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Play_off (1)
[CKR 서머 시즌 우승은 어디?]
오는 8월 24일에 열릴 CKR의 결승 대진표가 완성됐다. 플레이오프 5위로 마지막 티켓을 얻은 제라드와 명실상부 명문팀 주이.
제라드는 어렵다는 도장깨기에 도전하고 있어 결승전이 더욱 기대되고 있다. 주이는 핵심 선수였던 SUHO와 DOYOU가 빠져 올해 가장 염려되던 팀이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1위로 진출하면서 명불허전 명문팀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무엇보다 두 팀의 대결이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주이에서 SUHO와 DOYOU가 제라드로 이적했기 때문이다. 과연 오랜 라이벌이라고 소문난 두 팀의 승자가 어디일지 기대를 자아낸다.
제라드와 주이는 결승전을 진출한 것으로 월드 챔피언십 출전권을 획득했다. 월드 챔피언십 출전권을 모두 얻은 두 팀은 11월에 있을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에 진출할 팀으로 예상되고 있어, 두 팀 간의 대결에 더욱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sport 매거진 김승태 기자
[JOO.E OZ, ‘동경하던 SUHO 선수와의 대결 기대하고 있다.’]
결승전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OZ 선수는 앞선 인터뷰에서 제라드가 결승에 올라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제라드가 체스를 꺾고 결승에 진출하자 OZ 선수는 스프링 결승에서 하지 못했던 SUHO와의 대결에서 꼭 승리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오래전부터 SUHO 선수를 동경해 프로게이머가 되었다던 OZ 선수는 이번 경기에선 꼭 SUHO 선수를 뛰어넘을 거라고 밝혔다.
세계 최고 미드라는 타이틀이 어떤 선수에게 향할지 모두가 관심 깊게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코스모스 한용우 기자
결승에 관련된 기사를 보던 선우가 앞서 결승전 대기실로 향하던 수호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주오와 나란히 걷던 수호는 뒤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고개를 돌렸다.
“야, 오늘 경기가 세체미 정하는 경기라는데? 이러다가 너 OZ한테 뺏기는 거 아니야?”
짓궂게 웃는 선우를 수호는 평소와 같이 뚱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서머 시즌에서 그걸 어떻게 정해요?”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은 한국 리그 CKR에 국한된 말이 아니었다. 한국이 월드 챔피언십에서도 늘 좋은 성적을 거둬 게임 강국이라고는 하지만, 서머 시즌 우승팀으로 그것을 가리기에는 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그러게. 그건 월드 가봐야 아는 거죠.”
묵묵히 선우의 옆을 걷던 은기가 무심히 대답하자 선우가 씩 웃었다.
“월챔 결승도 우리랑 주이가 올라갈 거라고 예상되니까 그러는 거지 뭐.”
“그치! 그리고 올해는 우리가 이길 거야! 올해 월챔 우승은 제라드다! 으아아!”
재작년도, 작년도 주이에게 우승컵을 뺏겨 준우승으로 만족했어야 했던 우찬이 울부짖었다.
곧 있을 결승전을 준비하던 방송국 스태프들이 우찬의 외침에 놀라 시선이 선수들에게 몰렸다. 은기는 괜한 어그로를 끄는 우찬의 등을 후려쳤다. 우찬의 입에서 둔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어, 야! 아파! 손도 큰 게 그렇게 후려치냐?”
제라드에서 최단신을 담당하고 있는 우찬은 손에 닿지 않는 등을 어루만지며 끙끙거렸다.
“그러니까 소리는 왜 질러.”
“어우, 그렇다고 치냐? 이 새끼야!”
우찬은 길길이 날뛰며 은기와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앞에서 수호와 도란도란 얘기를 하던 주오는 뒤가 점점 시끄러워지자 싸우는 은기와 우찬을 돌아봤다.
“애들아, 조용히 하자. 싸울 거면 대기실 가서 싸워.”
“형, 이럴 땐 싸우지 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주오의 중재가 웃겼는지 선우는 웃으며 주오를 나무랐다.
“매일 저러는데 말린다고 말려지겠어?”
그건 맞는 말이었다. 묵묵히 듣던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갑이기도 하고, 같은 팀에서 3년째 뛰고 있어 유난히 가까운 둘은 늘 저런 식이었다. 처음에는 과격한 우찬의 욕설에 놀랐던 수호였지만, 지금은 그런대로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건 그렇네. 근데 형, 오늘은 굿즈 안 사?”
선우는 대기실로 들어서며 주오에게 물었다. 갑자기 무슨 굿즈인가 싶어 수호가 주오를 멀뚱히 바라봤다. 그러자 주오가 그게 무슨 소리냐며 황당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걸 왜 안 사. 짐 놓고 사야 더 많이 들 수 있잖아.”
주오는 장비가 든 백팩을 소파에 올려두고는 가방에서 접어둔 거대한 쇼핑백을 꺼냈다. 대체 저 사이즈의 쇼핑백은 어디서 난 건가 싶어 선우는 주오보다 더욱 황당한 얼굴을 했다. 그건 수호도 마찬가지였다.
