

“네.”

은기와 우찬의 투정을 들어주느라 통 먹지 못하던 주오였다. 수호는 그런 주오의 입안에 쌈을 들이댔다. 주오는 기쁘게 웃으며 쌈을 받아먹었다.

염장질을 눈앞에서 보게 된 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그러다가 진짜 연애설 나겠다.”

“게이머한테 연애설이 왜 나요.”

연애설이 하루에도 몇 번씩 터지는 연예인과 다르게 프로게이머는 그런 쪽에서 자유로웠다. 뻔히 알면서 짓궂게 말하는 선우에게 수호가 무심히 대답했다.

“그래도 둘은 날 수도 있지 않나. 주오 형의 열렬한 짝사랑 얘기도 기사로 나왔는데.”

“그래도 정말로 연애한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걸.”

주오는 선우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놀라지도 않고 재미없는 반응에 선우가 입을 삐죽였다.

“아, 반응 재미없어. 그런데 쟤네 벌써부터 저러면 숙소에 어떻게 데려가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는 듯 선우는 횡설수설하고 있는 은기와 우찬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주오는 볼에 가득한 쌈을 삼키고는 웃었다.

“어떻게든 데리고 가야지.”

“우찬이는 그렇다 치고 문제는 은긴데…….”

저 덩치를 대체 어떻게 끌고 가냐고 눈살을 찡그린 선우가 이내 한숨을 쉬며 술잔을 들었다. 수호는 내밀어진 잔에 같이 짠을 하고 잔을 비웠다.

“수호도 취하면 안 돼.”

유일하게 콜라를 마시고 있는 주오가 어느덧 수호 옆에 빈병이 생긴 걸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수호는 주오의 입에 다시 쌈을 넣어줬다.

“형도 진짜 쓸데없는 걱정 한다. 한 병 비운 걸로 얘가 취할 리가 없는데.”

걱정도 많다며 주오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고는 선우가 술을 다시 털어 넣었다.

“아, 선우 혀엉. 말해봐요. 솔직히 저 답답하죠?”

갑자기 은기가 타깃을 바꿔 자신의 서포터인 선우를 불렀다. 갑자기 자신에게 튄 취객의 하소연에 선우가 다시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은기가 눈가를 찡그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역시, 형도 내가 답답했던 거야.”

“야! 대답도 안 듣고 무슨 소리야!”

“형 표정이 말해주고 있어요. 제가 더럽게 답답하다고.”

“미친놈인가? 야, 조은기 정신차려.”

선우는 갑자기 자신을 물고 넘어지는 은기를 달래느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기가 선우를 따라나서며 두 사람이 빠지자 갑자기 테이블이 휑해졌다.

수호는 그 소란 속에서도 주오의 입에 쌈을 넣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주오가 답례라는 듯이 똑같이 쌈을 싸서 수호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수호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먹었다.

“수호야, 많이 먹어.”

꼭꼭 음식을 씹어 삼키는 수호를 주오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수호는 음식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형, 오늘 고마워요.”

“응? 뭐가?”

느닷없는 감사 인사를 이해 못 하겠는지 주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다요. 제가 흔들리는 거 잡아줘서요.”

“어? 아니야, 오히려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해.”

주오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듯 그의 얼굴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무서웠어요. 형이 절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 봐.”

빈 술잔을 손으로 돌리며 수호가 작게 말했다. 시끄러운 소음 사이에서도 그 소리를 단박에 캐치한 주오가 충격을 받았는지 표정이 놀람과 당황으로 변했다.

“대체 왜……? 절대 그럴 일 없어. 나는 언제나 수호 네가 좋아.”

이제는 저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수호는 여전히 충격에서 가시지 않는 듯 초조하게 눈을 굴리는 주오를 보며 웃었다.

“알아요. 그런데 결승전 때까지만 해도 그 생각 했었어요. 제가 이제 게임을 못하게 되면 형이 저한테 실망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형이 좋아하는 선수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면 어떡하나. 형은 절 선수로 좋아하다가 감정이 변한 거였잖아요. 그래서 다른 선수를 동경하게 되고 그러다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처음으로 가지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모든 게 무서웠다. 그로 인해 생겨나는 감정과 생각도 너무나 두려웠다.

하지만 더 무서웠던 건 주오가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주오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비추게 되었던 이유를 지키고 싶었다. 누구보다 잘하는 선수. 그 타이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없으면 자신에게 향한 감정도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주오가 해준 말이 그런 확신을 가지게 했다.

다른 선수들이 닮고 싶어 하는 선수가 최고라고, 시간이 지나도 SUHO라는 선수가 피지컬이라는 개념을 새로 썼다는 건 지워지지 않는 사실이라는 말이.

수호는 반박을 하기 위해 입을 여는 주오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생각 안 해요. 만약에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제가 다시 뺏어 올 거예요. 전 남과 형을 공유할 생각 없어요.”

직설적이고 대담한 고백에 주오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얼굴을 가린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주오가 다시 얼굴을 쑥 손 밖으로 꺼내고는 붉어진 얼굴로 웃었다.

“평생…… 정말 평생 그렇게 생각해 줘. 나도 누가 널 뺏어 가면 꼭 되찾아올 거야.”

애초에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수호는 확신했다. 수호는 어릴 적부터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집요하게 쫓는 경향이 있었다. 무엇보다 한번 좋아한 건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좋아했다. 마음이 변해서 싫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그럴 일은 없어요. 전 한번 좋은 건 계속 좋아해요.”

단호한 수호의 말에 주오는 다시금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붉어진 귓가만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수호는 나 좋아하지?”

행복에 겨워 떨리는 음성이 손가락 틈새로 새어 나왔다. 수호는 주오의 물음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형이 너무 좋아요.”

“하아, 나는 분명 전생에 온 우주를 구했을 거야. 분명해.”

손가락을 벌려 눈을 드러낸 주오가 조심스럽게 눈을 맞춰왔다. 수호는 그런 주오가 너무나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이런 사람과 함께할 가을이 너무나 기대됐다.

“가을에는 우승해요.”

“그래. 꼭 하자.”