“쇼핑백 어디서 구했어요?”
“인터넷에서 샀어. 많이 들어갈 것 같지?”
의아한 마음에 묻자 주오가 화사한 미소와 함께 대답해 왔다.
굿즈에 얼마나 진심이면 대용량 쇼핑백까지 구매하는 걸까. 수호는 가끔 주오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다녀올 건데 수호도 같이 갈래?”
하지만 그게 매력적으로 다가와 수호는 주오의 제안에 고민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인 답이 떨어지자 주오는 더욱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을 소파에 앉아서 지켜보던 진형이 눈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결승 때마다 너도 참 유난이다. 한 시간 안으로 돌아와야 된다.”
“네. 그러면 다녀올게요.”
주오는 수호는 이끌고 대기실을 나왔다. 일반 관객들은 결승 시작 직전부터 입장을 시작할 수 있어 경기장 복도는 한산했다. 하지만 건물 정문으로 보이는 밖은 이미 먼저 와 대기 중인 관객들로 북적였다.
주오와 수호가 밖으로 나서자 그들을 눈치챈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레인! 또 굿즈 사러 나왔어요?!”
이미 팬들 사이에서 주오는 결승전에 수호 굿즈를 휩쓸어 가는 걸로 유명했다. 전부터 자주 봐와서 그런지 팬들은 대용량 쇼핑백을 들고 나온 웃으며 주오를 반겼다. 주오는 관객들에게 미소로 보답했다.
“굿즈는 놓칠 수 없는걸요.”
“저쪽에서 굿즈 팔아요! 사람 더 많아지기 전에 빨리 사 와요!”
한 팬이 경기장 오른쪽을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이미 그녀도 양손에 굿즈를 한가득 들고 있었다.
“고마워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인 주오는 멀뚱히 선 수호를 이끌고 굿즈존으로 향했다. 손목이 잡힌 채 이끌려 가는 수호는 들떠 보이는 주오에게 물었다.
“사람 많은데 이렇게 막 다녀도 돼요?”
“음, 나도 너무 많으면 부탁하는데 지금은 시간이 좀 일러서 괜찮아.”
주오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지만 수호는 이 정도면 충분히 많지 않나 싶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굿즈가 가득한 부스에 도착했다.
“와아, 새로운 거 많이 나왔다. 수호야, 이것 봐. 귀엽지.”
주오는 수호의 SD 캐릭터가 가슴팍에 작게 프린팅된 티를 들어 보였다. 이런 쪽에서 귀여움을 느끼지 못하는 수호였지만, 옷을 들고 있는 주오가 너무 행복해 보여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수호의 눈에는 옷보다는 주오가 더 귀여워 보였다. 어느새 수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미친, 이수호 웃었어.”
“웃으니까 인상 되게 달라진다.”
이미 굿즈존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주오와 수호를 힐끔거렸다. 주오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티를 색깔별로 여러 개 담았다.
“똑같은 건데 그렇게 많이 사게요?”
“색이 다르잖아. 그리고 캐릭터도 색마다 달라. 이건 뚱한 수호, 이건 웃는 수호, 이건 자는 수호.”
옷 하나하나마다 그려진 캐릭터를 자랑하듯 보여주는 주오였다. 수호는 그건 이미 많이 보고 있지 않냐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너무 좋아하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주오는 당사자를 앞에 두고 수호와 관련된 굿즈를 자랑하며 쇼핑백에 쓸어 담았다. 대체 뭘 그렇게 사려고 하나 싶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쇼핑백이 가득 찼다. 오히려 부족했다. 주오는 쇼핑백과 함께 거대한 인형을 한 팔에 끼운 채 숍을 나왔다.
그리고 수호의 손에도 작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주오를 따라 구경하다 보니 주오 관련 굿즈가 눈에 들어와 홀린 듯 사버린 수호였다. 결제를 하려 물건을 계산대에서 꺼내 보일 때 옆에 서 있던 주오는 부끄러운 듯 어색하게 웃었었다.
“저 주세요. 제가 들게요.”
무거워 보여 수호가 손을 뻗자 주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들고 있는 무게만큼 행복해 보였다.
“괜찮아. 그런데 몇 시야? 한 시간쯤 된 거 같은데.”
양손이 가득해 시간을 확인하지 못하는 주오가 묻자 수호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진형이 말한 1시간에서 20분가량이 남은 상태였다.
“이제 들어가야 해요.”
수호의 말에 주오는 가벼운 걸음으로 경기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중간중간 팬들에게 잡혀 사진을 찍어주느라 시간이 지체됐다. 경기장 내부로 돌아오자 진형이 말한 시간에서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수호야!”
서둘러 대기실로 돌아가던 수호는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주이의 감독이자 수호와 오래 함께했던 윤채현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옆엔 요즘 수호의 라이벌이라고 언급되는 OZ, 신태민이 있었다.
“아, 감독님 오랜만이에요.”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수호와 주오의 손에 한가득 들린 쇼핑백을 보고는 채현이 이내 목적지를 파악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레인 선수가 결승 때마다 이런다는 건 들어서 알았는데, 수호 너도 이런 취미가 있는지는 몰랐네.”
“저도 몰랐어요.”
“그래도 보기는 좋네. 아, 레인 선수도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입니다, 감독님.”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주오를 흐뭇한 얼굴로 보던 채현은 옆에 서 있는 OZ를 가리켰다.
“지나가다가 봤겠지만 얘는 OZ, 신태민이야.”
“안녕하세요.”
아직 미성년자인 태민은 보송보송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주오와 수호도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태민은 동경 어린 눈으로 수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저, 수호 선수 팬이에요!”
갑자기 팬이라고 외치는 태민을 수호는 멀뚱히 보다 고개를 꾸벅였다. 그런 둘을 보던 채현이 웃으며 태민의 등을 토닥였다.
“얘가 너 너무 좋아하더라. 그래서 오늘 너한테 기대 많이 하고 있어. 그러니까 오늘 태민이한테 너무 쉽게 지지 마라.”
무슨 기대를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태민의 눈이 부담스럽게 반짝였다. 수호는 태민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제가 이길 거예요.”
“아뇨. 오늘은 꼭 제가 이길 거예요. 그러니까 멋있는 모습 많이 보여주세요! 세체미 SUHO를 이기는 게 제 꿈이에요.”
당차게 포부를 밝힌 태민의 눈이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것만 보고 살아온 사람처럼 뜨거운 시선에 수호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 수호를 보는 주오의 시선이 묘했다.
“오늘 수호 너도 긴장 좀 해야 할 거다. 객관적으로 요즘 네 폼으로는 조금 힘들지 몰라. 그리고 이제 세대교체할 시기도 됐지.”
최근 수호의 폼이 불안정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수호 본인 역시 잘 알았다. 하지만 질 수 없었다. 주오가 좋아하는 SUHO는 언제나 정상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수호의 검은 눈동자에 승리를 향한 염원이 반짝였다.
“그래도 이길 거예요. 전 아직 밀려날 생각 없어요.”
“하하하! 그래. 그래도 난 주이 감독으로서 태민이를 응원할 수밖에 없네. 오늘 재밌는 경기 하자.”
“……네.”
“조심히 가세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태민과 함께 사라지는 채현에게 인사를 건넨 주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오가 수호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수호야, 긴장돼?”
“아뇨. 괜찮아요.”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주오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주오는 양손에 낀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거대한 인형을 올렸다. 그러고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수호를 안았다. 자연스럽게 주오의 어깨에 고개를 얹은 수호였다.
“갑자기 왜요?”
“나한테는 수호가 언제나 최고야. 부담감 느끼지 마.”
다정하게 울리는 낮은 음성이 가슴에 콱 박혔다. 뭉클한 거 같기도 하고 불안한 것 같기도 했다. 문득 묻고 싶었다. 형한테 최고가 되는 기준이 뭐냐고. 수호는 주오의 어깨에 이마를 콩 박았다.
“형, 제가 잘해서 저 좋아했다고 했죠.”
“응? 그랬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너무 멋있었어.”
체이스에 뇌지컬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게 주오였다면, 수호는 범접할 수 없는 실력을 보여주며 기존에 있던 피지컬이라는 개념을 새로 세운 선수였다.
그런데 만약 그런 선수가 또 나타나면? 갑자기 수호는 불안해졌다.
수호가 보기에도 태민은 어린 나이에 실력이 출중했다. 경험을 쌓아서 더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만약 태민이 자신보다 더욱 유명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싶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연인으로서 이수호는 여전히 남겠지만 선수로서 동경하던 SUHO는 없어지는 게 아닐까.
“다른 선수가 형을 감탄시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선수의 팬이 되는 거예요?”
수호의 불안을 알았는지 주오가 수호의 등을 토닥였다.
“나는 언제나 수호 팬이야.”
“그래도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도 난 수호야.”
단호한 주오의 말에도 수호는 여전히 침울했다. 요즘 수호는 정말 주오로 인해 많은 감정을 겪고 있었다. 주오 때문에 이기고 싶었고, 그에게 언제나 최고이고 싶었다.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고, 멋있고 싶었다.
그래서 자꾸만 불안해졌다. 그러지 못하면 주오의 마음이 한 스푼이라도 줄어들까 봐.
수호가 주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주오는 어쩔 줄 몰라 하다 이내 수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진형이 말한 1시간이 훌쩍 넘을 때까지도 둘은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은기가 찾으러 나와서야 떨어졌다.
“제발 밖에서는 그러지 좀 말아요.”
둘이 부둥켜안고 있는 것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은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불만 어린 은기의 음성에도 주오는 여전히 침울해하는 수호를 살피느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하아, 저도 이제 몰라요. 일단 곧 대회 개막한다고 하니까 준비해요.”