간결하면서 힘 있는 주오의 대답에 수호는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 * *

서머 시즌이 끝나고 월드 챔피언십까지 한 달여간의 시간이 남았지만, 제라드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연습했다. 누가 보면 지금이 시즌 중이라고 착각할 만큼 다들 휴가도 접어두고 숙소와 연습실만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엄청난 연습량 때문인지 아니면 심경의 변화 때문인지, 흔들렸던 제라드의 경기력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걱정되었던 은기도 주오와 한동안 면담을 하고 나서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오늘도 승리로 끝맺자 선수들의 표정이 밝았다.

“요즘 분위기 너무 좋은데?”

실수 없이 완벽한 플레이를 보여준 선수들에게 진형이 박수를 쳤다. 우찬이 뿌듯하다는 얼굴로 진형을 돌아봤다.

“그쵸? 아무리 봐도 요즘에 우리 팀이 제일 잘하는 것 같아요.”

“그래그래, 잘한다. 이제 월챔까지 이 주 정도 남았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 폼 유지해 보자.”

“월챔까지는 무슨! 내년도 내후년도 유지할 거예요!”

자신에 찬 우찬의 음성에 선수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서머에서 준우승한 건 뼈아팠지만, 그래도 그것 때문에 선수들의 사기가 더욱 끓어올랐다. 수호는 이 뜨거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수호야, 수호야.”

물끄러미 우찬을 구경하고 있던 수호는 나지막이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주오가 눈가를 둥글게 만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수호는 굳이 속닥거리는 주오가 의아해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오늘 연습 끝나고 나랑 놀러 가자.”

의아한 마음에 묻자 주오는 가볍게 데이트 신청을 해왔다. 하지만 연습은 분명 저녁에 끝이 났다. 정확하게는 저녁이 아닌 밤이었다. 그 이후에 놀러 갈 곳이라고는 술집밖에 없었다.

“밤에 어디 가려고요?”

“오늘 연습 1시간 정도 뒤면 끝나.”

수호는 눈을 깜빡였다. 그걸 주오가 어떻게 알까. 무엇보다 진형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사실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 수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주오는 그런 수호를 보며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걸 어떻…….”

“아, 그리고 오늘은 1시간만 더 하고 퇴근해라.”

수호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진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주오의 말처럼 연습을 빨리 끝낸다는 의미였다. 이건 무슨 상황일까 싶어 수호는 물끄러미 주오와 진형을 바라봤다.

“왜요?”

수호처럼 선우도 이유를 모르겠는지 진형에게 물었다. 그러자 진형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집사람 생일이라 빨리 가봐야 한다.”

“아아, 사모님이랑 좋은 시간 보내세요.”

선우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라드에서 몇 년째 몸을 담그고 있는 주오와 은기, 우찬의 표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평온했다.

“미안하다. 이 주 뒤가 월챔 시작이라 더 빡세게 연습해야 하는데 이렇게 자리 비워서.”

“뭐 어때요. 근 한 달을 연습만 미친 듯이 했으니까 하루는 쉬는 것도 좋죠.”

미안하다는 듯 웃는 진형을 보며 은기가 괜찮다는 듯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숨 쉴 새도 없이 달려온 제라드였다. 시즌 끝나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 선수들은 차라리 잘됐다는 얼굴이었다.

“이럴 줄 알았어요?”

수호는 주오를 돌아보며 물었다.

“매년 월챔 전에 하루 빨리 퇴근하시거든.”

“기억력도 좋네요. 날짜까지 기억하고.”

보통 그래도 며칠인지까지 기억하지는 않았다. 그걸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주오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은기랑 우찬이보다 내가 더 오래 감독님이랑 같이했으니까. 이제는 익숙해.”

“아, 그렇긴 하겠네요.”

데뷔한 이후로 주오는 팀을 옮긴 적이 없어 진형과 유독 오래 활동했다. 이제는 소소한 서로의 개인사까지 알 정도로 오랜 관계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끝나고 나랑 놀면 안 될까?”

조심스럽게 묻는 주오를 보며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대체 뭘 하러 가지는 거기에 저렇게 조심스러워하는 건가 싶었다. 말하면서도 망설이는 그의 태도에 수호의 의아함이 더욱 커져만 갔다.

“어디 가려고요?”

“아, 음. 조금 이따가 말해줄게.”

주오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수호는 어서 그가 목적지를 말해줬으면 했지만 주오는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바라봤다.

마지막 연습 게임을 하는 동안 수호는 계속 주오를 힐끔거렸다. 다행히 집중을 못 한 거에 비해서 가볍게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인해 승리를 따냈다.

게임이 끝나고 진형은 짐을 챙겨 연습실을 나섰다.

“오늘 빨리 끝났으니까 내일은 조금 더 하자.”

“아니! 그건 반칙이죠!”

우찬이 벌떡 일어나 반항했지만 진형은 우찬의 머리를 헝클곤 선수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감독 마음이다. 그러면 내일 보자.”

후다닥 진형이 연습실을 나간 시간은 오후 5시였다. 평소와 다르게 유난히도 이른 시간이었다. 수호는 자연스럽게 주오를 바라봤다. 주오는 컴퓨터 전원을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호야, 가자.”

“엉? 뭐야. 둘이 놀러 가?”

진형이 나간 문을 뽀로통한 시선으로 보던 우찬이 주오의 말에 물어왔다.

“어. 너네끼리 먼저 숙소 들어가.”

“연습 빨리 끝났다고 바로 놀러 가는 것 봐! 레인 씨 정말이지 연습에 대한 마음이 식은 게 분명해.”

“너도 데탑 다 껐으면서 말이 많아.”

어느새 집 갈 준비를 다 마친 우찬을 은기가 어이없어했다. 그 시선을 시발점으로 시작된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가 백그라운드에 깔렸다. 선우는 동갑내기의 싸움에 질린다는 듯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우리도 그럼 놀다 가자. 오랜만에 밖에서 저녁 먹고 들어갈까? 피시방 가도 좋고.”

“헐, 너무 좋아.”

방금 전까지 하루 반나절을 게임만 했으면서 우찬은 눈을 빛냈다. 그건 은기도 마찬가지였다. 선우는 그런 두 사람을 달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미리 일어나 있던 주오도 수호가 일어나서 방긋 웃었다. 수호는 주오와 함께 연습실을 나서며 물었다.

“그래서 정말 어디 가는데요?”

“음, 으음……. 가고 싶은 곳은 있는데 수호가 싫으면 다른 곳 가도 괜찮아.”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는 주오였다. 수호는 대체 가고 싶은 곳이 어디길래 저런 얼굴을 하나 싶었다.

“대체 어딘데요.”