은기는 자신의 백팩을 둘러메고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수호와 주오도 은기를 따라 선수석으로 향했다.
“수호야, 파이팅! 오늘도 콜 열심히 할게.”
주오가 기운을 주려는 듯 힘차게 말했지만 수호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최고가 되어야만 한다. 이겨야만 한다. 한동안 잠잠했던 그 생각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 * *
[모두가 기다리던 CKR 서머 시즌 결승전! 여러 팀이 경쟁하고 그중 결승에 올라온 두 팀! 작년 서머 시즌 우승컵의 주인공, 주이!! 스프링 시즌 우승팀이자 도전자로 올라온 제라드!! 대망의 결승전을 시- 작하겠습니다!!]
엄청난 성량과 호흡을 자랑하는 이영중 캐스터가 점등된 경기장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중앙에서 소리쳤다. 그 순간 경기장에 불이 켜지며 폭죽들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정규 시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이 소리를 질렀다.
환호와 함께 시작된 결승전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그리고 그건 경기를 준비한 선수들과 코치진들도 마찬가지였다. 밴픽이 시작되자 루퍼가 빼곡히 정리된 노트를 넘기며 입을 열었다.
“첫 경기는 우리가 무조건 치고 나간다. 연습했던 바르다 중심으로 짰던 조합으로 갈 거야. 잘할 거라고 믿는다.”
[바르다요?! 지금 제 눈이 잘못된 건가요? 바르다가 나왔습니다! 이제 대체 몇 년 만이죠?!]
고인이라고 잠들어 있던 바르다의 등장에 유기현 해설이 놀라 뒤집어졌다. 하지만 선수석은 여전히 진지했다. 루퍼의 지시하에 바르다를 중심으로 짠 조합이 마무리되자 진형이 선수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연습한 대로만 가자. 선빵 갈기고 와라!”
“예에!!!”
힘차게 반응하는 우찬을 흐뭇한 얼굴 보던 진형은 이내 주먹을 불끈 쥐고 루퍼와 함께 선수석을 나갔다. 각 팀 코치진들이 선수석을 나가자 게임은 시작됐다.
“내가 초반에 우찬이 포커싱해 줘야 해서 바텀은 많이 힘들 거야. 상대 정글이 갱 와도 잘 버텨줘.”
“그럼그럼. 아래쪽은 잘 버텨볼 테니까 바르다 잘 키워.”
“우찬이가 다 바른다!”
요즘 나온 챔피언보다 병사를 처리하는 속도가 확연히 적고, 도주기가 없는 바르다는 상대 정글러의 갱킹에 유독 취약했다. 근거리 챔피언이었기에 상대 탑 선수를 견제하기도 힘들어서 초반에 주오는 우찬에게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우찬을 빠르게 백업해 주고 우찬을 성장시키는 게 이 조합의 키포인트였다. 그리고 주오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게임이 시작하고 10분이 지나기 전에 탑을 두 번이나 찌른 주오가 우찬에게 킬을 먹였고, 그 덕에 바르다는 무서운 기세로 성장했다.
잘 큰 바르다로 인해 탑과 미드라인에서 벌어지는 난전에서 제라드는 우위를 가져올 수 있었다.
“수호님! 천사님! 저를 이 악의 무리로부터 구원해 주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오히려 발전된 주오의 콜을 들으며 수호는 우찬과 주오와 합류했다. 상대적으로 우찬을 밀어주는 플레이었기에 주오는 상대 정글에 비해서 성장이 좋지 못했다.
2대2 전투에서는 승산이 없었다. 기동성이 체이스 캐릭터에서 가장 좋다는 챔피언을 선택한 수호는 OZ보다 빠르게 전투 중인 장소에 도착해 도움을 줬다.
주이는 너무 오랜만에 나온 바르다와 그와 동시에 조합된 기묘한 챔피언들로 인해 크게 흔들렸다.
기존에 단단하고 정석적인 플레이를 자랑하던 제라드와는 너무나 다른 플레이 방법이었다. 기존 스타일을 대비하면 연습해 왔던 주이의 입장에선 정말 곤란한 상황이었다.
결국 주이는 제라드 플레이의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제라드는 그렇게 첫세트 승리를 알렸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2, 3세트에서는 주이가 승리했다. 2세트는 1세트와 마찬가지로 색다른 픽으로 승부를 걸었지만, 주이는 1세트와 달리 공격적으로 받아쳤다.
탑을 밀어주면 바텀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깨부쉈고,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수호가 자리를 비울 수 없도록 만들었다. 불한당 같은 주이의 플레이는 3세트까지 이어졌고 제라드는 마지막이 될 수 있는 4세트를 맞이했다. 하지만 4세트에서는 원래 제라드의 플레이로 승부했다.