“……ㅈ ……숍.”

“네?”

수호는 잘 들리지 않는 작은 음성에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주오가 얼굴을 손으로 푹 가리고는 다시 중얼거렸다.

“쥬얼리 숍.”

“……?”

예상치 못한 목적지에 수호는 입을 다물었다. 평온한 얼굴과는 다르게 수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대체 그곳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가자는 걸까.

“선물 사게요?”

그런 걸 왜 저렇게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걸까 싶었다. 평소와 같이 무덤덤한 수호의 음성에 주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주오의 귓가는 붉어져 있었다.

“수호 선물 사려고.”

“저요?”

생일도 아닌데 자신이 선물받을 일이 뭐가 있을까. 수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점점 수호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해졌다.

“응. 음…… 반지 맞추려고 하는데 수호는 싫어?”

어색하고 초조해 보이는 주오였다. 떨리는 다갈색 눈을 빤히 자신에게 향한 채 대답을 기다리는 주오를 보며 수호는 곰곰이 생각했다.

반지.

반지를 왜 맞추는 건가 생각하던 수호는 이내 자신들의 관계를 떠올렸다.

주오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커플링을 맞추고 싶다는 의미였다.

수호는 주오와 눈을 맞추며 끔뻑거렸다.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주오가 이런 제안을 할 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서 놀란 마음에 입을 꾹 다물었다.

수호의 반응을 거절의 의미라고 생각했는지 주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이윽고 주오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너무 뜬금없었지? 하하, 우리 저녁 먹으러 갈까? 수호는 뭐 먹고 싶어?”

황급히 화제를 바꾸는 주오의 팔을 수호가 붙잡았다. 괜한 오해로 시무룩해하는 주오는 보고 싶지 않았다.

“안 싫어요. 그냥 놀라서 대답 못 한 거예요.”

“아, 정말……?”

침울하던 주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수호는 다시금 반짝이는 주오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남자 둘이 반지 고르는 거 이상해 보이지 않아요?”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사람도 많아.”

수호는 주오를 붙잡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런가. 수호는 여전히 조심스럽긴 했지만, 주오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아 더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애초에 수호도 그런 쪽으로는 무신경한 사람이었다.

“그러면 가요.”

“응! 수호도 이제 내가 널 싫어하게 될 거라고 불안해하지 마.”

이미 그렇게 생각하게 된 수호였지만, 주오는 여전히 그게 신경 쓰였나 보다. 이런 식으로라도 믿음을 주려는 주오의 행동에 수호는 옅게 미소 지었다.

사소한 것에도 자신을 살피는 주오가 좋았다. 엄마가 왜 누나에게 남자친구가 생길 때마다 매번 걔는 착하냐고, 너 잘 챙겨주고 세심하냐고 묻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엄마의 말처럼 다정한 남자가 제일이었다. 수호는 새삼 부모님의 지혜를 깨달았다.

“매일 끼고 다녀요.”

“절대 안 뺄게. 살찌워서 손가락에서 빠지지 않게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주오를 보며 수호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피 안 통해요.”

수호의 말에 주오는 방긋 웃으며 ‘그런가?’ 하고 대답했다.

* * *

수호는 주오와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받으며 주오가 봐둔 매장으로 향했다. 대중교통으로 30분 정도 이동해 도착한 곳은 생각보다 규모가 거대했다.

수호는 입구부터 반짝거리는 매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통유리로 된 매장 안에는 이미 여러 커플과 친구로 보이는 동성들이 쥬얼리를 보고 있었다. 커플들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수호는 가벼운 걸음으로 매장 안으로 향했다.

입구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브랜드 중에 수호는 어디가 좋은지 몰라 고개를 둘러봤다. 그러자 주오가 수호의 팔을 잡고 어느 매장으로 이끌었다.

“저기가 디자인이 깔끔하대.”

“찾아봤어요?”

“조금? 수호도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주오는 매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들뜬 기색이었지만, 지금은 유독 더 그런 것 같았다.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 주오였다. 그게 너무 보기 좋아 수호의 시선은 주오에게서 떠나가질 않았다.

“어떤 제품을 찾으세요?”

“커플링이요.”

“아, 이쪽이 커플링을 모아둔 곳이에요. 특히 이 라인에 있는 것들이 제일 잘나가는 제품들입니다.”

직원이 가리킨 곳을 보자 반짝이는 여러 쌍의 반지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주오의 말대로 수호가 지금까지 봐왔던 반지들보다는 심플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색다른 디자인 때문인지 시선을 잡아끌 만큼 예쁘기도 했다.

“수호야, 어때?”

“예뻐요.”

어떤 걸로 할지 고르기 힘들 만큼 전부 다 예뻤다. 수호가 진열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자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몇 개 꺼내서 착용해 보시겠어요?”

“네.”

“어떤 스타일이 좋으세요?”

“심플한 걸로 보여주세요.”

주오의 말에 직원은 요구사항에 맞는 반지들만 쏙쏙 진열장에서 빼냈다. 그리고 여러 크기의 고리들을 꺼내더니 입을 열었다.

“어느 분 사이즈로 봐드릴까요?”

“둘 다 봐주세요. 남성용으로요.”

주오가 빙긋 웃으며 대답하자 그녀는 주오의 유독 반짝이는 얼굴 때문인지, 그의 말 때문인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이내 주오를 따라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직원은 자연스럽게 수호와 주오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호수를 쟀다. 그리고 해당 호수가 있는 반지들은 껴보라고 건네기도 했다. 수호는 진열장 속 반지들을 하나씩 껴보는 주오를 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걸로 해요.”

“응? 이게 마음에 들어?”

주오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여줬다. 주오는 큰 신장과 덩치에 맞게 손도 컸다. 어떻게 보면 투박하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큰 손이었다. 물론 균형이 잘 잡히고 손가락도 굽은 곳이 없어 반듯한 손이기도 했다. 주오의 성격처럼.

워낙 손이 커서인지 반지를 꼈을 때 묘하게 이질감이 드는 편인데, 지금 끼고 있는 반지는 유독 주오한테 잘 어울렸다. 조금 더 손이 부드러워 보이는 느낌이었다. 곡선 디자인이 깔끔하게 들어간 반지에 작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수호는 손가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제일 잘 어울려요.”