거기서 주오와 선우의 슈퍼플레이가 터지면서 4세트를 승리로 가져왔다. 하지만 제라드는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스코어 2:2 상황. 제라드는 초조해졌다. 애초에 제라드는 5세트까지 경기를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최근 팀에서 크게 흔들렸던 은기와 수호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전략을 짤 때도 두 사람에게 과한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다. 우승에 대한 부담감이 심해 실수가 잦았던 그들이 5세트까지 갔을 때 느끼는 부담감이 지독하게 무거울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진형의 예상대로 5세트에 들어서자 은기와 수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은기는 다 잡은 상대를 놓치자 눈살을 찡그렸다.
“괜찮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우리가 상황 더 좋아.”
선우는 그런 은기를 다독이며 플레이했다. 하지만 실수들이 반복될수록 부스의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아직까지는 어떻게든 애쓰는 팀원들로 인해 상황이 팽팽하던 때였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우위를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던 상황에서 제라드의 기세가 한껏 꺾이게 됐다.
[아아아아악! OZ!! 이 상황에서 SUHO 선수의 솔킬을 따냅니다!!]
제라드 입장에서 대형 사고였다. 박동진 해설이 소란스러운 비명을 질러대자 그와 함께 관중석도 함께 탄식과 환호가 뒤섞여 터져 나왔다. 수호는 또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에 눈가를 찡그렸다.
이기려고 하면 안 되는데. 수호는 주오가 해줬던 말을 떠올리고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겨야 했다. 그래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수호가 그렇게 생각할수록 오히려 수호의 손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더욱 단단하게 굳어갔다.
“수호야, 나의 수호 님. 괜찮아, 긴장하지 마.”
주오가 평소에 수호의 긴장을 풀어주듯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지만, 이번에는 효과가 없었다. 이미 수호의 머릿속은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좋게 나왔던 플레이가 제대로 되지 않자 오히려 수호는 더욱 초조해졌다.
수호가 죽기는 했지만 그동안 많은 이득을 챙기지 못해 주이와의 상황은 여전히 팽팽하다면 팽팽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드의 솔킬은 팀의 사기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이미 멘탈이 흔들리고 있던 은기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은기는 수호의 솔킬 이후로 무너져 내렸다. 수호와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이기려 노력했지만 오히려 그게 독이 되는 플레이들이 터져 나왔다.
[아아, 제라드 선수들 괜찮은 건가요?! 자꾸만 주이에게 킬을 허용합니다!]
한순간에 흔들리는 제라드의 경기력이 안타까운지 이영중 캐스터의 음성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남은 팀원들이 더욱 노력했지만, 모두가 슈퍼플레이를 하지는 않지만 실수 없이 든든하게 받쳐주는 주이를 이기기는 힘들었다.
결국 내각 포탑까지 무너지고 보석 하나만 남았을 때 벌어진 한타에서 긴장감은 최고치에 달했다.
딜을 넣지도 못하고 처음부터 OZ에게 은기가 죽었다. 남은 딜러인 수호는 집중력이 깨진 탓인지 상대 딜러를 한 번에 잘라내지 못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주이의 승리였다.
[주이!!! 5세트까지 길고 길었던 경기를 승리로 끝냅니다!! CKR 서머 리그 우승팀은 주이!!!!!]
[GG!!!]
환호성과 폭죽이 터져 나는 축제 분위기를 제라드 선수들만 즐기지 못했다. 뛰어올라 서로를 끌어안고 포효하는 주이의 선수과 달리 제라드는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멍하니 있는 우찬과 우는 건지 고개를 처박고 있는 은기, 입술을 짓씹는 수호. 그리고 그런 셋을 착잡한 눈으로 보는 주오와 선우.
말 한마디 오가지 않는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깬 건 어느새 선수석으로 들어선 진형이었다.
“왜 이렇게 죽어 있어? 오늘 다들 고생 많았다! 자자,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진형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여전히 패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선수들을 두드렸다. 특히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은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은기야, 그렇게 우는 거 카메라에 찍히면 나중에 쪽팔리지 않겠냐.”
짓궂은 말과는 달리 은기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은 다정했다. 은기는 급하게 눈물을 슥슥 닦아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울어요.”
“나는 우는 줄 알았지.”
하하, 웃음과 함께 진형이 선수들을 이끌고 밖으로 향했다. 수호 역시 짐을 챙겨 선수석을 나서자 주오가 옆으로 다가왔다.
수호는 주오를 볼 수가 없었다. 지금 보면 이 기분 나쁘고 서러운 감정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주오가 수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열심히 했는데 아쉽다.”
아쉽다고 말하는 그의 음성은 차분했다. 정말 아쉬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온화한 음성에 수호는 울컥 감정이 터졌다.
“……죄송해요.”
우승을 꼭 시켜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한 게 너무나 억울하고 미안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주오가 좋아하던 선수 수호는 없어진 건가 싶어 불안했다.
어느새 울음이 밴 수호의 음성에 주오가 수호의 뺨을 잡아 올리며 웃었다.
“수호는 우는 것도 멋있다.”
수호의 말간 검은 눈이 어느새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수호는 여전히 맑게 웃는 주오를 보자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았다. 더욱 흐릿해진 주오를 보고 있자 주오가 수호의 눈가를 문질러 눈물을 닦아냈다.