본인도 반지의 주인이 될 텐데 자신은 껴보지도 않고 정하는 수호의 태도에 주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자신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낸 주오가 그걸 수호에게 끼워줬다. 주오가 꼈을 때 딱 맞던 반지가 수호 손가락에는 헐렁했지만 그래도 디자인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주오가 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수호 피부가 유독 하얀 편이라 그런지 반지가 더 눈에 띄었다. 수호 손에서는 유독 청초한 느낌이 드는 반지였다.

주오는 수호의 손을 내려다보다 이내 활짝 웃었다.

“수호한테도 제일 잘 어울려.”

“그 제품으로 하시겠습니까?”

눈치 빠른 직원은 생긋 웃으며 물었다. 주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제를 하기 위해 주오가 카드를 내밀자 수호가 주오의 팔을 붙잡았다.

“하나만 계산해 주세요.”

“어? 왜?”

주오는 뜬금없는 수호의 제지에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주오를 두고 수호가 결제를 기다리고 있는 직원에게 자신의 카드를 건넸다. 그러자 주오의 다갈색 눈동자에 깃든 의아함이 더욱 깊어졌다.

“저도 선물이에요.”

처음에는 수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이기만 하던 주오가 이내 뜻을 알아챘는지 웃어 보였다.

“고마워, 잘 받을게.”

“저도요.”

직원은 앞에서 둘이 그러든 말든 계산을 하는 데 여념 없었다. 둘이 본의 아니게 염장을 지르는 동안 결제를 끝마친 직원이 카드를 내밀었다.

“반지는 일주일 정도 뒤에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다음 주 중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직원의 말을 뒤로하고 가게에서 나온 주오의 입가는 정말 행복에 차 있었다. 미소가 떠나지 않는 주오를 보며 수호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아요?”

“너- 무. 정말 너무 좋아. 빨리 연락 왔으면 좋겠다.”

벌써부터 연락이 올 리가 없는데도 주오는 핸드폰을 꽉 쥐었다. 소풍날을 기다리는 어린이들도 이렇게 설레는 얼굴을 하지는 않을 거다.

수호가 빈 주오의 손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

“이제 숙소로 돌아갈 거예요?”

“우선 저녁부터 먹을까? 수호 저녁도 못 먹었잖아.”

급하게 오느라 저녁을 거른 주오와 수호였다. 하지만 딱히 끼니를 꼭 챙겨 먹는 타입이 아니었던 수호는 주오가 말하는 저녁 식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한동안 연습만 하느라 바빴던 두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비상구나 숙소에서 몰래몰래 애정 행각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벼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섹스가 주는 즐거움을 알아버린 수호는 오랜만에 얻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러 가요.”

“아, 수호 피곤하구나. 미안해. 요즘 너무 연습만 해서 오늘이라도 빨리 쉬고 싶었을 텐데.”

괜히 자신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게 된 수호에게 미안한지 주오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주오는 당장에라도 수호를 업을 기세로 그 앞에 주저앉았다.

“업힐래? 너무 피곤하면 내가 업고 갈게.”

수호는 둔한 주오를 뚱한 시선으로 보다 입을 열었다. 가끔 주오는 눈치가 없었다. 특히나 이런 부분에서. 막상 일을 치르기 시작하면 멈추지 못하면서 시작하는 걸 특히나 망설였다. 수호가 싫어할까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다는 게 느껴졌다.

수호가 주오의 옆에 쭈그려 앉아 작게 속삭였다.

“섹스하러 가자고요.”

“……어? 진짜로?”

주오는 예상치 못한 제안이라도 받은 사람인 양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 제안이 싫지는 않은지 주오의 표정이 상기됐다.

수호가 주오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딱 두 번만 해요.”

현재 시각은 오후 7시. 10시까지 돌아가야 하는 걸 생각하면 너무나 급했다. 수호는 고개를 돌려 숙박업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오가 수호를 조심스럽게 잡아왔다.

“나 어디 있는지 알아.”

“여기 와봤어요?”

단순한 의미로 물었지만, 주오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 내가 와본 건 아니고 그냥 혹시 몰라서…… 찾아는 봤어.”

그런 주제에 말 한마디 안 했던 주오였다. 수호는 자신이 오해할까 눈치를 살피는 주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으면 말해요. 눈치 보지 말고요.”

“네가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원치 않는데 따라와 주는 건 싫다는 듯 주오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수호는 말간 검은 눈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안 싫어요. 저는 매일도 좋아요.”

담백하게 떨어지는 수호의 말에 주오는 입을 꾹 다물더니 이내 손으로 얼굴을 감췄다. 대답 없는 주오의 반응에 수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주오를 들여다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주오는 얼굴을 감췄던 손을 내리고는 이내 수호의 손을 꽉 잡더니 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주오는 다정하기만 한 남자의 얼굴을 벗어던졌다. 욕망이 비치는 주오의 다급한 시선에 수호는 옅게 웃으며 주오를 따라나섰다.

위치를 미리 알아봤다던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과감하게 옮긴 발걸음 끝에는 모텔이 있었다.

빠르게 안내받은 객실로 들어온 주오는 그대로 수호의 입술부터 찾았다.

다급하게 맞춰진 입술은 서로가 원래부터 하나인 것처럼 굴었다. 서로의 입술을 빨고 이로 살며시 씹으며 친근하게 인사했다.

“……아.”

“……미안, 아팠어?”

수호의 입술 사이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오자 주오가 황급히 입술을 떼며 물었다. 수호는 어느덧 상기된 뺨을 한 채 고개를 저었다. 혀를 살며시 이로 물고 비비는 주오 때문에 순간적으로 열이 솟아 낸 소리였다.

수호는 주오의 목에 팔을 감고는 다시 입술을 맞추며 속삭였다.

“안 아프니까 다시 해요.”

수호의 허락이 떨어지자 주오는 다시 입을 맞춰왔다. 직전보다는 한결 조심스러워진 키스였다. 수호는 입을 벌려 주오를 받아들이며 그에게 이끌려 방 안쪽으로 향했다.

침대에 수호의 등에 닿자 주오와 수호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옷을 벗어 던졌다.

날이 갈수록 수호는 점점 관계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변했다. 주오는 그런 수호를 볼 때마다 곤란하면서도 기쁜 듯 눈가를 어색하게 굳힌 채 미소 지었다.

현재도 수호는 이미 단단하게 발기해 자신의 아랫배를 찌르는 주오의 성기를 쥐었다. 수호의 손이 닿자 주오의 입술 사이로 낮은 숨이 터져 나왔다.

수호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오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주오가 느끼는 표정이 좋았다. 이럴 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얼굴이었기에 수호는 이런 기회가 소중했다. 빤히 주오를 보던 수호가 입을 열었다.

“빨아줄까요?”

“……어?”

수호의 어색하면서도 자극적인 손길을 느끼고 있던 주오가 얼빠진 표정을 해 보였다. 단숨에 간지러운 쾌감에서 빠져나온 주오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빛났다. 수호가 주오의 성기를 손으로 훑으며 다시 말했다.

“이거 빨아줄게요.”

“어, 왜?”

주오는 혼이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여기는 듯했다.

“전에 형이 해줬을 때 좋아서요. 형도 좋아졌으면 했어요. 싫어요?”

주오가 더 느꼈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느끼는 얼굴을 구경하고 싶기도 한 수호였다.

수호는 주오가 싫다고 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래서 거절할 수 없도록 성기를 쥐고 있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주오의 눈동자에 여러 감정이 떠올라 혼란스럽게 뒤죽박죽으로 섞였다.

수호는 주오 아래에서 벗어나 주오를 침대에 앉혔다.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주오의 성기를 잡아 입에 넣으려고 하자 갑자기 주오가 수호의 머리를 붙잡았다.

“이, 이건 아닌 것 같아.”

“뭐가요?”

수호는 단단히 붙잡힌 머리를 힘겹게 들어 올려 주오를 바라봤다. 어느새 주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하지 마. 이런 거 안 해도 돼. 내가 해줄게.”

“제가 해주는 건 싫어요?”

수호는 괜히 침울해졌다. 자신이 해본 적 없어서 그러는 걸까.

시선을 내려 심각하게 고민에 빠진 수호를 보자 주오는 더욱 당황했는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너무 좋아. 좋은데…… 더럽잖아. 수호는 이런 거 안 해도 괜찮아.”

수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뭐가 더럽다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수호는 이내 다시 침울해졌다.

“형은 지금까지 제 거 빨아줄 때 더럽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했을 줄 몰랐다. 서슴없이 성기를 입에 물었던 주오였기에 당연히 거부감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자신의 착각이었던 것 같아 수호는 우울해졌다.

수호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주오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어떻게 수호가 더러워. 수호는 언제나 깨끗해. 그냥, 네가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다는 의미였어. 절대로 싫다는 게 아니야.”

주오는 수호의 양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 손길이 너무나 귀한 것을 만지는 것같이 굴어서 그의 말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수호는 다시 시선을 들어 주오를 바라봤다.

“저도 형 더럽다고 생각 안 해요. 제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매번 받기만 하니까 제가 해줄게요. 그러면 안 돼요?”

여전히 주오의 성기가 한 뼘 앞에서 꺼덕거리고 있었다. 성기 기둥 표면으로 혈관이 두드러진 모습이 정말 적나라하게 보였다. 하지만 더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주오가 좋았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수호는 주오의 성기를 붙잡고 괜히 귀두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꿈틀거리는 주오의 아랫배를 보며 수호가 다시금 주오와 눈을 맞췄다.

주오는 애달픈 수호의 물음에 눈가를 찡그렸다. 정말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수호는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양 뺨을 감싼 주오의 손을 떼어낸 수호는 입술을 벌려 대답 없는 주오의 성기를 품었다.

“읏……! 수, 수호야.”

주오는 밀쳐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색하게 허공에 머물러 있는 주오의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온 수호는 남은 한 손으로 성기 뿌리를 붙잡았다.

주오가 했던 것처럼 입술을 오므려 성기를 감싸고 혀로 기둥을 쓸었다. 그때마다 주오의 허벅지 근육이 꿈틀거렸다.

수호는 자신에게 반응하는 주오를 신기한 눈을 바라봤다. 입술을 씹으며 욕망을 참으려는 주오가 시야에 잡혔다. 수호는 그 얼굴을 더 보고 싶어서 입술을 더욱 벌렸다. 귀두 끝만 물어도 입안을 꽉 차고 들어오는 성기 때문에 벌써부터 입술이 아렸고 턱이 아파왔다.

하지만 수호는 포기하지 않고 더욱 깊이 주오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귀두와 기둥 사이의 골을 혀끝으로 문지르며 열심히 주오가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런 식으로 했던 것 같은데. 끙끙거리며 성기를 빨자 어느새 입안에 타액이 아닌 미끌거리는 액체가 혀끝에 느껴졌다.

거짓말로도 맛있다고 할 수는 없는 맛이었지만, 수호는 그 선액이 기꺼워 더욱 고개를 빠르게 움직였다. 그와 더불어 더더욱 턱은 빠질 듯 아파왔다.

성기의 반은커녕 1/3도 입안에 담지 못했지만 그래도 주오는 흥분한 듯 가끔씩 허리를 무의식적으로 쳐올렸다. 그때마다 목적이 눌려 순간적으로 구토감이 올라왔지만 꾹 참고 수호는 열심히 고개를 움직였다.

“하, 수호야…… 이제 그만해도 돼.”

“……으웁, 갠차나여.”

깊게 문 성기를 살짝 빼내며 대답하자 주오가 수호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문질러 왔다. 수호는 주오의 손길이 좋아 다시 깊게 성기를 물려 노력했다.

수호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성기를 문 입술 사이에서 타액이 흘러내렸다. 수호가 그것을 훔쳐내려 할 때 시야가 단번에 뒤집혔다.

갑자기 성기를 빼내어 자신을 잡아당긴 주오 탓에 수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형?”

“이제 됐어.”

덮치듯 수호 위에 올라탄 주오의 시선이 뜨거웠다. 꽤 오래 벌리고 있어 다무는 게 어색해진 수호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주오가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은 수호의 혀를 부드럽게 눌렀다. 점점 안쪽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혀 깊은 곳을 문질렀다. 유독 약한 부분을 자극당하자 수호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수호는 진짜 못됐어. 그러니까 나도 못돼지잖아.”

대뜸 저게 무슨 소리일까. 의아함에 주오를 보던 수호는 급히 아래를 가르고 들어오는 손가락에 숨을 멈췄다. 급하게 안을 넓히는 주오의 손길에 여유가 없었다. 빠르게 내부를 넓히는 주오의 팔을 다급히 붙잡자 주오가 입을 맞춰왔다.