“월챔에서 이기자. 이거 서머 시즌이야. 아직 올해 안 끝났어.”
서머가 중요하다고는 하나 월챔에 비하면 턱없이 가볍다고 할 수 있었다. 그건 수호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쉽고 미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주오가 빛나는 무대에 서 있었으면 했고, 스프링 우승 때 봤던 미소를 다시 보고 싶었다.
주오가 원했던 우승이라는 걸 꼭 그에게 선물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실수만 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우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을 자신이 망쳐 버린 것 같았다. 수호는 고개를 숙였다.
“수호야, 많이 속상해? 괜찮아. 월챔도 남아 있으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
그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수호는 주오를 보기 미안하고 창피했다.
주오가 그토록 좋아하던 SUHO는 이런 선수가 아니었다. 언제나 잘하고 승리하는 선수였다. 이렇게 힘없이 무력하게 지는 건 주오가 좋아하던 SUHO가 아니다.
“형, 정말 미안해요.”
“수호가 왜 미안해. 그리고 나한테 미안해할 일도 아니야.”
한없이 다정한 주오의 음성으로 인해 수호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왜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 때문에 진 건데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요. 수호는 오히려 화를 내지 않는 주오 때문에 불안해졌다.
자신에게 무언가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형, 저는 이제 형이 동경하던 선수가 아니게 된 거예요?”
오늘 자신의 플레이는 정말 형편없었다. 그런 모습에 주오가 실망했을까 수호는 초조해졌다. 그러면 안 되는데. 주오가 좋아하던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그에게 언제나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잘하는 선수이고 싶었다.
그런 수호의 마음이 느껴졌는지 웃고 있던 주오의 표정이 굳어갔다.
“무슨 소리야. 나한테는 언제나 수호 네가 가장 멋있어.”
“그렇지만 오늘 전 아무것도 보여준 게 없어요.”
보여준 게 없는 것뿐만 아니라 게임을 망친 장본인이었다.
수호는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한 사람이 좋아서 그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 건지 처음 알게 됐다.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 느껴지는 좌절감 또한 처음으로 느꼈다.
“수호야…….”
“형을 꼭 우승시켜 주고 싶었는데, 형한테 늘 잘하는 선수로 남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해요.”
수호는 주오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무서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실망한 주오의 눈을 보고 싶지 않았다. 수호는 하염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수호를 묵묵히 보던 주오는 고개를 돌려 앞서가고 있는 진형을 향해 소리쳤다.
“감독님! 먼저 가세요. 저랑 수호랑 따로 갈게요.”
“어?! 왜, 무슨 일 있어?”
우승을 하면 축하 파티, 패배를 하면 위로 파티를 위해 회식 장소로 이동하던 진형은 뜬금없는 주오의 말에 의아한 눈을 했다. 그리고 그건 수호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전시관 좀 다녀오려고요.”
“음? 그래, 뭐 그러면 다녀와. 회식 장소는 알지?”
“알고 있어요. 곧 따라갈게요.”
“그래. 수호도 조심해서 와라!”
진형은 별다른 이유를 묻지도 않고 떠나 버렸다. 수호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주오를 바라봤다. 주오는 땅을 향하던 시선을 이제야 자신에게 주는 수호를 보며 웃었다. 그러자 다시금 올라오는 미안함에 수호는 고개를 숙였다.
“수호야, 넌 잘하는 선수야. 그렇게 남아 있고, 앞으로도 넌 그런 선수일 거야.”
“하지만…….”
“내가 널 좋아해서 입바른 말 하고 있는 것 같아?”
주오라면 그럴 수 있었다. 수호에게 주오는 늘 좋은 말만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게 너무 좋았지만, 지금은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였다. 주오의 위로는 어떻게 해도 수호에게 닿지 않았다.
그런 수호의 마음을 알아챈 듯 주오가 수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보여줄게. 넌 누구보다 의미 있고, 굉장한 선수라는 걸.”
환하게 웃어 보인 주오는 그대로 수호를 이끌고 경기장 1층 로비로 향했다.
관객들이 처음으로 입장해서 마지막까지 보게 되는 곳. 그곳엔 체이스의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걸음을 옮겨 도착한 로비에는 첫 개막부터 현재까지의 우승팀과 베스트 선수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곳에는 주오와 수호도 있었다. 그리고 수호는 그 많은 사진 중에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주오는 수호가 데뷔해서 처음으로 우승한 시즌의 사진 앞에 섰다.
“수호야, 이 글 보여?”
주오가 가리킨 건 사진 아래 짤막한 설명이 적혀 있는 부분이었다.
[20XX년 스프링 스플릿 MVP SUHO]
데뷔하고 신인이 시즌 MVP를 받은 건 주오 이후로 수호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문구는 그다음 서머도, 월드 챔피언십도, 그다음 해도 동일했다. 모든 곳에 MVP 선수는 수호였다.