입안에 들어온 혀도 여유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귓가를 어루만지는 손과 혀뿌리와 천장을 크게 핥는 주오 때문에 아랫배에서 열이 올랐다. 특히나 귀와 그 주변 두피가 약한 수호는 주오가 손으로 그것을 어루만질 때마다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으…… 흐, 으응.”

입술이 겹쳤다 떨어질 때마다 축축한 소리와 함께 앓는 수호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혀와 귓가에 온 정신을 쏟고 있을 때 전과는 확연히 다른 부피로 아래를 가르고 들어왔다.

숨이 턱하고 막힐 만큼 버거운 진입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가져다주는 격렬한 쾌감을 알았기에 수호는 떨어진 입술 사이로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주오를 받아들였다.

급한 만큼 아래를 풀 시간도 촉박했기에 유독 힘겹게 느껴져, 수호는 침대를 짚은 주오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수호야. 이수호, 미안해.”

“뭐, 읏! 뭐가…… 아!”

수호는 단박에 허리를 쳐올려 깊이 박히는 성기에 숨을 들이마셨다. 내벽과 꽉 물린 성기가 유난히 뜨겁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꿈틀거리는 혈관이 느껴질 만큼 확연한 감각이었다.

주오는 상기된 수호의 뺨에 입술을 문질렀다.

“너무, 급해서…… 콘돔 못 꼈어. 진짜 미안해, 흣.”

꼭 뒤처리를 해주겠다며 속삭인 주오는 그대로 빠르게 추삽질을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지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수호는 깊은 곳을 헤집어놓는 뜨거운 성기에 신음도 내뱉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아…… 으!”

“수호야, 하아…… 이수호.”

달뜬 숨과 함께 애달플 만큼 다정한 주오의 음성에 수호는 다급히 그에게 손을 뻗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목에 감싼 주오가 입을 맞춰오자 수호는 다리를 더욱 벌렸다. 그만큼 주오의 몸이 더욱 밀착되며 성기가 깊게 들어왔다.

아래를 파헤치며 들어오는 뜨거운 것은 자비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을 만큼 지나친 감각이 물밀 듯이 수호에게 쏟아졌다.

수호는 아래만큼이나 열렬한 시선을 보내는 주오와 눈을 맞추며 끝으로 향하는 감각에 몸을 내맡겼다.

“하, 으읏…… 아아!”

“……!”

수호가 자신의 배에 하얀 정액을 토해냄과 동시에 몸 안쪽으로 질척한 액체가 거세게 흘러들어 왔다. 안쪽을 적시다 못해 밖으로 빠져나가는 정액으로 인해 아래가 축축해졌다. 수호는 그 적나라하고 낯선 느낌이 생경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주오는 수호의 눈가에 아롱아롱 맺힌 이슬을 입술로 쪼아 먹었다.

“미안해……. 금방 씻겨줄게.”

“……됐어요. 어차피 다시 젖을 건데 다 끝나고 씻어요.”

“어?”

무슨 소리냐고 묻는 주오의 눈을 보며 수호는 나른한 근육을 움직여 주오의 허리를 다리로 감쌌다. 여전히 안에 담긴 주오의 성기도 단단했다.

“두 번만 하자고 했잖아요.”

수호는 주오의 목에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당황하던 주오는 이내 벌어지는 수호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빠르게 다시 불붙은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숙소 생활을 조만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 * *

월드 챔피언십이 시작되기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이번 월드 챔피언십이 열리는 개최국은 한국이었다. 덕분에 짐을 바리바리 챙겨 비행기를 탈 필요는 없어 선수들의 표정은 한결 편안했다. 그래도 부산까지의 이동은 어쩔 수 없었다.

제라드가 부산으로 내려오기 전날 타이밍 좋게도 쥬얼리 숍에서 연락이 왔다. 수호와 주오는 연습이 끝나고 숍을 방문했다. 포장된 반지를 받자마자 주오는 입술이 아주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포장을 조심스럽게 뜯자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반지가 한 쌍 모습을 드러냈다. 서로 같은 디자인의 남성용 반지였다.

그날 둘은 반지를 나눠 끼며 미소 지었다.

주오는 처음 반지를 끼자마자 기념이라며 반지가 반짝이는 왼손을 사진으로 남겼는데, 지금도 주오는 그 사진을 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가 실물을 두고 사진을 보면서 웃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수호의 왼손은 빈손이었다.

‘그런데 우리 둘 다 똑같은 거 끼고 있으면 감독님이나 우찬이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선우는 이미 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은기도 확실하게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진형과 우찬이 문제였다. 특히나 팀의 감독으로 있는 진형.

수호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말을 꺼내자 잠시 고민하던 주오는 이내 수호의 손을 바라보고 속상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한 명은 빼고 있을까? 나는 애인 있다고 사람들이 알아야 수호가 불안해하지 않으니까 수호가 빼고 있어.’

그렇게 맞춘 지 하루도 되지 않아서 두 사람은 함께 반지를 낄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어디서 가져온 건지 주오가 얇은 목걸이 끈을 가져와 반지를 걸어주었다.

함께 손에는 끼지 못하지만 그래도 서로 같은 걸 가지고 있다는 거에 만족하는지 주오는 방긋 웃었다.

“그러다가 들켜요.”

연습실 한복판에서 대놓고 사진을 보고 있는데 들키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이면 반지를 빼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수호가 타박하자 주오가 아쉽다는 눈치로 핸드폰 화면을 껐다.

“하지만 계속 보고 싶은걸.”

“방에서 봐요.”

“너무 좋아. 매일 봐도 좋고, 매 순간 봐도 좋아.”

주오는 다시 방긋 웃으며 옷 속에 숨어 있을 수호의 반지를 바라봤다. 수호는 괜히 옷 위로 쇄골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옷 아래로 둥근 반지가 느껴졌다.

“뭐야, 뭐가 좋은데?”

“나도 알려줘!”

옆에 앉아 있던 선우와 우찬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주오와 수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우찬이 입술을 삐죽였다.

“또 둘만 놀지? 야속하다, 야속해!”

“헛소리하지 말고 자리에나 앉아. 곧 연습 시작이야.”

이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은기가 소파에 앉은 네 사람을 보며 말했다. 월드 챔피언십 개막까지 며칠 남지 않았기에 마지막 합을 맞춰야 했다.

은기의 부름으로 다들 자리에 앉자 진형과 루퍼가 문을 열며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자리에 앉아 있었네?”

“빨리 연습해요!! 그룹 스테이지 1위 해야죠!”

우찬의 당찬 음성에 진형이 껄껄 웃었다.

월드 챔피언십은 세계 각국에서 16개의 팀이 진출한다. 그리고 각 4팀으로 나눠서 진행되는 게 그룹 스테이지였다. 4팀끼리 경기를 거치고 각 그룹에서 승리 횟수가 가장 많은 1, 2위가 본선에 진출하는 방식이다. 본선에 진출하는 팀은 8팀.

제라드가 속한 B그룹에는 중국, 유럽, 북미 팀이 있었다. 그중에 가장 중점으로 봐야 할 건 유럽 팀으로, 올스타전에도 나왔던 정글 US 선수가 있는 팀이었다. 유럽의 맹주라고 불릴 만큼 주가가 높았다.

“그룹 스테이지에서 1위 해야 본선에서 각 그룹 1위들과 처음부터 안 붙으니까 무조건 1위로 치고 나가야 하는 건 알지?”

그룹 스테이지와는 다르게 8강부터는 토너먼트전이었기 때문에 지는 순간 제라드의 월드 챔피언십도 끝이 난다. 그러기 위해선 강팀들을 최대한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즉, 그룹 스테이지 1위를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8강에서 각 그룹 1위들과 각 그룹 2위들이 경기를 펼친다. 제라드도 이 꺼려지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모든 팀이 같은 마음일 것이다.

진형은 한껏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요주의 팀인 유럽의 레드 카우만 조심하면서 해보자!”

“예에!”

유럽의 맹주 RED COW. 통칭 빨간 소, 미친 소로 불리는 팀을 제외하면 다른 그룹보다 편하다고 할 수 있는 B그룹이었다. 그래서 부산에 온 뒤로 제라드는 빨간 소의 플레이를 중점으로 분석하고, 그에 맞춰 연습했다.

빨리 경기를 뛰고 싶다는 듯 우찬이 발을 동동 굴렀다. 우찬의 바로 옆에 앉은 주오는 그런 소란에도 굴하지 않고 왼편에 앉은 수호를 돌아봤다.

“떨리지 않아?”

서머 결승전에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던 수호였다. 서머가 끝난 후에는 그런 기미가 없었다고는 하나 곧 1년 중 가장 큰 대회가 열리게 되면 다를 수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수호는 걱정이 많은 주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주오의 걱정과는 달리 수호는 평온했다.

“전혀요.”

“다행이다. 혹시나 떨리면 말해. 내가 노력해 볼게.”

수호는 지난번 주오의 기묘한 콜을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보면 그리운 콜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굳이 필요 없는 콜이기도 했다. 수호는 스프링 때보다 오히려 한결 마음이 편한 느낌이었다. 주오의 은퇴와 그를 우승시키겠다는 부담감은 극복한 지 오래였다.

“그래요. 그것보다 은기는 괜찮아요?”

자신은 주오와의 대화로 부담감을 풀어냈지만, 은기는 어떤지 잘 몰랐다. 회식 때 속상한 마음에 한풀이를 한 뒤에 연습을 재개했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또다시 긴장감에 잡아먹힐 게 분명했다.

염려되는지 수호가 은기를 힐끔 보자 주오는 걱정 말라며 웃었다.

“이미 감독님이랑 나랑 얘기 다 끝마쳤어. 은기가 의외로 정이 많아서 서머 때 괜히 나 때문에 초조해진 것 같아. 그런데 또 마음 잡으면 쟤만큼 흔들리지 않을 사람도 없어.”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주오를 보자 수호도 편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모든 선수의 컨디션과 폼이 최고의 상태라면 제라드는 월드 챔피언십에 출전한 어떤 팀보다 잘한다. 그건 이중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최상의 폼을 자랑하는 사이 월드 챔피언십은 개막을 알렸다.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날! 한국을 비롯해 대형 리그인 유럽, 미국, 중국, 그리고 그 외의 일본, 대만 등 세계 각국 선수들이 참가하는 대회! 20XX 월드 챔피언십을 시- 작합니다!]

CKR을 비롯한 CPL, CES 등 세계 각국 생중계로 이영중 캐스터의 샤우팅이 전해졌다. 체이스를 즐기는 세계인이 즐기는 가장 의미 있으며 모두가 탐내는 대회이자 축제가 시작됐다.

유명 가수들이 무대를 꾸몄고, 체이스의 오프닝 주제가가 그 시작을 알렸다.

그룹 스테이지는 바로 시작됐다. 4개의 그룹에서 4개의 팀이 서로 경쟁을 하다 보니 그룹 스테이지만 열흘 정도가 소요되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개막식과 함께 경기를 치르게 된 팀은 제라드였다. 유럽의 맹주라고 불리는 레드 카우와 벌이는 시합이었다.

첫 경기부터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팀들이다 보니 관전을 온 관중들과 해설자들의 분위기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첫 경기부터 이 두 팀이 마주칠지는 몰랐습니다! 벌써부터 기대가 큰데 두 해설자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영중 캐스터가 선수석에 앉아 준비를 마친 선수들을 보며 해설들에게 물었다. 먼저 마이크를 잡은 건 박동진 해설이었다.

[진짜 누가 대진표를 이렇게 짠 거죠?! 처음부터 B그룹 1위 후보들의 경기라니 정말 볼만한 경기가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제라드는 서머 시즌 막바지에 폼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실수가 많았습니다. 결승 무대에서도 그런 모습이 보여서 준우승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고요. 이번 경기는 그런 모습을 떨쳐냈을지가 제일 관건일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벌였던 CKR 리그에서도 준우승으로 마감한 실력이었다. 그런 폼이 지금까지 유지된다면 월챔 우승은 정말 꿈같은 이야기였다. 걱정이 담긴 박동진 해설의 말에 유기현 해설이 맞장구쳤다.

[그렇습니다! 제라드의 폼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그리고 제라드와 맞붙는 레드 카우, 통칭 빨간 소는 정글러 선수의 센스가 돋보이는 팀입니다. 초반 이득을 가지고 빠르게 경기를 굴려가는 게 특징인 만큼 초반에 그 간격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유기현의 해설의 말을 끝으로 거대한 전광판이 게임 시작을 알렸다. 레드 카우를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준비한 만큼 제라드는 쉽사리 그들이 초반에 이득을 볼 수 없도록 막아섰다.