주오는 그 문구를 조심스럽게 만지며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야, 네가 체이스라는 게임에서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모두가 알고 있어.”
수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본인이 더 감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름이 적힌 당사자인 수호보다 주오가 훨씬 더 기뻐하고 있었다.
수호는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주오가 수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물론 시대는 변해. 앞으로 너를 이길 선수가 등장할지도 몰라. 하지만 수호야, 그래도 네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커리어와 명성은 변하지 않아. 체이스 리그가 시작된 순간부터 우승컵을 가장 많이 들어 올린 사람은 너고, 이 기록을 깨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야.”
OZ가 지금부터 우승을 밥 먹듯이 해도 적어도 4년이 걸렸다. 수호가 지금까지 일궈온 경력이 그랬다.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기록. 그것을 가지고 있는 건 이수호였다.
“그리고 여기. SUHO는 지금까지 체이스에서 볼 수 없었던 피지컬을 선보이며 피지컬의 새로운 개념을 쓴 선수. 수호 너는 이미 체이스라는 게임의 상식을 바꾼 선수야. 그런 네가 어떻게 최고가 아니야?”
이미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는 것을 새로 바꾼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수호는 그걸 해낸 사람 중 하나였다.
수호는 열심히 주오가 가리키는 사진을 바라보며 입술을 씹었다. 하지만 오늘 자신은 저곳에 있던 SUHO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침울해하는 수호를 보며 주오는 말을 이었다.
“우리가 늘 하는 말이 있잖아. 폼은 순간이지만 커리어는 영원하다는 말. 물론 최근 수호의 폼은 많이 흔들렸어. 하지만 수호야, 네가 지금 흔들린다고 과거와 미래까지 흔들리진 않아. 만약 그랬다면 주이가 제라드에게 졌던 이때부터 수호는 다시 우승하지 못했을 거야.”
주오의 시선이 향한 곳은 시즌마다 우승을 달리던 주이가 제라드에게 우승을 넘겨줬던 시즌에 향해 있었다. 맞았다. 그때 주이는 제라드에게 졌었다. 그리고 주이에게 패를 안겨줬던 건 주오였다.
“이다음 시즌에는 다시 주이가 우승했잖아. 지금이랑 다르지 않아. 오늘 졌다고 다음 시즌도 지라는 법은 없어.”
주오의 말이 맞았다. 한 번 진 팀이 계속 지고, 한 번 우승팀이 영원히 우승팀이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만약 현실이라면 애초에 대회 같은 걸 만들지도 않았을 거다.
수호는 자신을 보며 웃는 주오와 시선을 맞췄다. 자신에게 향한 주오의 시선에서 깊은 믿음이 보였다. 수호 너는 다시 우승할 거고, 언제나 최고 자리를 되찾아올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었다.
침울했던 기분이 한결 편안해졌다. 졌다면 다시 이기면 되는 거였고, 빼앗겼다면 되찾아오면 되는 거였다. 한껏 꺼져 버린 마음이 다시 부풀어 올랐다.
수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꼭 다음에도 지라는 법은 없죠.”
침울하던 전과는 다르게 평소와 같이 무던한 수호의 음성에 주오의 미소가 짙어졌다. 수호는 다짐하듯 말을 이었다.
“월챔에서는 꼭 우승컵 안겨 드릴게요.”
꼭. 이번에 빼앗긴 우승컵을 되찾아오겠다는 말을 건네자, 환하게 웃고 있던 주오의 표정이 묘해졌다. 할 말이 있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내 주오가 결심했는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수호야, 나 꼭 수호가 잘해야만 우승컵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니야. 그러니까 꼭 그렇게 책임감 느끼지 마. 나도 더 열심히 할 테니까 월드에서는 꼭 우리 같이 우승하자. 나도 수호에게 우승컵 안겨줄게.”
혼자 모든 걸 짊어지지 말고 함께 나누자는 주오의 말에 수호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렇다. 주오는 수호가 끌고 가지 않으면 승리하지 못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로 기묘한 설계를 펼친 주오에게 수호도 무릎을 꿇은 적이 있었다. RAIN이라는 선수는 그만큼 잘하는 선수였다.
수호는 지금까지 자만하고 있었다. 꼭 자신이 잘해야만 주오가 빛을 볼 수 있다고 여겼던 걸지도 몰랐다.
“좋아요. 우리 서로한테 우승컵 선물로 주는 걸로 해요.”
수호의 말에 주오는 환하게 웃었다.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우승컵을 들고 사진을 찍던 주이의 선수들보다 훨씬 더 반짝였고 눈부셨다.
“그래. 그리고 나한텐 언제나 OZ보다 수호가 더 빛나. 언제까지고 넌 내가 동경하는 선수야.”
수호가 마음속 한편에서 심각하게 염려하고 있던 부분을 콕 찍어 위로하는 주오였다.
수호는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말 그럴까. 의혹이 남은 시선에 주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OZ도 물론 잘하지만 플레이를 보면 너랑 비슷해. 너를 바탕으로 연습한 게 느껴져. 모든 선수가 닮고 싶어 하고 목표로 하는 네가 나한텐 언제나 최고의 선수야.”
SUHO는 체이스에서 상징적인 선수였다. 한 시대에 반짝 잘하는 선수가 아닌 피지컬의 상징. 그건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상징이었다. 뇌지컬의 장을 열었다는 RAIN이 여전히 체이스의 상징인 것처럼.
경기에선 졌지만, 수호는 주오의 말에 승리를 맛본 것처럼 달콤함을 느꼈다. 한순간에 불안감이 사그라들고 정열이 수호를 가득 채웠다.
뜨거운 한여름 밤에 벌였던 결승전은 수호에게 가을의 시작을 알렸다. 부담감을 떨친 수호는 그 어느 때보다 맑은 눈으로 주오를 보며 웃어 보였다.
* * *
[OZ, SUHO 꺾고 서머 우승]
주이가 오늘 열린 CKR 리그 서머 우승을 차지했다. 그 속에서도 눈에 띄는 활약은 벌인 것은 미드라이너 OZ였다. OZ는 중국에서 활동하다 한국 CRK로 넘어와서 많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1년도 되지 않아서 바로 우승컵을 들어 올린 점에서 발전 가능성이 높은 선수로 각 팀 감독들은 말했다.
특히나 OZ는 SUHO의 오랜 팬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결승전 직전 인터뷰에서도 SUHO를 이기고 최고의 미드라이너가 되고 싶다고 말한 게 화제가 되었다. 밝힌 포부대로 OZ는 결승 5세트 무대에서 SUHO를 솔로킬 냈다.
통칭 세체미라고 하는 세계 최고 미드라이너 SUHO를 위협하는 유망주가 되었다. 가을에 열릴 월드 챔피언십에서 OZ의 행보가 기대된다.
e-sport 매거진 김승태 기자
[게임/11023154] 오늘부로 세체미 OZ
결승에서 솔킬 나왔쥬?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수호 이제 퇴물된 거 맞는 거 같다. 잘 가라...
└ 진짜 요즘 수호 폼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솔킬 날 줄은 몰랐다...
└ 22....
└ 수호도 오래 해먹긴 했지.. 이제 세체 자리 넘겨줄 때 된 거 같음.
└ 뭐래. 그래도 아직 OZ가 세체는 아니지;;
└ 인정 좀 해라 ㅅㅂ
└ 아직 월챔도 안 가봤는데 세체라고 하기엔 이르지 않냐?
└ 이게 맞지. 월챔에서도 캐리하면 ㅇㅈ함.
└ 수호 팬들 이제 입 못 열겠넼ㅋㅋㅋㅋㅋㅋㅋ개꼬시다.
└ 너 같은 놈들이 닥쳐야 되는데
└ 맞잖앜ㅋㅋㅋㅋㅋㅋ OZ한테 솔킬 따이고 뭔 세체냐
└ 그래서 OZ는 커리어가 어떻게 되는데요? 월챔 우승도 못 해보고 세체????
└ 커리어 그만 따지라고ㅋㅋㅋㅋㅋ
└ 너는 그러면 성적표는 좆망했는데 수석이랑 상식 퀴즈에서 이겼다고 네가 수석 되냐? 돌대가린가?;;
[게임/11023209] 제라드 지긴 했는데 레인이랑 두유 미쳤더라;;
4세트에서 멱살 잡고 이기는 거 진짜 개미쳤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레인은 진짜 언제까지 잘하냐...?
└ 잘하는 거 맞음? 잘 안 보이던데.
└ 넌 진짜 눈이 없는 거다. 킬 따야 잘하는 거임????
└ 와 너 같은 애가 잘하는 걸 따지는 것도 놀랄 일이다. 레인이 시야 다 잡고 초반 성장 밀리는 데도 보면 정글몹 먹은 거 차이도 없는데다 탑을 그렇게 키워놨는데;;
└ 버러지는 경기 보지 말자.
└ 이걸 버러지 만드넼ㅋㅋㅋㅋㅋ 근데 진짜 보는 눈 없는 건 맞는 듯.
└ 진짜 나도 정글 유전데 김레인 미쳤더라... 1세트 탑에서 설계하는 것도 돌았어
└ 이거 보고 소름 돋았음.
└ 두유도 탑에서 포변했을 때 갑자기 왜 포변하나 했는데 서폿도 잘하네... 진짜 화끈하게 햌ㅋㅋㅋㅋ
└ 탑신병자 어디 안 가는 거짘ㅋㅋㅋㅋㅋㅋㅋ 쟤넨 DNA가 그렇게 되어먹은 게 분명함...
└ 도장깨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멋있었다.
└ 저 실력이니까 결승까지 올라온 거지. 진짜 아깝긴 하다. 막 세트에서 좀만 더 잘했으면 이겼을 것 같은데..
└ 원딜이 처짤리니까 지지...
└ 포지션이 이상하긴 하더라
김레인×이수호 파는 사람 있어??
3권
@정은성