“얘네 바텀에서 이득 보는 거 실패했으니까 이제 탑 쪽으로 밀어붙일 거야. 수호도 합류할 준비 하고, 나는 땅굴 파서 뒤쪽에서 대기할게. 그러면 우찬아, 뒤에서 병사만 받아먹고 있다가 살짝 앞으로 나가서 쟤네들한테 진입 각 줘.”

레드 카우는 바텀에서 이득 보는 것에 실패하면 곧바로 탑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주오는 탑 라인에 함정을 팠다. 난전을 설계하는 건 주오의 특기였다.

“형! 쟤 뒷무빙 한다. 뒤에 US가 대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더 앞으로 나가?”

상대가 잠시 귀환 타이밍을 잡았을 때 이미 시야를 지우고 상대의 뒤를 잡고 숨어 있던 주오는 우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아래쪽으로 치우쳐 있는 거 보면 쟤네 정글러 미드로 이어지는 경로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야. 수호도 이제 궁 찍어서 바로 합류할 수 있으니까 들어가.”

“오키!”

주오의 콜에 우찬이 망설임 없이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숨어 있던 주오와 US가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2:2 상황이 되었다.

[탑에서 서로 설계에 들어갔던 것 같죠?! 어어? 이때 SUHO 선수가 궁극기로 합류합니다!!]

수호의 합류로 상황은 빠르게 제라드가 우위를 가져갔다.

[오오오! SUHO!! 탑으로 합류해서 1킬을 따냅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합류 속도죠?!]

이영중 캐스터가 기함이 나올 정도로 빠른 제라드의 합류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미리 콜이 되어 있던 것 같은데요?! 이야, 제라드!!! 서머 때와는 확연히 다른데요!!]

박동진 해설도 입이 떡 벌어지는 합류 속도와 서머와는 다른 제라드의 분위기에 열을 올렸다. 한국 해설자들이었기에 한국 팀이 잘하면 당연히 더욱 흥분했다. 어느새 캐스터와 해설 두 명이 제라드를 응원하고 있었다.

[아아아악! RAIN!!! 대체 저기에 US 선수가 숨어 있을 거라고 어떻게 알고 있던 거죠?!]

기묘한 곳에서 몸을 숨기고 수호의 뒤를 노리던 US를 찾아내 그들의 설계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주오를 보며 박동진 해설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함께 소프라노 열창을 함께하던 유기현 해설이 감격에 차 입을 열었다.

[레인! RAIN!! 이런 식의 설계는 뻔하다고 말해주는 건가요!!! 진짜 대체 거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던 거죠!]

체이스는 맵이 넓었다. 그만큼 곳곳을 살피면서 다니기 힘든 게임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오는 알고 있었다는 듯 남들이 잘 향하지 않는 길로 향해 그를 잡아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설계의 장인이자 뇌지컬 그 자체라고 불리는 주오에게 일반적인 전략은 너무나 뻔했다.

그러자 레드 카우는 이번엔 설계가 아닌 힘 대 힘으로 붙는 전투로 밀고 들어왔다.

[레드 카우!!! 소규모 난전 설계를 포기하고 오브젝트로 제라드를 끌어내려고 하는데 가능한 게 맞나요?!]

보통 비등비등한 상황이거나 상대보다 불리한 경우에는 섣불리 대형 오브젝트에 승부를 걸지 않았다. 그러다가 실패했을 경우 리스크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형, 얘네 절대 못 쳐!! 그냥 지금 바텀이랑 미드라인 밀어 넣는 게 이득이야!”

그런 안일한 생각에 덜미를 잡혔다.

[아아아아악! 레!드!카!우! 정말 미친 소같이 들이박습니다!!! 저걸 친다고요?!]

보통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과감한 선택을 보여준 레드 카우였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제라드에게 끌려다닐 것을 직감한 레드 카우는 제라드가 모이기 전에 빠르게 오브젝트를 잡아냈다.

그러자 그들이 오브젝트를 못 칠 거라고 단언했던 우찬이 울상을 지었다. 괜찮다며 우찬을 달랜 주오가 입을 열었다.

“쟤네가 가져간 버프는 공격력, 방어력 증가하는 버프니까 분명 전투 걸어올 거야. 그때 싹 다 잡아버리자. 우선 우리 쪽에서 좁은 길 전투에 좋은 스킬이 많으니까 그쪽으로 유도하자. 선우야, 시야 안쪽까지 과감하게 잡으러 들어가 마주치면 물고 들어올 거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시야로 이득 보니까 좋아.”

차분한 주오의 오더에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는 상대의 정글을 헤집고 다니면서 깊은 곳에 시야를 밝혔다. 그리고 이미 자신의 진형에 시야를 박아뒀던 레드 카우는 선우만 모습을 드러내자 선우를 물고 늘어졌다.

사전에 레드 카우의 시야가 어느 지점을 밝히고 있는지 체크해 둔 제라드는 사각지대에서 그들을 급습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돋보였던 건 수호였다.

우찬과 선우가 경로를 막아내며 은기를 지키는 동안 수호는 벽을 넘어 옆에서 레드 카우를 쳤다.

안전한 포지션이라고 생각하며 도주로 근처에서 딜을 넣고 있던 레드 카우의 원딜러는 갑자기 어두운 벽 너머에서 창을 휘두르며 등장한 수호에게 죽었다.

남은 선수 중에서 가장 딜을 뿜어낼 수 있는 캐릭터는 미드였지만, 미드는 이미 우찬과 선우에게 붙들려 있었다.

상황을 확인한 수호는 남은 세 사람 사이로 들어갔다. 레드 카우는 자신들 사이로 깊게 들어온 수호를 보며 기회라고 생각했다. 무리하게 던진다고 생각한 레드 카우는 수호에게 모든 공격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수호는 가뿐하게 스킬들을 피했다. 그리고 스킬쿨이 아직 돌지 않은 레드 카우의 선수들을 하나씩 잡아갔다.

결국 상대 팀 전원을 처치하고 제라드는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았다.

[꺄아아아아아악!! 제라드!! 경이롭습니다!!!]

[이야, 제라드! 오랜만에 완벽한 경기를 보여줍니다! 격전으로 예상됐던 제라드와 레드 카우의 경기는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주며 제라드가 승리를 가져갑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